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노인들의 결집을 촉구하는 〈노인동맹단〉의 취지문이 발표되었다. 백발노인이 죽기를 기필할 때 적인(敵人)도
오히려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 잃은 울분을 토하며 거리로 나온 노인들이 국내외에 거주하는 몇 백만의 노인들을 향해 던진
포성이다.
우리 노인 형제여 생각해보라. 구구한 형해(形骸)가 세상에 살날이 그 얼마더냐? 고인이 말하기를 죽을 때
죽으면 죽음도 영광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만일 오늘 죽을 뜻을 얻어 영광을 자손에게 전하게 된다면 하늘이 내린 행복이라 하겠다.
1백 년 전 이 땅, 선배 노인들의 패기와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 시대의 노인은 기껏해야 복지의 대상이거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밀려나 있지는 않은가? 머지않아 8백만 베이비부머의 멀고 긴 노년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들을 누가 보살피고 누가 돌볼
것인가? 노인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을 돌보고 또 주변을 돌보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전망은 불가능한 것인가? 최근에 대두되는
노인문제는 좋은 노년을 위한 조건을 다각도로 만들어야 함을 시사한다.
노년은 좌절인가, 즐거움인가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에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에는 눈물이
나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하면서 눈앞의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는 없고 모두 이빨 사이에 끼어있고, 흰 얼굴은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희어진다.
‘노인의 열 가지 좌절[老人十拗]’이라고,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소개되었다. 노인의 신체적 증상에는 계급이
없다. 영조 임금은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83세까지 살았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라 불릴 만큼 왕성한 업적을 남긴 임금 영조도 노년에
이르러서는 각종 신체적 증상에 시달렸다. 그는 공부하는 중에 깜빡깜빡 조는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읽으라고 명해 놓고는 다시 졸아 들리지도 않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 ‘민망한’ 증세를 임금은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제아무리 왕후장상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노인 증상이라면, 그것과 마주하는 인식과 태도의 혁명이 필요해 보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노인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여섯 가지를 꼽았다. 이른바 ‘노인육쾌(老人六快)’이다. ①대머리가 되어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어 좋고, 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면해서 좋다. ②이빨이 없으니 치통이 없어 밤새도록 편안히 잘 수 있어 좋다. 이빨은 절반만 있느니 아예 다 빠지는 게 낫고, 또한 굳어진
잇몸으로 대강의 고기를 씹을 수다. “다만 턱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 씹는 모양이 약간 부끄러울 뿐.” ③눈이 어두워져 글이 안 보이니 공부할
필요가 없어 좋고, ④귀가 먹었으니 시비를 다투는 세상의 온갖 소리 들리지 않아 좋다. ⑤붓 가는 대로 마구 쓰는 재미에 퇴고(推敲)할 필요
없어 좋다. ⑥가장 하수를 골라 바둑을 두니 여유로워서 좋다. 즉 정진해야 할 이유가 없는 나이거늘 “뭐하러 고통스레 강적을 마주하여 스스로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라고 한다. 물리적으로 어쩔 수 증상이라면 사고의 전환을 통해, 그 증상을 즐기면서 함께 노니는 것이다. 역시 다산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욕구하고 선택하는 많은 것들이 ‘젊고, 어려’보이기로 수렴되는 듯하다. 심지어 ‘영(young)해
보이게?’라며 국적불명의 언어로 우리의 취향을 묻기도 한다. 젊음의 특권이 있듯이 노인에게도 강점이 있을 텐데, 우리의 문화는 젊음의 가치로
노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하긴 어느 시대 어떤 문화에서나 노인과 늙음은 항상 부정적인 인식과 긍정적인 인식으로 병존하고 교차해왔다. 노년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방법 또한 개인에 따라 달랐다. ‘아직 팔팔하다’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그분’ 앞에선 젊음이 오히려
부끄러운, 성숙과 성찰의 노인도 있다.
청춘처럼 살 것인가, 노년답게 살 것인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심수경(1516~1599)은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는” 자신을 몹시 대견스러워했다. 과거
동기생[同榜] 다섯 중에서, 자신은 “재주와 덕은 최하이지만 벼슬과 수(壽)는 최고”라 하고 하늘이 주시는 것은 공평하다고 한다. 겸손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심수경은 75세에 아들을 낳았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다. 비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지만 사람들은 ‘은발
청춘’의 왕성함을 축하하였다. 그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심수경은 심정을 시로 읊었다.
75세 생남(生男)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아! 조물주가 일이 많아 이
늙은이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견한잡록』의 저자 심수경은 유독 ‘나이듦’에 민감하였다. 그의 글에는 누군 몇 살이고 누군 몇 살이라는 방식의 서술이나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는 방식의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그런 심수경의 노년의식을 굳이 따진다면 “여전히 청춘”이고 싶은 거다.
반면에 젊음으로는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늙음 그 자체로 빛을 발한 노인들도 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왕이
궤장(几杖)을 내리자, “신의 나이 82세입니다. 세 가지를 두고 평생을 힘써왔으나 아직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부끄러워한다.
그가 못한 세 가지란,
첫째는 입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몸을 지키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입을 지키면
망언(妄言)이 없고, 몸을 지키면 망행(妄行)이 없으며, 마음을 지키면 망동(妄動)이 없습니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겸손과 성찰의 자세로 일관한 미수의 노년의식이 참으로 그립다. 우리 역사를 산책하다 보면 노년의 자존감을
잘 가꾸어낸 많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80이 넘은 나이에 나라의 큰 직임을 맡게 된 김상헌(1570~1652)은 “시골로 물러가 노년을 지키며
늘그막의 절개를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라고 하였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젊음을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음을
완성시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젊음을 기준으로 삼기보다 노년의 강점과 노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최대로 발휘하는 삶이어야 하지 아닐까.
노년은 삶의 경험과 지혜를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성숙의 시기라고 한다. 또한, 노년은 평온과 재생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적기라고도
한다. 각종 사회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년이야말로 그 자신일 수 있는 시기라는 뜻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