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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리 [Vivien Leigh ]
생년월일 : 1913. 11. 5 ~ 1967. 7. 7
출신지 : 인도
신 장 : 161cm
학 력 : 런던 왕립 연극학교
비비안 리는 1913년 11월 5일, 인도에서 프랑스계 영국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상류층의 교육을 받았으며, 연예인이 되기위해 바이얼린,피아노,첼로,발레등을 배우기도했다.
19세가 되던해 12세 연상의 허버트 리 홀만이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 스무살의 이른 나이에 첫딸를 낳은 그녀는
현모양처로서의 위치보다 영화배우로서 명예를 더 꿈꾸게 된다. 밤이면 런던의 극장가를 배회하거나 사진모델또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의 꿈을 키워나가게 된다.
그녀의 우상은 귀족스러운 품격의 로렌스 올리비에였다. 그에 대한 흠모로 눈이 멀어버린 유부녀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를 유혹하기 위해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한다.
당시 유명한 여배우였던 질 에이몬드의 남편인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정열적인 여인 비비안 리와
사보이 그릴이라는 곳에서 첫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이미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없이 성공한 28세의 미남 배우
로렌스는 풋내기 비비안에게 눈길을 주게된다. 곧이어 둘은 런던 필름에서 제작한 <무적함대 Fire Over England>(37)에서
같이 공연하게 된다.
이어 <폭풍의 언덕>을 촬영하던 로렌스를 따라 할리우드까지 쫒아간 비비안은 타국에서의 분방함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깊은 사랑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비비안 리의 인생이 180도 전환하게 되는 중요한 한 곳을 방문하게 되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촬영지인
아틀란타였다. 아직 영화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 역을 캐스팅하지 못했던 제작자의 동생이 그녀의 불타는
눈동자를 우연히 보게된 것이다.
"스칼렛 오하라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형님." .... 이미 원작을 읽고 그 역을 탐내었던 비비안은 이후 결국 그 꿈을
이뤘으며 이 작품으로 첫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그 여세를 몰아 <애수>등에 출연하며 사랑과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랄까? 그녀의 불행은 건강의 악화와 함께 서서히 찾아온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촬영과 이후 무리한 군인 위문공연 등으로 폐결핵을 앓게되고,
설상가상으로 로렌스의 아이마저 유산하게되는 슬픈일을 당한다. 치명적인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로렌스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해 <안나 카레리나>에 출연하지만, 평소즐기던 줄담배와 무리한 촬영으로 다시 폐결핵이 재발된다.
하지만 집요한 성격의, 비비안 리는 그 몸에도<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재기에 성공하고 두 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다시 행운을 거머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내의 병치레와 간호에 이미 지쳐버린 로렌스는 30세나 연하인 새로운 연인을 사귀고 있었고,
공식적으로 비비안에게 이혼을 요구해왔고.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를 잃은 그녀는 1967년 7월 7일 폐결핵과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고독으로 세월을 보내다 화려했던 짧은 애욕과 영욕의 삶을 마감하게된다.
비비안 리는 1913년 11월 5일, 인도의 다즐링에서 프랑스계 영국인 아버지 어니스트 리차드 하틀레이와 아일랜드계 영국인 어머니 거틀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비비안 메어리 하틀레이.런던 증권가의 부호였던 아버지 덕분으로 그녀는 일곱 살에 로햄프턴의 성심수녀원 기숙학교에 입학해 상류층 자녀들만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받았고, 1927년 만 13세가 되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넉넉한 가정환경 덕분에 산레모, 디나르드 등을 여행하며 외국어를 배우는 4년간의 유럽 순회교육 기회를 얻었으며, 런던 왕립학교를 다니던중(18세) 31세의 허버트 리 홀만을 만나 첫 사랑에 빠진다. 둘은 비비안이 19세가 되던 1932년 12월 20일 결혼식을 한다. 그러나 원숙한 남편의 사랑과 임신의 불안은 어린 신부가 감내하기엔 벅찬 감정이었다. 스무살의 나이에 첫딸 수잔을 낳은 비비안은 엄마로서의 위치보다 배우로서의 명예를 탐내게 된다. 밤마다 런던의 극장가를 떠돌던 비비안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진모델을 하게 되고, 곧이어 등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당시 배우를 꿈꾸던 그녀의 우상은 귀족스러운 품격의 로렌스 올리비에였다. 우상에 대한 열망으로 눈먼 어린 유부녀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를 유혹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한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는 사보이 그릴에서 처음 만났다. 아내이자 유명한 여배우였던 질 에이몬드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정열적인 여인 비비안 리와 인사를 나누게 된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러울 것없이 성공한 28세의 미남 배우 로렌스는 풋내기 비비안에게 주목한다. 곧이어 둘은 런던 필름에서 제작한 <무적함대 Fire Over England>(37)에서 공연하게 된다. 극중 연인으로 등장했던 둘의 사랑이 비로소 점화된 것이다. 비비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소유자이자, 내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당황스러울 정도의 매력을 가진 여배우이다. 비비안에 대한 로렌스의 첫 인상이다.
이어 <폭풍의 언덕>을 촬영하던 로렌스를 따라 할리우드까지 쫒아간 비비안은 타국에서의 분방함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사랑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비비안 리의 인생이 180도 전환하게 되는 중요한 한 곳을 방문하게 되니, 그곳이 바로 애틀랜타에 있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촬영지였다. 아직 영화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 역을 캐스팅하지 못한 채 촬영을 진행하고 있던 이 곳에서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의 동생 마이론이 비비안 리의 불타는 눈동자를 보게된 것이다. 여기 스칼렛 오하라가 있습니다. 형님. 이미 원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은 후 스칼렛 역을 탐내고 있었던 비비안은 결국 자신의 내말한 욕망을 영화 촬영현장에서 이루게 된 것이다. 비비안 리는 이 작품으로 첫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그 여세를 몰아 <애수>등에 출연하며 사랑과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
이때부터 5년간이 비비안 리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황금기였다. 당시 그녀의 친구들은 이 5년간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워보였던 시기라고 술회한다. 비비안의 불행은 건강의 악화와 함께 찾아온다.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촬영하던 1946년, 무리한 군인 위문공연과 고된 촬영으로 폐결핵을 얻게되고, 설상가상으로 로렌스의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치명적인 정신적 상처를 받았던 그녀는 로렌스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해 <안나 카레리나>에 출연하지만, 줄담배와 무리한 촬영은 폐결핵의 재발을 가져온다.
하지만 거칠고 강인했던 스칼렛 오하라, 비비안 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재기에 성공하고 두 번째 오스카를 수상한다. 비평가들은 실제의 비비안과 영화속의 블랑쉬가 동일인물 같다는 극찬을 보냈고, 비비안은 다시 행운을 거머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내의 병치레와 조울증에 지친 로렌스는 30세나 연하인 새로운 연인 조안 플로라이트를 사귀고 있었고, 공식적으로 비비안에게 이혼을 요구해왔다. 당시 비비안은 46세(59년). 로렌스 올리비에와 조안은 1961년 3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로렌스를 잃음으로해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비비안은 1967년 7월 7일 폐결핵과 견딜 수 없는 고독으로 사망했다
그후로 한달 후인 8월 15일 성 마틴 왕립교회에서 이루어진 그녀의 추도식에는 생전, 그녀가 사랑했던 세명의 남자들이 자리했다. 첫 번째 남편 리, 두 번째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 마지막 연인이었던 잭 메리벨
위대한 샛별의 초상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 가장 얄미운 여자, 가장 콧대 높은 여자, 가장 열정적인 여자, 그러면서도 가장 꿈 많은 여자의 전형을 진하게 농축시켜 놓은 '위대한 샛별' 비비안 리는 1913년 11월 5일 히말라야 산맥을 등지고 있는 인디아의 디아질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너스트는 캘커타에 본거지를 둔 금융업자였다. 그녀가 6살 되던 해 일시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하아틀리 부처는 비비안 리를 런던 교회에 위치한 로오햄프턴 성심 수도 병원 기술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 후 그녀는 13살 때까지 외로운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면, 나중에는 부모를 따라 유럽 각지를 전전하면서 고상한 숙녀 교육을 몸에 익혔다. 그러나 16살 때 연극에 미친 비비안은 혼자 파리에 정착하여 배우가 되겠다는 고집을 발동, 부모를 설득시킨 나머지 끝내는 런던의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비비안의 꿈은 '멋진 배우가 되어 멋진 사랑을 해 보는 것' 이었는데 그만 배우로 성공하기도 전에 젊은 변호사 하버드 홀맨과 눈이 맞아 19살 나이로 가정주부가 되었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주부인 것에 만족햤더라면 영화의 역사는 변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며는 결혼 후에도 연기에의 꿈을 씻지 못하여 남편을 또 설득, 연극학교에 복학하였다. 이후 수년동안 그녀는 몇편의 영화와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나 별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고, 남편 홀만과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았다. 이 무렵 비비안은 영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햄릿'의 무대에 서는 영광을 얻었다. 이 연극은 덴마크에서 상연되었는데, 날카로운 올리비에의 눈이 비비안의 천부적 소질을 인정해 준 것이 계기기 되어 그녀는 꿈에서까지 동경해 마지않던 올리비에에게 필생의 저력을 다한 사랑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올리비에가 비비안에게 종복되고 만 것은, 그녀가 그를 쫓아 미국까지 날아갔디 때문이었다. 모든 신문들은 이들의 로맨스를 대서특필하고 양쪽의 가정은 풍지박산이 났으나 미국에 건너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세기의 대역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을 따낼 수 있었고 소녀 적부터의 꿈이던 위대한 사랑(?)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비안을 첫눈에 보고 대번에 스칼렛 오하라에 적역임을 꿰뚫어 판단해 낸 셀즈닉이야말로 위대한 프로듀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느날 밤, 나는 우연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애틀랜타의 대화재 장면을 보기위해 영화 촬영소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의 촐영 장면들은 스칼렛 오하라라는 중요한 히로인을 결정짓지도 않은 채, 히로인이 필요없는 장면만을 찍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이 영화의 제작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셀즈닉씨를 처음 만났지만, 그 때만 해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에,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칼렛 오하라라는 무척 어려운 여자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이게 됐다. 수십명의 후보자들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나는 정말 내가 그 역을 무난히 해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번의 테스트로 나는 스칼렛으로 결정 되엇다. 그러나 진짜 고충은 그 후부터였다. 이 젊고 발랄한 여성은 대단한 말괄량이여서, 나의 과거의 경험만으로 그녀와 같은 행동을 취하기란 매우 얄망궂은 노릇이었다. 그래도 나는 스칼렛을 가장 가까이 느끼면 6개월동안 그녀와 똑같은 생활을 해 나갔다. 이침 일찍부터 저녁늑게까지 하나하나의 동작에서부터 순간적인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진짜 스칼렛과 같은 기분으로 변덕스럽고 비열한 행동거지등을 나의 감정속에 차곡차곡 심어넣었다. 이리하여 촬영이 끝날무렵에는 난 그녀와 같은 마음가짐과 감정에 완전히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나에게 커다란 영예와 나아가서 오스카상까지 안겨준 것이긴하나, 나로선 이런 경험을 두번 다시 하고 싶지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비비안 리를 안고 쩔쩔매던 클라크 게이블 레드 버틀러가 스칼렛을 안고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어느날 모두가 피곤한 상태에 있는 오후 늦게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몇번을 촬영했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그래서 가없게도 클라크 게이블은 그 장면이 만족스럽게 찍힐 때까지 비비안리를 안고 수십차례나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세트 디자이너가 힘센 클라크 게이블에게만 일부러 길게 만들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이 계단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러나 "헌번 더 클라크" 라는 빅터 플레밍 감독의 말에 그는 또다시 비비안 리를 안고 그 긴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감독은 또 "어렵군 클라크. 하지만 지금의 장면은 이 영화에 필요가 없는 거야, 다만, 자네가 한 번 더 그녀를 안고 계단을 올라갈 힘이 남았는가 어떤가를 시험해 본 것뿐이야". 라고 조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라크 게이블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자신도 농담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만일 비비안 리가 자기와 같은 입장에 처했을 때, 자기처럼 익숙해 질 수 있을까 없을까하고 매우 조마조마해한 것이다. 이 밖에도, 클라크와 비비안이 마차를 탄 채 화마속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의 촬영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도 자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대목이 가장 인상깊은 것이었다고 이따금 비비안은 술회하곤 했다.
비비안리와 로렌스 올리비에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의 사랑은 영화 <무적 함대>에 공연하면서부터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당시 비비안은 변호사 하버드 홀램의 부인이자 세살짜리 계집애의 어머니였다. 올리비에는 거무스름하고 정력적인 인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사나이로서, 그 역시 여우 질 에드먼드의 남편이었다. <무적 함대>에서 공연하는 동안 서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그들의 결합을 가로막는 장해물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두 사람 다 자기들의 어린애가 염려되었고, 특히 그들의 스캔들을 톱으로 다룰 신문기사가 눈앞에 크게 부각되었다. 만일 그런 기사가 실리는 경우, 그들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게 될 뿐더러, 찬란한 연기자로서의 앞날을 파멸로 몰아 넣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보다는 사랑이라는 본능이 더 강했다. 두 사람은 될대로 되라, 세상이 자기들을 파멸로 시킬테면 시켜봐라, 세상이 이기나 자기들이 이기나 하는 사랑에의 도박을 걸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미국에서 올리비에는 <폭풍의 언덕>의 주연을, 비비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역을 맡게 되었다. 그무렵, 두 사람의 이혼소송이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3년전 남편은 미스 리(비비안)와 연애한다는 것을 고백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어요." 질 에드먼드의 증언이었다, 하버드 홀맨의 증언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혼 소송은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고, 법정도 공청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극비리에 열렸다. 그리하여 1940년 8월 30일 대서양을 건너간 이들은, 헐리우드 교회 산타 모니카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비비안 리는 비비안 올리비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스칼렛처럼 쓸쓸히 스러져간 비비안 리
1953년, 비비안 리가 <거상의 길>의 실론 로케를 마치고 세트 촬영을 위해 헐리우드에 돌아가 있을 무렵, 남편 올리비에는 그녀와 떨어져 잍날리아에 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친국 데비드 니븐으로부터 지급 전화가 걸려왔다. 비비안 리가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헐리우드로 돌아온 올리비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비안의 눈은 번뜩였고, 입은 한시도 놀림이 없이 뭔가를 지껄여댔다. 심지어는 상대방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공연중인 남우 피터 핀치를 라리(로렌스)의 애칭)라고 부를 지경이었다. 의사의 진단은 '급성 신경 장애' 비비안이 맡은 역은 엘리자베드 테일러에게 넘어갔다. 그 즈음의 몇 년동안 비비안은 자신의 약한 육체에 채찍질을 가하면서 올리비에의 정력적인 활동에 대해 있는 힘을 다해 격려했다. 그 결과, 46세의 올리비에는 인생 최고조의 시기에 들어선데 반해, 비비안은 이유야 어쨌든 자기의 모든것이 끝장났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그들 부부의 정은 차차 식어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올리비에는 여배우 존 플로라이드와 사랑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1959년 비비안은 그 동안 줄곧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 온 올리비에에 대한 집념을 꺽고, 그와 존과의 사랑을 들어 이혼 사실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애수>등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1953년 사건이래 1967년 7월 8일 런던의 자택에서 타계하기까지의 14년간은 그녀에게 더없이 고독한 나날이었다. 사인이 자살이 아니었나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장의 위원장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이리하여 비비안 리란 한 여성은 그녀의 출세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처럼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 현란함을 남겨둔 채 조용히 스러져간 것이다.
주요 출연 작품
1934년 찾고 있는 물건(Things Are Looking Up)
1935년 시골 신사(The Village Squin),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 응시와 웃음(Looking Up and Laugh)
1936년 무적 함대(Fire Over England)
1937년 간첩(Dark Journey), 찻잔 안의 폭풍(Storm in a Teacup)
1938년 21일간(21 Days), 옥스포드의 앵키(A Yank At Oxfork), 세인트 마틴의 골목길(St. Martin's Lane)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40년 애수(Waterloo Bridge)
1941년 엠마(Lady Hamiton)
1945년 시저와 클레오파트라(Caesar and Cleopatra)
1948년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1954년 로마의 애수(The Roman Spring of Mrs, Stone)
1965년 바보의 배(Ship of Fools)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성공으로 그녀는 여배우 중 가장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최고스타가 되었지만
영화보다는 연극을 사랑한 배우였고, 굵직한 몇 편의 영화출연 만을 남긴 전설적인 스타로 사라져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2만5천 달러였던 출연료는 '애수'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10만 달러까지
올랐지만 영화는 일생동안 모두 스무편도 찍지 않았다.
도도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일면도 있다. 미국 영화계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었던 그녀가 영화제작 이전에
이미 어마어마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 역을 따냄으로써
단박에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지만, 되돌아보면 비비안 리 없는 '바람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부친이 인도 기병대에 주둔해 있어, 그곳에서 태어난 비비안 리는 아마추어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의 후원으로 그녀는
세 살 때 연극무대를 밟았고 많은 문학작품들을 섭렵하면서 대 여배우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영국의 수녀원 학교에 보내졌는데, 후일 배우가 된 모린 오설리반과 친하게 지냈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런던의 왕립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931년 바리스타인 허버트 리 홀만을 만나 이듬해 결혼해 딸을 얻었다. 1935년은 그녀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해였다.
연극 'The Mask of Virtue'로 큰 호평을 받았고, 인생의 전기가 된 남자를 만났다. 그가 바로 로렌스 올리비에다.
서로에게 급속히 이끌린 둘은 1937년 영화 'Fire Over England'을 공연하면서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들의 배우자들은 둘다 이혼을 거절했고 둘은 동거를 시작했다. 둘의 결혼은 1940년에 이루어진다.
이 즈음 그녀는 마가레트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스칼렛 오하라 역을 따겠다고 공언했다.
1938년 로버트 테일러와 'A Yank at Oxford'에 출연, 미국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녀의 성격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녀는 까탈스런 배우로 인식되었다.
1939년 로렌스 올리비에는 자신의 연기영역을 넓히기 위해 헐리우드 진출을 서둘렀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드클리프
역할을 맡았는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비비안 리에게 이자벨라 역을 제의했지만, 이미 멜 오베른에게 결정된
캐시 역이 아니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1946년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59년 '벤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받았고, 1953년 '로마의 휴일'을 찍은 거장 와일러 감독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헐리우드는 바쁘게 돌아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 스칼렛 오하라를 맡길 여배우를 찾기 위해서다.
비비안 리는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의 동생에게 자신의 추천을 의뢰했고, 셀즈닉은 그녀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그녀를 후보의 한 명으로 낙점했다. 1938년 10월 비비안 리는 LA로 날아가 애틀란타 화재신을
찍고있던 셀즈닉에게 소개되었고, 다음날 스크린 테스트를 거쳤다.
이로써 비비안 리는 최종후보 네 명 중 한 명으로 결정되었고 결국 히로인으로 선정되어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
수많은 미국팬들은 풋내기같은 영국 여배우가 스칼렛 오하라 역에 캐스팅된 사실에 분노했지만, 영화가 개봉되자
그녀의 열정적인 연기에 찬사를 보내기 바빴다.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그녀는 엄청난 명성을 얻었지만, 그녀 스스로 '나는 영화배우가 아니라 배우이다,
항상 연극무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영화 이상으로 연극을 사랑했고, 30여년을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세익스피어극을 비롯해 수많은 배역을 소화했다
마가레트 미첼 여사의 유일한 저서인 파란만장한 역사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6년 출간된 1년 동안 150만부라는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5만달러라는 저작료를 지불해 영화화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3년동안 제작을 미루면서 영화팬들을 안달시켰고, 마지막 남은 스칼렛 오하라 역을 정하기 위해 전국을
곳곳을 찾아다니며 모두 1400명의 여성들을 면접하는 등 영화제작 이전에 이미 최고의 관심사로 만들어버렸다.
모두 10개의 아카데미 상을 받은 이 영화로 그녀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최초의 영국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스카상을 그녀의 침실 문을 고정시키는 받침대로 썼다는 얘기가 있다.
대단한 헤비 스모커였던 그녀는 '바람과...'를 촬영하면서 하루에 무려 네 갑의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일견 독선적인 면이 엿보이는 그녀는 무척이나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가정을 버리고 영국 최고의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와 사랑을 이루었고, 성격장애와 결핵으로 건강을 잃어가면서도 무대를 피하지 않았다.
1940년 '레베카' '오만과 편견' 등에서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공연하려던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한 탓에 번번이 배역이 무산되었고 결국 한 편의 영화도 같이 찍지 못했다. 둘이 주인공으로 결정된
'애수'에서조차 막판에 남자 주인공 역이 당시 MGM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 로버트 테일러로 변경되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나, 이 영화는 큰 상업적 성공과 평가를 얻었다.
1945년 왼쪽 폐에 결핵이 발병했다는 진단을 받고 수주간 치료후 사극인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 출연했는데,
뒤늦게 임신을 확인했지만 유산의 아픔을 겪는다. 이 작품은 '안나 카레리나(1948)'와 함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1947년 로렌스 올리비에가 버킹검 궁에서 기사작위를 받음으로써 그녀는 죽을 때까지 '레이디 올리비에'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도 종말이 다가왔다.
1948년 둘은 극장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6개월간의 호주, 뉴질랜드 공연여행을 떠난다.
연극은 큰 성공으로 이어졌지만 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비비안 리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 있었고, 둘은 지속적으로 다툼을 벌였다. 마침내 서로 빰을 때리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그녀는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더 이상 로맨스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뿐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이미 배우인 피터 핀치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결혼생활을 정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 비비안 리는 웨스트 엔드에서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 역을 맡는다. 무려 326회의 공연을 마치자 영화화 작업에 참여한다. 1950년 그녀의 정서장애가 심각함을 알고 있는
올리비에는 그녀를 보살피는 한편, 바람둥이로 알려진 말론 브란도와의 문제를 막기 위해 LA에 동행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말론 브란도는 비비안 리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나, 워낙 로렌스 올리비에를 존경한 탓에
그녀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데는 극도의 자제력을 보였다.
역시 그녀와 떼놓을 수 없는 작품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작업중 엘리아 카잔 감독과 불화를 겪었고,
감독은 그녀를 '조무래기 재능'이라고 폄하했으나 갈수록 그녀를 찬탄해마지 않았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뉴욕 비평가협회상을 안겨주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지만, 그녀는 올리비에와 계속 연극공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두번째 유산을
겪고 심각한 정서적 문제가 발생해 유럽공연중 단원들과 불화를 일으키자 첫 남편까지 날아와 올리비에와 함께
그녀를 달랬다. 1960년 결국 둘은 이혼했고, 그녀는 죽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연극과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967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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