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풍회
유래》
먼저 순풍회의 유래를 기록 하기
전에【이 기록의 보는 이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첫째로 선대의 호칭 관계 기준을 시조하37세손 석환(錫煥) 에 두고
둘째로 시조하 33세 휘(諱)(죽은사람이름휘) 순자 형자 를 선,고조고
라 칭하고 34세 휘 학자표자는 선,증조고라고 기록하며 35세 휘 성자 지자와 휘 성자 림자는
선,조고와 선,종조고로 략기하고 36세 휘 의자 경자와 헌자 의자는 선고, 선숙으로 기록하는
불민에 먼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1.순풍회의 명칭 유래=순풍정(順風亭)(옛날 안골 건너편에 선,증조고께서 살던 집을 순풍정
이라 했었는데 그 근처도 순풍정이라 전해지고있음.)에 선,고조고와 선 증조고의 묘소가 있었
기에 그 후손들의 모임에서 회칙으로 그 명칭을 순풍회 라고 명명 하였슴.
◆ 2.선대에 대한 고찰
★ 선,고조고깨서는 시골 부자로 큰머슴 3인과 갈담살이(소,머슴)1인 그리고
내,시종2인등을 고용하여 풍요롭게 살으셨다는 것이다.
★ 선,증조고가 그 뒤를 계승하여 잘 사시다가 중년에 순풍정에서 체계상
사(현재, 일수상사)를 하던중 모진 흉년을 당하여 일수 돈 회수가 불가
능 하여 살림이 거들이 났고 머슴들에 대한 세경(貰耕)(현대의 연봉)대
신에 논을 분양하고 나니 집안이 일시에 폭망을 하였다는 것이다.
★ 선, 조고와 선,종조고 께서는 고추 밭 때기 한평 없는 모진 빈곤에 처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앉아서 주검을 기다릴 수 없는 실정에 형되는
선,조고께서 부득이 선영을 당시 동생인 선, 종조고께 맡기시고 중흥마
을 엄씨 집안과 미평마을 조씨 집안에 고용 사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용생활 20여 년에 중흥평야에 논7두락과 밭8두락을 취득하고 37살경에
오천동 김해김씨와 결혼하여 38살 되는 해에 아들인 선고를 득남 한 뒤
39세 되는 해에 병으로 사망 하고 생후 1년되는 해에 선,조비가 개가하
니 선,종 조고비가 양부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연에 따라서
선영을 뫼시는 동생집을 큰집이라 호칭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선,고 와 선숙께서 생시 전하신 말씀을 간략하게기록 한 것이다.
★ 선고,선숙 ; 선숙은 초년에 가계가 비교적으로 넉넉하여 글도 많이 배우고
인품이 너그러웟으며 선 고 께서는 찌저 지는 가난속에서도 너무나도 정직
하였고 선영을 숭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조상의 묘소 수호 관리에 철두철
미 하였다. 남의 묘 벌초하시는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고와 선숙 두어른들은 평생 동안 잊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천금보
다도 소중한 두 어른의 화합이였다. 간혹 내적으로 화음이 찬 바람이 약간
있어도 두 어른들은 조상을 위한 화합에서 벗어 나지 않았다.
★ 선대의 묘소 관리와 제향
◆ 선대 묘소 관리
●선,고조고의 묘소=원래 순풍정 로상에 뫼셨다거 1991년11월에
떼덜이
선,고조비 부안임씨
묘(丁坐) 왼편에 이장 하면서 상석을 세웠다.
●선,증조고의 묘소= 원래 순풍정 중록 갑좌에 초장하였는데 1991년11월
선, 증조비 영양천씨를
가능골에서 이장하여 선,증조고의 묘 오른편에 뫼
시고 그때 상석,
체비, 망석, 동자석, 월석등 갖은 석물을 세워서 그때만
해도 천추에 한을
푼 것 같은 생각도 했으나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선,조고비의 묘소= 문바위등 하록 답156번지 계좌에 배 김해심씨
와 쌍
분인데 1991년11월에
상석을 세웠다.
● 선,종조고의 묘소= 달뜨기 덕석바위 석간 임좌에 뫼셔있다.
● 선,종조비 경주김씨의 묘소= 송봉산 하록 경좌에 뫼셔있다.
● 선,고비 묘소= 가좌지 건좌 상하분에 뫼셔 있다.
● 선,숙비 묘소= 백호등 곤좌 쌍분으로 뫼셔 있다.
◆선대 (선,고조고비와 선,증조고비)제향의 유래와 근황
☆제향의 유래
선,고조비와, 선,증조,고비
4위에 대한 기제사를 선 종조고께서 일생동안
뫼셔 오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선,숙(先叔)이 이어서 상기 4위에 대한
기제사 제물 담당을
하시고 그때부터 선,고 (先考)가 제주가 되어 봉향
하였다.
1969년에 선숙께서
돌아가신후 점차 기제사의 봉향이 소홀해지는 경
향에 대처 하기 위하여
1979년(己未年)부터 기제사를 시향으로 매안 하
고 37세 석자(錫字)
항렬 6인이 돌림식 제물 유사를 담당 하면서 그
첫 해에 시향의 항구대책을
협의한 결과 1차로 제물유사 윤번이
끝 날때까지 매년
1인당 10만원씩을 거출하기로 하고 그해에 60만원
을 거두어서 증식
하고자 한 것이 회수되지 않아서 1차 모금 은 실패
하고 중단 되었다.
1985년(乙丑年)에
제2차 제물 윤번제가 다시 시작 되면서 당시4인(석환
용길, 재환, 석구)이
40만원을 거출 한것이 순풍회 기금의 시원이
된 것이다.
1986년(丙寅年)에
전년과 같이 4인으로부터 40만원을 거출하였고 같
은해에 순풍정 묘지
산 피해 보상금615,000를 합한 금액 1,415,000원
을 석환 명의로 3년간
인천 부평 신탁은행에 예치 한 결과 원리금
1,957,707원이
순풍회의 기금으로 조성되게 된 것이다.
1989년 순풍회가
맨 처음으로 인천 에서 창립 할 때 에 회칙이 통과
됨과 동시에 상기
기금이 순풍회의 창립기금으로 답지 되었다.
이와 같은 길고도
짧은 기간을 통해서 흥망성쇠 의 기류를 가늠 할수
있을뿐 더러 그 당시
남들은 제답(祭畓)으로 시제 뫼시고 비축금으로
묘역 사업을 잘들
하는데 우리 만이 침체 되어 윤번식 제유사 와 수시
모금등 을 하였으나
숭조 사업의 목마름은 그 갈증이 해소 되지를 아니
하였다.
백방으로 모색한 끝에 그 후손들의 정신적인 동참에 착안 한것이
마침재 순풍회
라는 조직적인 운영체가 발족 되었는바 이와 같은 사
연을 순풍회의 유래와
근황 이라고 해서 대략 기록 하고보니 어색 한
점이 많으나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점에 대하여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 제향의 근황
1999년 호명 문중에서
송월사(남양홍씨 호명문중제각)를 건립 하여
당년에 선, 고조
고비와 선, 증조 고비에 대한 위패를 송월사에 봉안 하였
고 2005년에는
선,조 고비와 선,종 조고비에 대한 위패를 송월사에 봉안
하였다.
송월사 시제 봉향
일자는 매년 음력10월15일로써 그 후손 들은 반드시
참제(參祭) 하여
선대에 명복을 빌고 또한 종친에 친화를 다지 는 것이
마땅한 도리 일 것으로
생각 하는 바이다.이상 순풍회의 유래와 근황
이라는 용어를 빌어서
집안의 사실(史實)를 간기 하였으나 순풍회는
이와 같은 깊은 뿌리가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무성한 순풍회가 육성
된 것으로 그 뿌리를
기본원리로 하여 더욱 친화 하고 숭모정신이 더욱
함양 될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순풍회를 성년으로 육성하여 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끔 애 써 준
사람들에 격려와 치하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홈페이지을 통해서 본회 의 현대
화를 구사한 점에 대하여도 높이 평가 하는바이다.
앞으로 가까운 근친 이기에 이 소중한 친애 정신이 길이 계승 되기를 기원 하는 바이다.
2006년 7월 1일
순풍회 고문 석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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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급제 10대 명벌》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총 13,999명중 1명이상의 문과를 배출한 성씨는 총 309개 성씨다. 309개 성씨중 10대 성씨를 순위별로 소개한다
순위 |
성씨 |
문과급제자 |
인구비순위 |
인구수(명) |
인구대비
급제자수 |
1순위 |
전주이씨 |
873명 |
7위 |
2,379,537 |
2,819 : 1 |
2순위 |
안동권씨 |
359명 |
4위 |
558,574 |
1,558 : 1 |
3순위 |
남양홍씨(당홍계) |
340명 |
3위 |
382,077 |
1,123 : 1 |
4순위 |
파평윤씨 |
339명 |
5위 |
646,632 |
1,907 : 1 |
5순위 |
청주한씨 |
287명 |
6위 |
597,598 |
2,082 : 1 |
6순위 |
광산김씨 |
265명 |
8위 |
750,701 |
10,636 : 1 |
7순위 |
미양박씨 |
261명 |
10위 |
2,704,617 |
10,636 : 1 |
8순위 |
연안이씨 |
250명 |
1위 |
126,744 |
501 : 1 |
9순위 |
여흥민씨 |
244명 |
2위 |
137,314 |
508 : 1 |
10순위 |
진주강씨 |
221명 |
9위 |
941,087 |
4,25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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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휘 석자 환자 전 고문님의 진실한 역사를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