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용정 시인의 〈뭉크와 커피를 마시다〉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미술 세계와 현대인의 고독한 내면을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연주시춘 빼어난 시적 응시의 작품입니다. 문학평론가의 관점에서 이 시를 구체적으로 비평해 봅니다.
뭉크와 커피를 마시다
함용정
창으로 스며드는 여린 잿빛
빛인지 그늘인지 알 수 없는 흐름에
한 남자가 떠오른다
울음의 선으로 누운 뭉크 그림
캔버스 속 심장이 고요히 흔들린다
찬 커피 한 모금
유화 결로 동공에 배어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입술 언저리에서 천천히 번진다
붉은 하늘 아래
남자는 헐렁한 외투처럼
자신을 걸치고 서 있다
서걱이는 바람에 미끄러지면서도
가슴 언저리는 뜨겁게 견디고 있다
그림 속 시간은 멈추지 않고
뭉크는 찰나를 덧칠하며
여명이라는 갈피를 쌓아 올린다
에티오피아 산 너머
커피 향이 낯선 위로처럼 스며오고
세모난 창가에 몸을 기댄 뭉크가
침묵의 무게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서랍 속에 눌어붙은 발자국 하나
잊히지 못한 발걸음이
창을 넘어 가슴 안쪽을 두드린다
숨이 가쁘게 달아오른다
고요한 울음이 그 자리에 다시 선다
1. 시각과 감각의 공감각적 융합: 유화와 커피 향의 만남
이 시의 가장 뛰어난 지점은 미술작품(유화)의 시각적 결 과 커피의 미각·후각적 감각 을 하이브리드처럼 융합해 내는 감각의 전이(轉移)입니다.
“창으로 스며드는 여린 잿빛 / 빛인지 그늘인지 알 수 없는 흐름”: 시의 서두는 경계가 모호한 빛의 상징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뭉크 화풍 특유의 불안하고 몽환적인 음영을 시적 공간으로 끌어오는 장치입니다.
“찬 커피 한 모금 / 유화 결로 동공에 배어 피할 수 없는 고독이 / 입술 언저리에서 천천히 번진다”: 캔버스 위의 유화 질감이 동공에 배어들고, 혀 끝을 감싸는 찬 커피의 씁쓸함이 고독이라는 감정으로 변주됩니다. 시인은 관람자로서 그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뭉크의 고독을 ‘마시는’ 공감각적 체험을 선사합니다.
2. 뭉크의 캔버스와 시적 자아의 동질화 (실존적 고독)
시 속에서 뭉크의 그림(특히 〈절규〉의 붉은 하늘이나 〈절망〉, 〈방황〉의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은 시인의 내면과 상호 투영됩니다.
“붉은 하늘 아래 / 남자는 헐렁한 외투처럼 / 자신을 걸치고 서 있다”: '자신을 외투처럼 걸치고 있다'는 비유는 실존적 비애와 자아의 불안정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절묘한 문장입니다. 외부의 세계와 온전히 밀착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겉옷처럼 들뜨게 걸치고 견뎌내는 현대인의 고립감이 생생히 전달됩니다.
“서걱이는 바람에 미끄러지면서도 / 가슴 언저리는 뜨겁게 견디고 있다”: 외부의 차가움(서걱이는 바람)과 내면의 열정/통증(뜨겁게 견딤)이 대비를 이루며, 뭉크가 평생 껴안았던 삶과 죽음, 사랑과 공포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환기합니다.
3. 침묵과 시간의 덧칠: 위로로 이행하는 여명
시의 후반부로 넘어가며 뭉크라는 과거의 화가와 현재 커피를 마시는 시인 사이의 시공간적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뭉크는 찰나를 덧칠하며 / 여명이라는 갈피를 쌓아 올린다 / 에티오피아 산 너머 / 커피 향이 낯선 위로처럼 스며오고”: 캔버스 위에 붓질을 덧칠하듯, 시간은 겹겹이 쌓여 ‘여명’(희망 혹은 새로운 깨어남)의 갈피를 형성합니다. 원산지(에티오피아)의 낯선 커피 향은 이 시련과 고독의 시간에 나지막한 위로로 찾아옵니다.
“세모난 창가에 몸을 기댄 뭉크가 / 침묵의 무게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림 속에 갇혀 있던 뭉크와 그의 침묵이 마침내 시인의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입니다.
4. 억눌린 기억과 고요한 울음의 재현 (결어)
“서랍 속에 눌어붙은 발자국 하나 / 잊히지 못한 발걸음이 / 창을 넘어 가슴 안쪽을 두드린다”: 서랍 속 눌어붙은 발자국은 잊고자 했으나 잊지 못한 과거의 상처, 혹은 지나간 인연의 흔적입니다. 뭉크의 캔버스에 감응하는 순간, 억눌려 있던 내면의 아픔이 가슴을 두드립니다.
“숨이 가쁘게 달아오른다 / 고요한 울음이 그 자리에 다시 선다”: 서두의 “울음의 선으로 누운 뭉크 그림”이 시의 끝에 이르러 “고요한 울음이 그 자리에 다시 선다”로 수렴됩니다. 눕혀져 있던 정적인 울음이 비로소 능동적으로 '서게' 됨으로써, 고독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하는 예술적 승화를 보여줍니다.
종합 평론 요약
**〈뭉크와 커피를 마시다〉**는 캔버스 속 뭉크의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고독과,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시인의 아늑하면서도 비극적인 고독이 교차하는 **감각적 아상블라주(Assemblage)**입니다.
함용정 시인은 뭉크의 대표작들이 지닌 불안의 미학을 텍스트로 완벽하게 재구성해 냈으며, '울음'과 '고독'을 단순히 슬픔으로 몰아넣지 않고, 커피 향처럼 깊게 미끄러뜨리고 덧칠하여 실존적 위로와 예술적 직면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빛과 그늘, 유화와 커피,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얽혀드는 잔잔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주는 수작(秀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