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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하루
남편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떠나게 된 베트남 다낭 여행. 8명이 시간을 맞추고 더군다나 명절에 나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절 연휴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라 부모님들과 형제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고 잘 쉬고 즐기고 오라는 응원을 받으며 떠난 여행이었다. 며느리로, 아내로 30년 혹은 그 이상을 열심히 살아온 아내를 위한 여행이라는 부제를 붙이는 남편들. 그들의 생색을 거뜬히 받아 주기로 했다. 4박5일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기대 이상으로 모두 만족했다.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항상 유쾌한 추억을 만든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목에서 난 모두에게 뜻밖의 추억거리를 남겨주었다.
“여보, 폰이 없어!”
비행기에 올라 지정된 자석에 안자마자 떠오른 핸드폰의 행방.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공항버스로 이동하기 전에 매고 있던 크로스백에 넣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내에 들고 온 남편가방과 내 가방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핸드폰은 없었다. 남편은 좁은 통로를 쏜살같이 달려 나가 승무원에게 번역 어플로 핸드폰 분실을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비행기는 속절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 출발하는 비행기는 1시간 이상 연착하는 바람에 피로감으로 모두들 힘들고 피로했을 텐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긴장감을 주었다. 일행들에게 괜찮다며 안심시키고 어수선한 자리를 수습했다. 기내가 최소한의 불빛을 남기고 어두워지자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가 찾아왔다. 남편은 비행기가 이륙 전까지 본인의 폰을 들여다보며 분주히 뭔가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눈을 감았다.
‘대체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을까?’
‘폰에 저장된 메모장의 메모, 전화번호, 사진을 어떻게 복원하지?
’내가 백업을 해뒀나? 새 폰을 사야하나?’
복잡한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 바로 가게 일을 시작할 생각을 하니 숨이 턱하니 막혔다. 핸드폰으로 업무처리를 하는 게 많아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4박5일의 행복한 순간은 잠시 나의 실수로 몽땅 사라지려했고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4시간 이상의 비행, 오롯이 한 숨도 못자고 아침을 맞이했다. 얼마나 피곤한지 안구 회전이 안 돼 눈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남편이 이륙 전 현지 가이드에게 현재 상황이 전달해놓은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다낭 공항에서 핸드폰의 행방은 확인이 되었다. 도착 후 빠른 분실신고 접수도 한 몫을 했다. 인계받는 절차가 끝낸 후에야 안도의 숨을 쉬고 타들어가던 목구멍으로 생수 한 통을 털어 넣었다. 가이드는 외국에서의 핸드폰 분실 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아주 운 좋은 케이스라고 했다. 다행히도 공항직원이 폰을 습득 했고 분실접수가 신속하게 전달됐고 확인 절차도 가이드 도움으로 일사천리도 되는 바람에 기적같이 되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오후 나의 핸드폰은 하늘을 날아 대구 공항으로 도착했고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핸드폰을 찾아와 내게 건넸다. 그 후로 또 얼마나 생색을 내던지.
하여튼 간에 기억에 남을 극적인 하루,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은 이젠 추억의 이름으로 웃음 짓는다. 뭐든 급하게 서두르면 탈이 난다. 완벽은 바라지도 않지만 잦은 실수만은 최소로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이제야 말하지만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당시 지인들 앞에서 태연한척 의연한척 했지만 온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멘 붕이었음을 고백하는바 이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 애쓴 남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며 여행길에 함께한 지인들, 그리고 끝까지 수고하신 현지 가이드님께 감사의 마음을 이 글로 대신할까한다.
병아리 날다
주중에 하루를 쉰다는 것, 타인의 일이라면 그저 부러움이고 나의 일이라면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겠거니 했다. 뜻밖에도 내게 한 달에 한 번도 아닌 주중에 한 번 휴무가 주어졌다. 믿기지 않은 변화에 훨씬 가벼워진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잦은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결혼한 지 30여년 만에, 남편과 함께 일한지 20여년 만에 공식적인 자유의 날이다. 그렇다고 얄짤없이 주중에 일만 한 건 아니다. 내가 필요하면 당일로, 어쩌다가 1박2일로, 드물긴 하지만 2박3일까지도 쉰 적도 있다. 남들은 내게 의아해하며 이야기 한다.
“본인이 하는 사업장인데 왜 맘대로 못 쉬어?”
“그 나이 돼서도 아직 남편 눈치를 봐?”
내 입장은 나만 아는 것이고 쉽지 않은 것 또한 나만의 사정인 것이다. 어찌됐든 간에 남편과의 극적인 협상의 결과이자 남편의 배려로 난 3주째 매주 목요일을 쉬게 됐다. 대신 다른 요일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함께 가게 문 열고 닫는 걸로. 금요일 꽃자리 수업은 열외. 시간적으로 따지면 근무 시간은 변화가 없다. 조삼모사(朝三暮四)격이지만 그래도 난 좋다. 단지 하루의 휴무를 위해 아침 운동시간을 줄였고 환기하며 청소하는 것을 포기했다. 좋아하는 것을 못하는게 유감스럽지만 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상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 도전이자 설렘이 될 줄이야. 덕분에 출근 시간을 2시간 이상 앞당긴 셈이라 요즘 나의 아침은 분주하기 짝이 없다. 2,3배속 빨리 빨리 움직여 짧은 시간 내에 해내야하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재주도 얼떨결에 생겨나게 됐다.
더 분주해진 목요일은 1시간 일찍 기상과 함께 주저함 없이 움직여했다. 남편과 출근을 한 뒤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대구로 향한다. 가게 일로 대구 나설 때와는 다르게 같은 기차를 탔건만 왜 이렇게 창밖으로 시선이 가는지 모르겠다. 여유를 가지고 나서게 돼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돼서인지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무게부터가 다르다. 봄은 아직 멀었지만 봄바람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발검음도 무척 가벼워짐을 느낀다. 꼿꼿이 앉아 3시간 이상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놀랍고, 잠자던 내적 호기심이 되살아남에 감사한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목요일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남편이 늘 묻고 재빠르게 나는 대답을 한다. 짧은 물음과 답이지만 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편은 얼굴색이 달라졌느니 목소리 톤이 달라졌느니 하며 흐뭇해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남편에게 날을 세웠고 의욕도 없이 ‘일상’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에 튀지 않은 색으로 선 밖으로 색이 튀어나오지 않게 색칠하며 살았다. 한 장을 다 그린 후 넘기면 똑 같은 밑그림에 색칠을 어제와 다름없이 했다. 무탈하게 사는 게 쉽지 않다고도 하지만 무료함이 더해지면 마음이 이내 병들고 만다.
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되어 보려고 한다. 봄 햇살 가득한 마당에 혼자 놀아도 행복한 병아리로 언젠가 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오늘도 작은 날갯짓을 해본다.
안녕하시죠? 자매님들
내가 ‘언니’라 부르는 여자 사람들은 대체로 결혼을 하고 알게 되어 지금껏 이어오는 인연들이 대부분이다. 결혼 후, 대구에서부터 남편의 이직으로 새롭게 터전을 닦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스쳐 보냈다. 그 중 열 명 남짓의 언니들은 서로에게 열렬한 팬으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안부를 묻고 집안 대소사를 함께 하며 잘 지내고 있다. 15년에서 20년 이상을 함께 한 언니들은 적게는 서너 살 많게는 열 살 많은 언니들도 있다. 친언니가 없는 나로서는 든든한 조력자가 아닐 수 없다. 모두들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는 언니들이다. 부지런하고 긍정적이며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다. 턱없이 부족한 나를 예쁘다 해주며 살뜰히 챙겨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비 오는 날 점심 장사를 마친 언니한테
“언니, 찌짐이가 먹고 싶어~ ” 하면 귀찮을 법도한데 후딱 몇 장 구워서는 막걸리 한 병을 보태 가져다줬던 언니, 된장, 고추장을 맛깔나게 담그는 언니는 된장찌개를 한 솥 끓여 들고 와 주기도 하고 토마토 농사짓는 언니는 지나는 걸음에 잠시 들렸더니 양손으로 못 들 만큼의 토마토를 실어 주기도 하고, 정육점 하는 언니는 늘 덤을 넘치게 챙겨준다. 계절별 김치를 넉넉하게 담가 점심때 먹으라며 나눠주는 인심 좋은 언니들. 그녀들의 사랑에 보답하려 애를 써 보지만 할 수 있는 게 고작 밥과 커피를 사는 정도 밖에 안 돼 미안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몇 해 전, 난 그런 언니들 중에 암으로 투병하다 먼저 보낸 언니가 있다. 그런데 올해 들어 한 언니가 위암 선고를 받았지만 다행히도 수술을 받아 회복 중이다. 또 한 언니는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던 차에 우연히 만난 언니 딸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게 됐다. 복막암 4기. 다음 주 서울서 수술을 받게 됐다고 하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나는 다리 힘이 풀렸다. 그날 바로 전화하니 평소와 같은 명랑 쾌활한 목소리로
“항암치료 때문에 빡빡이다. 근데 너무 잘 먹고 살도 2키로나 쪘고…….”
이런 저런 수다로 30분 이상을 떠들어댔다. 누가 누구를 위로 하는지를 모를 정도로 언니는 씩씩했고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심란해 혼이 났다. 하지만 언니와의 통화에서 삶의 대한 강한 의지가 보였고 분명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길한 징조가 보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살이 안 빠지고 찌는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발 오진이거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기도하고 기도한다.
피를 나눈 언니는 없지만 나에겐 정을 나눈 언니들이 있다. 쉰 중반을 넘긴 응석받이 동생의 푸념과 넋두리를 들어주며 내 등을 따뜻하게 도닥여 주는 언니들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친형제들 보다 더 자주 안부를 묻고 함께 밥정을 나누고 있는 그녀들이 별안간 내 곁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환하게 웃으며 어디서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언니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다. 그녀들의 지혜로움을 배우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함께 하는 시간이 늘 유쾌하고 평온하기를 바란다.
오랜만에 안부를 여쭙습니다.
“안녕하시죠? 자매님들!”
어깨 좀 빌려줄까요?
한 동안 괜찮던 나의 어깨와 목. 그런데 이놈에 어깨와 목이 단단히 탈이 난 모양이다. 가벼운 스트레칭에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 으윽~”
간밤에 잠을 잘 못 잤나? 잘못된 자세로 오래있었나? 짐작해보지만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남편이 파스를 붙여 주기도하고 주물러 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 결국은 병원을 찾았다. 의사도 병명을 단정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근육 뭉침이던가? 담이던가? 스트레스 때문이던가? 여하튼 물리치료만 받고 하고 약을 지어왔다. 다음날 오른쪽 어깨에 동그란 부황 흔적들이 여러 개가 생겨나있었다. 보기 싫게 여러 개가 뒤엉켜 있었고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씁쓸한 웃음이 났다.
걱정거리가 많다는 말은 신경 쓰고 있는 게 많다는 말과 비슷한가? 아님 다른가? 난 해결하지 못하거나 납득이 안 되거나 수용이 안 되면 다른 일 진행에 제동이 걸린다. 예민해지기도 하지만 잠을 못 잘 정도로 머릿속에서 문제가 되는 그것이 자꾸 맴돌아 힘이 든다. 앞선 걱정도 있지만 종종 상처 받고도 겉으로는 아닌 척 하다 혼자 끙끙대며 상황을 재구성하고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바라다본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든가, 무시하던 가, 그래도 뭔가 찝찝하면 꽁꽁 싸매 나의 깊은 벙커에 집어넣고 밀봉을 해버린다. 그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지 않고 해서 몸의 불편함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아닐까. 지하 벙커 속에서 아우성대는 감당 안 되는 그 무엇을 두고 혹자는
“내려놓으시오~”
“버리시오~”
“생각이 너무 많소.”
내가 당신이 아니기에 그들의 우려 하는 말이나 위로의 어떤 표현은 미안하게도 귓등으로 스쳐간다.
인생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가벼울 수 없지만 그 길을 걷는 발걸음의 무게는 내가 정할 수 있다 고한다. 모든 망상과 걱정은 ‘나’ 로서부터 시작일 테지만 알면서 무한 반복하는 나는 오늘도 아픈 목이며 어깨를 스스로 어루만져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 하다보면 짧게나마 잊고 있을 수 있으니 그나마 요즘은 그 숨구멍에 감사하고 있다. 그 작은 틈으로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 들어올 수 있게 나는 자꾸 그 틈을 넓혀볼까 한다. 온전히 숨을 쉬고 날개 짓할 정도로 목과 어깨가 편해지는 날이 오면 내 어깨 좀 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지금도 성치는 않지만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심스럽게 내주리라. 단지 기대어오는 어깨를 다독일 아량을 지닐 수 있기를 바라본다.
뱅갈아, 미안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식물 가꾸기, 무엇보다 베란다가 확장이 되어있어 햇볕이 잘 들고 이왕이면 실내 건조함도 없애고 공기정화도 잘되는 식물들을 골라 가족으로 맞이했다. 집들이 선물로 화분을 사달라며 지인들에게 특별히 주문을 하기도 했다. 애기 돌보듯 세심하게 살펴보고 어루만지니 지금은 초록 옷을 입은 사이좋은 형제들이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서 나를 반긴다. 키가 자라고, 잎사귀 수가 늘고, 몸 둘레를 넓혀 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식물을 키우며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에 빠지고 소소한 행복함마저 느낄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 중에 으뜸의 자태를 갖춘 것은 뱅갈고무나무다. 키도 크고 군더더기 없는 몸통은 매끄럽고 가지런하며 잎사귀들도 진한 초록으로 잘 자라줬다. 지난 해 연말, 뱅갈고무나무의 잎은 검은 반점을 띠며 누런 누렇게 변해갔다. 몇 개 빼고 전체 잎으로 번지더니 이내 우수수 떨어졌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손을 살짝 대었건만 무섭게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벌어진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떨어진 잎사귀들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남편한테 보였더니 나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우리 집 대표 인물인 뱅갈이가 어쩌다가…….’
나란히 있던 형제들 중에 제일로 불쌍한 몰골을 하고 서 있게 되었다.
별안간 변해버린 뱅갈고무나무에 대해 전문가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고 또 검색을 해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식물재배의 초보인 나는 무조건 햇빛 좋은 대서 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물주기로 이 사단을 낸 것이다. 햇빛도 적당히, 물도 적당히, 때에 맞춰 분갈이 등 뭐든 적당치 않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말에 그 ‘적당’이라는 것은 대체 어느 정도 인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도 더도 말게,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간으로 맞춘다는 게 가장 힘들다.
앙상한 뱅갈고무나무의 가지 끝에 꼼짝 않던 새순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한 겨울, 소한이 지나고 대한이 다가오는데 말이다. 잎사귀 크기를 매일매일 조금씩 키워 가는 게 어찌나 기특하고 예쁜지 새로 돋은 잎사귀에 아침인사를 가장 먼저 한다. 요 며칠 떨어진 뱅갈고무나무의 숱 없는 머리를 보며 우울했는데 새 단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한 올리브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거실에서 가장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의의 배려, 친절, 관심, 사랑도 그 정도가 넘쳐버리면 부담, 의심이나 오해를 유발하기도 하고 나중엔 왜곡된 집착만 남게 된다. 특히 뭔가를 바라고 또는 기대하며 베푼 가면을 쓴 ‘선의’는 나중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기도 하고 파국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수없이 실패하며 깨닫고 얻는 지혜는 삶의 보물로 내 안에 쌓여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고 싶다. ‘뱅갈아, 미안해’
주인없는 거실을 지키고 있을 뱅갈고무나무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등교를 하기 위해 통학 버스로 향하고 있는 낯익은 모습이 아침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 눈에 햇살 스미듯 들어온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젊은 엄마와 두 딸, 세 모녀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은 함박꽃 같다. 두 딸의 까르르 웃음소리는 지하 주차장 그 넓은 공간에 청량하게 울려 퍼져 싱그럽게 스며든다. 연분홍 원피스에 진분홍 카디건을 입고 언뜻 봐서는 쌍둥인가 했지만 다가가보니 연년생쯤으로 보인다. 나풀나풀 스쳐가는 모습이 봄꽃을 닮았다.
‘언제쯤이더라!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내 딸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으로 겹쳐 보인다. 두 딸은 나를 대동하지 않고도 등원을 하게 될 무렵 나는 베란다에서 딸들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유치원 버스 타기 전 우렁찬 인사 소리는 높은 층의 내 집까지 선명하게 도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따라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때의 잔상들이 입가에 미소를 부른다.
나에게는 연년생 두 딸이 있다. 정확하게 15개월 차이인 딸들은 성향은 물론 식성, 취향이 너무나 다르지만 그 다름으로 함께 하게 되면 시너지 효과가 크다. 그들과 함께한 20년 남짓의 시간증 절반은 아이들과 나의 온전한 성(城)에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물론 애들이 어려서도 있고, 어설픈 엄마의 자리가 실수투성이였지만 힘든 것 없이 재미지게 잘 지냈다. 애들은 잠자는 것, 먹는 것들이 예민하지 않아 수월했다. 돌이 지나고 나서는 크게 병원도 안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독박육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덕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혼의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한 시절의 생생한 추억은 화사한 햇살을 머금고 힘이 들 때마다 나를 따사로이 비춘다.
두 딸은 1년 가까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큰 애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잠시 도와준다는 게 작은 애는 현재 큰 애 가게의 점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둘 다 경험이 적어서인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우려와는 달리 잘 해내고 있다. 둘은 가까이에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제대로 톱니바퀴가 됐는지 아주 파이팅이 넘친다. 난 저 나이에 결혼을 했고 오직 육아에만 전념했건만 두 딸은 내가 상상도 못할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은 크지만 한 편으로는 그녀들의 도전정신과 추진력 그리고 그 엉뚱 발랄함이 부럽기도 하다.
노란 통학버스가 아파트 내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다녀오겠습니다.”
머리가 발에 닿을 듯 배꼽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른다. 엄마는 통학 버스가 주차장을 돌아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든다. 딸들과 떨어져 있을 동안 그녀들의 안전과 평안을 기도하는 손짓일 것이고 내 품으로 무사히 귀가하길 바라는 마음도 보탰을 것이다. 저 두 자매도 돈독한 우애로 잘 지내길 바라는 내 마음을 봄바람에 실어 보낸다. 사랑하는 내 딸들도 늘 사이좋게 즐겁게 일 하기를 바란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각자의 길을 선택해 가는 날이 오더라도 서로 응원하며 우애 있게 지내기를 바란다.
보물찾기
등갈퀴나물, 왕고들빼기, 은난초, 금난초, 흰대극, 청미래덩굴, 호재비꽃, 양지세잎꽃……. 처음 들어보는 야생풀, 야생꽃의 이름이다. 남편이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산을 오르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로 영접한 그들을 만나고 있다. 남편은 두어 달 전부터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 나지막한 산을 오르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 빼고는 열심히 산에 오른다. 산 오르는 시간은 남편 걸음 폭으로는 20분이 채 안 걸린다.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꼼꼼히 살피다 보물찾기처럼 발견한 그것을 먼저 사진을 찍는다, 정상에서 설치 된 운동기구로 운동을 한 후 찍은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을 검색하며 정리하느라 왕복 1시간 30분이 꼬박 걸린다.
새롭게 발견한 야생풀과 야생 꽃은 다른 풍경사진과 함께 가족 톡방은 물론 형제들, 친구, 지인 단체 방에 이른 아침부터 도배질을 한다. 그 작업에 아주 재미를 붙여서는 반기는 이가 많지 않을 텐데도 아침 인사와 함께 열심히도 올려댄다. 어쩌다 산에 못 오르고 건너 뛸 때는 그들 중 즐겨보던 이들한테 전화가 온다.
“형님, 오늘 산에 안 갔어요?”
“친구야, 아프나?”
그럴 때면 남편은 신이 나서 구구절절 사설이 길어진다. 뭐 하나에 꽂히면 지겨워질 때까지 열정을 불태우는 남편.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남편의 관심사가 적잖이 버겁고, 긴 설명에 말은 안 했지만 많이 지겨울 때가 있다.
남편이 무심히 지나칠 때는 못 보이던 것이 어느 날부터 시작한 삶에 변화에 진심을 더하니 매일 오르던 산이 달리보인다고 했다. 아침의 산 기운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더욱이 세심하고 자세히 살펴야 보이는 보물들을 만나는 아침이 너무 행복하단다. 빠짝 말라있던 나뭇가지에 푸른 새순이 돋고 풍성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니 자연의 신비가 새롭다고도 한다. 더군다나 아픈 허리도 정상이 되고 종아리 허벅지 근육도 붙어 더더욱 만족해한다. 연초에 한 동안 남편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병원을 오가며 마음고생을 꽤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보기에도 아주 괜찮아 보인다. 남편의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분은 좋다.
얼마 전 느닷없이 곰치 씨앗을 남편은 주문해 도착했다. 5만원 상당의 씨앗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적은 양이었다. 남편은 그 씨앗을 산 오르내리는 곳 양 옆으로 뿌려 놓을 거 라 했다. 의아해하며 물었더니 진지하게 한 말씀하신다.
“산 덕분에 아침마다 좋은 기운 얻고 건강해졌는데 고마움의 선물로는 약소하지.”
“곰치라고 아는 사람이 꺾어가 맛나게 먹겠지. 늘 보는 양반들이 먹어주면 더 좋고ㅎㅎㅎ”
산행길이 만나는 정겨운 이웃들에게 곰치씨앗 뿌린 것을 알리며 혹 오가는 길에 눈에 띄면 본인 뿌렸으니 기분 좋게 꺾어 가시라고 전했다.
비 온 뒤 뿌려 놓은 곰치를 살피러 오늘도 남편은 반려견과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보물을 찾아서 내게 선물할지 궁금해진다. 항상 건강한 웃음으로 시작하는 아침이 되길 소망하며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
마지막이 언제였을까? 지난 5월 난 그 곳을 다녀왔다. 그 곳은 나의 외가이자 엄마의 고향이다. 기억 속의 그곳은 엄마 품 같이 포근하고 오롯이 자연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외진 곳이다. 이번 울진 방문의 계기는 조부모님의 제사로 시작됐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의 일환으로 모두 함께 하게 되었다. 평일이라 스케줄을 사전에 조정했고 아쉽게도 남편은 가게를 보느라 동참하지 못했다. 부산에서 남동생 네가 부모님을 모시고 출발, 고맙게도 여동생이 내가 사는 곳까지 데리러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죽변 등대 아래 동네엔 이모댁이 있다. 작지 않은 동네는 담벼락과 지붕, 진입로는 아기자기하고 편하게 바뀌어 있었지만 등대를 에워싼 나지막한 대숲은 변함없이 소박하게 무리를 지어있었다. 등대 아래의 바닷길은 편안한 산책길로 바뀌어 있고 감사하게도 그날은 하늘색도 바다색도 5월의 싱그러움을 가득 안고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삼남매는 쉴 새 없이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 냈고 이모 댁과 1박할 펜션 그리고 죽변 어시장을 오가며 평온한 오후를 웃음꽃으로 채웠다.
외삼촌댁에서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사를 모셨다. 늘 조용하던 제사는 잔칫날처럼 화기애애했고 엄마는 도우미를 자처한 제부와 여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카들과 함께 제사를 모시게 된 외삼촌은 부모의 제의에 쉽지 않은 시간을 내 준 것에 대해 더 없이 고마워하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 화성리에 조부모님 산소를 찾아 주위를 치우고 차례를 올렸다. 어릴 적 그 길은 꼬불꼬불하고 좁았는데 지금은 확장 공사로 인해 수월하게 차들이 오갔다. 기억 속의 외가는 그대로인데 그 위의 집들은 사람 사는 흔적으로 더 깨끗하고 모양새 좋게 변해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어 있던 외가를 여동생이 몇 해 전 구입했었다. 딱히 사용 목적이 없어서 인지 이주 노동자들에게 잠시 무상으로 빌려준 후 더 흐트러진 모습이 되었단다. 낯선 인기척을 듣고 몇 분이 나오셨는데 두 분 모두 안면이 있었다. 한 분은 먼 친척분이셨고 또 다른 한 분은 나와도 면식이 있는 아주머니셨다. 세월이 지나도 내 이름을 기억해내 불러 주셨고 내게 젖동냥까지 해주셨다며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는 그 곳에서 1남 3녀를 키우셨다. 이모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고 데릴사위가 된 이모부. 엄마는 일찌감치 소녀가장이 되어 도시로 나와 최소의 생활비를 두고 모두를 집으로 보냈다 들었다. 동생 둘 뒷바라지는 물론 척박한 땅을 일구며 억척같이 사는 외할머니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한 엄마는 분가할 때까지 대식구의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그 후 우리 삼남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셨으니…….
엄마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나보다 가족을 위해 무한한 애정으로 희생을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엄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남편과 삼남매 그리고 사위까지 대동해 고향땅을 밟았으니 얼마나 감격의 순간이었을까. 외가를 떠나오며 엄마의 눈가는 촉촉해 졌다.
“또 언제나 오게 될까? 살아생전 마지막이지 싶다.”
“엄마! 건강만 하셔요. 다음엔 맏사위가 모시고 올 테니.”
하며 나는 엄마의 좁아진 등을 어루만졌다.
엄마의 고향은 가슴 아리고 늘 애틋한가 보다. 가난한 유년시절은 엄마의 삶에 아픈 기억일 테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삶에 애착이 뿌리 내린 곳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엄마는 더 강해졌고 우리에게 근검과 절약을 몸소 실천 하시며 우애를 우선으로 가르치셨다. 난 그런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엄마는 내 삶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시다. 동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울 엄마 인생은 대 성공이 아닐까 한다.
난 이번 외가를 다녀오며 고향과 엄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가 앞 마당의 백년이 넘은 감나무와 울진 바닷가 해송처럼 묵직한 모습이 되겠다고. 어떤 환경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자식들과 동생들에게 편안한 그늘과 안식처가 되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우산 든 남자
기막힌 날씨다. 에어컨이 없이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여름이다. 또 언제 이 렇게 더웠을까? 첫애를 가졌던 그 해 여름과 시아버님 돌아가셨던 그 무렵의 여름, 그리고 또 몇 번을 더 기억한다. 그 중에 으뜸으로 꼽고 싶은 올 해 여름. 부채, 선풍기로 견뎌내던 어릴 적 여름은 동화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얼음가게에서 사온 덩어리 얼음을 바늘을 꽂고 망치로 쪼개서 얼음 띄운 수박화채나 미숫가루 한 그릇에 선풍기 바람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건만.
도심의 여름은 건물 벽에, 혹은 건물 옥상의 에어컨 실외기 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열기로 한증막을 방불케 한다. 그런 열섬현상 때문에 여름날의 새로운 진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이들의 손에는 흔한 부채 보다는 충전해서 쓰는 한뼘 만한 작은 선풍기와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남성분들은 골프장에서 볼 법한 아주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간다. 검은색 장대우산은 이젠 비 올 때가 아닌 한 여름의 남성의 필수 아이템이 된 듯했다. 한 여름, 한 낮의 우산 든 남자라…….
대학 때 소개팅이 있던 날, 만나기로 한 장소에 검은색 접이 우산을 들고 나타난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예비역.
‘비도 안 오는데 무슨 우산??’
의아해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 커피숍에서 나설 무렵에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에서 굵은 장대비가 마구마구 쏟아졌다. 덕분에 함께 우산을 쓰고 비 그칠 때까지 제법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오빠, 동생으로 잘 지냈다. 그 예비역 오빠가 직장 때문에 타 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잊게 됐지만 검은 우산을 쓰고 스치는 남자를 보면 그 예비역인가 하며 뒤돌아 볼 때가 있었다.
아무튼 요즘은 소나기가 그 시절 소나기가 아니다. ‘게릴라성 집중 폭우’ 라는 이름으로 짧은 시간 엄청난 양으로 일대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일기 예보도 이 같은 게릴라성 집중 폭우의 양에 대해서는 어림하기 힘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난 물로 재산피해는 물론 인명 피해까지 이어진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는 더 이상 어릴 적 읽던 소설의 한 장면처럼 길가 모르는 집 처마 밑이나 상점의 햇빛 가리개 아래서 잠시 피하는 그것이 아니다. 기상이변으로 극에 치닿는 날씨로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반이 점점 더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된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매미는 목도 쉬지 않는지 오늘도 늦은 밤까지 울어댄다. 식지 않은 도시의 밤, 오늘도 열대야로 에어컨 덕을 봐야하고 난 두통에 몸을 떨어야한다. 말복도 지났건만……. 하지만 곧 처서다.
한 여름, 햇볕 짱짱한 훤한 대낮에 우산 든 남자와도 이별을 고해야한다. 조금만 더 견디면 햇볕의 날카로움도 무뎌 지고 부는 바람도 청량해 질 것이다. 그렇게 또 계절이 바뀌면 이 기막힌 날씨도 잊히고 말 것이다. 사계절이 절기에 맞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인간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지구, 훼손되어가는 자연에 대해 고민하며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이 뭐가 있을지 관심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선 결혼, 후 연애
쉰한 살의 나이에 엄마는 내 친정엄마가 되셨다. 그리고 나는 곧 딸의 친정엄마가 되려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에 이상하리만큼 난 지극히 덤덤하다. 마냥 아닐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니 남의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여하튼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올해 초 소개팅으로 만난 사위, 만나는 첫날부터 호감을 가지더니 며칠 안가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작한 결혼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30년 전에 우리처럼 말이다.
3 0년 전,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4개월하고도 10일이 걸렸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은 것처럼 쏜살같이 만남에서 결혼까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귀신에 홀린 것마냥 정신을 차려보니 예식 당일 신부입장의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이끄는 손을 잡고 눈물 훔치며 들어갔던 내가 사위를 보게 되는 나이가 됐다니 감개무량이 아닐 수 없다.
“선 결혼, 후 연애”
딸은 엄마의 자취를 쫓는다 했던가?
딸은 사위와 만나지 9개월 만에 결혼을 한다. 난 상견례 하기까지, 아니 하고 나서도
“이 결혼 후회하지 않겠나? 지금이라도 아니면 안 해도 된다.”
몇 번이고 물었고 못내 “NO!" 라고 얘기를 해주길 바라는 순간이 솔직히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없던 계획에다가 즉흥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아 말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사위의 반듯한 모습을 보고, 그 후 사돈될 분을 뵙고 난 후 더 믿음이 갔다. 사위는 내 딸의 성향으로 봐서는 의아한 선택이긴 한데 서로 맞춰가며 잘 살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정말 다른 성향이지만 옥신각신 하며 여태 잘 살고 있다. 안 맞는 것은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 아닌 ‘인정’이 편하다. 이건 정말 살면서 터득한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앞서한 선배로 한 말씀 하자면 결혼 전 함께한 시간은 지나고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함께 하는 긴 여행에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보다 역경과 시련을 함께 나누며 이겨내면서 돈독해지는 부부애가 결혼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짧은 연애기간에 무엇이 결혼까지의 확신을 줬는가를 잊지 말고 부디 평생 알콩달콩 연애하듯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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