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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2 - Triplets.는 홀수는 혜성의 시점. 짝수는 민우의 시점입니다. ^^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Prologue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Triplet [tríplit] n. 세 쌍둥이 중의 하나
(pl.) 세 쌍둥이
* Prologue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의 담당 의사는 말했다.
난 곧 죽을 것이라고...
그것은 심약한 우리의 어머니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고, 집안 식구들에게도 충격
적인 사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인생을 시작한 난 그 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후, 곧 요
양을 위해 공기가 좋은 시골의 별장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주치의와 우리 어머니의 유모
이자 나의 보모였던 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단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한 나였지만,
나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던 나의 형제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한때는 내가 이렇게 허약하게 태어난 것이 나와 한배를 나누었던 나의 형제들 때문이라 생
각했었지만, 방학이나 휴일이면 찾아오는 나의 형제들을 만날 때면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
리곤 했다.
하지만 나의 형제들이 함께였기에 늘 즐거웠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학교란 곳에 입학하면
서부터 발걸음이 뜸해진 나의 형과 동생을 보며 난 또다시 어린 시절 느끼던 박탈감을 느
끼기 시작했다.
나도 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났다면 그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테고, 그런 공기 좋
은 시골에서 아침 저녁으로 뛰어 다니는 건강한 시골 아이들을, 창 넓고 아름다운 집안에
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옹졸한 질투심도 내 동생의 너무나도 이른 죽음으로 끝이나 버렸다.
늘 죽음의 위험을 폭탄처럼 안고 살던 나이기에, 우리 중 가장 먼저 죽는 것은 나일 거라
고 생각해왔다. 단 한번도 나의 형제들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 나보다 5분 늦게 태어난 나의 동생의 죽음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던 형의 모습은 더욱 충격이었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나
와는 달리 인형같이 굳어있는 나를 끌어안고 꼬박 사흘을 울어대던 형은 결국 동생의 장례
식 직전 실신을 했고, 그 충격에 어머니 역시 실신하셔 장례식은 가족조차 모두 참석하지
못한 채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동생의 유골을 보는 것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거라 생각한 동생의 장례식이 있은 지 꼭 3년이 되던 해.
난 또 하나의 그리고 절대 상상하지 못한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형의 죽음.
Tip 1 - Triplets.는 Prologue를 읽지 않으면 이해가 쉽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Tip2 - Triplets.는 홀수는 혜성의 시점. 짝수는 민우의 시점입니다. ^^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 01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01
“ 진짜 똑같이 생겼다. 머리 색깔만 빼면 완전 똑같아. 그치? ”
“ 진짜... 눈동자가 갈색인 것까지 똑같아... 소름 끼친다... ”
“ 유.성.이 보는 거 같다, 야... ”
소름끼친다...
나 역시...
형의 방에서 형의 사진과 나란히 걸려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어느 것이 사진이고 어느 것
이 거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김 비서님께서 시골에서 입던 옷
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한 아름 안긴 옷. 형이 입던 옷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걸친 내
모습은...
형의 분신 같았다...
게다가 등교를 하기 위해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은 형의 방에 걸린 사진과 똑같았다.
그러니... 이렇게 소름끼친다고 떠드는 애들이 당연할지도...
“ 쟤 이름이 뭐라고?... ”
“ 신.혜.성. ”
“ ...... !!!!!!!!! 란아... ”
“ 그렇게 뒤에서 떠들어 대는 거 별로 보기 안 좋다...
떠들려면 안 들리는 데 가서 하던지... “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아이들 사이로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훤칠한 키에 늘씬하
게 아름다운 여자애가 웃고 있었다.
“ 혜성이... 맞지? ”
“ ... 어?... 어, 어... ”
“ 반가워. 난 선우 란. 넌 나 모를지 몰라도 난 유성이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
내 앞으로 내민 손은 희고 길었다. 나의 유모나 김 비서님도 예쁜 손을 가졌지만,
이 애의 손은 희고도 긴, 시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쁜 손이었다.
“ 아. 반가워... ”
어색했다.
여자애를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여자애의 손을 잡아보는 것도.
악수란 걸 해보는 것도.
내겐... 모두 어색했다.
물론 선우 란.이란 이름과 얼굴은 형이 가져온 수많은 사진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예쁘던 사진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은 내게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 너 온단 소식 듣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가자. ”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
아. 다른 세계가 맞구나...
“ 혜성이 왔어!~ ”
좀처럼 들어본 일이 없는 높고도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연 문의 안쪽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 와!~ 혜성이구나... ”
“ 어서와. 바로 등교해서 피곤하겠다... ”
“ 오늘부터 바로 수업 듣는 거야? ”
“ 유성이랑 정말 닮았구나... ”
“ 아냐! 유성 오빠가 더 멋있어!!! ”
“ 그만들 좀 해라. 정신 없다. ”
정신없이 쏟아지는 높고 낮은 목소리의 말들은 깊은 저음의 마지막 말로 정리가 되었다.
“ 정혁오빠. 유성오빠랑 정말 닮았죠?...”
“ 닮은 거지. 유성이가 아니라구. 정신들 좀 차려라.
유성이 말고 너희 그렇게 극성 떠는 거 받아줄 사람은 없으니까...
난 문정혁. 유성이 친구였어. "
아이들의 뒤에 있어 아이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의자에 깊이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일
어나 걸어 나오며 말했다. 큰 키에 너무 희지도 않은 피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깔끔한
조각미남이었다.
문정혁.
형과 그가 말한 이름.
" 나! 나!!! 난 정아미예요. 난 1학년이구, 혜성오빠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
갈색이라기엔 너무 밝은 머리를 양갈래로 올려 묶고는 두 손을 가슴 쪽에 꼭 올려 쥐고는
소리를 치는 소녀였다.
" 전요, 전요. 지혜예요. 손지혜. 전 혜성오빠 사진도 많이 봤어요!!! "
" 혜성오빠. 전요..."
" 그만들 해. 소개도 정도껏 해야지. 그래봐야 기억이나 되겠어?
교실로 가자. 정혁아. "
“ 란이 선배... ”
선우 란은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이리저리 날 흔들어대며 떠들어 대던 여자애들을 깔끔하
게 한마디로 물리치고는 정혁이...란 애에게 말하고는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 그래. 너희도 자기 소개는 나중에 천천히 해라. ”
란이가 나의 손을 잡고 아이들 사이를 빠져오는 뒤로 정혁이의 멋진 목소리가 차분히
울려 퍼졌다.
교실로 가는 내내 우리 셋은 전교생의 주목을 받았다.
시골에서 보던 아이들과는 달리 전형적인 도시 아이들 같이 생긴 둘.
선우 란과 문정혁의 외모를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시골 아이들에게 서울이 집이라는 피부 하얀 내가 신기해보였듯이...
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이 익숙치 않은 내게 이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편치만은 않았다.
“ 저기... 교실엔 나 혼자 가면 안될까?... ”
“ 왜? ”
나란히 걷던 란. 선우 란에게 말하자 선우 란은 그 시원스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 저기... 난... 사람들이 이렇게 쳐다보는 거... 편하지 않아... ”
“ 그래서 우리가 같이 가잖아. ”
“ 그러니까... 애들이 너희 때문에 자꾸 쳐다보는 게... 난... 좀 불편해... ”
“ 푸훗... 혜성이, 너... 뭐 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애들은 우리가 아니라 널 보는 거라고... “
“ 뭐??? ”
란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정혁이란 아이를 돌아보자 정혁이 역시 멋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사실... 란이와 내가 인기가 많긴 하지만, 오늘 관객의 대부분은 널 보기 위한 거야.
그나마 란이가 옆에 있으니까 애들이 아까처럼 달려들지 못하는 거라구... “
“ ...... 나... 나 때문에?... ”
“ 그래. 널. 보려고... ”
날... 보려고...
... 그럼... 이 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살아났다고...
“ 뭐해? 좀 있으면 종 친다고... ”
하지만... 그렇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게 너무 잔인하잖아...
모두들...
.
.
.
“ 궁금한 게 있어. ”
수업이 끝난 후 함께 하교를 준비하던 정혁이에게 하루 종일 참고 있던 걸 물었다.
“ 뭔데? ”
“ 내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살아난 게... 그렇게 재미있어? ”
“ ......... 무슨... 말이야?... ”
하루 종일 정혁의 곁으로 다가와 여자아이들이 건네준 혹은 방금 정혁의 사물함에서 꺼내
온 선물들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뒤적거리며 걷고 있던 정혁이가 하던 일을 멈추고는 고개
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 ....... 니가 유성이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 ....... 모두들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서 날 그렇게들 바라보는 거잖아...
.... 하지만... 그게 그렇게 까지 재미있어? 그렇게 하루 종일 날 보며 웃을 만큼?... “
“ 신혜성. 너 뭘 착각하고 있는가본데... ”
“ 아무리 내가 평생을 시골에서 학교조차 못 다녔다지만 알아.
그런 신기함이 가득 담긴 눈초리...
평생... 그 시골마을 아이들에게 받았던 눈초리니까... “
“ 혜성아. 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니가 유성이를 죽였다니...
유성이는 교통사고였어.
내가 그 옆에 있었다고...
유성이가... 어린아이를 구한 유성이가 피 흘리고... 숨이... 약해져갈 때......
그 상처를...... 피가... 피가 흥건해진... 그 상처를 막고 있었던 게... 바로 나라고... “
정혁인... 붉어진 눈을 하고는 오늘 한번도 보이지 않은 비통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그 표정은... 너무나 아파서... 꼭... 현성이가 떠났을 때 날 안고 울던 형의 모습 같았다.
“ 내가... 내가 죽었어야했어.
죽어야했던 내가 죽지 않아서... 현성이와 형이... 그렇게 된 거라고... “
“ 그게 무슨 말이야!!!!!! 유성이가... 유성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
“ 그 끝이 없는 피해망상증은 신유성이랑 똑같구만... ”
“ 이민우!!!!! ”
목소리가 들린 뒤엔 정혁이와는 사뭇 다른 교복 차림의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풀어헤친 남방에 타이는 보이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은 입고 있던 조끼도 보이지 않았으며
머리는 잔뜩 부푼 거친 회색이었다.
“ 형은 자기 땜에 동생이 그렇게 됐대고, 동생은 자기 땜에 형이 그렇게 됐다니.
누가 한 형제 아니랄까봐. “
“ 너... 오늘 학교 왔었어? ”
비딱한 자세로 서서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끄고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그 남자아이에게 정혁이가 물었다.
“ 그. 유.명.한. 녀.석.이 온다는데 안 와볼 수가 있나... ”
“ 왜 교실에 안 왔어? ”
“ 기집애들이 하도 빽빽대서 머리가 울려 아지트에 가 있었다. ”
그러고는 내게 바짝 다가섰다.
엷게... 낯설기만한 담배 냄새가 났다...
“ 진짜 똑같군...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그러니 기집애들이 빽빽댈 만도 하지... ”
그 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한참을 날 바라봤다.
“ 참 나... 그 기집애들. 신유성 때문에 빽빽대는 바보들인 건 맞지만.
니가 유성이 녀석 죽였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뇌아들은 아냐.
단지... 널 통해 유성이 녀석을 보기 때문이지.
니가 유성이가 아니란 걸 알면 금새 시들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널 보니 그렇게 되진 않겠다. “
“ 민우야... ”
“ 좋은 눈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민우란 아이가 정혁이를 바라보며 동의라도 구하는 듯 묻자 정혁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응... 유성이만큼이나... ”
민우는 뒤돌아 걸어가며 덧붙였다.
“ 아니. 신유성보다 더... ”
Tip 1 - Triplets.는 Prologue를 읽지 않으면 이해가 쉽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Tip2 - Triplets.는 홀수는 혜성의 시점. 짝수는 민우의 시점입니다. ^^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 02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02
부탁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이 떠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진 않았겠지만
언젠가 환하게 웃으며 했던 부탁이 마음에 걸려 나갔다.
- 민우야.
우리 혜성이가 오면 잘 부탁해.
꽤나 오랜 시간 함께 했지만 그렇게 솔직하고 시원스런 웃음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족쇄 -쌍둥이 동생이라는-를 풀어버릴 날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결코 자신이 떠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진 않았겠지만
그날 환하게 웃으며 했던 부탁이 마음에 걸려 만나러갔다.
“ 내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살아난 게... 그렇게 재미있어? ”
“ ...... 무슨... 말이야?... ”
그 유명한 얼굴.
그래봐야 유성이와 똑같을 그 얼굴을 보기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들린 가느다란 목소리.
익숙하지만 조금 더 여리고 가느다란 목소리.
“ ... 니가 유성이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 ....... 모두들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서 날 그렇게들 바라보는 거잖아...
... 하지만... 그게 그렇게 까지 재미있어? 그렇게 하루 종일 날 보며 웃을 만큼?... “
“ 신혜성. 너 뭘 착각하고 있는가본데... ”
“ 아무리 내가 평생을 시골에서 학교조차 못 다녔다지만 알아.
그런 신기함이 가득 담긴 눈초리...
평생... 그 시골마을 아이들에게 받았던 눈초리니까... “
“ 혜성아. 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니가 유성이를 죽였다니...
유성이는 교통사고였어.
내가 그 옆에 있었다고...
유성이가... 어린아이를 구한 유성이가 피 흘리고... 숨이... 약해져갈 때...
그 상처를... 피가... 피가 흥건해진... 그 상처를 막고 있었던 게... 바로 나라고... “
“ 내가... 내가 죽었어야했어...
죽어야했던 내가 죽지 않아서... 현성이와 형이... 그렇게 된 거라고... “
“ 그게 무슨 말이야!!!!!! 유성이가... 유성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
잘들 노는 군...
있지도 않은 사람 가지고 둘이 생난리를 치는구만...
“ 그 끝이 없는 피해망상증은 신유성이랑 똑같구만... ”
“ 이민우!!! ”
나의 말에 정혁이 녀석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날 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한때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누군가와 지독히도 닮은 얼굴.
“ 형은 자기 땜에 동생이 그렇게 됐대고,
동생은 자기 땜에 형이 그렇게 됐다니.
누가 한 형제 아니랄까봐. ”
“ 너... 오늘 학교 왔었어? ”
정혁이 녀석의 질문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끄고는 둘에게 말했다.
“ 그. 유.명.한. 녀.석.이 온다는데 안 와볼 수가 있나. ”
“ 왜 교실에 안 왔어? ”
“ 기집애들이 하도 빽빽대서 머리가 울려 아지트에 가 있었다. ”
사실 그 녀석을 보기 위해서는 교무실에 먼저 갔어야했겠지만, 교무실이고 복도고 심지어
는 교실까지 전교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이란 작자들까지 몰려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닮았지만 뭔가 다른 느낌.
자세히 보기위해 바짝 다가섰다.
그런 나의 행동에 바짝 긴장한 듯 흡- 소리를 내며 숨을 멈추고는 가느다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날 바라본 채로 굳은 모습.
“ 진짜 똑같군...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그러니 기집애들이 빽빽댈 만도 하지... ”
하지만 곧 느껴지는 향기는 우습게도 베이비 파우더향.
고2 남자 녀석에게 베이비 파우더 향???...
환장 하겠구만...
“ 참 나... 그 기집애들. 신유성 때문에 빽빽대는 바보들인 건 맞지만.
니가 유성이 녀석 죽였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뇌아들은 아냐.
단지... 널 통해 유성이 녀석을 보기 때문이지.
니가 유성이가 아니란 걸 알면 금새 시들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널 보니 그렇게 되진 않겠다. “
“ 민우야... ”
“ 좋은 눈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유성이보다 엷은 갈색의 눈동자.
작고 가느다란 몸은 분명 운동으로 다져진 유성이 녀석의 미끈한 몸보다 볼품없었다.
하지만... 눈은...
“ 응... 유성이만큼이나... ”
“ 아니. 신유성보다 더... ”
그래.
눈이야.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 03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03
“ 다녀왔습니다. ”
“ 그래... 왔니? 피곤하지?...
배는 안고프니? 엄마가 케잌 만들어 놨어.
우리 아들 좋아하는 딸기 케잌으로...
어서 가서 먹자. “
“ ......... 네... ”
집에 들어서자마자 곱게 실내복을 차려 입은 엄마가 뛰어나와 나를 맞았다. 나의 가방을
받아들고는 나의 팔을 잡고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간 잘 정돈된 주방에는 엄마가 직접
만든 하얀 생크림과 빨간 딸기로 맛있게 장식된 케이크와 딸기주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 학교는 재미있었니? ”
“ 네... ”
“ 이번 주 주말에 친구들 부를까?
3주후가 네 생일이잖아.
그 때 뭐하고 놀지 이번 주말에 정해.
정혁이랑 란이랑 민우랑 동완이랑, 승호랑 우혁이랑... 다들 오라고 그래.
엄마가 파티 해줄게. ”
“ ... 네... ”
“ 어머. 우리 아들 피곤하니? 그럼 이거 가지고 올라가서 쉬렴. ”
“ 네... 그럼 올라갈게요... ”
화사한 엄마의 미소와 달착지근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하얀 생크림에 빨간 딸기가 예쁘게
장식된 케이크와 딸기 주스를 들고 방으로 올라왔다.
“ 휴- ”
들어온 방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벌써 봄이라지만 내가 있던 시골과는 달리 도시에선 그런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순수한 자연의 향기를 머금은 잘 익은 딸기의 진한 향만이 봄이란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달칵
“ 피곤하지? ”
“ 아... 김 비서님... ”
“ 힘들어도 좀 참아 줘.
사모님도... 많이 힘드셔서 그런 거니까. “
“ 알아요... 그런 거... ”
“ 그래. 학교는 어때? ”
“ 그냥... 아직까지는 좀 낯설어요... ”
“ 그래. 아무리 개인 교습으로 학교 진도 따라갔다고 해도
애들 많은 속에서 수업 듣는 것도 혼자 공부하는 거랑 같지 않을 테고,
또 유성이가 다니던 학교라서 알아보는 애들도 많아서 더 힘들 꺼야.”
“ 훗...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던데요?
내가 유성이 형 동생인거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내가 유성이 형 죽이고 살아난 게 그렇게 신기한가?... “
“ 혜성아!!!! 그런 거... 아니야.
유성이... 학교에서 유명했어.
전교 회장에 학교 수석으로 입학.
운동, 미술, 악기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게 없고, 성격도 좋고 집안도.
그래도 그런 티 안내고 다녀서 애들이... 많이 좋아했어. ”
“ 하... 나랑은... 더 비교되겠네요...
난 시골에서 조차 애들이랑 어울리지 못했는데... “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유성이... 그렇게 학교생활 열심히 한 거... 다 널 위해서야. ”
“ ...... ?????!!! ...... ”
“ 현성이... 그렇게 간 후에... 너 온 후에 편하게...
자기가 널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니가 언제 학교에 오더라도 적응할 수 있게 하겠다고.
그러려면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들고,
니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학교에 열심히 였어. 올해 안에... 꼭... 너 데려 오겠다고... “
“ .......!!!!!!!!!!!!!!!!.....
......... 나.... 혼자 좀... 있게 해줄래요?... ”
“ 그래... 그럼 쉬어. ”
- 달칵
형의 일기장...
[ 혜성이에게... ]
형이 나의 올해 생일 선물로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이 방은 날 위해 꾸며져 있었다.
형의 방이 형과 나. 그리고 이제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될 형 친구들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고, 형의 물건이 잔뜩 있었던 것만큼 이 방안에는 날 위한 물건들이 있었다.
별장에서와 똑같은 킹 사이즈의 침대.
그 위에 덥힌 흰색의 순면 시트.
깔끔한 붙박이 옷장과 책장.
널찍한 유리 책상.
여벌의 교복.
내가 좋아하는 책.
교과서를 비롯해 각종 참고서.
형과 내가 별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
커다란 LCD모니터가 달린 최신형 컴퓨터.
없는 것이 없었다.
또한 엄마의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날 더욱 안심시켰다.
형이 이것들을 준비한 걸까?...
.
.
“ ... 성아... 유성아... 유성아?... ”
“ ... 으... 음... ”
“ 유성아... 왜 여기서 자니? 네 방에 가서 자야지... ”
“ ........ 으흠..... 엄... 마?... ”
“ 그래. 엄마야.
글쎄 엄마가 이상한 꿈을 꾸었지 뭐니...
니가 사고가 나는 꿈을 말이야...
걱정 돼서 방에 가보니까 니가 없지 뭐야...
근데 왜 혜성이 방에 와서 자고 있는 거야?
혜성이 보고 싶니? 어차피 곧 데려 올텐데 뭐...
그래도 정 보고 싶으면 이번 주에 한번 가보렴...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잘래? “
- 끄덕
“ 그래,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우리 아들... 쪽. ”
- 딸칵
“ ............ 흑...... 흐흑.........
....... 흐흑.... 흑....... 흡.....
...... 난... 혜성이예요... 혜성이... 엄마...
그리고... 형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나 대신... 형이 가버렸거든요...
역시... 내가 먼저 가버렸어야 하는 건가요?... “
서늘한 밤기운이 나의 온 몸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아 그 쓸쓸함을 주체할 수 없다.
난... 날 버렸어야하는 걸까?...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 04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04
- 뭘 그렇게 심각하게 하냐?
- 음... 혜성이 목록.
아지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뒷모습.
전교에서 가장 멋진 뒷모습이라는 계집애들의 말이 떠올라 웃어버렸다.
하지만 뭐가 그리 심각한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심각하게 테이블위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다.
그런 녀석의 어깨를 툭-치며 묻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너 혜성이가 여럿이냐?
- 하하... 혜성이한테 해줄 것, 혜성이가 하고 싶은 것, 혜성이가 해야만 하는 것 목록.
그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녀석의 말에 되려 김이 빠져 녀석의 팔이
올려진 커다란 테이블 위로 껑충 뛰어올라 앉았다.
- 아무튼 너희 형제도 유별나.
필래?
시험공부 때보다 더 열심히인 유성이 녀석을 무심히 보며 꺼낸 담배를 입에 물고는 나머지
를 유성이를 향해 내밀며 물었다.
- 아니- 금연 중.
- 그놈의 금연은 일년에 열두 번씩 하냐?
- 혜성이 만나러가기 전에는 필수야.
별장 가서 피고 싶어지면 안 되잖아...
- 그럴 바에야 아예 끊어.
- 그럴 수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유성이는 그제서야 테이블 위에 거의 박다시피 한 얼굴을 들고는 콧등 위에 올려져 있던
안경을 벗고는 날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 다른 짓은 모범생인 녀석이 담배 피는 것도 웃기지만,
너같이 독한 놈이 못 끊는 것도 웃겨.
- 훗... 너도 혜성이 오면 더 이상 여기서 담배 못 피니까, 각오해.
- 푸훗... 누가 브라더 콤플렉스 아니랄까봐.
- 하하... 그래. 나 브라더 콤플렉스야.
평생 그렇게 살아도 다 못 갚을 테지만...
나의 말에 순순히 긍정하며 웃는 녀석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녀석이다.
신유성.
그 녀석은 내 18년의 인생 중에 만난 가장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 뛰어남에는 전교생은 물론이고 이 근방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녀석의 성적이나 운동
실력, 악기 연주 실력도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내가 녀석을 뛰어나다고 칭하는 것은 좀
다른 이유에서였다.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녀석이었지만, 사실 내 눈에 그 녀석은 한 가지도
온전하게 가지지 못한 듯 보였다. 그것은 갖은 자의 오만이나 허영이 아닌 진정한 부족함
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것을 알지 못했다.
신유성.
녀석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위.장.술.을 가진 녀석이었다.
텅-비어버린 자신의 가슴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뛰어난 위.장.술.을 가진 녀석.
- 난 혜성이에게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이 있어.
- 아직도 그 타령이야?
- 넌 내 기분 100% 이해 못할 거야.
동생의 것을 빼앗고 태어난 기분.
난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었어.
- 어울리지 않는 원죄론이야?
그렇게까지 자학할 거 없잖아.
- 글쎄... 모르겠어.
다른 일에는 그렇지 않은데, 왠지 혜성이 일에는 예민해.
현성이가 죽고 난 후로 더...
그냥 늘 미안해.
어머니 뱃속에서 혜성이가 나의 옆에 있었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그냥...
내가 혜성이의 양분을 다 빼앗고 태어나 혜성이가 그렇게 된 기분이야...
그래서 우리 셋이 나란히 한 달씩 있어야할 인큐베이터에
혜성이 혼자 그 짐을 싸안고 아홉 달이나 있었던 것 같아...
-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소리라는 거 알지?
- 과학적으로 해결할 거였으면 옛날에 끝났어.
이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냐.
그건 알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해결했을 녀석이니까.
단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저명한 의사인 집안이 아니더라도
녀석은 그런 과학적 근거를 알기에 충분히 똑똑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말대로 그 것은 과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 대체 어떤 녀석이냐? 니가 그렇게 끔찍이 생각하는 네 동생.
- 혜성이?... 혜성인 순수배양된 것같이 순수한 아이야...
나의 질문에 유성이는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떠올리는 10대의 소녀마냥
빙그레- 웃으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 순수배양?...
- 그래. 깨끗하고 좋은 물에 꼭 필요한 영양소만 주어져서 예쁘고 깨끗하게 자란 아이.
그게 혜성이야.
녀석이 그리도 아끼는 녀석.
신혜성이라는 그 녀석을 떠올릴 때면 유성이는 이런 표정을 짓곤 한다.
마치 다른 세계로 빠져버린 문학소년과 같은 표정.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자상한...
성모마리아나 부처상과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걔가 무슨 개량 화초냐?
- 하하... 어쩜 그럴지도... 나와 부모님에 의해 개량된 순수 혈통의 화초일지도...
- 그렇게 순수한 녀석이... 현실에 나와 적응할 수 있을까?
지나치게 깨끗한 건 오래가지 못해.
-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야... 그 애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모든 준비를 해놓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 그래서 그렇게 이 악물고 악착같이 사는 거냐?...
나의 눈에는 그랬다.
수 없이 많은 타인의 눈에 신유성이라는 존재는 뛰어나게 훌륭한 존재였지만
나의 눈에 신유성이란 내일이면 죽어버릴 하루살이처럼 악착같이 사는 놈으로 보였다.
- 후훗... 그래. 내게는 완수해야할 임무가 있으니까...
-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니가 이러는지 정말 궁금하다.
- 너도 만나보면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알거야...
처음엔 녀석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몰랐다.
누구나 한번쯤 돌아 볼만큼 근사한 외모.
그에 준하는 뛰어난 성적과 각종 대회를 휩쓰는 운동신경과 예술성.
왠만한 집안은 부러워할 것 없는 든든한 배경.
녀석의 텅-비어버린 가슴의 원인이 그 녀석과 한배에서 난 쌍둥이 동생이란 것을 안 것은
시간이 꽤 흘러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 동생이라는 존재가 쉽게 말할 수 없는 금기라는 것만 알았을 뿐
고작 몸이 약해 요양 중이라는 동생이 왜 그리 중요한 존재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점차 녀석을 알아감에 따라 그 녀석의 모든 행동, 생각, 계획의 원인과
목적이 모두 그 녀석의 동생이라는 존재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가 녀석에게 쏟던 꽤나 예외적인 인간적 관심의 일부는 결국 한번도 보지 못한 그 녀석
의 동생에게로 돌아갔다.
그랬던 나의 관심의 대상이 드디어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번/째설] Triplets. 세 쌍둥이 - # 05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05
“ 유성군은 항상 여기서 내렸는데, 어떻게 할까요? ”
“ 아... 저도 여기서 내려주세요. ”
아직은 낯선 학교생활의 적응을 돕기 위해 등하교 길을 함께 하는 김 비서님의 말씀에
가방을 챙겨들고는 차에서 내렸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날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에
움찔- 했지만 독하게 마음을 다잡고는 한 발을 내딛였다.
하지만 지난 번 등교 첫날에는 전학 수속을 위해 차로 운동장까지 들어가서인지 아직 등교
길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무작정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등교하는
학생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불편했다.
그 부담스런 관심의 시선은 시골에서나 이곳에서나 변함없었지만 역시나 이런 시선은 아무
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 어? 혜성아~~ ”
고개를 숙이고 회색의 아스팔트에 눈을 맞추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들리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얼른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어제 하루 종일 날 도와준 선우 란.
“ 아. 란아... ”
반가운 마음에 가볍게 뛰어 란이에게 다가섰다.
란이는 어제보다 더 예쁜 모습이었다.
검고 결 좋은 긴 생머리를 찰랑이게 빗어 내린 어제와 달리 길게 내려뜨린 머리를 양쪽으
로 핑크색 실핀으로 살짝 꽂은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는 다른 학생들을 세워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정혁이가 보였다.
“ 란이 오늘 너무 귀엽다.
아... 정혁이도 있네?... ”
“ 나??? 아... 이 핀?... 혜성이 너 대단하다.
남자애들은 이런 거 신경 못쓰는데... 후훗... 정말 귀엽다니까... ”
무언가 바빠 보이는 모습에 선뜻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란이를 보며 작게 말하자 란이는
날 보며 그 예쁜 얼굴에 시원한 미소를 띄고는 나의 볼을 톡톡- 쳐주고는 정혁이에게로
휙- 돌아서서는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 야. 문정혁. 인사정도는 해야지. ”
“ 어? 혜성이 왔구나.
Hi~ 어젯밤 잠은 잘 잤어? 학교에서 피곤해서 정신없이 잤지??? ”
“ 저, 저... 수다쟁이... 인사 했으면 일이나 해.
어. 거기. 이름표 어디 있어??? ”
정혁이에게 말하던 란이는 저쪽의 한 학생을 보더니 검고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그런 란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정혁이에게 물었다.
“ 저... 난 이제 들어가도 될까?... ”
“ 아. 그래. 아참... 너 이대로 들어가면 시끄럽겠다.
야! 김동완!!! 빨리 와!!!! ”
내게 말하고는 교문 밖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정혁이에게로 건강한 피부에 단단
해 보이는 몸을 가진 성격 좋아 보이는 얼굴의 남학생 하나가 한쪽 어깨에는 가방을 다른
한쪽 어깨에는 기다란 막대기 하나를 걸치고는 뛰어왔다.
김동완.
이 아이도 유성이 형이 내게 보여준 친구들의 사진 중 있는 아이.
“ 뭐야. 형님을 뛰어 오라마라 하고... ”
“ 자식... 어제 검도대회 성적은??? ”
“ 당근 우승이지. 지역대회에서 우승 못할 정도면 진작에 그만뒀다. 푸하하하~ ”
“ 미친 놈... 아. 네가 혜성이나 교실에 데려다 줘라. ”
“ 뭐? 어???!!!!!
아... 네가... 혜성이구나.... ”
한참을 정혁이와 정신없이 떠들던 동완이는 정혁이의 말에 날 돌아보더니 순간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는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흔드는 몸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막대기의 모습이 신기해 웃자 특유의 시원스런 웃음을지
으며 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정혁이와 란이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날 끌고 학교
로 들어갔다.
“ 저기... 란이랑 정혁이는 교실로 안 들어가? ”
동완이에게 거의 끌러가다시피 건물로 들어서며 동완이에게 물었다. 다른 학생들 모두 교
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데, 팔에는 노란 띠를 두르고는 계속 교문에서서 등교하는 학생
들에게 말을 거는 정혁이와 란이가 이상해보였기 때문이다.
“ 란이??? 아... 걔네들은 선도부야. ”
“ 선도부?... ”
“ 선도부 몰라? 흠... 전에 학교에서는 선도부가 없었나보지???
흠... 다른 말로 뭐랄까?... 지도부?
학교의 이런 저런 규칙을 위반하지 않게 일하는 집단이지.
교내 학생 경찰 같은 거 말야. ”
“ 아... 그렇구나... 근데 동완아. ”
나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세히 알기 쉽게 설명해준 동완이는 말을 마치고는 내게
씩- 웃어주었다. 하얀 이빨을 시원스레 보이며 웃는 그 웃음은 유성이 형이나 란이, 정혁
이와는 또 다르게 멋진 웃음이었다.
“ 응? 왜??? ”
“ 저기... 나... 이 학교 전에는 학교에 안다녔어. 그래서... 선도부가 뭔지 몰랐던 거야. ”
“ 아. 그랬구나... 하하!!! 아마도 유성이가 이야기 했을 텐데 내가 또 까먹었나보다...
내가 뭐 그렇지... 하하하... ”
나의 말에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한 동완이는 나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과장되게 웃으며
날 위로해주었다.
“ 거기가 네 자리야??? ”
교실로 들어서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 동완이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과 막대기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 응. 왜?... ”
동완이의 표정이 이상해 묻자 손을 들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 아니, 뭐... 하필이면 왜 그 녀석인가... 하고... ”
“ 김동완. 수식어구가 이상하다?... ‘하필이면’이라니?... ”
“ 으아악!!!!!!! 니가 이 시간에 왠일이냐??? ”
동완의 말에 특유의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온 모습에 동완이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을 쳤다.
“ 왠일이라니? 우리학교 등교시간 7시 50분까지 아니었냐? ”
“ 그러니까... 니가 언제 등교시간 맞춰 온 적 있냐? ”
“ 매일 너보다 먼저 왔었어. 교실에 없어서 그랬지. ”
정신을 못 차리고 교실의 시계와 자신의 손목시계는 물론이고 휴대폰 액정 시계까지 호들
갑스럽게 들여다보는 동완이를 희고 건강해 보이는 손으로 밀고는 나의 옆자리에 가방을
던져놓는 아이.
“ 안녕? 민우. ”
“ ................... ”
나의 어색한 인사에 민우는 한손으로 책상에 끼워져 있던 의자를 꺼내어 앉으려던 움직임
을 멈추고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서있었다.
“ ........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니?.... ”
“ 확실히 신유성은 아니군. ”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민우는 꺼내던 의자도 그대로 둔 채 책상 위에 가방을 던져두고
는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 야!!! 이민우. 또 어디가? 간만에 교실에 일찍 들어오나 했더니, 또 땡땡이냐??? ”
“ 상관 마. ”
동완이의 외침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 나 참... 저렇게 수업 안 듣고 그. 성.적.인 게 기적이라니까, 기적... ”
동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06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06
습관처럼 아침이면 아지트로 와 담배를 문다.
늘 아지트를 지키고 있는 란이나 정혁이 그리고 이제는 없는... 유성이는 아침이면 선도부
지도를 위해 교문에 서있고, 그 덜떨어진 검도광 김동완은 아침이면 도장에 있기 때문에
아침시간의 아지트는 내게는 최고의 흡연장소였다.
물론 어쩌다 일찍 아지트로 들이닥치는 눈치 빠른 선우 란에게 현장을 잡히곤 하지만 유성
이가 있을 때는 그 녀석이 대부분 그 것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녀석이 없는 지금은 녀석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잠시도 건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교문 앞에 있는 선우 란 덕에 이렇게 한가하게 ‘아침의 연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성이는 나의 흡연을 돕고 있다.
“ 야. 교문 앞에 봤냐? 환상의 트리오더라.
선우 란, 문정혁에 신혜성까지 있으니까.
2학년의 ‘플라워 트리오’가 돌아온 거 같지 않아??? ”
“ 글쎄 말야.
신유성 쌍둥이라고해서 정말 똑같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까 그렇지도 않아서 실망했는데,
그 둘 사이에서 빛나는 걸 보니 또 색다른 매력이 있던데??? ”
“ 왜. 신유성은 왠지 든든한 느낌이랄까? 그랬는데.
신혜성은 왠지 보호해주고 싶은 기분... 그런 게 들지 않아? ”
“ 그래. 그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남자~ ”
“ 글쎄 말야.
유성이 없어지고, 우리학교에 볼거리가 사라졌다. 했더니 새로운 볼거리야~ ”
아지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빽빽-거릴 선우 란의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창가에 기대어
아침의 연기를 들이마시는 중에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
아침 청소 당번이라도 되는 듯, 양동이와 대걸레, 주전자를 들고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떠들
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 후- 등교했단 말이지?
그럼 어디 한번 가볼까?... ”
난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깊이 빨고는 꺼버리고 창 너머로 던지고는 아지트를 나왔다.
“ 거기가 네 자리야??? ”
교실 문을 들어서자 들리는 목소리는 덜 떨어진 김동완.
오늘도 변함없이 한쪽에는 가방을 한쪽에는 죽도를 매고는 삐딱한 자세로 내 자리 옆에
서서는 떠들고 있다. 자기 반도 아닌 우리 교실에 당당하게 드나드는 유일한 녀석.
“ 응. 왜?... ”
들리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데 그 녀석의 넓은 등판에 가린 것은 어제 그 녀석.
“ 아니, 뭐... 하필이면 왜 그 녀석인가... 하고... ”
“ 김동완. 수식어구가 이상하다?... ‘하필이면’이라니?... ”
“ 으아악!!!!!!! 니가 이 시간에 왠일이냐??? ”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며 말하는 김동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수식어구를 콕- 꼬집어
말해주자 김동완을 질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 왠일이라니? 우리학교 등교시간 7시 50분까지 아니었냐? ”
“ 그러니까... 니가 언제 등교시간 맞춰 온 적 있냐? ”
“ 매일 너보다 먼저 왔었어. 교실에 없어서 그랬지. ”
학교 등교시간도 모르는지 -하긴 매일같이 지각인 녀석이니...- 내가 왜 이 시간에 교실에
있는지를 묻는 김동완에게 등교시간을 알려주자 한술 더 뜨며 호들갑떠는 모습에 한손으로
녀석을 밀어버리고는 자리에 앉기 위해 의자를 꺼냈다.
“ 안녕? 민우. ”
“ ................... ”
18년 동안 들어본 중 가장 바보 같은 아침인사.
아직도 이런 말을 쓰는 녀석이 있나?
너무 어이가 없어 의자를 꺼내던 손조차 멈추고는 돌아본 곳에는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
너무도 낯선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5년을 보아왔지만, 신유성은 이런 얼빠진 표정은 하지 않는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억지로 입꼬리만을 올린 어색한 표정.
이봐. 너희 형은 완.벽.한. 위.장.술.을 지녔다고.
너처럼 어.색.한. 연.기.는 본 적이 없어.
“ ........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니?.... ”
“ 확실히 신유성은 아니군. ”
순간 바뀐 표정은 천진한 아이 같은 표정.
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손을 재빨리 들어 햇살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듯 아기처럼
뽀얀 얼굴에 대고는 쓱- 만져보는 모습이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다.
물론 신유성은 이런 표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 야!!! 이민우. 또 어디가? 간만에 교실에 일찍 들어오나 했더니, 또 땡땡이냐??? ”
“ 상관 마. ”
“ 나 참... 저렇게 수업 안 듣고 그. 성.적.인 게 기적이라니까, 기적... ”
내 뒤로 울리는 것은 자신의 교실인냥 남의 교실에 들어와 있는 김동완의 목소리.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07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07
“ 자. 오늘 종례는 이상. 중간고사가 딱 이주 남았다.
내일 아침. 시험 일정 공지 될테니까, 이제 준비들 시작하도록...
특히 운동부 녀석들. 이번 시험에도 성적 안 좋으면 시합 못나가니까, 알아서들 해라. ”
“ 네에- ”
“ 아. 특히 혜성이. 혜성이는 시험 처음이니까, 란이랑 정혁이가 많이 도와주도록... ”
“ 네. ”
선생님의 말씀에 란이와 정혁이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선생님께서는 교실을 빠져나
가셨다.
“ 혜성아. 너 OMR카드 작성해본 적 있니??? ”
“ 오해말?.... "
선생님이 빠져나가시자 시끄러워지는 교실 저쪽에서 란이가 다가와서는 민우의 책상을 그
늘씬하고 예쁜 팔로 짚고는 내게 물어왔다. 하지만 처음 들어오는 단어에 생소함을 느낀
내가 되묻자 란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이었다.
“ 그럼 우선 OMR카드 몇 개 받아다가 연습 좀 해야겠다.
다음 번 모의고사 전에도 모의고사 OMR카드로 연습하고...
그럼 난 선생님한테 중간고사 OMR카드 받아올 테니까,
정혁이 네가 혜성이 좀 아지트에 데리고 가라. ”
“ 그래.
아... 안된다. 나 오늘 선도부장 선생님한테 가야해. ”
“ 오늘 네 차례야?... ”
“ 응. 야. 이민우. 네가 좀 데려다 줘라. ”
정혁이의 말에 민우를 돌아보았다.
민우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민우의 행동에
내가 란이와 정혁이를 돌아보자 란이는 웃으며 ‘따라가.’라고 말했고 난 재빨리 가방을 챙
겨 교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 들어서자 꽤나 전에 교실을 빠져나간 민우가 아직도 복도
벽에 기대고 서있었다.
건강하게 하얀 피부.
얼굴과 잘 어울리는 거친 회색의 머리.
살짝 내리뜬 멋진 눈.
그 모든 것들과 잘 어울리는 콧날.
살짝 말아 올린 입꼬리.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삐딱하게 서있는 모습은 너무도 멋졌다.
“ 아. 미안... 가방 챙기느라... ”
나의 말에 민우는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고, 난 여유로운 민우의 발걸음과
는 달리 종종 걸음으로 민우를 쫓아갔다. 정규수업이 끝난 복도는 학생들로 북적였고, 복도
를 뛰어다니거나 소리치는 아이들로 인해 난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을 함께 느꼈다.
등교 이틀 째, 학생들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로 향해있었고, 그와 동시에 어제와는 달리 나
의 앞 뒤를 망설임 없이 스쳐지나가 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었다. 란이나 정혁이 혹은 동
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이런 혼란스러움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들에게 엉켜
민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난 더욱 당황했고 학생들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피하던 나는 한
쪽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한 남학생의 어깨에 부딪혔다. 그 남학생은 그 속도 그
대로 계속 달렸지만, 나는 그 충돌에서 온 충격에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 어어어- ”
이대로 복도에 넘어지면 또 며칠은 학교에 못나오겠구나- 라는 생각과 아찔한 느낌이 들어
팔을 허우적-댔지만, 사실 나의 0점짜리 운동신경으로는 어쩔 수 없는지 복도를 향해 떨어
지는 나의 몸은 가속도가 붙었다.
- 퍽!!!
‘콰당-’ 이 아닌 ‘퍽-’ 이란 소리가 나며 나의 몸은 복도에 떨어졌고, 나의 뒤에는 누군가
가 있었다.
깜짝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복도를 시끄럽게 울리던 학생들은 하나같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웃길 것 같아 벌떡- 일어섰다. 순간 어질-하는 기운에 휘청였지만
나를 따라 일어선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아 세워주었고 내가 몸을 고정시키자 그 손을 곧
떨어져나갔다. 날 잡아준 그 손이 누군지 돌아보기가 무섭게 여학생들의 높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민우가 한 남학생의 멱살을 잡고는 거칠
게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우는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 남학생
과 주변의 학생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는 민우와 그 남학생 주변에 꽤나 넓은 공
간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 한번만 더 복도에서 뛰어다니다가 잡히면 죽는다. ”
민우는 무서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 남학생의 멱살을 거칠게 놓고는 돌아서서는 걸어왔고
아이들은 민우가 걸어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갈라주었다. 날 스쳐지나간 민우는 한쪽에 떨
어져 있는 자신의 가방을 들어 손으로 툭툭-털고 얼굴만 반쯤 돌려서는 날보고는 물었다.
“ 안가? ”
“ 아... 가. 가... ”
그 목소리에 난 깜짝 놀라 민우와 마찬가지로 내 곁에 떨어져있는 가방을 들고는 재빨리
민우의 뒤를 따라갔다. 민우가 걸어가는 곳은 신기하게도 그 많은 학생들이 쫙- 갈라지면
길을 만들어 주었고 난 더 이상 민우를 잃어버리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민우
는 꼭대기 층인 5층 복도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학교의 다른 교실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한 가운데에
는 커다란 원목 테이블과 그 둘레에는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창가에는 소파, 한쪽 벽에는
높이는 낮지만 꽤 넓은 책장이 놓여있었고, 또 다른 쪽 벽에는 여러 가지 글씨가 쓰인 화
이트 보드와 알록달록한 Post-It 이 붙은 게시판이 걸려있었다.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깔끔
하게 꾸며진 토론실이나 상담실같이 보였다.
민우는 중앙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 가방을 던져 놓고는 소파로 가서는 털썩- 앉았다. 그
런 민우의 모습을 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문 옆에 서서는 다시 한번 방안
을 둘러보았다.
“ 콜록- 콜록- ”
갑자기 나는 독한 냄새에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목이 따끔거리도록 낯선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침을 하며 그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창가의 소파에 앉아있던
민우가 입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콜록- 콜록- 콜록- ”
민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탁한 눈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기침을 하는 나를 바라보더
니 담배를 짓이겨 끄고는 창밖으로 휙-하고 던져버렸다.
“ 어리버리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하군...
너 정말 신유성 동생 맞냐??? ”
“ 콜록- 콜록- 켁켁... ”
소파 등받이 위에 한쪽 팔을 올리고는 멋지게 앉아서는 말하는 민우를 바라보며 적당한 대
답을 찾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하기에 곤란했다. 내가 유성이 형의 동생이란 사실은 맞지
만, 또한 유성이 형의 동생이 맞냐는 질문을 들을 만큼 바보 같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 거기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문에 밀려 고꾸라진다. ”
“ 어? 어- ”
귓가를 스치는 민우의 말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아까처럼 다시 서 있었다.
“ 바보같이 뭘 또 그러고 서있냐? ”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치는 민우를 보고는 민우를 따라서 널따
란 테이블 위에 살짝 가방을 올려놓고는 민우의 옆에 가서 앉았다. 민우에게는 아직까지도
매케한 담배의 향기가 묻어났다. 낯설지만 왠지 가슴 설레는 그 향기에 무릎위에 올려진
두 손만을 가만히 바라봤다. 민우가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랑 살랑- 바람이 불어
와 나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칼이 흔들리고 그 바람에 연한 담배 향과 함께 민우의 향기
가 실려 오는 것이 좋아 미동 없이 앉아있었다.
“ 하아- 너 정말 신유성 동생 맞냐? ”
드디어 들리는 민우의 질문에 가만히 민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소파의 등받이에
한 팔을 올리고는 날 향해 반쯤 돌아앉아있는 모습에 가슴이 쿵-.
“ 아... 동생은 맞는데... ”
“ 푸훗... 생긴 건 지독하게 닮았다. 근데... 네가 좀더 작고 말랐나? ”
민우는 이렇게 말하며 그 하얗고 예쁜 손으로 나의 비쩍 말라 볼품없는 손목을 잡아 눈높
이까지 올렸다. 민우의 손에 잡힌 나의 손은 민우의 건강하고 예쁜 손에 비해 너무 볼품없
고 보기 싫어 민우의 손에 잡힌 나의 손을 빼내려했다.
“ 뭐야? ”
“ 저기... 놔줘... ”
하지만 엄마의 손에서조차 힘이라고는 전혀 쓰지 못하는 나이기에 민우의 손에서 쉽게 빠
져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의미 없는 반항에 민우는 불쾌하다는 듯이 물었고,
그런 민우의 앞에서 불쌍하게 사정하는 나의 모습에도 민우는 나의 손을 놓지 않고는 오히
려 내 손을 자신의 코앞까지 잡아당겨 가만히 나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 저기... 놔 줘... ”
“ 왜? ”
“ .... 네가 잡고 있으니까... 더 볼품 없어 보이잖아... ”
결국 내 입으로 내뱉고 싶진 않았지만 고백했다.
“ 뭐가? ”
“ ...... 내... 손..... ”
나의 창피한 고백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민우에게 힘겹게
답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목소리에도 민우는 내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고는 나의 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에 내 초라한 손에는
민우의 가벼운 숨결이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숨결이 느
껴질 때마다 내 손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보같이도 자동으로 움찔- 움찔- 반응했다.
“ 미... 민우야... ”
난 억지로 민우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나의 그런 행동에 민우는 화가 난 듯 더욱
손에 힘을 주고 잡고는 억지스럽게 나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민우는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동안 유심히 나의 손을 들여다보더니, 내게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 모습에 놀라 얼른 자
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날 끌어 앉히고는 다른
손으로는 나의 볼품없이 초라한 어깨를 꾹- 잡아 쥐었다. 그 손길에 움찔-하며 몸을 빼내
려 했지만, 역시 내 힘으로는 무리였다.
“ 자세히 보니... 다르구나. ”
“ ................... ”
민우에게 손목에 어깨를 잡힌 채 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나의 눈을 들여다보
던 민우가 말했다. 민우가 입을 떼는 순간 느껴지는 숨결에서 나는 연한 담배 향기와 민우
특유의 향기.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08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08
“ 혜성아. 너 OMR카드 작성해본 적 있니??? ”
무슨 세살짜리 애도 아니고 선우 란과 문정혁에게 잘 부탁한다는 우스운 주문을 한 담임이
빠져나가자 교실 저쪽에서 선우 란이 다가와서는 내 책상에 팔을 짚고는 신혜성에게 물었
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란...
“ 오해말?.... "
순간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거... 바보야???
“ 그럼 우선 OMR카드 몇 개 받아다가 연습 좀 해야겠다.
다음 번 모의고사 전에도 모의고사 OMR카드로 연습하고...
그럼 난 선생님한테 중간고사 OMR카드 받아올 테니까,
정혁이 네가 혜성이 좀 아지트에 데리고 가라. ”
“ 그래. 아... 안된다. 나 오늘 선도부장 선생님한테 가야해. ”
“ 오늘 네 차례야?... ”
“ 응. 야. 이민우. 네가 좀 데려다 줘라. ”
문정혁의 말에 셋이 동시에 날 돌아본다. 그 상황에서 그 둘을 상대로 거절이라는 걸 해봤
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기에 난 그대로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는 자리에서 일
어섰다. 하지만 뭘 그렇게 꾸물럭대는지 도통 교실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았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나지만, 동생이니까... 신유성의 동생이니까...
그리고.. 잘 부탁한댔으니까...
“ 아. 미안... 가방 챙기느라... ”
교실에서 겨우 그걸 걸었다고 하얗다못해 핏줄이라도 비칠 듯 투명한 얼굴을 잔뜩 붉히고
는 날 바라보며 말하는 녀석의 모습이 한심해 몸을 돌려 아지트를 향했다. 정규수업이 끝
난 복도는 난장판이었다. 그 소란에 머리가 지끈거려 소리라도 지르려고 뒤를 도는 찰나
어리버리- 좌우를 돌아보며 정신 못 차리고 있는 한심한 녀석이 보였고, 그 녀석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또 한 녀석도 보였다.
- 혜성인 몸이 너무 약해서 누군가랑 부딪히기만 해도 사흘은 못 일어나...
“ 씹. 젠장- ”
달리는 게 제일 싫다.
이 볼 것 없는 세상.
뭐가 그리 급해 달리고 소리치고 서두르는지.
하지만 지금은-
“ 어어어- ”
- 퍽!!!
세이프.
내 위에는 작고 가벼운 녀석이 올려져 있었지만, 워낙 부실한 녀석이다 보니 잠시 움직임
없이 멈춰져 있는 녀석을 보니 또 어디 한군데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곧 오뚜기
처럼 발딱 일어선다.
그럼 그렇지... 그러더니 다시 휘청-.
아무튼 어디 한군데 나사가 빠진 녀석이라니까.
그 모자란 모습에 손을 뻗어 잡은 것은 이제껏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가느다란 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한 그 팔에 새삼 유성이의 말이 실감났다.
- 혜성인 몸이 너무 약해서 누군가랑 부딪히기만 해도 사흘은 못 일어나...
씹... 근데 어떤 새끼가 날 복도에서 열나 뛰다 못해 바닥에 슬라이딩을 하게 해???!!!
주변을 둘러보고는 포착되는 벌벌 떨고 있던 범인 녀석을 검거해 숨도 못 쉬게 옭아매고는
경고해주었다.
“ 한번만 더 복도에서 뛰어다니다가 잡히면 죽는다. ”
경고해주고는 돌아서 아지트로 걸어가려다 돌아보니.
젠장...
그나저나 저 어리버리- 는 또 애들 가운데서 헤맨다.
“ 안가? ”
“ 아... 가. 가... ”
아지트에 도착해서는 습관처럼 중앙 테이블에 가방을 던져 놓고는 소파로 가서는 털썩-
앉아 또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콜록- 콜록- ”
저 낯선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난 신유성과 함께 있다고 착각했다.
“ 콜록- 콜록- 콜록- ”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얼른 한 번 더 빨고는 아직도 길게 남은 장초를 짓이겨 끄고는 창밖
으로 휙- 던져버렸다.
“ 어리버리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하군...
너 정말 신유성 동생 맞냐??? ”
“ 콜록- 콜록- 켁켁... ”
유성이는 나와 함께가 아니면 평소에는 담배를 피지도 않았지만, 내 담배 연기에 이렇게
콜록-대지는 않았으니까. 똑같은 얼굴을 하고는 다른 행동을 한다.
게다가 아직도 한심하게 문 앞에 구겨져 앉아있는 모습이란...
“ 거기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문에 밀려 고꾸라진다. ”
“ 어? 어... ”
나의 말에 뜨거운 부뚜막에 올라간 고양이마냥 화들짝 놀라 발딱- 일어선다.
그러고는 또 어리버리-.
“ 바보같이 뭘 또 그러고 서있냐? ”
- 툭툭-
아지트에 들여놓은 내 전용 침대.
하지만 저 녀석을 소파가 아닌 딱딱한 의자에 앉히면 왠지 또 아까처럼 휘청- 할 것 같아
내가 아끼는 소파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녀석은 정자세로 앉아서는 처음 데이트하는 계집
애마냥 가만히 무릎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두 손만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까지 그럴지 궁금해진 나는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가느다란 갈색머리.
흩어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이마.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
동그란 콧날.
빨갛고 말랑해 보이는 입술.
“ 하아- 너 정말 신유성 동생 맞냐? ”
나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돌린 얼굴은 분명 신유성이다.
하지만... 부드럽고도 유연하게 고개를 돌리는 동작은 유성이가 아니다.
유성이이자 유성이가 아닌 녀석.
지금 내게 신혜성이란 존재.
“ 아... 동생은 맞는데... ”
“ 푸훗... 생긴 건 지독하게 닮았다. 근데... 네가 좀더 작고 말랐나? ”
유성이의 형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리버리-한 말투로 대답하는 녀석이 우스워 그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유성이보다 두 치수는 작아 보이는 모습. 한손에
잡히고도 남는 손목. 아까 잡혔던 팔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느다란 손목. 유성이 녀
석과 비교하기는커녕 란이 보다도 가느다란 거 같다. 그런 생각에 잡고 있는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딴에는 힘을 준다고 줘서는 손목을 빼내려는 듯 손을 비틀었다.
“ 왜? ”
“ 저기... 놔줘... ”
그 모습에 무슨 의도인지 뻔히 알았지만 왠지 심술이 나서는 물었다. 그러자 당황한 표정
으로 팔을 빼기 위해 그 조그만 몸까지 비틀면서 말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하얗다
못해 파리하게 보이는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는 그 작고 빨간 입술을 앙- 다물고는 하는
말. 그래서 핏줄이 다 드러나는 그 하얗고 조그만 손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 저기... 놔 줘... ”
“ 왜? ”
“ .... 네가 잡고 있으니까... 더 볼품없어 보이잖아... ”
녀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서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는 웅얼대는 목소리가 아기 같았다. 그런 모습에 더 오기가 나서-.
“ 뭐가? ”
“ 내... 손... ”
이제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신경 안 쓰고 손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 미... 민우야... ”
“ 자세히 보니... 다르구나. ”
“ ................... ”
그 투명하고 작은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말하자 화륵- 더욱 붉어진 귀여운 얼굴.
유성이보다 멋진 눈.
유성이보다 작은 코.
유성이보다 말랑해 보이는 입술.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09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09
- 달칵
“ 혜성아~ OMR카드 가져왔어~ ”
짧으면서도 엄청나게 긴 그 긴장된 순간에 문이 열리며 란이가 큰 소리로 말하며 들어왔
다. 란이의 등장에 난 화들짝 놀라 민우에게서 떨어져 나오려 했지만 민우는 움직임 없이
나의 손목을 잡은 채로 시선만 돌려 란이를 돌아봤다.
“ 뭐야??? 너. ”
“ 란이야... ”
“ 너. 혜성이 못살게 굴고 있는 거야???!!!! ”
“ 풋- ”
란이의 말에 민우는 피식- 웃고는 나의 손을 놓고는 일어섰다. 그런 민우의 행동에 그 고
운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는 내게 다가와 털썩- 나의 곁에 앉은 란이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
며 민우를 향해 팩- 소리가 나게 얼굴을 돌리고는 소리쳤다.
“ 야! 이민우. 너 여기서 담배피지 말라고 했지??!!!! ”
란이의 무서운 목소리에도 민우는 무섭지도 않은지 눈 깜박하지 않고 책장을 향해 걸어가
서는 책을 뒤적거렸다.
“ 으휴... 내가 포기해야지... 너한테 이런 말이 통할 리가 있나...
혜성아. 우리 OMR카드 연습이나 하자. ”
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에 여러 가지 사이즈의 종
이를 오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나 역시 란이를 따라가 란이의 옆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 이런 거 본적 있어? ”
란이의 말에 약간 노란색이 돌고 빳빳한 작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처음 보는 종이여서 란이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 흠... 역시... 그럼 이 문제 대충 풀고 그 번호를 여기에 옮겨 적는 거야.
꼭 이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칠해야해.
다른 칸에 칠해지면 오류가 나니까, 조심해야하고...
혹시 틀리면 수정용 스티커로 수정하거나 많이 틀리면 교환하면 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안 그러는 게 좋으니까, 연습해보자.
우선 이름이랑 학년, 반, 번호부터 쓰고... ”
란이의 말에 가방에서 펜을 꺼내 이름과 학년, 반, 번호를 또박또박 쓰고는 란이가 건네준
컴퓨터용 싸인펜을 들어 숫자가 쓰인 작은 원안에 검은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하면 돼? ”
“ 응. 잘했어. ”
원안에 검은 칠을 마친 내가 고개를 돌려 란이에게 묻자, 란이는 웃으며 그 고운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주었다.
“ 근데 연습 좀 많이 해야겠다.
그렇게 천천히 색칠하다가는 수학 시간에는 문제 풀 시간 모자라겠다...
그나저나 혜성이 너 글씨 정말 귀엽다... 유성이랑은 다르네?... ”
“ 형?... ”
“ 응. 유성이 글씨는 어른 글씨 같잖아...
혜성이 네 글씨는 유성이보다는 민우 글씨랑 비슷하다.
그치? 민우야? ”
란이가 말하며 민우를 돌아봤지만, 이미 민우는 소파에 누워 얼굴 위에 책을 덮고는 잠들
어있었다.
“ 암튼... 학교가 무슨 여관인줄 안다니까... ”
그런 민우의 모습에 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럼 문제 풀고, 여기에 마킹 해.’
라고 말하고는 맞은 편 의자에 가서 앉아서는 책을 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란이를
돌아보고 소파에 누워있는 민우를 한번 돌아보고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문제는 간단한 수학 문제였다. 별 어려움 없이 스무 문제 남짓한 수학 문제를 풀고는 란이
가 알려 준대로 조심스럽게 마킹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꽤나 고전했지만 학년, 반, 번호를
연습한 이후여서인지 10번이 넘어가서는 그런대로 순조롭게 마킹을 마치고는 고개를 들어
란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란이는 이미 공부에 푹- 빠져서는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했다. 그런 란이에게 시선을 떼고는 민우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민우의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은 민우의 움직임에 이미 소파 위로 떨어져있었고,
살짝 이쪽으로 돌아간 얼굴은 민우의 회색 머리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멋진 턱 선과 높
은 코. 잡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와 약간 벌어진 붉은 입술이 너무 멋졌다.
감긴 저 깊은 눈이 떠져 날 바라본다면
난 아마 심장이 멈출지 몰라.
나와는 다른 모습.
형과는 다른 모습.
많이 특별해.
- 달칵
“ 연습은 다 했냐??? ”
문이 열리며 시원스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목소리에 왠지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 곳에는 정혁이가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는
들어섰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민우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테이블 위로 가방을 던지고는 한
손으로 의자를 꺼내 털썩 앉아 그 긴 다리를 척- 하니 테이블에 올렸다.
“ 야. 문정혁. 그따위 짓 하지 말랬지??? ”
“ 뭐. 어때. 밥 먹을 때는 또 벅벅- 닦아 댈 거면서... ”
“ 넌 다 맘에 안 드는 데 빵점짜리 위생관념이 젤 맘에 안 들어!!! ”
“ 나도 너 별로야. ”
- 퍽!!!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정혁을 책망하던 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책으로
정혁이의 다리를 아프게 때리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다 했어? ”
“ 어? 응... ”
“ 잘했어. 음... 40분이라? 빨리 풀었네? ”
“ 아... 나 수학 좋아하거든... ”
“ 아. 그렇구나. 그럼 우선 네가 쓴 거랑 카드랑 맞는지 볼까? ”
다했다는 말에 다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는 시험지와 카드의
번호를 하나하나 체크하는 란이를 보고는 눈을 살짝 돌려 민우의 쪽을 바라봤다. 민우는
그새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지 얼굴에는 책을 이마에는 한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반쯤 걷어 올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희고 단단한 팔뚝에는 잘 단련된 근육의 선이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와~ 역시 혜성이 학습능력 짱.이구나.
하나도 안 틀리고 차분하게 다했네?...
OMR카드는 이제 연습 안 해도 되겠다. ”
“ 헤헤- 다행이다... ”
날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란이의 행동에 난 진심으로 기뻐했다.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0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10
- 달칵
“ 혜성아~ OMR카드 가져왔어~
뭐야??? 너!!! ”
“ 란이야... ”
“ 너. 혜성이 못살게 굴고 있는 거야???!!!! ”
“ 풋- ”
평소와 같은 란이 녀석의 요란스런 등장에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란이의 이름을 부르
는 녀석을 본 선우 란의 엉뚱한 발언을 비웃어주고는 책장으로 걸어가자 소파에 털썩- 앉
은 란이 녀석은 또 소리쳤다.
“ 야! 이민우. 너 여기서 담배피지 말라고 했지??!!!!
으휴... 내가 포기해야지... 너한테 이런 말이 통할 리가 있나...
혜성아. 우리 OMR카드 연습이나 하자.
이런 거 본적 있어?... ”
-도리도리
“ 흠... 역시... 그럼 이 문제 대충 풀고 그 번호를 여기에 옮겨 적는 거야.
꼭 이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칠해야해.
다른 칸에 칠해지면 오류가 나니까, 조심해야하고...
혹시 틀리면 수정용 스티커로 수정하거나 많이 틀리면 교환하면 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안 그러는 게 좋으니까, 연습해보자.
우선 이름이랑 학년, 반, 번호부터 쓰고... ”
“ 이렇게 하면 돼? ”
“ 응. 근데 연습 좀 많이 해야겠다.
그렇게 천천히 색칠하다가는 수학 시간에는 문제 풀 시간 모자라겠다...
그나저나 혜성이 너 글씨 정말 귀엽다... 유성이랑은 다르네?... ”
“ 형?... ”
“ 응. 유성이 글씨는 어른 글씨 같잖아...
혜성이 네 글씨는 유성이보다는 민우 글씨랑 비슷하다.
그치? 민우야?
암튼... 학교가 무슨 여관인줄 안다니까...
그럼 문제 풀고, 여기에 마킹해. ”
무슨 중학교를 갓 입학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엄마라도 되듯이 하나하나 차분히 가르치는
란이 녀석이나 그런 란이 녀석의 가르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힘을 꽉- 준채로 입을 앙
- 다물고 심각한 표정을 한 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배우는 녀석이나 하나같이 웃음이 났
다.
순수배양 된 화초가 아니라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냐?
선우 란의 끊임없는 수다가 끊어지고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났다.
선우 란은 펜 안 쓰면서 공부하는 거 아니까, 이 소리는 신혜성이 수학 문제를 푸는 소리.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계속 사각 소리를 내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한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로 신혜성은 전혀 겁먹거나
걱정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늘 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상한 녀석이다.
수업시간에 필기를 하거나 영어 회화 시간에 외국인 선생과 대화하는 것, 미술 시간에 그
림을 그리는 건 능숙하게 하는 녀석이 책상과 굳게 맞물린 교실의 의자를 꺼내거나 사물함
을 여는 것, 화장실의 소변기를 사용하는 것에는 당황하며 어물거리는 것이.
더 이상한 건 그런 녀석을 대하는 다른 녀석들의 태도.
마치 금방이라도 별나라에서 톡- 떨어진 요정마냥 고운 표정으로 울먹거리며 당황할 때면
푹-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저절로 손을 뻗어 도와주게 된다.
할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식당에서 급식 받는 법도 몰랐으니까.
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녀석이 수학문제는 풀 줄 아는 걸까?
살짝 얼굴 위에 올려놓은 책을 치우고는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연신 손을 놀리며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
선우 란과 마찬가지로 옆모습이 보이고 있어 둘의 모습은 비교가 됐다.
여자인 란이 녀석과 별 차이 없이 고운 선을 가진 녀석.
아까도 보았던 동그란 이마.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하는 긴 속눈썹.
그 아래로 깊게 드리워진 그늘.
동그란 콧날.
붉은 입술.
첫댓글 세쌍둥이서 혼자 남은 불쌍한혜성이, 세사람 몴을 혼자 살아나가야하는데.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그래도 유성이 만들어준 친구들의 틀이 있어 다행이네요. 대단한 형의 사랑. 감동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