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노라 보았노라 쇼핑했노라
전쟁은 캐나다를 '이민자의 고향'으로 전환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대부분은 자식들을 위한 지출이었다. 전후 베이비붐 현상으로 1947년까지 해마다 인구가 2%씩 증가했다. 국민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
세기가 바뀐 이래 이민 숫자는 최고를 기록했다. 전쟁 이후 10년간 150만 명 이상이
캐나다로 왔다. 그들은 2차 대전을 피해 온 망명자들과 전쟁 미망인, 그리고 혁명의 바람이 세 찬 헝가리를 탈출한 가족들이었다.
절반 이상이 영국과 서유럽 출신이었고, 남부와 동부유럽 출신들도 처음으로 도착했다. 이들은 주로 화이트칼러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면 산업관련 기술자였다. 이민자들은 그들의 언어, 관습, 문화를 도입, 캐나다 사회가 바뀌기 시작했다.
|
|
|
**제21 부두
이민자들이 처음 육지를 밟는 곳은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21부두였다. 나치 학살을 피해서 독일과 폴랜드에서 온 유태인들을 포함, 51년 한 해에만 9만 4천 여명이 통과한 이 부두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바쁜 입국문이었다. 이민자들은 도착과 동시에 대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타거나, 농부로 일하기로 정한 서부로
출발했다. 북부 온타리오의 광산지대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정착보증인을 구하지 못했던 도로시 반
헬버트(16세, 네덜란드 출신)는 21부두에서 부모와 함께 6주간 묶여 있었다. 마침내 온타리오주 세인트 캐서린에 정착한
헬버트는 훗날 ‘처음 도착했을 때 영어가 어렵다고 느끼지 못했다. 이 동안은 나도 캐네디언이 된 것 같이 느껴져 몸에 밴 관습에
매달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당시의 많은 이민자들이 동감하는 말이었다.
1947년 정부는 '시민권 법’(Canadian
Citizenship Act)을 제정했다. 국내 출생자 뿐 아니라 이민자 모두가 시민이라는 것이었다. 새 법 전에는 이민자는
'영국시민(British Subject)'였다. 시민들은 처음으로 고국의 친척들을 이민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이민자들의 취업을 도왔지만 정착보조금등 다른 혜택은
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생활비 보조나 ESL 영어수업, 직업교육도 없었다. 또한 대규모 이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가 필요로 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 유지 중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정부에 대해 인종 차별정책 중단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0년대에는 보다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갖게 됐다.
** 더 많은 주택, 더 많은 차, 뭐든지 많이
전후에 집과 차를 갖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50년대 전국적으로 공급된 주택 가격은 총 6백억 달러나 된다. 도심주변에는 집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도서관 등이
어섰다. 교외는 다운타운의 소음과 불결, 높은 인구밀도로부터 벗어난 살기 좋은 장소였다. 가족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급증하는
이민자 그룹은 주택공급을 계속 요구했다. 토론토 북동쪽의 던밀즈 Don Mills 지역은 1950년대 국내 최초의 주거지
계획조성 지역이었다. 곧 12개의 교외지역 자치단체가 생겼다. 살집을 마련한 주민들은 길과 고속도로, 그리고 자동차를 필요로
했다.
자동차는 가장 눈에 띄는 전후 번영의 상징물이다. 어떤
단일상품도 이처럼 경제에 파급효과를 주지 못했다. 어떤 소비자도 이처럼 많은 선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자동차 회사는 크고,
유연하고, 빠른 차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고급스런 2중색갈, 흰색 타이어(white-wall tires), 후면
안정판(rear fins), 그리고 파워 스티어링 등의 옵션과 함께.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경제활동에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드라이브-인 극장, 드라이브-인 식당, 모텔, 쇼핑센터, 주유소와 정비소가 생겼으며 교외 주택단지는 빠르게 뻗어 나갔다.
국민 대부분이 가진 놀라운 구매력은 전후 경제붐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시장엔 새로운 상품들이 넘쳐났다. 냉장고, 자동차라디오, 믹서, 마루 광택제, 식기세척기, T.V. 냉동식품,
다림질이 필요 없는 셔츠, 전동 제초기, 녹음기 등. 임금과 근로혜택의 증가와 전시 채권의 원금 및 이자상환은 소비를 더욱
부채질했다. 업소들은 때를 놓지 지 않고 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 이튼 대 시어스
1950년대 중반, 이튼(Eaton)과 심슨
시어스(Simpson Sears) 백화점 사이의 판촉경쟁은 가히 전투를 방불케 했다. T. 이튼 컴퍼니와 로버트 심슨 주식회사는
오랫동안 국내에 잘 알려진 업체였다. 1952년 심슨백화점은 시카고의 시어스 로벅과 합작해 심슨 시어스를 창업, 이튼의 첫 번
째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전국의 거의 모든 가정은 이 거대한 백화점의 경쟁에 영향 받았다. 모든 가정의 세 가지 중요한 책은,
성경과 더불어 매년 두 번 씩 발행되는 두 백화점의 상품 카탈로그였다. 심슨 시어스는 백화점운영을 혁명적으로 개선했다. 이튼은
전통적으로 토요일 정오까지만 영업했다. 시어스는 주 6일 영업했고 셀프-서비스 카운터제도를 도입했으며 신용 좋은 충성스런
고객에게는 신용카드를 발급했다. 또한 시어스는 새로운 사회에서 자동차가 중요한 교통수단이라는 점에 착안, 넓은 주차장을 가진
대형 매장을 교외에 설치했다.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널찍한 2층 백화점은 이튼의 낡은 엘리베이터를 시대의 퇴물로 보이게 했다.
번역 한수정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