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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한민족의 시원지로서 시베리아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일대가 부각되고 있다. 고고학을 비롯해서 문화인류학, 유전학, 신화학 등에서 이와 관련된 논문이 발표되고 있는데, 일찍이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바이칼 호수를 포함한 만주와 백두산 일대를 한민족 문화의 발상지로 주목하면서, 백두산의 옛 이름인 불함산(不咸山)을 따라 ‘불함 문화권’이라 표현한 바 있다.
바이칼호는 러시아의 동시베리아 남부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지리적으로는 북위 51。28、∼55。47、, 동경 103。43、∼109。58、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유라시아대륙 최대의 담수호(淡水湖)이며, 호수 안에 있는 18개 섬 중의 하나인 알혼섬 주변의 수심이 무려 1,700여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기도 하다.
바이칼은 ‘샤먼의 호수’를 의미해
바이칼이라는 지명은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주로 사용되던 ‘바이’와 ‘칼’의 합성어다. ‘바이’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당을 가리키며, ‘칼’은 골, 괼, 곌 등으로 불리는 넓은 계곡과 호수를 의미해, 결국 바이칼은 ‘샤먼의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솟대 신앙과 성황당 등 바이칼 지역의 샤머니즘 양상은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우리의 민속신앙과도 흡사한 점이 많다(정재승이 엮은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참고).
샤머니즘(shamanism)은 신 또는 정령(精靈)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신의(神意)의 전달과 예언, 병 치료 등과 같은 각종 의례를 행하는 원시종교 형태를 말한다. 샤머니즘은 주로 시베리아 일대에서 발견되는데, 우리 한민족의 기층문화와 정신세계에도 중요한 한 원형을 이루고 있다.
바이칼호 주변은 산악지역으로 해발 1,500~2,000m대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자작나무와 버드나무 등으로 울창한 산림지대를 이루고 있다. 지난 호에 소개한 ‘부르한’은 붉은 버드나무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자연조건과 관련해서, 바이칼호 주변에 부여와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에 나타나는 인물, 설정 등과 유사한 내용의 각종 설화와 민담들이 전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책에 실린 주재혁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몽골에서 바이칼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길고 큰 강인 셀렝게 강변에는 버드나무가 아주 많고, 바이칼호 동쪽에는 아예 ‘붉은 버드나무 산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머어마하게 길고 큰 산맥이 있어 그 속에 부르한 산을 비롯한 몽골 시조 전설과 관련된 유적들이 있다. 몽골에는 버드나무가 자작나무와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진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우리 성황당과 비견되는 ‘오보’도 숲지대에서는 ‘버드나무 오보’라고 부른다. 만주지역의 보드마마 신앙도 버드나무와 관련되고,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도 버들꽃이라는 이름을 가져 버드나무와 관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백(河伯) 곧 용왕의 딸로 용솟음치는 샘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후략’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생 인류가 2만5천 년부터 4만5천 년 전 사이에 이미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호 주변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의 각종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는 타림분지나 중국 대륙보다 훨씬 앞선 시기다.
바이칼호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은 그 후 무슨 이유에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각지로 이동해나간 것일까. 이에 대해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에 수록된 몇몇 논문에서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가설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빙하기의 오아시스’ 바이칼호
바이칼호는 위도 상으로 북위 51도 이상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빙하기와 같은 혹독한 기후조건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그 동안의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바이칼호 일대는 오히려 사람이 모여 살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호수 깊은 곳에서 다량의 온천수가 용출되고 있어서, 호수 주변은 사람의 거주와 활동에 유리한 기후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빙하 사이에 위치한 오아시스와 같은 형국이었다.
위도 상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고 기후조건이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앙아시아나 타림분지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 앞선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이 이곳 바이칼호 주변에서 발굴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해빙기가 되면서 뜨거운 열수(熱水)가 치솟던 바이칼호 일대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바이칼호 수면이 높아지고 주변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게 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바이칼호와 알타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여러 갈래로 이동하기 시작해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견해다.
이 같은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선조가 1만4천여 년 전에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했고, 북부 중국에 사람이 정착한 것이 1만1천여 년 전이라는 연구 결과를 전제로 할 때,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1만5천 년 전에 끝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앞의 책에 수록된 몇몇 논문에서는 한민족 형성과정과 그 이동경로에 대해 대체로 만주 북부의 흥안령을 거쳐 한반도에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이칼 호수 일대에 살던 일단의 무리가 동쪽 경로(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갔던 길일 수 있는)에서 벗어나 동남향으로 진로를 바꾸어 흥안령산맥 일대에 거주했고, 다시 일부가 한반도로 유입되어 오늘날의 한민족을 이룬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고원의 ‘문화적 수수께끼’
싱안링 산맥(興安嶺山脈·흥안령산맥)은 몽골고원과 중국 동북 평원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다. 중국 최북단의 헤이룽강(黑龍江) 남쪽 연안에서 헤이룽장성의 서부,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내몽고 자치구)에 걸쳐 있는데, 서쪽에는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동쪽에는 샤오싱안링 산맥(小興安嶺山脈)이 자리잡고 있다.
앞의 가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뢰감을 주는 견해다. 하지만 티베트고원 일대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수수께끼’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티베트고원 일대의 일부 부족은 우리 전통문화와 흡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바이칼호 주변에 살던 일단의 무리가 흥안령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다는 앞의 가설은, 이 같은 문화현상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흥안령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집단이 우리 조상의 일부를 이루었을 수는 있지만, 오늘날 한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이룩한 ‘문화적 주류(主流) 집단’이라 볼 수는 없다.
주간조선 2002년 11월28일자(1730호)에는 ‘또 다른 한국, 부탄’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티베트, 네팔과 인접하고 있는 부탄 왕국의 언어와 풍습 등이 전래되어오는 우리 전통문화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부탄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한국어 강사 등은 우리나라 말과 부탄의 공식 언어인 종카어(Dzongkha) 사이에 흡사한 점이 많다고 밝히고 있다. 아빠와 엄마를 각각 ‘아빠’(Apa)와 ‘아마’(Ama)로 부르는 것을 비롯해서, 발음과 문장 구조, 경어법 사용 등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부탄 사람들은 활쏘기를 즐기며,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인 구슬차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자치기 등이 지금도 이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부탄과 인접한 네팔과 티베트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음악과 탈춤 등이 우리 전통문화와 흡사한 점이 많은데, 특히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연희되던 북청사자놀음(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과 가락, 가면 모양, 춤사위 등이 상당히 유사한 놀이가 티베트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북부에 위치한 라오스와 태국 북부 등지에서도 이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태국 북부에 위치한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지역은 이른바 ‘황금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고산지대다. 해발 2,000m가 넘는 산악지역에는 10여 개의 부족이 살고 있는데, 이 중에서 라후족, 리수족, 아카족의 생활 풍속이 우리 전래문화와 흡사한 점이 많다.
특히 라후족의 경우 설날이 되면 색동옷을 입고 인절미를 만들어 먹는다. 이 같은 명절 풍습 외에도 채소를 소금에 절인 후 발효시킨 김치와 콩을 삶아 메주로 만들어 된장을 해먹는 등 기초적인 식생활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라후족은 김치를 ‘왓치’라고 부른다).
또한 라후족의 아이들은 공기놀이, 자치기, 널뛰기, 팔방놀이 등의 놀이를 즐긴다. 심지어 솟대와 소도 등이 아직 남아 있고, 무당이 쌀을 흩뿌리면서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전통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김병호의 <치앙마이> 참고).
티베트 고원과 인도차이나 반도는 물리적으로 우리 한반도와는 수천km 떨어져 있다. 먼 거리를 사이에 둔, 두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문화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단순한 우연의 일치, 혹은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의미 없는 문화적 유사 현상에 불과하다는 식의 부정적인 견해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예를 든 색동옷 등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한민족의 주요 이동경로일 수 있어
오늘날 우리는 이 같은 ‘문화적 수수께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곤륜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에 이른다는 <택리지>의 기록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연재 ‘곤륜산을 다시 생각한다’를 통해서, 곤륜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 첫 회에서는 ‘상상의 산’으로 인식되어온 <산해경> 속의 곤륜산이 지금의 곤륜산맥 일대를 가르키는, 실재하는 산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2회에서는 한반도에 널리 퍼져있는 상여소리 등의 전통 제례요(祭禮謠)에 담긴 곤륜산의 의미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기록된 곤륜산 관련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난 호에서는 <택리지>의 곤륜산 관련기록이 단순히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 당시의 지리 지식체계에 의해 쓰여진 지리적 사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한민족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바이칼호와 관련된 학계의 연구결과와 부탄, 태국 북부 등 티베트 고원 주변에서 발견되는 우리 전통문화와 유사한 문화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앞에서 설명한 여러 사항을 전제로 하여, 필자의 가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빙하기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일단의 몽골로이드가 살고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 해빙이 되면서 바이칼호 주변의 저지대가 호수로 변하자, 그들은 남하하기 시작해 방대한 지역인 곤륜산의 동쪽에 이르렀다. 이곳에 정착한 그들은 수천 년 동안 한족(漢族) 못지않은 높은 문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이들 중의 일부가 남하해서 히말라야 산맥 일대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부탄, 티베트 등을 이루었다.
한편 다른 일부는 <택리지>에 기록된 대로 동진해서 고비사막 남쪽을 거쳐 지금의 랴오닝(遼寧·요녕), 지린(吉林·길림), 헤이룽장(黑龍江·흑룡강) 등 중국 동북3성이 있는 만주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이들 중의 일부가 다시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와 오늘날의 한민족 주류 문화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록된, 곤륜산에서부터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우리 한민족의 이동 경로와 문화 전달 경로일 수 있는 것이다.
산맥은 고대인에게 생명줄과 같아
산은 우리 인간이 생존하기에 가장 좋은 자연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다. 산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 사냥감, 땔감 등이 풍부하며, 계절에 따라 각종 임산물을 손쉽게 채취할 수도 있다. 또한 숲으로 이루어진 산은 안정된 기후조건을 갖고 있다. 기온이 온화한 편에 속하며 바람과 비와 같은 직접적인 자연재해로부터 일시적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중국 북부와 몽골 남부지역은 대체로 황량한 초원과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같은 척박한 풍토를 감안한다면, 곤륜산에서 시작되어 고비사막 남쪽과 만주 흥안령을 거쳐 백두산에 이르는 산줄기는, 이동을 필요로 하는 고대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산과 산이 이어진 산맥은 한 집단이 장기간 이동하기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형지물 파악이 용이해서 길을 잃지 않고 이동경로를 확보,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줄기가 끊어졌다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일 수 있다. 일정한 지역의 장기간 거주는 곧 자연자원의 고갈을 의미하며 이로 인한 생존조건의 위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맥은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생명줄과 같은 중요한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우리 한민족은 옛부터 산과 산이 이어진 산맥에 대해 강한 지적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산(또는 산맥)에 대한 중요성과 경외심이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 숭배신앙으로 발전하였고, 산맥에 대한 지적 탐구심이 오늘날과 같은 풍수지리설이라는 지리 지식체계를 확립케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산맥이 고대인에게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는, 유전자 조사를 통해 바이칼호의 투바족이 아메리카 인디언 조상이라 밝힌 러시아 바빌로프 유전학 연구소의 일리아 자하로프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고고학적 혹은 역사적인 자료들도 원시 아메리카 인디언이 베링기아를 향하여 이동할 때 어떤 경로룰 택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과 사냥꾼들은 고향 땅을 마지못해 떠나서 산줄기를 따라 이동했다…중략…남쪽의 알타이 지역에서 북동쪽의 츄코트카 지역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활 모양의 산맥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것들은 사얀 산맥, 호마르다반 산맥, 야블로노이 산맥 등이며, 바이칼 호수의 동부 해안을 따라 나있는 산맥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중략…이들은 알래스카로 향하는 자연적인 통로가 된다. 그런 다음 아메리카의 서부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로키 산맥이 나오게 된다.’
산은 공동체의 개별성을 구획짓는 지표
앞의 일리아 자하로프의 글에서는 바이칼호 주변에 살던 원시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얀산맥 등을 따라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산맥을 따라 대륙 내부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산맥을 주된 이동 경로로 삼았으며, 우리 한민족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산(또는 산맥)이 갖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백두산의 줄기는 유주(幽州)·영주(營州)·병주(幷州)의 3개 주 밖에서 왔고, 선비산(鮮卑山)은 그 너머에 있다. 오호시대(五胡時代)에는 선비족이 제일 강했는데, 산 이름을 따라 그 종족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중략…백두산 내외에 있는 종족을 모두 숙신(肅愼)이라 하였으며, 그 서남쪽의 줄기는 조선에 이른다. 그 영역이 처음에는 요동 전역에 걸쳤으며, 요동의 땅은 모두 선비산의 지맥이다. 조(朝)는 ‘아침에 해가 떠오른다’의 아침으로, 곧 동쪽을 뜻한다. 천하에서 동쪽의 끝은 조선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선비족은 산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숙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그 주변의 종족을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연재 첫 회에서 설명한 <산해경> 속에 나타나는 ‘곤륜산의 서왕모’와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대인들은 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산은 각 공동체 간의 개별성을 구획하는 중요한 지표로서 오랫 동안 인식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있는 진산(鎭山) 개념의 설정도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산은 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에 그들은 산과 강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지리지식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이 같은 배경 속에서 풍수지리설 등의 지리 지식체계가 확립, 발전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풍수지리설 연구해야
앞에서 필자는 곤륜산 일대에 문화공동체를 이루던(우리 전통문화와 동질성을 가진) 무리 중의 일부가 티베트, 부탄 등의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치앙마이>의 저자는 라후족 족장으로부터 전해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족장 짜가한테 남아 있는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자기네 조상들은 약 150년 전에(그러니까 중국의 청나라 말엽) 한족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이곳까지 도망쳐왔다는 것, 그리고 아주 먼 조상들은 눈(雪)이 오는 나라에서 살았는데 당시 무슨 일로 해서 남부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인용문에 따르면, 태국 북부의 라후족이 ‘눈이 오는’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치앙마이>의 저자는 라후족이 1,300여 년 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패했을 당시 당나라에 잡혀간 고구려인의 후손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견해는 논리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적석묘 등 분묘의 형태, 고분 벽화의 복식(服飾)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문화와 오늘날 한반도에 전래되고 있는 전통적인 주류 문화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곤륜산 일대에 살던, 우리와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많은 부족의 하나가 정치적, 경제적 요인 등에 의해 태국 북부지방으로 이주해 간 것으로 풀이하는 게 합당한 일이다. 이는 또한 곤륜산 일대에 살았던 한민족의 조상이 <택리지>에 기록된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한 예가 되기도 한다.이 연재를 통해 살핀 바와 같이, 곤륜산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의 형성과정과 이동경로를 비롯해서, 산악 숭배신앙, 풍수지리설, 전통 제례요와 무가(巫歌) 등 우리 민족 고유의 기층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곤륜산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매우 미진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곤륜산을 상상의 산으로 보는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풍수지리설이 주술적인 음택(陰宅) 중심으로 논의, 활용되어온 점도 부정적인 요인으로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을 기존의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 전개와 함께 성립, 발전해온 ‘역사성을 가진 지리 지식체계’로 이해하고 연구한다면,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적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곤륜산을 한반도의 근원으로 보는 관점이 우리 한민족의 세계관과 자연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에 대한 문화인류학과 민속학적 연구도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연재 끝>
/박용수 소설가·한국산서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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