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시리즈1) 야고보서 3:1~12 /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갔습니다. 한참 걷다 좀 피곤해진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영감, 나 좀 업어 줄 수 없어?” 할아버지는 업어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나중에 잔소리 들을 것이 귀찮아서 할머니를 업어 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가 좀 미안해하면서 물었습니다.
“나, 무겁지?” 그러자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그럼, 무겁지!” 할머니가 되물었습니다. “왜?”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줘.”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업었습니다.
잠시 후 미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나, 무겁지?”하면 자기가 한 말을 따라 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세 가지가 바로 쏜 화살, 잃어버린 기회, 내뱉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쏜 화살은 멈출 수 없습니다. 이미 놓친 기회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한 말은 결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높여서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누가 진짜 선생이 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혀를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은 누구도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한 책임지지 않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실수로라도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말을 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기자가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혀를 잘 다스려서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여기서 선생은 가르치는 자라는 뜻으로 랍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랍비는 존경받는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랍비는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랍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그 주님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랍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랍비와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이나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선생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로부터 거기 걸맞는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배우려고는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했으니 교회가 어지럽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 생겼습니다.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거룩해야 할 교회 안에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도 높아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배우기보다는 가르치려고 들 때가 더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선생이 되고 지도자가 될 것 같으면 그 책임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그 대답을 본문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야고보는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생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생이 된다는 것은 가르침을 통해서 교회와 사람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생이란 교회에 꼭 필요한 직분이요 매우 중요한 직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책임도 큽니다. 그리고 책임이 크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선생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종이 많은 교회입니다.
지배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겸손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진짜로 좋은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을 것 같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3:2).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 말의 뜻은 성숙하고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때 의사들이 종종 입을 벌려 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입 안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말로 실수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선생 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원망이나 불평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보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시인인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는 “목자의 고백”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불평하고 있는 동안 난 아직 땅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있는 동안 난 이미 하늘에 삽니다.
방황하고 있는 동안 난 아직 땅에 살고 있습니다.
경배하고 있는 동안 난 이미 하늘에 삽니다.
근심하고 있는 동안 난 아직 땅에 살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있는 동안 나 이미 하늘에 삽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과 땅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혀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비록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을지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실수하고, 허물이 있고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결단코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칭찬하고 위로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용기와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혀로 주님만 찬양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늘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고 또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