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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주고 내가 우네 (조용필)
정든 님 사랑에
우는 마음 모르시나? 모르시나요?
무정한 당신이 내 마음
아실 때엔 땅을 치며 후회하련만
어차피 가신다면
미련(未練) 마저 잊으리!
정(情) 주고 내가 우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 간 주 ....
정든 님 모습을
행여나 잊을 때엔 잊을 때에는
무정한 당신이 내 마음 꾸짖으니
야속하고 우울하련만
괴로움 남기시고
그대 어이 가려하오.
첫 사랑 고백하던
그 말씀을 잊으셨나요.
괴로움 남기시고
그대 어이 가려하오.
첫 사랑 고백하던
그 말씀을 잊으셨나요.
첫 사랑 고백하던
그 말씀을 잊으셨나요.
■ 김중순 작사. 김희갑 작곡
■ “정주고 내가 우네” : 아마도 이곡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수가 부른 트로트 명곡일 것이다. 1968년 가수 ‘박일남’이 “유정무정”(有情無情) (정 주고 내가 우네)로 가장 먼저 취입해서 발표한 곡이다. 그 다음에 1969년, ‘He5’ (히 파이브)가 ‘정 주고 내가 우네!’ 라는 제목으로 불러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또한, 1975년, “김훈과 트리퍼스”가 다시 불러서 인기 절정에 올랐다. 그 후,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는데, 1989년, “조용필” 가수의 remake 작품이 가장 감성적이며 서정적이다.
■ ‘He5’ 그룹 사운드 : 한국 그룹 사운드의 효시는 ‘키 보이스’ (Key Boys)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한국 그룹 사운드 1세대 ‘키 보이스’ (김홍탁.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상빈)는 주로 스탠더드 록이었다. 그리고, 대표곡으로 해변으로 가요(1970)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다. 1968년 그룹 이름을 ‘He5’ (히 파이브) (김홍탁. 한웅. 조용남. 유영춘. 김용호)로 바꾸었으며, 윤항기. 차중락 씨가 떠나고 멤버가 바뀌면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생겼기 때문에 그룹 이름을 바꿨다. 음악 장르도 스탠더드 록에서 강한 비트의 하드 록으로 바뀌었다. ‘He5’ 그룹 사운드는 정주고 내가 우네(1969)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그 후, 1970년, 그룹 사운드 이름을 다시 ‘He6’ (히 식스) (김홍탁. 최 헌. 조용남. 이영덕. 유상윤. 권용남)로 바꾸었는데, 조용남씨만 남고, 나머지는 다 흩어진 셈이었다. 그룹 사운드에서 김홍탁과 함께 노래했던 분들 중에 차중락. 윤항기. 최 헌 등은 독립하여 가수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1972년 김홍탁은 미국(America)으로 건너갔고, 나중에 다시 돌아왔다. 김홍탁은 1996년 대중 음악의 메카 서울 재즈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15년 이상 후배 양성에 심혈을 쏟고 있다.
■ 조용필(趙容弼) : 1950년 경기도 화성시 출생이며, 대표곡으로 창밖의 여자(1980), 단발 머리(1980), 잊혀진 사랑(1980), 고추 잠자리(1981), 미워 미워 미워(1981), 일편단심 민들레(1981), 못찾겠다 꾀꼬리(1982), 자존심(1982), 꽃 바람(1982), 친구여(1983), 여행을 떠나요(1985), 허공(1985),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 그 겨울의 찻집(1985), 상처(1985), 들꽃(1985), 어제 오늘 그리고(1985), 바람이 전하는 말(1985), 내 가슴에 내리는 비(1985),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1987), 모나리자(1988), 서울 서울 서울(1988), 정주고 내가 우네(1989), 추억 속의 재회(1990), 꿈의 아리랑(2003), Bounce(2013) 등이 있다. ★ 원래는 기타리스트 (guitarist)로 데뷔했으나, 1975년 나이 26세에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1975)’가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한 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975년 12월 03일부터 폭풍처럼 몰아쳤던 ‘대마초(大麻草) 파동’ 사건에 휘말리면서 벼랑 끝으로 몰렸다. 박정희 정권은 록 그룹(Rock group)들이 요상한 음악으로 젊은이들을 선동한다며 풍기문란(風紀紊亂) 및 퇴폐 집단으로 몰아 세웠다. 박정희 정권의 가요계 정화 운동으로 수많은 인기 가요들이 금지곡(禁止曲) 판정 내려졌다. 가수들의 대마초(大麻草) 파동으로 그룹 사운드(Group sound)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대마초 흡연은 1976년 04월 07일 “대마 관리법” 제정 이전에는 불법이 아니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발표된 이후, 전국에서 유신 헌법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자, 1975년 05월 13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 비판 및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그래도, 유신 헌법 반대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이윽고, 가요계 연예계를 지목했다. 그래서, 1975년 10월 02일까지 대중 가요 222곡을 금지곡(禁止曲)으로 지정 처분했다. 그리고, 수많은 가수 연예인들에게 마약 관련 혐의를 입혀서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1975년 137명이 검거되었다. 1966년 01월 21일까지 수많은 가수 연예인들이 입건되었고, 수십명이 구속되었다. 조용필 가수 역시 거기에 휘말렸고, 1976년 05월부터 방송 출연 금지(禁止)되었고, 1980년 03월 20일까지 4년간의 가수 활동 공백기를 갖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1979년 12월 06일, 해금(解禁) 조치가 발표 되었다. 대마초 파동 관련 연예인의 방송 출연 및 음반 취입이 허용된 것이다. 드디어, 조용필 가수 역시 해금(解禁)되었고, 그동안 처참하고 암울했던 족쇄가 풀리게 되었다.
★ ‘창밖의 여자(1980)’는 1979년 12월 06일 해금(解禁) 조치 이후에 대마초 사건으로 인한 4년간의 공백을 깨고, 1980년 03월 20일 발표된 첫 앨범이다. ‘창밖의 여자(1980)’는 한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 ‘밀리언 셀러’(million seller) 단일 앨범이며, 19주 연속 1위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기록을 남겼다. 이 곡은 “조용필 가수가 옥중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며, 그 여인은 ‘단발 머리’이다!” 라는 등등의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소문일 뿐이었다. 원래, "창밖의 여자"는 1979년 동아 방송 라디오 드라마였다. 작가 배명숙씨의 장편 소설 "창밖의 여자"를 각색해서 만든 라디오 드라마였다. 조용필은 바로 그 라디오 드라마 대사에서 몇가지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러브 스토리(love story) 대목을 노래 가사에 엮어서 작곡 발표한 노래가 ‘창밖의 여자(1980)’이다. 처절하게 억눌린 통한(痛恨)이 서린 듯한 노래 구성이며,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고, 쥐어 짜서 나오는 듯 하다.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른 듯한 노래이다. 조용필은 대한민국 가요계 최초로 '오빠 부대'로 불리는 팬층을 이끌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에 일본 가요계로 진출했다. 1994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기록했다. 일본에서의 앨범 판매량 역시 공식적으로 600만장이 넘었다. 그래서, 그는 한류(韓流)의 시초로 평가 받았다. 2003년까지 총 18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였다. 조용필 가수 때부터 국내 음반 시장에서 한국 가요의 음반 판매량이 외국 음반 판매량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한국 대중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거대한 인물이다. 그는 다양한 곡들을 직접 작사 작곡하여 한국 가요계에 싱어송 라이터(작곡가 겸 가수)를 라는 개념을 확립시킨 인물이다.
★ 소금 염전업을 하던 아버지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 중학교 설립자로 교육자였다. 집안 가족들은 조용필이 연예인이 되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조용필은 대입 준비 대신에 음악 학원을 드나들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가출했다. 그리고, '애트 킨즈'(Atkins)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멤버들의 가정 사정으로 곧 해체되었다. 혼자가 된 조용필은 다시 경기도 문산 근처의 무명 밴드에 소속되어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9년초 '파이브 핑거스'(Five fingers)에 스카웃 되어 미(美) 8군 무대에 서게 되었다. '파이브 핑거스'는 실력있는 밴드들의 집합소였던 이태원까지 진출하며, 상당히 인정받는 팀이었다. 그러나, 그의 1년반 동안의 활동은 집에서 형이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 마감됐다. 1971년 그는 다시 '김 트리오'(Kim trio)에서 활동했고, 앨범을 발표하며, 수준급 밴드로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군(軍) 복무를 마칠 때 쯤, 킹 레코드사(King record)로부터 취입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발매 된 것이 1975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다. 이 곡은 처음에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러다가 재일(在日) 동포 모국 방문으로 부산에서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부산에서의 인기가 서울로 올라오며, 전국을 휩쓸었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다. 1975년 겨울, 조용필은 무대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사복 경찰들에게 잡혀서, 서울 남산 지하 수사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바꿔가면서 무리하게 정권을 연장하려 했다. 그런데, 정치적인 명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대중 가수 노래 가사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시비를 걸었고, 과거에 합법적이었던 대마초 흡연 경력을 엮어서 협박했다.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압박을 거절하면, 보복이 뒤따랐다. 폭력 수사에 거짓 자백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가수들의 히트곡이 금지곡이 됐고, 방송 출연 및 업소 출연이 금지되었다. 결국, 대마초 파동 사건은 그 해에 있었던 굵직한 정부 시국 사건을 한꺼번에 덮어버렸다. 말하자면, 국민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은 셈이다. 바로 그 때, 조용필 역시 대마초 파동으로 구속되었다. 조용필은 고문까지 당하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사실, 조용필은 대마초 파동 당시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피운 것이 아니라, 1969년 의정부 기지촌에서 '파이브 핑거스'(Five fingers)‘로 활동할 당시, 같은 하숙집에 살던 미군 병사가 담배라고 건네준 것을 피워본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조용필은 이렇게 말했다. “1975년 겨울, 저녁 무대 한타임을 끝내고 나오다 사복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남산 마약반이었다. 거기서 무조건 50명씩 불어야 했다. 주전자 고문도 치가 떨리지만, 가자마자 한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돌 사이로 밀어 넣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던 고문이었다” 조용필은 고문 후유증과 대마초 가수라는 억지 비난 때문에 1977년 05월 반강제로 가수 활동이 중단되었다. 조용필은 1979년 12월 06일 완전 해금(解禁) 될 때까지 가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80년 03월 20일, 그는 동아 방송 라디오 주제가였던 ‘창 밖의 여자’(1980)를 지구 레코드를 통해서 발표했다. 현악기나 관악기를 배제하고 신시사이저(synthesizer)를 적극 사용한 것이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단발 머리’ 등 여러 곡이 연이어 히트를 하였고, 그는 단숨에 국민 가수로 부상했다.
★ 노래 ‘창밖의 여자’ 탄생 스토리
1970년대 후반, 경기도 화성에서 서울로 올라온 조용필은 동대문 이스턴(Easton)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역시 땜방 가수로 간간히 무대에 섰다. 그 즈음, 묘령의 아가씨가 조용필 곁에 다가왔다. 충남 공주시 3선(選) 박찬 국회의원의 따님이자, 조용필의 첫번째 부인인 박지숙이었다.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미모의 여대생 박지숙과 조용필은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3선의 국회의원 따님과 무명 가수의 사랑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박지숙을 만나러 공주로 내려간 조용필은 박찬 의원의 집 담장을 넘어 박지숙의 방 앞에 까지 다가갔다가 박찬 의원으로 부터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박찬 의원은 조용필의 멱살을 잡고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가서 온 동네 사람들을 향해 “도둑놈 잡았다!”고 외쳤다. 그날 밤, 조용필은 친구 하숙방을 찾아가 구멍 가게에서 구매한 소주 2병을 안주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뱃속이 온전할 리 없었다. 토하다 토하다 언뜻 고개를 들었을 때, 앗! 창밖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박지숙이 조용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너무도 반갑고 너무도 놀라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박지숙은 온데 간데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조용필은 오선지를 꺼내 곡을 쓰기 시작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토하듯, 절규하듯 부르는 그 유명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1980)는 그날 밤,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한 진짜 이유
1984년 03월 조용필은 박지숙과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 절에서 갑작스런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은 처음부터 비밀리에 진행됐다. 결혼 예정 사실은 조용필과 매니저만 알고 있었을 뿐 신부가 될 박지숙씨 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혼 장소도 전날 밤 11시에야 최종 결정됐다. 결혼식에 하객은 거의 없고, 기자들만 잔뜩 있었다. 훗날, 조용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그럼, ‘그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했을텐데요?’ 라고 묻자 조용필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그 때는 매스컴이 무서웠어!’ 조용필은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며 손을 저었다. 말 못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매스컴이 무서웠어!’ 라는 말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필은 여의도 TV 방송국 일을 마치고, 강남 서초동 집으로 돌아갈 때, 강물에 비춰 흔들리는 가로등 불기둥을 보는 순간, 매우 큰 영감을 얻었다. 음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 소위 ‘절대음감’이었다. 그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언뜻언뜻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음계가 생각날 때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그리고는 몇날 며칠을 꼬박 굶어가며 하나의 곡을 완성시켰다. 신곡 녹음을 할 때면, 1주일 혹은 10일간 녹음실을 떠나지 않았다. 느낌(feel)을 놓쳐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소리를 눈으로 보는 순간, 조용필은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작곡에 몰두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이 다가올 무렵, 남편 걱정에 애태우던 아내 박지숙의 심정은 나름대로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 신혼 초부터 해외 출장 공연이 많았고, 방송 활동, 레코딩 작업, 가수 무대 활동 등으로 그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잇따른 연애인과의 스캔들 때문에 박지숙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1986년 03월 급기야 음독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혼수 상태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천재 음악가였지만, 아내 박지숙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절했는지를 그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나는 비겁했다. 인기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나의 음악적인 욕구 때문에 그녀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의 첫 결혼 생활은 그렇게 순탄치가 않았고, 2년 남짓 지속된 후, 1988년 위자료를 지불하고 막을 내렸다. 박지숙은 그 후,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캘리포니아 LA 라하레아 근처에서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했다.
★ 노래 ‘서울 서울 서울’ 탄생 스토리
조용필은 범상치 않은 예술가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정부는 조국과 서울을 예찬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밝은 노래들만을 방송하도록 했다. 자연히 그런 노래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1988년 조용필만은 애잔한 노래 ‘서울 서울 서울’(1988)을 내놓았다.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이렇듯 애잔한 애조 때문에 이 노래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TV 방송의 전파를 타지 못했다. 방송들이 이 노래를 들려준 것은 서울 올림픽 폐막 행사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노래가 됐다. 그 당시 나온 노래들 가운데서 지금도 기억되고 사랑받는 노래는 이 노래가 거의 유일하다. 이 노래의 생명력은 거의 영원하다. 사람들이 온통 올림픽으로 신바람에 위해 있을 때, 조용필은 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그는 서울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 사회가 숙연해지고 차분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조용필의 명곡 ‘비련’(1982)에 얽힌 이야기
조용필이 1982년 4집 발매 후, 한창 바쁠 때에 어느 시골 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 원장은 자신의 병원에 14세의 지체 장애 여자 아이가 조용필 4집에 수록된 "비련"(1982)을 듣더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입원 8년만에 처음 감정을 보인 것이다. 이어 병원 원장은 이 소녀의 보호자 측에서 “돈은 원하는 만큼 줄테니, 조용필이 직접 이 소녀에게 "비련"(1982)을 불러줄 수 없겠느냐?” 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 당시 조용필은 캬바레에서 한 곡을 부르면, 최고 금액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게 이 얘기를 전했더니, 그는 곧장 병원으로 출발하자고 했다. 그날 행사가 4개였는데,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까지 물어주고 시골 병원으로 갔다. 병원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조용필은 병원에 가자 마자 사연 속의 소녀를 찾았다. 소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기적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조용필이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자, 소녀가 펑펑 울었다. 이 소녀의 부모도 울었다. 조용필이 여자애를 안아주고, CD에 사인을 해서 주고 차에 탔다. 환자 엄마가 "돈 어디로 보내면 되냐? 얼마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용필은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돈 보다 더 비쌉니다" 라고 답했다.
■ 두번째 부인 안진현씨와의 불꽃 같은 사랑
조용필의 두번째 부인은 1994년 당시 미국 교포 2세 안진현씨인데, 조용필은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청혼을 했고, 1994년 3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안진현씨와 결혼 생활 중에는 음악 활동을 일시 중단하거나 공연 회수를 줄여 그녀와 불꽃같은 사랑을 불태웠다. 10년 동안 슈퍼 스타의 아내로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안진현씨는 “왜 이제야 만났을까”라는 후회가 들 정도로 고마운 조용필의 영원한 ‘모나리자’였다. 하지만, 안진현씨는 2003년 겨울,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겨진 조용필에게는 음악만이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 되었다. 안진현씨는 2002년 12월 09일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은 후 메릴랜드 포토맥 집에서 요양해 왔다. 한때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안진현씨는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워싱턴 DC 조지 워싱턴 대학 응급실로 옮겨지던 중 심장 마비로 눈을 감았다. 조용필은 응급실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내가 숨을 거두자 한동안 통곡했다. 안진현씨의 여동생은 국제 전화를 통해 “충격과 슬픔에 잠긴 조용필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기진맥진한 상태”라며, “누구와도 통화할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동안 조용필은 국내 공연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미국에 있는 아내와 매일 10여통 이상씩 국제 전화를 주고 받았다. 2002년 08월 심장 질환으로 다리 마비 증세를 호소하는 아내의 통증을 풀어주느라 밤샘을 하면서도 조용필은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아 안진현 가족을 감동시켰다.
■ 로비스트(lobbyist)이자 최고 경영자였던 안진현씨
조용필씨 부인 안진현씨는 정신 여고 재학 중이던 15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나 텍사스 대학 회계 학과를 졸업한 후, 조지 워싱턴 대학 경영 대학원에서 국제 경영학을 전공했다. 버지니아 제일 은행의 회계 감사관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연방 정부 주택 도시 개발부(HUD)의 예산 분석관(국장급)까지 승진했다. 1985년 경영 자문 회사인 웨덜리 컴퍼니(Weatherly &Company)사를 설립했으며, 현대 자동차 미국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로비스트였다. 결혼 당시에는 부동산 관계 회사인 폰스 드 리온 리조트 앤 컨벤션 센터, 홀리데이 익스프레스 조지타운 휴양소 등등의 대표로 활동했으며, 조지 워싱턴 대학의 재단 이사와 클린턴 자문 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스 도미니카 공화국 등 20여개국 기업의 로비와 경제 자문을 맡았으며, 결혼 이후에는 미국과 한국을 1년에 절반씩 오가며 활동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좀처럼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아내 자리만 지켰으며, 미국에서는 로비스트(lobbyist)와 비즈니스 우먼으로 활동했다. 또한, 안진현씨는 미국의 엑셀 통신사 고위 경영자였기 때문에 살아 생전 월1억씩 받았으며, 이 직급은 상속이 되어서 사후에도 조용필씨 및 따님에게 매월 7-8억 정도 지급되고 있다. 엑셀 통신사는 유명한 글로벌 정보 통신 전문 기업이다. 안진현씨는 9녀 1남의 장녀로 집안에서도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해 왔으며, 심장 질환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워싱턴에서 J&J 컨설팅 CEO로 활동했었다. 그녀는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들 정도로 내조에 남다른 기쁨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