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지(憤志), 분지(焚紙)로의 곡해
-남정현의 ‘분지사건’을 중심으로-
1958년 문단에 데뷔하여 50년대~60년대 문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남정현은 세칭 ‘분지사건’이라는 우리 문단사에 있어 아프지만 의미 있는 사건을 남겼다. 이렇듯 남정현은 60년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고민한 작가이다.
1987년 남정현 작품집 『분지』(한겨레)의 재출간은 그동안 금기되던 남정현 소설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분지사건’이 과거의 정치적 유물이 아닌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확대의 문제나, 지배탄압에 의한 작가의 저항 문제 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작가가 지니는 작품의 올바른 의미를 알아보고 더불어 우리 문단에 영향을 미친 ‘분지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다.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의 앞서 짤막한 작가소개와 ‘분지사건’의 개요를 밝힌다. 그리고 인터뷰의 이해를 돕기 위해「분지」의 줄거리를 적어보았다.
1. 哨兵으로서의 남정현
“작가란 결국 최일선의 초소에서 조국의 산하와 민족의 이익을 지키는 초병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정현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글쓰기를 한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작가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러한 작가정신을 가지고 있는 작가소개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작가 남정현은 1933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서 1958년 《자유문학》을 통해 <경고구역>으로 등단한다. 그 뒤 <굴뚝 밑의 유산>을 발표하고 1961년 <너는 뭐냐>로 제 6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등단한지 3년에 불과한 신인작가가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드문 일이어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뒤로 1962년<자수민><광태>,1964년 <사회봉><부주전상서><탈의기>등 사회의 문제를 그리는 소설을 쓴다. 그리고 1965년 <분지(糞地)>를 《현대문학》에 발표한다. 이 <분지(糞地)>가 반공법에 저촉되어 구속, 기소되어 징역 7년을 구형받는다. 하지만 1967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분지필화사건’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게 된다. 그 뒤 1970년 <방귀소리>를 발표하고, 오랜 벗 이어령의 권유로 1973년<허허선생1>을 시작으로 ‘허허선생’시리즈를 이어간다. 하지만 또다시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긴급조치 1호위반혐의로 4월 구속된다. 그러나 육영수사망에 의한 조의의 건으로 남정현은 9월 긴급조치해제로 석방된다. 1975년 <허허선생2>1980년<허허선생3>발표되고 1987년에 남정현 대표소설선 『분지』(한겨레)가 재출간하다. 그 뒤 1988년<핵반응-허허선생4>1990<신사고-허허선생5>1992년에는<허허선생옷벗을라>등의 허허선생시리즈를 이어가며 시대에 변화하는 당시의 허허선생들을 비판하는 소설을 써나갔다. 남정현은 허허시리즈를 마감하는 20여년의 세월에 대하여“20년이란 세월은 한마디로 말해서 허허선생과의 피나는 대결시대였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남정현이 작품 속에 품으려는 시대의식을 짐작케 한다.
2. ‘焚紙사건’이 되어 버린 ‘糞地사건’
위와 같은 소개를 통해서 작가가 밝혀온 작가 정신을 스스로 실천해 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중 무엇보다도 작가에게나 한국문단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지사건’이다. 분지 사건을 중심으로 한 발표인 만큼 ‘분지사건’의 개요를 밝히고자 한다.
당국의 정식구속이 있었던 것은 1965년 7월전인 5월 초순부터 이다. 당시 굴욕적인 대일 외교의 반대투쟁 등으로 한일협정 반대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으로 시국은 고조되어있었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남정현은 정식 구속당하기 2개월 전에 이미 을지로 3가 ‘충일기업사’로 연해 되었다. 이 때 당국이 문제로 삼은 것은 3월 《현대문학》에 실린 <분지>가 용공 적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분지>가 북한의 《통일전선》이라는 기관지에 5월8일 실리게 되면서 이다.
남정현은 중앙정보부에 반공법 위반으로 1965년7월9일 서대문 구치소로 구속된다. 7월17일 서울 지방 검찰청으로 사건이 송치 되지만 7월23일 구속적부심사 끝에 석방된다. 하지만 이 사건을 맡은 김태현 검사는 1년을 미결로 두더니 1966년7월23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 다시 불구속 기소한다. 적용법조는 반공법 44조 1항이었다.
1966년 9월6일 첫 공판 이후 8회에 걸친 공판이 계속되었다. 3회부터는 김태현 검사가 부산으로 전출을 가게 되어 박종인 검사로 교체된다.(1967.2.8) 남정현의 변호에는 김두현, 이항녕, 한승헌 변호사가 있고 작가 안수길이 특별 변호를 맡았다.
1967년 2월8일 제 3회 공판은 분지사건의 클라이맥스라고 불리는데 이날 검찰 측 증인과 변호인 측 증인에 대한 신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피고 측 증인으로 이어령 문학평론가가 나와서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하지만 1967년 5월24일 결심공판에서 <분지>가 대남 적화를 노리는 북괴주장에 동조하는 용공적인 내용이므로 그 문학성이 어떻든 간에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요지의 논고 끝에 반공법 제 4조 제1항의 법정형 상한인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구형한다. 검사판결은 <분지>가 문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작품내용의 반미, 용공성 때문에 법의 제재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한국문인협회도 법원과 당국에 진정서를 보내면서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고 김춘수 또한 이를 시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67년 6월28일 오전 10시 서울 형사 지방법원 제 2114호 법정에서 판결을 선고한다. 이는 “피고인에 대한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라는 박두환 판사의 판결 주문이었다. 「분지」는 반공법에 저촉되는 내용이므로 피고인은 유죄이나 정상을 참작하여 ‘선고유예’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에 항소를 제기 하였지만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부는 항소이유를 모두 ‘이유 없다’고 배척하여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憤志를 焚紙로 곡해하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문단사에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남게 된 ‘분지사건’과 남정현 작가의 이해를 돕고자 <분지>의 간략한 줄거리를 적어본다.
3. 1965년3월《현대문학》123호-「분지」
남정현의 <분지>는 그의 소설 중에서 반외세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분지>는 향미산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속에서 당시 한국의 문제를 담아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홍만수가 그의 죽은 어머니와 이야기 하는 서간체 방법을 취한다. 홍만수는 홍길동의 10대손으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해방군인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홍만수의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을 당해 미쳐 죽는다. 그 후 홍만수는 군인으로 6.25를 겪고 제대한다. 그동안 동생 분이는 스피드 상사의 첩이 되어있었다. 홍만수는 어머니의 사건으로 미군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살아갈 방도가 없자 분이에게 의탁한다. 결국 미군에 의존하여 미군물품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스피드 상사는 결함 없는 분이의 몸을 밤마다 자신의 본처와 비교하며 학대한다. 그래서 홍만수는 스피드 상사의 본처의 육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다. 그러던 중에 본처 비취여사가 방한하자 그녀를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육체를 확인한다. 이 일로 전 미군은 홍만수를 겁탈한 것으로 간주하고는 강간범 취급하며 향미산을 포위한다.
미국여자를 겁탈했다는 죄목으로 1만의 미사일을 동원하는 일은 비현실이다. 하지만 미국영향아래서 억압받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비현실의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미국에 적대감을 가지나 결국 그 미국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한국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차별한 미국의 모습 뿐 아니라 미국의 그늘 밑에서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국에 빌붙어 살아가는 위정자에게 비판을 가하는 가장 시대적으로 현실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분지사건’을 야기했다. 필자는 이처럼 문단사적으로 첫 필화사건의 작가로 남겨진 남정현을 직접 만나 ‘분지사건’과 더불어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어간 그의 작가정신을 들어보았다. (앞에 인사말 등은 적지 않았습니다.)
4. 2009년 11월 11일, 작가에게 듣는 ‘남정현과 분지사건’-인터뷰 내용
질문자: 어느 대담에서 “작가란 신이 창조해 놓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져서 소설가를 소망”하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럼 어릴 때부터 줄곧 꿈이 소설가였는지요? “더 좋은 세상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직접적 계기가 있지는 않으셨는지요?
남정현: 가족 모두 가톨릭을 믿습니다. 그중 제가 제일 못하지만요. 그래서 어릴 적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본다면 실패작이라는 생각을요.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거든요. 평등하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자신하고 비슷하게 생긴 인간을 만들어 이번에는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세계를 만드시고자했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인간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보다 더 나쁩니다. 자연의 세계보다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굴을 보이시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창피해서요. 그때 만약 내가 이런 어지럽고 잘못된 세상을 고치는, 세상을 바꾸는 글을 써서 정말로 사람들이 바뀌고 고쳐진다면 하나님이 저에게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이 말씀을 어머니께 말씀드렸죠. 뭐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문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 때문이지요. 이 말은 재판 때 처음 말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질문자: 예전엔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월계’라는 다방에서 많은 지인과 친분을 쌓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요즘에도 소위 아지트를 삼고 자주 모이시는 곳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요즘은 문인 어느 분과 교류가 많으신가요?
남정현: 요즘엔 다들 나이가 많이 들어서......(웃음) 자주 만나지 못해요. 그리고 지금은 문인친구가 많이 없어요. 요즘 작가들은 다들 젊으니까요. 당시 문인들은 나이가 들어서 먼저 간 사람도 있고, 그리고 있더라도 소설을 안 쓰기도 하고...... 예전엔 신동엽과 자주 어울렸었는데......세상 떠날 때 내가 안아서 보냈지요.
질문자: 선생님께서는 아픈 기억이시겠지만 아무래도 ‘분지사건’을 묻지 않을 수 없겠네요.
그날의 사건을 제가 피부로 느끼기에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고, 또 공공연한 비밀처럼 교육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무의식적으로 때가 되면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반공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런 저에게 <분지>소설은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학이 힘이 있다 하고, 그렇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경계를 했겠지요? 물론 그동안 <분지>와 ‘분지사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셨겠지만 당시 문단의 분위기와 집필하게 되신 직접적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분지>를 보면서 느낀 것은 ‘미군’의 인식이 다른 작품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작품들을 보면 미군에게 당하고 사는 현실(양공주, 문란한 생활) 그 자체를 다룬 것이라면 <분지>는 홍만수의 행동에서 대응을 느꼈는데요.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더불어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신 미군, 혹은 미국은 어떤 것인가요.
남정현: 나는 미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반미라고 하는데 나는 반미가 아닙니다. 다만 미국의 지배체제가 싫을 뿐이에요. 만약 미국이 지금과 같은 체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싫어할 일이 없었겠지요.
삼국시대, 고려, 소위 조선 500년, 식민지 36년, 왕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의 한국 시대가 없었습니다. 천안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들어가기를 청한 후 들어갔던 시대를 가졌습니다. 명, 청의 나라를 위해 산사람이었고. 일제36년은 뭐 말 안 해도 아는 일본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이름과 성마저도 호적에서 털린 그런 상황이었어요. 이런 식의 식민지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 후 해방 후에는 미국을 떠받들지 않으면 못사는 나라였어요. 다시 미국의 시대였지요. 오래 전부터 김부식 같은 사람이 묘청과 같은 자주성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없애던 그런 시대를 지금까지 가지고 사는 나라지요. 우리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 외세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외세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쌍한 민족으로 살뿐, 아무리 좋은 머리를 가졌어도 좋은걸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아부하고, 추종하게 하고, 자기생각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외세문제를 해결 못하면 발전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꼭 외세문제를 해결해야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예속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영역을 맡은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는 앞서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중심이란 변할 수가 있거든요. 또 변하고 있는 조짐도 보이고 있고요. 소설가는 이런 것을 빨리 알아야합니다. 바람개비를 하나 돌려도 그 중심축에서 소리가 나지요. 하물며 기존의 중심축에서 다른 중심축으로 변하려면 더 큰 소리가 들릴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이런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그런 시기의 소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전 일제시대에 많은 문인들이 이런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일제시대가 끝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했지요.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시대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인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소설이란 틀을 가지고 우리세상을 알리고 진실을 알린 거예요. 그래서 비평가나 다른 사람들이 소설작법을 가지고 내 소설 이야기들을 하는데 나는 참 애쓴 거지요. 되도록이면 소설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 하도록 말입니다.
질문자: 문제 인식 차이의 변화라든지, 반공법 저촉에 따른 작가의 작가적 변모라든지, 여러 이유로 ‘분지사건’ 전과 후가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절필하는 문인들도 생기고,,,,,,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그래서 저는 분지사건 이후 상황을 그린 작품이 <방귀소리>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발표된 시기도 그러하고 그 소설 안에 ‘여자얘기하면 귀한 집 규수 바람나게 하고, 돈 얘기하면 돈 천하에 무슨 꼴 당할지 모르겠고, 호의호식하는 사람네들 얘기하다가는 적을 이롭게 한 행위라 하고, 가난한 사람들 얘기는 적에 동조하는 얘기라’ 할 거라고 고뇌하는 ‘골’이 당시 시대 문인들의 모습이 아닐까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남정현: 분지이후에 작가의 자기검열이 더욱 심해졌을 겁니다. 이때부터 사회참여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고 순수, 참여논쟁도 나왔습니다.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였지요. 변호사가 증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더니 다들 선뜻 나서주지 않더라고 하더군요. 그때 이어령씨가 맡아주셨지요. 그때 이어령씨의 말이 유명했지요. 아직도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세요.
그때는 절필이라기보다는 쓰지 못하게 만든 시기였어요.
질문자: 1965년 5월 8일자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통일전선》에 개재된 것이 반공법 저촉에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남정현: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외세를 비판했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시대비판으로 부정부패 같은 문제만 다뤘다면 이렇게 문제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야당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외세비판, 즉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니 정당에서도, 나라에서도 좋아할 수 없었겠지요. 바로 외세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동안 외세를 직접 비판한 것은 없었어요. 나도 변호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분지’ 나오고 1년 후에 고대데모 구호로 처음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전에는 하나도 없었어요.
질문자: “세상에서 어떻게 굶어 죽지 않고 맞아죽지 않고 용케 목숨을 이어”가고자 “긴 세월을 그저 열심히 땅만 쳐다보며 살아온”(분지) 많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특혜족”이 판치는 세상, “될 수 있는 대로 양심이 없는 것이 양심인지 모르”(부주전상서)는 세상을 알리기 위해 선생님은 풍자의 방법을 사용하셨는데요. 검열을 피해 대중들에게 쉽게 가기위해서, 그리고 민중들에게 가까이 가기위해서 사용하셨다고 짐작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풍자의 방법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의 억측이지만, 만약 당시 검열 같은 문학적 억압이 없었다면 선생님의 독특한 소설작법과 풍자(울분을 삭히는 일종의 생존양식)의 방법은 생겼을까요? 다시 말해, 풍자라는 방법이 문학적 영향을 받아서 사용하신건지, 시대의 선택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사전 검열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 사전검열이라는 것이 궁금합니다. 예전 채만식소설에서 도장이 찍히고 줄이 그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시대의 검열도 그런 식으로 출판 전에 이루어 진건가요.
선생님 회고하실 때 ‘미운털’이 박혔다고도 말씀하셨는데 (물론 이 미운털에 대한 말씀은 민청학련과 같은 시련을 들어 말씀)-이런 ‘미운털’ 때문에 그 후 더 심한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는지요?
남정현: 일제시대와 같은 그런 검열은 아니었습니다. 작가들 스스로 자기검열을 했어요. 국가보안법은 무서운거였어요. ‘분지사건은’ 작가가 발표한 작품을 가지고 검열을 받았던 것 중에 처음 있었던 일이었지요.
한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 뉴스든 신문이든 진실을 알려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서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은 본능적 욕구였지요. 그 당시에는 장막이 쳐져 있었고 나는 그 장막 너머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의 틀을 허물지 않고 쓰기위해 노력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소설미학과는 거리가 멀 수가 있어요. 일반적으로 비평가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설작법이나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요(웃음)
문학은 세상과 밀접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 자주 듣는 유행가, 친구들끼리와 대화 모두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마지막 길에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위의 모든 것이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문학을 안 하고는 살수 없어요. 그러니 사람들과 밀접한 정치가 문학과 멀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현실 속에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문제, 그 시대의 진실이 있는 문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시대를, 시대의 진실을 알리는 방법으로 소설을 사용한 것이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풍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검열이 있었어요. 함부로 쓰고 싶은 데로 쓸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풍자나 비유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족은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족이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말하기 좋기도 하지만 가족이야기로 해야 집안사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허허선생의 문제를 말하는 것도 허허선생의 아들 허만이 말하는 것으로 아들이 아버지를 비판하는 거라고 할 수 있었지요.
특히 이런 마음이 <자수민>에 나와 있어요. 가장 힘들었던 마음이 들어간 작품이지요. 힘들여서 쓴 것이지요.
‘여기’가 어디냐고 구태여 그 위치를 가지고 따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기는 그냥 여기일 따름이요, 다시 말하면 저기도 거기도 아닌 모름지기 여기라는 사실 이외엔 조금도 다른 뜻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죽은 한이 있더라도 여기의 위치만은 기어이 좀 알아야겠다고 덤비는 친구들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여기의 주소를 되는대로 누설하자면 ‘여기’는 그저 별다른 곳이 아닌 아무개라고 하는 일개 짐승이 아닌 분명한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는 그렇게 아기자기한 지구의 한부분이라고나 해둘까, (선생님 낭독)
간단하게 대한민국, 한국, 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시대였지요. ‘여기’ 라고 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거였지요. 빛은 중앙정부를 의미해요. 강한 빛으로 머리카락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감시하였지요.
질문자: (65년 분지사건)이후 선생님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1971)를 결성하셨습니다.(삼선개헌 장기집권반기) 이병린(변호사),천관우(언론),김재준(종교) 공동대표로 한 것으로 4.19혁명 기념일에 ‘반 박정희 투쟁’을 하셨습니다. ‘분지사건’으로 참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 어떻게, 그야말로 ‘거국적’ 모임을 만드실 수 있으셨나 궁금합니다. 그것에 따른 육체적, 경제적 고통이 따를 것을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말이죠. (실제 1974년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구속-1975년 9월 해제)
남정현: 처음의 민간단체였어요. 언론계, 법조계에서 사람을 모았고 나는 분지사건으로(웃음) 내가 문학계를 맡았지요. 조금씩 바뀐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기분 좋았습니다.
그런데 74년에 잡혀갈 때는 그동안 (분지사건 때)손목 자른다 다시 소설 쓰면 손목 자른다는 그 말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진짜 손목이 잘리는가보다 그랬지요.
질문자: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작품과 채만식의 작품을 같이 언급하곤 합니다. 풍자라는 가장 큰 공통점 때문이겠지요? 이런 말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선생님 소설에는 이름이 큰 의미를 지닌 거 같습니다.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행동능력결여자’, 여자주인공은 ‘외세편중자’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렇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남정현: 대체로 남자는 비전을 의미하고 여자는 잘못된 현실을 의미합니다. 남자들이 무력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기에 현재는 무력하지만 비전은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당시에 힘 있는 것은 사이비 현실이니까요. 사이비 현실에서 힘 있는 사람은 진실로 힘이 필요할 때는 무력합니다. 바로 역사를 바꾸고 틀을 바꿀 때가 그러하죠. 그런 현실이 <너는 뭐냐>에서 표현 되요. 아내는 늘 남편에게 현대현대 라는 말로 타박 하지만 남에게 멱살을 잡혀도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히려 아내는 꼼짝 못하지만 남자는 그들과 함께 하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시대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소설을 사용하였습니다. 간신히 소설이란 틀을 헤치지 않고 말하려고 애쓴 거예요. 나는 비평가에 말에 신경 쓰지 않아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소설을 오해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 것 중에 홍만수가 강간을 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 소설 안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아요. “혹시 엉겁결에 제가 강간 비슷한 짓을 했을지는 모릅니다만”이렇게만 나오지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홍만수 스스로도 자기가 강간범으로 몰리고 있음을 한탄합니다. 대한민국은 그런 민족이 아니지요. 홍만수가 우리 민족을 대신하는데 내 스스로도 그렇게 쓰지 않았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그리고 홍만수는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도 미국의 펜타곤이라는 거대 힘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하지 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툭 솟아나온 눈깔”이란 말에 결의가 느껴지지요. 그리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萬壽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오래 영원히 산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홍만수는 이렇게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웃음)
그리고 소설 중에 “다이얼 알링턴발 0.038메가사이클에 맞추시고”이란 말이 나옵니다. 0.038 같은 건 없지요. 바로 38선을 비유한 거예요. 알링턴발도 한국의 국립묘지가 있듯 미국에도 국립묘지가 있는데 그 지명을 나타낸 거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라는 말도 오해들을 많이 하는데 러닝셔츠를 찢어 새 깃발을 세우자는 것은 통일을 이루자는 거지요. 그동안의 각각의 태극기를 찢고 새로운 깃발을 세우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그 끝>(1995)에서 많은 사람이 이해를 잘 못합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소설 같지 않다고도 하지요. (웃음)하지만 내 생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어서 맨 앞에 실었어요.
작가에게 작품이 세상이니 이 세상을, 사회를 없애는 것은 소설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온밤을 검은 크레용으로 소설을 칠합니다. 밤새도록 지우고 나니깐 정신도 몽롱하지요.
“기왕의 썩은 세상은 이제 끝장을 봤다고 생각하며 그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그는 끝내 다다르고야 만 세상의 그 끝에서, 그 암흑에서, 그 암흑을 수수만 갈래로 흩날리며 찬연히 솟아오를 새 세상을, 아 그 새 태양을 마음속에 그리며 깊은 잠에 젖어들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밝았는가. 땅 위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빛나는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기진한 그의 면상 위로 따끔따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선생님 낭독)<세상의 그 끝> 29면
세상을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지우는 것도 힘듭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운 새 세상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잠이 들지만 아직 현실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문제겠지요. 소설가는 이런 세상과 대결하는 그 끝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문학은, 소설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격려를 합니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작은 글에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고 합니다. 그래서 죽을 것을 살리기도 하지요. 그것이 소설이 해왔던 일로 당연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게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세상을 그냥 허용하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요. 그래서 죽을 것을 살린 것이 죄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시장경제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에 실망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체념하게 하고 위로하게 하고 마냥 이해하게 한 것이 문학이 아닌가, 그래서 그대로 멈추게 한 것이 아닌가. 문학이 그런 마음들을 막아 논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내 소설을 종래 소설작법으로 보면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소설은 소설이 아닌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울분을 토해내고 싶어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우성이고 몸부림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일제시대 때와는 또 다르게 화려하게 장식된 시대입니다. 작가는 이런 시대를 제대로 보고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민중과의 접촉이 있는 것이기에 작가는 평화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지원하고 북돋는 작품을 써야 합니다.
활자매체와 전파매체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장막 뒤의 진실을 오히려 감추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문학은 작가의 영혼과 영감을 현실화 시킬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 우리시대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소설은 상징이 더해지고 상징이 더해진 것입니다. 물론 자유롭게 풀어쓸 수도 있지만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에 상징을 더하고 더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징이 더해지고 또 더해지면 그것은 암호가 되지요. 암호는 그야말로 소수, 둘이서,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상징을 써야하지만 그것이 암호가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지적수준을 생각하고, 민중들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서로 통하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어법이랄까 문장이랄까.
그래서 우리 시대의 문장은 우리시대의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인터뷰 마지막으로 작가로서 애착 가는 작품을 물었다. 그리고는 <부주전상서>에서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이란 말이 인상 깊었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한 작품을 말씀하시기보다 책의 이곳저곳을 다시 찾아주시며 <광태>는 5.16을 나타낸 것이고 <자수민>은 가장 어렵게 쓴 작품이라시며 소설의 내용을 직접 집어주시면서 설명해주셨다. 그 모습에서 지치지 않는 문학의 열정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순수니 참여니 그런 것은 모르신다고 하신다. 반미도 아니라고 하신다. 풍자도 계획된 작법이 아니라고 하신다. 물론 작가별로 추구하는바가 다르겠지만 선생님은 시대의 문제를 시대의 문법에 맞게 온몸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사회의 문제를 말씀하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작가란 장막 뒤에 진실. 변화되고 있는 시대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조심스럽게 고문에 대해 묻자 그것에 대한 대답은 꺼리시는 것이 역력했다. 아직도 분지사건을 말씀하실 때는 긴장하시면서 기억을 떠오르신다. 시간으로 지우기에는 반공법에 의한 ‘분지사건’이 아픈 사건임이 틀림없다.
외세나 미군의 모습은 <분지>이전에도 이후에도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외세문제의식이라기보다 그것마저도 시대의 배경으로 표현했다. <분지>이전에 <쑈리킴>(송병수,1957)은 청계천 다리 밑 왕초 밑에서 동냥질하다 도망치고, 교통순경에게 붙잡히고, 고아원으로 끌려가고, 탈출하여 미군부대 있는 곳으로 도망쳐온 전쟁고아 ‘쑈리킴’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전쟁고아들의 생활과 시대풍경을 그린다. 물론 미군에 대한 반감은 있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그보다 미군으로 야기되는 물신주의를 문제 삼는다. 그 뒤로 나오는 <왕릉과 주둔군>(하근찬,1963)에서 주인공은 왕릉을 지키는 박첨지로 “머리에 어린애 주먹만한 상투를 튼”인물이다. 딸 금례와 근근이 살아가지만 조상에 자부심으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물로 왕릉 옆에 자리를 잡게 되는 서양병정과 대립되는 인물이다. 서양병정에 의해 미풍이 훼손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끝내 그의 딸 금례가 양갈보들과 함께 도망간다. 기존 미군에게 가졌던 구원자의 모습에서 전통과 풍습을 파괴하는 ‘주둔군’의 인식이 나타난다. 하지만 박첨지는 금례가 도망갔다는 사실보다 왕릉을 지킬 손이 끊어진 것에 대한 걱정을 통해 올바른 현실의 대응이 미진한 상태를 볼 수 있다. 역시 당시의 잘못된 상황을 고발하지만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분지>이후로 나온 <황구의 비명>(천승세,1975)에도 여전하다. 아내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양공주 담비킴을 찾으러 용주골로 간 나는 담비킴-은주 옆에 놓인 신발의 차이를 보고 “신발 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신발들은 너무나 잔인하게 크고 작았다”라는 말로 미군과 한국의 모습을 비유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양갈보생활을 하는 은주에게 “은주의 외씨 고무신 곁에는 황토로 범벅된 검정고무신이나 코 째진 짚신 같은 것이 놓여 있으면 되는 거구”라는 식의 대응을 표현한다. 역시 미군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 아닌 “황구는 황구끼리말야”라는 소극적 대응이다. 즉 <분지>와 같은 직접적인 외세문제의 대응은 문단에서 독보적인 것이기에 ‘분지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분지사건’이후 남정현의 말처럼 우리 문단은 반공법에 더욱 위축되었다. 발전되는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정현의 ‘분지사건’은 변호사 한승헌의 말을 통해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된다.
“필화가 없다는 것은 일응 좋은 현상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무 제약 없이 쓰고 싶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상황 하에서만 성립될 이야기다. 역설 같지만 필화사건은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앞의 경우에 규제자의 몰이해나 억압 그리고 작가의 수난이 불행이라면 뒤에 경우에는 작가의 무력이 문학 부재의 반사적 안정일 수도 있어 역시 불행이란 말이다.”
그렇게 남정현은 작가란 민중에게 올바른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한다는 작가적 소신을 실행하시며 작품을 써온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정현의 ‘분지사건’이 의미가 있는 것은 여전히 사회는 민중에게 올바른 진실을 장막 속에 가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