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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문학론
1. Platon, <<국가론(The Republic)>>
"그는 안락하게 그리고 아마도 부유하게 자라났다. 그는 잘 생기고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플라톤이라고 불린 것도 그의 어깨가 넓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무술도 뛰어나, 이스토모스의 경기 대회에서도 두 번이나 상을 탔다. 이런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 철학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윌 듀란트(Will Durant)는 <<철학 이야기>>에서 말한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기원전347)은 아테네의 명문가 집안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인데, 두 형(아데이만투스, 글라우콘)은 명저 <<공화국>>의 화자로 등장한다. 18세 무렵 우연히 만나게 된 "아무리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못 생"긴, "대머리에다 크고 둥근 얼굴, 깊숙하고 쏘아보는 듯한 눈, 많은 술잔치에 참석했다는 역력한 증거인 납작하고 빨간 코"를 가진 소크라테스 때문에 운명이 바뀌었다. "유명한 철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짐꾼의 모습"(위와 같은 책)인 이 대화술의 천재인 스승이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플라톤은 스물여덜 살이었다. 신변의 위험 때문에 망명길에 오른 플라톤은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귀국, 명성과 안정 속에서 만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대략 제1기의 아테네 시절, 제2기(기원전 399-387)의 망명과 방랑 여행기, 제3기(기원전 367년까지) 아카데미 창설과 활동기, 제4기 만년으로 나누는 게 통례이다. 이와 병행하여 플라톤의 저술 작업도 초기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록한 시기(<<소크라테스의 변명>><<향연>> 등), 중기 아카데미 활동기의 <<국가론>>, 그 이후의 저작으로 나눠 고찰하고 있다.
2. Thomas More, <<유토피아(Utopia)>>
청빈과 지조는 언제나 의좋은 짝으로 역사의 교훈이 되지만 부당한 권력은 이를 훼절켜야 만 지탱되는 생리구조를 가진다. 권력의 역사는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듯이 청빈한 관리를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낙인 찍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More, Sir Thomas. 1478 - 1535.)도 그랬다. 보통법원 판사의 둘째 아들로 런던 밀크 스트리트에서 태어난 모어는 캔터베리 대주교 겸 대법관이었던 존 몰턴 집에 입주(12세), 그의 추천으로 옥스퍼드에 입학(14세)하여 르네상스 의 인문학적 교양을 쌓았다. 집안의 희망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자 링컨 인(법학원)에 들어 가(18세) 수학하면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알게 되어 평생 교유관계를 가졌 다. 변호사 자격을 획득(22세)한 뒤 의회에 진출(26세)했으나, 헨리 7세(장미전쟁을 종결시킨 튜더왕조의 창시자로 재위 1485-1509)의 가혹한 조세 부과를 반대하여 그 보복으로 아버지에게 벌금을 부과해 납부할 때까지 런던탑에 감금당해야만 되었다. 헨리 7세 치하에서는 출세길이 막힌 모어인지라 수도사가 되어버릴 생각도 했지만 헨리 8 세(1491년생, 재위 1509-1547) 즉위로 욍립법학원 감독관, 이듬해(1510)에는 런던 대리집정 관이 되었다. 모어에게 실력 발휘의 기회가 닥친 것은 1514년 양모 수출 금지로 야기된 영국과 네델란드. 카스틸리아 사이의 분쟁 때였다. 왕이 파견하는 특명공사 소식을 듣고 상인들은 모어를 대동해 줄 것을 요청하여 사절단에 수행한 그는 7개월 가량 머물면서 협상에 성공, 그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의 길이 트였다. 물론 이 대석학은 관직에 자족한 것만은 아니어서 해외파견 중에도 앙뜨와프에서 <<유토피아>> 제2편 주요부분을 집필하는 등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하원 의장(1523)을 거쳐 대법관(1529년, 51세)이 되어 청빈과 공명정대한 법 집행으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을 때 헨리 8세는 이혼을 궁리하느라 분주했다. 형이 죽은 뒤 스페인 공주인 형수 캐더린을 왕비로 맞은 것은 관습이기도 했지만 스페인 이란 강대국에 대한 외교관계를 고려한 추밀원의 압력이 우세했다. 성서 <레위기>는 시동 생과 형수의 혼인을 금했기에 교황의 칙서까지 얻어 올렸던 캐더린과의 첫 결혼이 온전치 못했음을 입증하느라고 증인까지 세워 선서하는 등 소란을 피워댄 결혼이었던 터라 캐더린은 진짜 처녀처럼 머리를 땋지 않고 결혼식장에 섰다. 그런 요란을 떨었던 결혼이었기에 당연히 이혼이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일이 겹쳐 교황과의 사이도 껄끄럽던 터라 교황청의 이혼 승낙은 뜻밖에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이럴 때면 꼭 어거지로 천륜을 거슬리면서도 권력자의 욕망을 관철시킬 수 있는 묘책을 제공하는 책사들이 등장한다. 크랜머 (Cranmer, Thomas.1489-1556)사제는 로마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유명한 신학자 두셋의 증언만으로 충분하기에 재혼의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책략을 내놓자 왕은 용기를 얻어 옥스퍼드. 캠브리지. 소르본느 등 저명인사 8명에게서 형수와의 결혼은 무효이며, 교황이 재혼 인가를 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견해를 도출하여 필요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1532년 11월 이혼한 왕은 권력에 나긋나긋한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1533년 1월 25일 이미 임신중인 앤 블린과 결혼했다. 인간에게 신앙이란 무엇일까. 헨리 8세는 유럽 대륙을 휩쓸던 종교개혁을 강력히 부인하 면서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만을 진리로 받아들여 교황에게서 "신앙의 옹호자"란 칭송을 받 기도 했었는데, 막상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혀서는 생판 딴전을 펴고 말았다. 교황은 이 결혼 이 불법임을 선포하고 10일 안으로 이혼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왕은 이미 로 마의 고함에 귀를 막아 버렸다. 흔히들 헨리 8세의 이혼 원인을 사랑에서 찾지만 앙드레 모로아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 더라도 앤 볼린(1507-1536)을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있었던 것"이라면서, "왕조의 이익과 나 라의 이익이 왕자의 출생을 요구"했기 때문인 것으로 <<영국사>>에서 풀이한다. 일설로는 헨리 8세가 매독이었다고도 한다. 캐더린은 딸 메리만 낳고는 곧 유산했기에 후계자 없는 왕실의 비극을 되풀이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이런 무리수를 두었을 수도 있다. 교황의 동의를 끝내 얻어내지 못하자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교회의 유일 최고의 수장"자리에 왕 자신이 앉도록 선포했다. 대륙과는 다른 영국식 합리성을 띈 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종교개혁은 성직자들 거의 모두가 새로운 "선서"를 하도록 만든 일대 소용돌이를 몰아쳤다. "섬 나라적, 언어학적, 국민 의식의 종교적 표현"이라고 모로와는 풀이하면서 이렇게 썼다. ......교회는 강력한 세력을 펴고 있었으며, 최대의 권세를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다소의 저 항을 받는 일 없이는 이 세력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주교와 사제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이상하리만큼 순종적이다. 벌써 이전 부터 그들도 주위의 국민의식에 침범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고급 사제는 종교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가였다. 그들이 의석을 가지고 있었던 상원은 아무런 반항 없이 모든 개혁을 가결하였다. 말하자면 선영국 국교라고도 말할 수 있 는 것이 이들 고급 사제들 전부에게 침투되어 있었다. 극심하게 가난했던 하급 사제는 그들이 관리로서의 대열에 끼는 일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 낄 정도였다. 그들은 위클리프 파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사제의 독신생활을 억지로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앙드레 모로아 지음, 최을림 옮김 <<영국사>> 중권, 서문당, 50-51쪽 몇몇 신앙인과 대법관인 토마스 모어는 이 혁신적인 분위기도 아랑곳 않은 채 의연히 로 마의 카톨릭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대법관의 동의를 얻어 국민적인 지지를 도출하고 싶었던 왕은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옴짝 않는 모어에게 권력이 자행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정치조작 사건 날조나 판사 시절의 부정부패 추궁 등 옭아맬 수 있는 죄목을 찾아내다가 그것도 실패하자 부패한 권력 이 언제나 휘둘렀던 보검인 반역죄를 적용시켰다. 이미 모어는 그 낌새를 채고 대법관직을 사임, 앤 왕후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534년 3월 앤 왕후의 소생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한다는 왕위 계승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2월에는 왕의 존엄성, 호칭, 이름을 악 의적으로 훼손하는 자에게 대역죄를 적용하여 처벌한다는 취의의 반역법이 강행되었다. 모어의 일대기를 가장 우아하게 그린 로버트 볼트의 희곡 <<사계절의 사나이>>는 이 석 학이요 인류의 양심을 추호의 과오도 없는 완벽한 인간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판사 시절 에 모어에게 은컵을 선물로 준 여인을 간신히 찾아내어 부정부패의 위증을 시켰으나, 모어 는 양심에 걸고 맹세코 자신은 법을 어기는 판결을 내려 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종내에 는 그녀도 비록 컵은 줬으나 만족할만한 판결은 받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마는 것으로 볼트 는 묘사하고 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반역죄로 기소 당해 법정에서 검찰과 공방이 전개 될 때 시종 침묵을 지키는 대목이다. 침묵은 피고인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대의 변호 인데 권력의 시녀로서의 재판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를 묵살코 판결은 사형이었다. 토마스 모어 연구자로 유명한 칼 카우츠키는 <<토마스 모어와 유토피아>>에서 이 성자 에게 내려진 판결문이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소개해 준다. "모어를 런던탑으로 도로 데려갈 것....거기서 런던 시가지를 빙 둘러서 사형장으로 데려온다. 거기서 교수형에 처한다. 단 반 죽인 상태에서, 숨이 붙어있는 동안 신체 각 부위를 베어낼 것. 성기를 절단, 배를 갈라 장 기를 끄집어내고, 그리고 화형에 처한다. 끝낸 뒤 남은 시체를 넷으로 갈라 시가지의 네 성 문에다 하나씩 매단다. 단 머리는 런던 브리지에 매단다". 이 판결을 뒤엎고 참형을 시키도 록 한 것은 왕의 대사면에 의한 것이었다니 잔혹한 권력에도 인자함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모어의 맏사위 윌리엄 로버의 <<토마스 모어의 생애>>, 토마스 스티풀턴의 <<세 사람 의 토마스>>, 증손자가 쓴 <<크리세이커 모어>> 등은 예외 없이 모어를 성인화 시키려는 의도가 강력히 스며있는데, 거기에는 돈독한 신앙인들이 발휘하는 초능력들이 거침없이 나 열되어 있다고 카우츠키는 밝힌다. 모어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부각시킨 카우츠키의 시각과는 달리 앙드레 모로아는 도리어 당시의 로마와 라틴어 성서 중심주의적인 신앙이 영국에서는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었다고 평가한다. 서민대중들이 영어성서와 외세 배격을 원하던 시대에서 지조와 청 렴을 지킨 지식인이 왜 하필이면 역사의 역류를 탔던가를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사형 집행 때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비견되는 장면이다. 사형집행 통고를 받고 "이 음침 한 현세에서 이렇게 일찍 벗어나게 해주신 것은 오로지 폐하의 은덕이기에 감사드립니다." 고 했던 모어는 단두대에 올라가면서 "내가 무사히 올라갈 수 있도록 부축해 주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 할테니까."라고 농을 걸었다. 단두대에 목을 들이 밀면서 그는 내 목은 자르지 만 수염은 죄가 없으니 그냥 두도록 하라며 옆으로 쓰다듬었다든가,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농짓거리를 했다는 기록은 그를 더욱 전인적인 인간으로 승화시킨다. 1535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풍자시인이기도 했던 모어, 당대 유럽 최대의 지성인이었던 에라스무스 와도 절친했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집에 묶게 했던 관계, 등등 모어의 이야기는 아직 도 문학의 생생한 소재로 남아있다. 희생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성역화의 관점이 아닌 객관 적인 인간으로서의 토마스 모어의 면모가 아쉽다. 덧부치자면 앤 볼린에게서 기다리던 왕자가 아닌 딸 엘리자베드가 태어나자 왕은 3년만에 그녀의 부정을 조작하여 단두대로 보내버리고는 제인 시이모어와 결혼하여 대망의 왕자(후 일의 에드워드 6세)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산욕열로 왕비가 일찍 죽어버렸다. 네번 째 왕비 캐더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앤 볼린과 같은 운명을 겪었고, 다섯 번 째 여인은 네 남편을 바 꾼 경력을 가졌는데 왕보다 오래 살았다.
3. Bacon, <<신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
4. Campanella, <<태양의 나라(Civitas Solis)>>
Tomaso Campaneiia(1568-1639)는 이태리 남부 출생. 도미니코수도회 회원. 자연철학자 텔레지오(Bernardino Telesio)에 감동, 변화. 4차 투옥, 은둔 조건으로 석방, 재구속, 석방 후 망명.
5. Morris, <<유토피아 소식(News from Nowhere)>>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 - 1896).
에식스주(州) 출생. 옥스퍼드대((1833∼1855) 수학. 러스킨 사상에 심취. 건축가 지망에서 회화로 전환, 생활환경 전반에 걸친 운동 전개.
<<지상의 낙원(The Earthly Paradise)>>(1868-70).
6. Huxley, <<멋진 신세계(Brave New Wold)>>
가장 이상적인 사회에서 사랑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까에 대한 관심은 오랜 문학적 과제였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란 공상 소설을 통해 25세기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재미있게 그려 준다.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 부화 및 조절국의 34층 건물에 있는 실권자 10여 명에 의하여 통치된다. 인공 부화 장치는 96쌍을 한꺼번에 양산하는 기계로 태아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런 등의 5등급으로 구분되어 길러진다. 물론 계급에 따라 육아 방법이 다르다. 태어나서부터 모든 통제와 간섭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신세계에서는 자유란 개념은 사라지고, 가난, 질병, 고통도 없는 대신 이상, 소원, 개성 등의 인간적 특성도 사라진다. 신세계의 기원은 포드 자동차가 T형 자동차를 만든 해를 기원 1년으로 잡았기에 기원전이니 후니 하는 연대법도 없다.
이 시대에서 가장 큰 모욕적인 욕설은 “어머니를 가진 녀석”이란 것으로 모두가 인공 수정으로 어머니가 없다. 당연히 모든 여성은 그녀들이 그렇게 바라던 대로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이브의 원죄를 잊는다. 종교란 것이 사라진 지 오래니 당연한 이치지만 남녀는 단순하게 즐기기 위해 성관계를 가질 뿐이지 아기에 대한 집착은 전혀 없다.
가정이란 개념이 없어졌기에 남녀는 누구하 한 상대에 오래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럴 생리적 구조도 아니다. 한 남녀가 장시간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국가로부터 불순응주의자로 지목받는 것이 된다. 감정으로 말미암은 몰아 상태는 노동에 지장을 초래해서 비능뉼적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알파 프러스 계급 소속의 산 교수는 넉 달 동안에 640여 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신세계의 기본 도덕률이다.
고민이 있을 때 소마란 치료약을 먹으면 거뜬히 해결되는 이런 신세계에서도 이단자가 있을 수 있을까. 우주 만물에는 꼭 그런 별종들이 존재한다. 버나드 막스라는 남성과 레니나 크로운이란 여성이 그 실례이다. 이 이상향 속에서 그들은 이상하게도 자기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인공 수정을 할 때 담당자의 실수로 알코올이 너무 많이 흘러들어가 정신과 육체적 구조에서 신세계에 맞지 않는 조선을 가진 탓으로 버나드는 묘한 이단자로 살아간다. 레니나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건강하고 관능적인 여성인데 어느 날 버나드와 뉴 멕시코 근교의 야만인 마을을 구경 갔다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보고는 수치스러워 고개를 돌릴 지경이 된다. 그 야만인의 마을에서 우연히 백인 존을 발견한 그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를 문명사회로 데려오나 존은 영 적응하지 못한다.
자기주장과 낭만, 시와 종교를 못 잊어하는 존은 레니나에게 사랑을 느낀 나머지 애정을 고백한다. 애정의 고백에 서투른 레니나는 그 의미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문명 사회에서는 결혼이란 풍속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레니나가 이럴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럼없이 성행위를 준비하여 상대에게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모욕과 분노로 참을 수 없게 된 존은 그녀를 걷어차며 문명 세계에 대한 환멸을 되씹는다. 존은 델타 계급 노예들과 아이들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며 폭동을 유발하나 당연히 실패한다. 최고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는 그를 징계하는데, 견디다 못한 그는 은둔생활로 들어가지만 정신적 압박감 때문에 자살하고 만다.
여성들이 이상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부엌과 살림으로부터의 해방이 남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져서 종내에는 사회적 해방의 존재로 되었을 때 과연 남녀는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헉슬리는 1932년 이 작품을 쓰고 난 26년 뒤에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란 글을 썼는데 그는 그 멋진 신세계가 인간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비인격적 권력과 지나친 조직화가 인간화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오늘의 주변에서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7. Kurt Vonnegut, <<갈라파고스(Galapagos)>>
포스트 모더니즘적 기법으로 판타지와 블랙 유머를 구사하여 현대의 마크 트웨인이란 별명을 듣고있는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는 그 이름처럼 독일계 이주민의 후손이다. 세계사적으로 한 획을 그었던 1848년에 도미한 보네거트의 조상들은 인디아나주 인디아나폴리스에 정착한 건축가 집안이었다. 독일인다운 합리주의와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종교에 대한 편견이나 인종차별을 반인간주의로 보는 게 이 집안의 전통이었고, 유머를 소중한 삶의 가치로 인정했다.
형 버나드(1914), 누나 앨리스(1917)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1922. 11.11) 보네거트는 쇼트리지 고교시절(1936-40)에 학교신문 편집일을 맡는 등 일찍부터 문학과 관련을 맺었으나 코널대학에 진학할 때는 생화학을 전공할 요량이었다. 대학신문에 작품을 투고하는 등 문학적 활동엔 열을 냈으나 학과 성적은 뒤떨어져 방황하던 중 1942년에 육군 보병으로 입대, 기술병 훈련을 받고 유럽에 투입, 제2차대전을 가장 혹독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수면제로 자살하여 잠시 귀국(1944.5), 다시 전선에 복귀한 그는 유명한 격전지 발지전투에서 독일군 포로(12월)가 되어 엘베강의 피렌체라는 예술의 도시 드레스덴의 임산부용 비타민 시럽제 공장에서 소련군이 해방시킬 때1945.5.22)까지 복역한 그는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겪었다.
연합군 총공격의 상징으로 알려진 드레스덴 대폭격(1945.2.13)이 감행될 때 그는 환호도 비난도 할 수 없는 미묘한 처지에서 인류의 비극을 체험해야만 되었다. 비전투원인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13만 5천 여명이 집단 참사한 이 폭격은 전쟁의 잔혹성과 역사의 교훈으로 거론되는 일대 사건인데, 보네거트는 이 체험을 바탕 삼아 휴머니즘 문제를 자신의 문학적인 주제로 삼았다.
종전, 귀국, 고교 시절 친구였던 제인 마리 콕스와 결혼(1945.9.1), 신문 통신원, 시카고 대학에서 인류학 석사과정(논문 부적격으로 통과 안됨), 아들과 딸 얻기, 제너럴 엘렉트릭사 입사 등등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의 고비를 넘기다가 손을 툭툭 털고 창작에 전념하겠다고 나선 건 1950년. 그러나 밥벌이 때문에 영어 교사, 광고회사 등에 몸을 담기도 했고 (1954-56) 아버지와 누이 부부의 죽음(1957-59)을 겪는 등 인생살이에 부대끼기도 했다.
아이오아대학 작가 워크샵 연수 참가(1965-67), 드레스덴 방문(1967), 하버드대학에서 창작 강의(1970), 부적격으로 거절 당했던 시카고대학으로부터 <<고양이 요람>>이란 소설로 인류학 석사학위 취득(1971) 등 경력을 쌓으면서 그는 작가로 기반을 굳혔다. 개인적으로는 1979년 첫 아내와 이혼, 질 크레메츠와 재혼(11.24), 1991년 질과 이혼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2차대전 때 나치 선전대장이었던 하워드 캠벨이 종전 후 미국의 첩자였음이 밝혀지나 인간 캠벨에 대한 인식은 다를 게 없다는 인간의 정체성과 정치 역학적인 잔혹성을 그린 <<태초의 밤>>(중앙일보, 오늘의 세계문학 28권, 현충식 역), 산 로렌조 섬에서 보코노미즘이란 신앙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추악한 욕망을 폭로시킨 <<고양이 요람>>(새와 물고기, 노종혁 역), 드레스덴 대폭격 체험을 다룬 <<제5 도살장>>(새와 물고기, 노종혁 역) 등이 있다.
그의 소설은 과학 공상적인 요소에다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적인 요인을 뒤섞은 포스트 모더니즘적 기법이 도두러지는데, 여기서는 디스토피아적 시각으로 접근해 보기로 한다.
갈라파고스(Galapagos)는 남미 에콰도르 서태평양에 있는 화산성 군도로 적도에 가깝지만 한류 때문에 시원한데다 희귀 동식물이 많아 명승지로 꼽히는 지역이다. 소설에서 보네거트는 이렇게 갈라파고스를 설명한다.
백인들이 갈라파고스를 처음 발견한 것은 스페인 선박 한 척이 폭풍으로 항로를 이탈해서 그 제도에 이르른 1535년의 일이었다. 거기엔 아무도 살고있지 않았으며,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 운 나쁜 배의 목적은 오로지 남미 해안을 계속 따라 내려가다가 파나마 주교를 페루에 내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폭풍이 불어 배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사정없이 밀려갔다. 당시 사람들의 압도적 견해에 의하면 그쪽엔 오직 바다만이, 끝없는 대양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폭풍이 그쳤을 때, 스페인 뱃사람들은 자기들이 주교를 정말 악몽 같은 곳으로 모셔갔음을 깨달았다. (..............)
그들은 그 섬을 스페인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지옥을 스페인 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견해 수정으로 그 제도가 지도에 표시된 후 300년이다 되도록 그 어떤 나라도 그 제도를 소유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던 1832년,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약소국의 하나였던 에콰도르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견해를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갈라파고스는 에콰도르의 영토이다."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다.
<<갈파파고스>>, 25 - 26쪽.
스페인어의 거북에서 이 섬 이름이 붙었다고 할 정도로 거북이 많은 이곳은 제2차대전 때 미 공군 기지가 들어섰지만 1959년 찰스 다윈 재단이 설립되면서 국제적인 자연보호 구역으로 환경운동의 메카 역을 상징하는 명승지이다. 1970년부터 관광상품이 개발, 최근에는 주민이 약 2만 여로 늘어난 데다 , 매년 6만 여 관광객이 몰려들 정도인데 아예 접근금지 섬이 많을 만큼 이구아나. 펭귄. 상어. 바다사자. 물개 등 생물학적 보고로 이름 높아, 아예 외부로부터 도입된 쥐. 염소. 들개 등은 멸종시키고 토종들만 살도록 보호해 주는 특수지역이다.
대대로 의사였던 집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강박관념에다 평생 피를 보기가 싫어 목사가 되려던 캠브리지대 학생 찰스 다윈(1809 - 82)이 갈라파고스를 찾은 것은 1835년이었다. 이로 말미아마 유진화론의 실험실처럼 유명해진 갈라파고스를 작가 보네거트는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풍자 작가답게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만행을 보고는 스웨덴으로 망명한 경력이 있는 레온 트라우트를 화자로 삼았는데, 그는 죽은 뒤에도 백만 여년을 거뜬히 영혼의 상태로 인간 세상에 남아 이 섬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 하는 시점은 1986년으로부터 1백만 년 이후이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100만 년 전인 AD 1986년"이라고 이 소설은 시작된다. 너무 잡다한 수식체 문장에다 줄거리 조차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락가락해서 일목요약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이 소설의 알맹이는 너무 단순하다.
198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86년부터 1백만 년 이후까진데, 그러니까 소설을 발표하기 1 년 이후 세계의 종말을 그는 '예언'하고 싶었던 셈이다. 하다 못해 몇 십 년 뒤로 그 예언을 잡으면 좋을 걸 왜 이렇게 바싹 1년 뒤로 잡아 곧 자신의 소설이 엉터리임을 들통 나게 했을까 하는 질문은 그리 쓸모 없을 것이다. 보네거트로서는 인류의 위기가 너무나 화급하여 당장 내일이라도 멸망할 듯이 보였을 테니까.
갈라파고스의 이름난 200명 정원인 엘도라도 호텔에 1986년 11월 어느 날 '세기의 자연 유람' 참가자로 투숙한 건 불과 여섯 명뿐이었다. 이들은 곧 유람선 다윈호를 타고 풍광을 한껏 즐길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원인 모를 폭발이 연이어 두 번 터져 일대 혼란에 빠진 채 엉겹결에 승선, 피신길에 올랐으나 배 역시 공격을 당했다. 마침 이 지역은 갈파파고스 소유권 분쟁으로 페루와 과테말라가 전쟁 중이었고, 아프리카는 가뭄으로 모든 생명체가 사라졌으며, 세계는 기아. 경제적 위기. 제3차대전. 난소에서 난자를 먹어 치우는 바이러스 등등 온갖 이유로 지구촌은 최후를 맞고 있었다.
비록 공격을 받긴 했으나 다윈 호는 기세 좋게 서태평양 물살을 가르며 곧 어느 가까운 항구에 닿아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배는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엔진이 고장 나버렸고 모든 승선객들은 이 황폐한 무인도에 버려졌다. 이게 1986년 12월 1일에 일어난 일인데 그 중요성을 환기 시키기 위해서는 이 지구 위에 인간으로 살아 남은 건 이들 뿐 이었다는 말을 첨가하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다윈호는 제2의 노아의 방주였던 셈이다.
작가는 아슬아슬한 거짓말(이걸 소설에서는 상상력이라고 고상하게 부른다)을 아무렇게나 갖다 부치는데, 예를 들면 제클린도 이 관광에 참여하려고 예약했었는데 그 소문이 돌자 세계 굴지의 저명인사들(키신저. 누레예프. 등등)도 앞다퉈 예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이 되자 지구촌의 모든 사정이 악화일로, 예약 취소가 잇따랐고 결국 '세기의 자연 유람'은 폭삭 오그라든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그 덕분에 이들은 인류 최후의 노아 방주 승객이 될 수 있었다.
누가 탔을까. 여기서 작가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만약 착실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성직자를 태울텐데 이 씨니컬한 작가 보네거트는 무신론자에다 투철하게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는 터라 그답게 최후의 인류이자 100만 년 뒤 인류의 조상이 될 인간을 선택했다. 관광객 참가자 6명의 신원은 아래와 같다.
(1) 제임스 웨이트 ; 부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나 오하이오주 미들랜드시 실업고교에서 2 년간 자동차 정비를 배운 게 학력의 전부인, "열일곱 번이나 결혼했으며, 그때마다 그녀들의 보석함과 금고와 예금통장들을 깨끗이 비우고는 바람처럼 날아"버렸던 사나이로, 여기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가명으로 참여했다.
(2) 일본인 컴퓨터 천재 젠지 히로구치(29세)와 아내 히사코 히로구치(26세) ; 1986년 당시 세상에 열 대 밖에 없는 만능 컴퓨터 만다락스를 만든 장본인. 히사코는 어머니가 제2차 대전 때 원폭 피해자.
(3) 미국 금융업자인 홀아비 앤드류 매킨토시(55세)와 맹인인 그의 딸 셀레나(18세) ; 매킨토시는 도쿄의 젠지를 유인해 온 사업가.
(4) 단신으로 호텔에 도착,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메리 햅번(51세) ; 고교 생물 및 성교육 여교사로 지난 여름 남편이 죽었고 아이는 없음.
이상이 호텔 투숙객이고. 그 외의 부수 인물은 아래와 같다.
(5) 다윈호 선장 아돌프 폰 클라이스트 ; 최후까지 살아 남아 인류의 새 조상 곧 아담 역을 담당.
(6) 이밖에 원주민 칸카보노 소녀들 ; 떠돌이 창녀로 길러졌는데, 우연히 다윈호에 동승, 인류 보존에 기여한다.
이런 인간상들이 지구 위에, 그것도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에 남았다는 가상에서 이 소설은 전개된다. 우선 제임스 웨이트, 젠지, 매킨토시를 비롯한 남성을 이런 저런 아유로 죽도록 만들어 버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건 이들은 이내 생명을 다한다. 결국 남은 건 선장인데, 그에게는 치명적인 두가지 결함이 있다.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앓았던 헌팅턴 무도병(舞蹈病)인데, 이 신기한 병은 어떤 검사로도 잡아내기 어려운 잠복기가 긴 유전병으로 춤을 추고는 헛 것이 보이면서 여인(아내)를 죽이게 된다고 한다. 선장은 이 공포 속 에서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다 그는 인종주의자로 "히사코에게도, 그녀의 털복숭이 딸(그녀는 여기서 유복녀 아키코를 낳았다)에게도 전혀 끌리지 않았고, 결국은 그의 아이들을 낳을 인디오 소녀들(칸카노보)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의 쾌락 상대는 오직 메리 햅번이었고, 그녀는 칸카노보들에게 인공수정으로 후손을 길러냈으며, 그 아들에게 가미가제(神風)란 이름이 부쳐졌고, 그는 자라나 아키코와 결혼 (2027년), 한 씨족을 이룬다. 이 뒷 이야기는 사족이다. 이게 1백만년 후 인류의 조상인데,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다보니 그 모양새는 "지느러미 몇 개와 주둥이 하나"를 가진, "그토록 빨리 헤엄치고 그토록 오랫동안 물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인간"으로 진화(?)해 버린 것으로 작가는 묘사한다. 사랑이니 결혼식이니 하는 건 이미 사라진지 오래여서 "당사자들이 발정기인가 아닌가로부터 촉발된다. 이제 남자와 여자는 1년에 딱 두 번,
그러나 물고기가 바닥 났을 때는 1년에 단 한번 발정을 한다."
"남자들의 성적 황금기는 여섯 살 무렵"으로, 짐승처럼 아무데서나 남성이 발정난 여성을 찾아 소리 지르며 덤볐다. 이렇게 진화한 인간을 작가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게 참된 삶으로 보는가, 아니면 이런 반문명적인 시대의 도래를 경고 하면서 현대 생태계 파괴와 반인간주의에 대하여 강렬한 비판을 고조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 소설은 다분히 디스토피아적 요인을 갖는다.
작가는 인간의 비극이"커다란 두뇌와 환상적 사고" 즉 ""약 3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커다란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했다고 강조한다. 지구 최후의 그 날에도 "전인류에게는 식량이며 연료가 전과 다름없이 아직도 막대하게 남아있었는데도 한쪽에서는 수백만, 수천만의 인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 말기 증세를 진단 내렸다. 작가는 소설에서 왜 지구가 파멸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는데, 그건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책임이란 관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레온 트라우트의 아버지는 "백편이 넘는 장편과 천 편의 단편"을 쓴 무명 작가인데,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넌 인간이 선한 동물이라고 믿지? 따라서 결국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상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만들 거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인간에 대한 긍정인가 부정인가? 씨니시즘적인 작품으로 보건대 차라리 부정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는 현대 세계에 대하여 다윈의 진화론을 적응시켜 인간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경고한 것이다. 비록 세상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진화론에 따라 인간이 달라져가고 있다는 경고가 이 소설엔 내포되어 있다. 바로 여러 작가들이 추구해 왔던 디스토피아소설의 맥락으로 이 소설은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디스토피아 소설의 계보
지상의 그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유토피아' 문학이 플라톤 - 토마스 모어 - 캄파넬라로 이어져 오는 다른 한 흐름으로 반유토피아, 살기 나쁜 곳을 그려 인간에게 경고하려는 디스토피아 문학이 새로운 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주로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시작된 이 계열의 문학은 H.G. 웰즈의 <<타임머신>>
(1895)을 그 효시로 삼는다. 80만 년 뒤 세계를 그린 이 소설 속의 인간은 현대의 모든 문명을 깡그리 잊어버린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어 잭 런던의<<강철군화>>(1908)는 소설 자본론이란 별명처럼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을 극대화시킨 디스토피아 소설이며,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1924)은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최고 걸작으로 사회주의 당시 소련권에서 출판 금지된 작품이었다. 널리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와 <<다시 가 본 멋진 신세계 >>(1958)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결코 인류에게 행복을 약속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조지 오웰의 <<1984년>>(1949)이 사회주의적 허구성을 비판 했다면, 윌리암 골딩의 <<파리 대왕>>(1954)은 핵전쟁 대피 중이던 영국 어린이들이 무인도에서 전개하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악의 근원을 추적한 작품이다. 모르데카이 로슈왈트의 <<제7 지하호>>(1959)는 핵전쟁으로 인류가 절멸을 맞게 될 공포를 그렸으며, 좀 다르긴 하지만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1969) 역시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고발의지를 담고 있다.
고마쓰 사교의 <<일본 침몰>>(1971)은 지진에 의한 일본열도의 최후를, 아르까지와 보리스 스뜨루가츠키 형제의 <<종말전 10억년>>(1974)는 자연법칙에 의한 지구의 위험성을, 어네스트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1975)는 환경 생태계에서의 유토피아 의식을, 마가렛 애트우드의 <<핸드 메이드>>(1985)는 생태계 파기로가임 여성이 감소하여 발생하는 위기를 그려 자연보호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안소니 버제스의 <<1985>>(1978)와 기요르기 달로스의<<1985>>(1982)는 오웰식 모방으로 정치 사회적 위기가 인류를 위협한다는 내용을 담아낸다.
이 일련의 과다할 정도로 쏟아지는 디스토피아 소설은 과학 문명. 이데올로기. 인간의 탐욕. 자연 파괴. 전쟁 등등에 의하여 지구가 실낙원으로 변질되어 간다는 경고를 담는 것으로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