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기막힌 전술 2건 - 이건 다른데서 퍼온 글이다.
제비와 고양이로 승리한 징기스칸 아래와 같은 명언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부족에서 쫒겨났다.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리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여러 해를 연명했다. 배우지 않았으니 무식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를 독살한 적들을 피해 숨어 다녔고, 간신히 허기를 채우며 글도 읽을 줄 몰랐지만 아시아에서 중동에 이르는 대 제국을 건설한 인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사람 '칭기즈칸'. 몽골 제국이나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린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아시아 제국, 혹은 단순 무식한 저돌적인 기병대, 실제로 칭기즈칸의 몽골 기마병은 당시 세계 최강의 부대였다. 잔인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기동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전투에 나설 땐 말 세 마리를 끌고 다니면서 옮겨 탔고, 저항하는 부족이나 도시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잿더미와 시체만 남았다.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칭기즈칸은 엄격한 군대 규율을 강요했고, 군율을 어겼을 때에는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처벌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칭기즈칸이 제국을 건설하던 무렵 몽골 전사가 생각했던 행복의 개념은 대략 이랬다. “내게 대항하는 적의 머리를 벤 후, 그 재산을 약탈하고 그 자의 가족 중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는 것이 남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군대를 키워낸 칭기즈칸은 계속된 원정을 통해 1200년대 아시아, 중동,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칭기즈칸의 정복 루트) (당시 서하의 위치)
그러면 과연 칭기즈칸은 용맹함과 엄격함만으로 대 제국을 건설하였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는 용장이고, 맹장이면서도 또한 현명한 장수였다. 그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력해서 사람들은 그가 최고의 전략가였다는 점을 놓치곤 한다. 몽고를 통일하고 통일 국가를 세운 후 2년째 되는 1208년 여름, 그는 15만의 군사를 몰고 당시 최강 세력이었던 금나라 북쪽의 서하를 침공했다. 서하 침공은 칭기즈칸의 군정 일치 이후 2년간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었으며, 평야에서 기마전으로 승부를 내던 당시 몽고군에게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성채 공략전을 경험해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무대였다. 본국 수비로 남겨둔 8만의 군사를 감안하면 당시 몽고의 최대 군사력은 23~25만 수준이었다. 개전 초 기마전에서 연전연패한 서하군은 정면승부를 피해 축성 도시인 우로하이에 들어앉는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쏠 줄만 알았던 몽고군에게 수십 미터 높이의 성은 일지기 경험해보지 못한 듣보잡이자 난공불락의 진이었다. 서하의 성채 앞에서 쩔쩔매는 기마병들을 보면서, 이 보다 훨씬 더 높고 웅장한 성벽을 가진 금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칭기즈칸의 꿈은 헛된 욕심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달랐다. 전략가로서 칭기즈칸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여기서 부터다. 성에 갇힌 서하군 지휘관 앞으로 사절을 보내 “고양이 천 마리와 제비 만 마리를 잡아서 살린 채로 보내주면 몽고군은 철수하겠다. 만약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근 지방 도시들을 약탈하고 모든 주민들을 살육하면서 장기전을 벌이겠다.”며 협박했다. 말도 안 되는 강화조약을 들은 서하 지휘관은 의심이 들어 일부 몽고군을 통해 고양이와 제비가 왜 필요한지 알아보았다. 의도적으로 사로잡힌 몽고군 포로는 “고양이와 제비가 몽고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이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서하군은 그런 몽고군을 야만인이라 비웃으며 요구대로 동물들을 잡아서 산채로 성벽위에서 내던져 주었다. 칭기즈칸은 그렇게 넘겨받은 제비와 고양이 꼬리에 기름을 먹인 솜을 달고 불을 붙여 풀어놓았다. 귀소 본능이 강한 두 동물들은 성벽을 넘어 원래 거처로 돌아갔고, 서하 우로하이성은 몇 시간 만에 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과의 사투에 정신이 팔린 틈에 몽고군은 총 공격에 나섰고, 손쉽게 성벽을 타고 넘어 우루하이를 수중에 넣었다. 몽고군의 용맹과 칭기즈칸의 전략 앞에 서하는 결국 항복하게 되고, 본영지로 철수하는 몽고군은 23만 전 몽고군이 나눠가져도 될 만큼의 많은 물자와 약탈품을 얻게 된다. 서하에서 성채 공략법을 익힌 몽고군은 내친 김에 금나라까지 정복했으며, 이후 중동까지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대 역사를 쓰게 되었다.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성을 점령하게 된 우로하이 전투는, 전략가로서의 칭기즈칸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 좋은 사례로 현재까지 칭송되고 있다.
배를 산으로 넘겨 승리한 콘스탄티노플(이스탄풀) 전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의 전투에서 배가 산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방법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예기치 못한 장소에 병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허를 찔러 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이 전략적 역발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사건은 지금으로 부터 560년 전인 1453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전투다.
근 1100년간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역사상 세 번째로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는다. 674년 첫 전투와 717년 두 번째 전투 모두 성을 포위한 이슬람군을 몰아냈던 동로마 제국군에게 세 번째 전투만큼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비록 당대 최강의 방어력을 갖춘 난공불락의 요새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연이은 전쟁과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비해 1451년 19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왕)에 즉위한 마흐멧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벌을 위한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의 뿌리, 동로마를 한방에 끝장내 버린다면 선왕들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달성하는 것이자,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위해 서유럽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심에 부풀었던 마흐멧 2세는 즉위 3년째가 되던 1453년 4월, 드디어 수백 척의 전함과 8만이 넘는 대군을 몰고 기독교 문명의 자존심,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바야흐로 기독교 문명의 종가 집과 이슬람 문명의 신흥 명문가가 보스푸러스 해협에서 세기적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슬람군에겐 막강한 병력이 있었고, 기독교군에겐 역사상 단 한 번밖에 뚫린 적이 없는 전설적 성채가 있었다. 비록 당시 콘스탄티노플 수비대가 7천명에 불과했지만, 콘스탄티노플 11세 황제는 기독교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이슬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 다음 차례는 자기들이라는 걸 잘 아는 그들이 원군요청을 무시하지 못하리란 기대 하에 황제는 서유럽 기독교 제국들에 사절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지원군은 수백 명 단위의 소규모에 불과했고 극심한 전력차속에서 그는 힘겨운 싸움을 맞게 되었다. 성채 앞에 진을 친 21세의 젊은 술탄, 마흐멧 2세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젊은 왕은 조심성이 부족하고, 늙은 왕은 과감성이 부족한 편인데 그는 그 두 가지를 다 겸비하고 있었다. 과거 두 번이나 이슬람 침공을 무력화시킨 이 난공불락의 성채를 함락시키기 위해 신중히 준비했고 과감하게 공격했다. 그가 준비한 공성장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길이 8미터, 무게 300kg에 달하는 초대형 슈퍼건 우르반(Uruban)대포였다.
400명의 인력과 60마리의 소가 끌어야 겨우 옮길 수 있었던 특대 사이즈의 우르반 대포는 집채만한 포탄을 1.6km까지 날리는 무시무시한 병기였다. 제대로 맞으면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아니라 현대식 벙커까지도 한 방에 날려버릴 가공할 무기였다. 비록 사격 후 재장전에 몇 시간이 소요되는 단점도 있었지만, 이 대포라면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허무는 것도 시간문제 같았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개시되자 마흐멧 2세의 기대와 달리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우르반 대포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데다 어쩌다 명중해도 기독교군은 신속하게 성벽을 복구했다. 장전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포의 위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땅굴을 파서 성벽을 화약으로 날려 버리려고도 했지만, 매번 기독교군의 역습으로 실패하기 일쑤였고, 오스만 해군을 동원한 해상봉쇄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오스만 군이 장악하지 못한 Golden Horn 해협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전쟁 물자를 조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초기 콘스탄티노플 11세와 마흐멧 2세는 공평하게 한 번씩 좌절을 맛본 셈이다 죽음을 각오한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수비대는 오스만군의 파상공세를 잘 막아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군의 피해는 갈수록 커졌고 전선은 교착상태로 흘렀다. 개전 초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보낸 사절마저 사형시키며, 승리를 장담하던 마흐멧 2세는 반대로 자신이 사절을 보낼 정도로 초조해져가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우수한 공성 무기들보다 포위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의 전의를 잃게 만들 회심의 일격이었다. 우르반 대포보다 강력한 무기는 바로 사람들의 의지란 걸 간파한 것이다. 그에겐 바로 그 의지를 무너뜨릴 임팩트(Impact)가 필요했다. 그리고 Golden Horn 해협에서 해법을 찾아냈다. 바다로 돌출된 형태의 콘스탄티노플 성은 7.5km의 동쪽 성벽, 7km의 북쪽 성벽, 5.5km의 서쪽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북쪽 Golden Horn 해협을 방어하는 북쪽 성벽과 강을 끼고 있는 서쪽 성벽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서쪽 성벽은 자신이 직접 방어하고, 북쪽 Golden Horn쪽에는 해협을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쳐서 이슬람 해군의 접근을 막았다. 사실상 상륙즉시 공격에 노출되는 동남쪽 성벽과 봉쇄된 북쪽 Golden Horn 성벽을 제외한 서쪽 성벽만 오스만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고, 제국 수비대는 적은 숫자나마 집중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마흐멧 2세는 과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유일한 사례가 바로 Golden Horn쪽 성채를 돌파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Golden Horn에 오스만 해군을 진입시키고 싶었다. Golden Horn을 오스만 군이 장악하면 세 가지 전략적 이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비록 소규모나마 콘스탄티노플 지원군은 개인 단위와 부대 단위로 북쪽 해협을 통해 계속 유입되고 있었다. 식량과 군수물자 역시 어렵지만 끊이지 않았다. 이 해협이 점령되면 성채는 완전히 고립되고 제국은 고사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둘째, 북쪽 해협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은 수비대와 시민들에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였다. 해협 봉쇄는 바로 이 불씨를 꺼뜨리는 결정적인 일격이 되어, 희망을 잃은 제국이 전투의지를 상실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셋째, 북쪽 성벽으로 공격을 확대하면 전선은 5.5km에서 12.5km까지 늘어나게 되고, 제국군의 방어선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늘어난 전선 중 어느 한 지점의 방어선이 뚫릴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계산 하에 마흐멧 2세는 해협의 입구를 막고 있는 쇠사슬의 해체를 명령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역시 잘 이해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수비군 역시 Golden Horn 방어에 악착같이 나서서, 콘스탄티노플 해군과 성벽에서 쏘아대는 화력 때문에 쇠사슬 해체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마흐멧 2세는 다른 공격루트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는 다소 엉뚱한 지시를 내린다. 바닷길로 Golden Horn 진입이 불가능하다면 육로로 전함을 끌고 옮기라고 명령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침공 19일째, 이슬람군은 술탄의 명령대로 배를 끌고 산을 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 대역사를 수행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60m 높이의 갈라타(Galata) 언덕을 가로질러 Golden Horn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고, 엄청난 규모의 목재 통나무가 깔렸다. 남는 게 사람이던 이슬람군은 한 척 한 척 개떼처럼 달라붙어, 수십 톤에 달하는 전투선을 끌고 밀며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둠을 틈타 갈라타 언덕을 넘어간 전선은 70척에 달했고 모두 무사히 Golden Horn에 도착했다. 하룻밤 만에 대규모 함대를 Golden Horn으로 이동시킨 오스만군은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모든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완벽히 차단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제국군과 시민들은 자기 눈을 의심할 광경에 경악했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해협에 느닷없이 오스만의 대규모 함대가 나타난 것이다.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절망의 그림자가 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제국의 결사대가 보급로를 뚫기 위해 술탄의 함대를 공격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차분히 최후를 준비해야 했다. 패배를 예감한 황제와 시민들은 다함께 마지막 미사를 드렸고 제국의 종말과 자신들의 운명을 슬퍼했다. 포위 53일째, 이슬람군은 총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졌다.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맞닿는 꼭지 점 부분의 성문이 뚫리면서 이슬람 군이 성내로 밀려들었고,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오스만군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콘스탄티노플은 약탈을 당했고 그 와중에 약 4,000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성의 함락소식에 화들짝 놀란 교황이 급히 십자군을 끌어 모아보았지만, 이미 겁을 먹은 서유럽의 군주들은 병사들을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포위 53일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동로마는 멸망했다. 동로마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승리를 기념해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그리고 192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계승한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이곳은 470년간 가장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이 세기적 승리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전함을 Golden Horn으로 이동시킨 사실만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건 물론 아니다. 이 사건 이후로 제국은 34일간을 더 버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마흐멧 2세가 과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여전히 성내에는 전의를 불태우던 소수정예 수비대와 이슬람 군에게 성지를 내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결의를 가진 5만의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흐멧 2세의 전략이 이 전쟁을 끝낸 건 아니지만 그 덕에 이슬람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배를 산으로 옮긴다는 역발상은 마흐멧 2세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한 때 세상을 주름잡았던 바이킹들도 보트를 끌고 이동하곤 했다. 전함을 육지로 옮겨 전투에 활용한 사례도 없었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처럼 결정적인 승리의 원인으로 작용한 사례는 드물다. 또한 이 같은 대규모의 함대를 산을 넘어 이동시킨 군사 작전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다소 무식해보이지만 역발상적 전술을 과감히 전투에 접목시킨 마흐멧 2세의 병법이 적중했고, 그 결과 그는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이 사건은 유럽인들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터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데 극복하기 힘든 정서적 반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마흐멧 2세는 터키인들의 영웅이자 이슬람 정신의 아이콘이다. 세계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은 역발상의 전략가, 마흐멧 2세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 지휘관 중에 한 명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세계사의 소용돌이 현장이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정복자 마흐멧 2세와 비잔틴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벌인 54일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오스만튀르크는, 그때부터 18세기까지 세계 최강국을 구현하는 초석을 놓았다. 전쟁 결과 문명사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뀌었고, 지리적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르네상스가 꽃피우는 토대를 마련했다. 성경이 왕성하게 번역되어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되면서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등, 이 전쟁이 미친 정치 사회 경제 종교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1400년 동안 지속된 로마 제국 최후의 날이라는 것 외에도, 동양·이슬람문명에 의해 정복된 서양·기독교문명이라는 점, 중세에서 근대로 시대가 전환된 시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의 세계에만 관심을 둔다. 패장이 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항복해 목숨을 살리라는 신하들과 정복자 마흐멧 2세의 권유를 뿌리치고, 장렬히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얼마든지 목숨을 구명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제국의 멸망과 함께 자신도 전사들과 적진에 몸을 던져 산화하면서 명예로운 패장이 되었다. 지금 시대는 전쟁과 무기 등 군사력으로 세계를 누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과 창 대신 과학기술, 음악 예술, 무한대의 인터넷망으로 문명을 선도하고 세계를 리드하는 시대에 와 있다. 한국이라는 좁은 나라에서 시각을 넓혀야 할 때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의 배가 산으로 옮겨진 것 같은 파격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
첫댓글 세계사 수업자료로 활용해야겠다
배를 산으로 옮긴다?
그런 민족을 상대했으니 십자군 원정이 번번이 실패한거지
~이스탄불 방문 계획이 올해는 이루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