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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영국 성공회 여자주교 허용... 480년만의 금녀의 벽 깼다
박심온 ( 朴心溫 ) 기자⁄ 2007.02.28 아래기사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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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톨릭. 영국 성공회
우리사회에는 통합해야할 것이 너무 많아
영국의 헨리 8세 왕(1509~1537년)은 열심한 가톨릭 군주였었다. 마르틴 루터의 이단이 발생하자 그는 『7성사를 옹호함』(The Defence of the Seven Sacraments)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Defensorfidei)라는 존칭까지 받았다.
이러한 헨리가 로마 가톨릭을 배신하게 된 동기는 그 자신의 방종한 정욕 때문이었다. 그는 18세 때 가톨릭에 필요한 관면(寬免)을 얻어 1509년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 5세의 딸이며 그에게는 형수뻘이 되는 카자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결혼서약을 충실히 지키지 않았다. 엘리자벳 브라운과 관계하여 한 아들을 두었으며, 마리 볼레인과 관계하였는데 이 여자가 시들해지자 그의 시종에게 출가 시켰다. 이러한 호색 국왕 앞에 등장한 것이 마리 볼레인의 언니인 안(Anne Boleyn)이었다. 안 볼레인은 자기를 정식 왕후로 삼아주지 않으면 청혼에 응할 수 없다며 거절하자 헨리는 카자린과 이혼할 구실을 찾아야 했다. 헨리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전 교황 율리오 2세의 관면칙서를 거짓으로 꾸며 받은 것이니 그 혼인의 무효를 선언해 주도록 청했다. 교황은 이를 거절했고 안은 이미 임신 중이어서 교황의 허락 없이 안이 왕후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헨리 8세는 재능 있고 무용도 갖춘 인기 있는 군주였으나 그에겐 정욕·탐욕·색욕·공포 같은 데에는 이상할 정도로 제어 못하는 잔인한 성격을 가졌었다. 그는 많은 희생을 지불하고 안 볼레인을 왕후로 삼았으나 나중에 그를 미워하고 사형에 처하고 다섯 번째 아내인 카자린 하와도 역시 단두대에 보내 목을 베었다.
이러자 시중에는『무서운 헨리는/ 아내 여섯을 얻었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왕보다 오래 살고/ 둘은 소박맞고/ 둘은 목이 잘렸네』라는 민요조 노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국회는 왕의 강압에 못 이겨 왕을 『영국교회의 으뜸』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는 마침내 영국교회의 교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에 불과했던 토마스 크롬웰을 영국교회를 다스리는 대감독대리로 임명하여 역사상 보기 힘든 크롬웰의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크롬웰의 주요한 관심은 풍부한 교회재산이었다. 약탈로 자기 사복(私腹)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영국의 이교는 헨리 8세의 정욕과 크롬웰의 물욕이 빚어낸 역사의 비극인 것이다. 24살 때 매독에 걸려 몸은 쇠약해지며 다리는 종기가 생겨 몸이 자유롭지 못한 헨리는 죽을 때까지 왕후 2명·추기경 2명·대주교 2명·주교 18명·대수도원장 13명·부원장 수도자 500명·신학 및 법학박사 38명· 공작-백작 12명·귀족 164명·일반시민과 숙녀 234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며 생긴 영국교회가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여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어 왔다.
그런데 이 영국교회가 473년 만에 로마가톨릭교회로 일부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
양 측 교회 인사로 구성된 『통합과 선교를 위한 성공회·로마가톨릭 간 국제위원회』가 통합에 따른 초안을 만들었는데 양 측 수석 주교들의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교황이 모든 교회의 수장이란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며 교황 주도의 교회통합이 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전 세계에 사분오열로 갈라져있는 다른 교단에 모범을 보일 영국교회에 박수를 보낸다. 분열은 항상 적대감을 갖는다. 통일이나 통합을 성사시켜야할 일이 우리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영국교회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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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다 돌아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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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 의료, 고아 선교의 효시 노라 수녀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최초로 내한한 영국 성 베드로 수녀회 선교사들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 북쪽 언덕에는 성공회(Anglican)선교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1892년 영국 성 베드로수녀회 최초 선교사로 내한한 세분 수녀 묘지도 있다.
초대 주관(책임) 수녀로 최초의 고아원 운영과 의료선교에 헌신하다가 1919년 별세한 노라(Nora)수녀의 묘지가 그 첫 번째이다. 함께 내한한 6명의 간호 수녀 가운데 웹스터(Webster, 1856-1898) 협동수녀와 로이스(Lois, 1854-1899) 봉사수녀의 묘지가 두 번째 경우이다. 알마(Alma, 1906년 5월 6일 별세) 수녀의 경우는 강화의 십자산에 묻혀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성공회 묘역의 성역화 차원에서 앞으로 알마 수녀의 양화진 이장(또는 추모비 건립)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 볼만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1889년, 영국 캔터베리 대교구에서 코프(Charles Corfe,고요한) 주교가 한국 최초의 주교로 선임되어 내한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수녀들의 도움 없이는 여성을 위한 선교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국 출발에 앞서 성 베드로 수녀회의 프란시스(Sarah Frances) 원장에게 한국에서 함께 선교할 수녀들의 파송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수녀의 파송을 편지로 거듭 요청했다. 한편 성 베드로 수녀원은 인도, 스리랑카 등으로부터 선교 수녀의 파송 요청을 받은바 있으나 코프 주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최초의 해외 선교지역을 한국으로 선택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1891년 노라 수녀를 비롯한 로잘리(Rosalie), 마가렛타(Margaretta), 알마, 로이스, 웹스터 수녀 등 6명의 선교사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6개월간에 걸쳐 런던의 성 죠지병원과 메틀로폴리탄 병원에서 간호교육과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짐을 꾸려 1892년 6월 14일 ‘카타지’호 배편으로 알버트 항을 출발하여 긴 항해를 마치고 1892년 11월 4일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 베드로수녀회 수녀 선교사로 내한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낯설고 먼 땅에서 복음을 들고 내한한 초창기 수녀들은 개척과 도전의 삶이었다. 새로운 기후 풍토에 적응해야 했고, 시베리아 북서풍이 몰고 온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을 견디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외로움을 이겨내어야 했고, 힘든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그들은 의료선교와 고아원 운영 등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영국 성공회 최초의 고아원과 노라 수녀
대체로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고아원 사회복지사업은 1893년부터 성공회 주교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노라(Nora, 1849-1919) 수녀의 열정과 봉사로 서울 정동에서 이루어 졌다. 그는 초대 주관수녀로 고아원 운영과 강화지역 선교에 크게 기여했다.
1894년 3월, 고아 1명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수녀들은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 올 때마다 세례를 주면서 돌아가며 대모(代母)가되었다. 세례는 그 자체의 목적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쳐주는 의미도 있었다.
고아들은 1895년 5명에서 1899년에는 20명의 늘어났다. 이 무렵 고아원의 영아(嬰兒) 사망률은 50%정도나 되었기에 수녀들의 또 다른 봉사는 고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이었다. 많은 고아들이 양화진에 이름 없이 묻혔다. 수녀들은 양화진에 아이를 묻으면서 자신들도 그곳에 묻히고 싶어했다.
“주교 님께서 늘 묘지로 사용하겠다고 한 장소이다. 이곳은 프랑스 남부 피서지 ‘포’나, 이태리 남부 항구도시 ‘나폴리’보다 아름답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양화진을 표현했다.
1913년에는 24명의 고아를 양육했다. 그 후 1913년 7월 22일 고아원은 수원으로 옮겼다.
1921년 10월 30일 ‘피득보육원’이라는 고아원 전용 건물을 교동11번지에 건축했다. 그 후 이 고아원은 장애인 사업을 위하여 1973년 8월 30일 폐원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교 활동 시작 10년째 되는 1902년 성탄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0년 전 성탄절에는 성탄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라곤 우리 집 중국인 요리사와 그 부인, 아이들 몇 명이었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1902)에는 많은 교인들과 세례 준비 자로 교회가 꽉 찼고, 또 오후에는 여자들과 고아들을 데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라 수녀는 초창기 제1대 주관(감독) 수녀로서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수녀들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헌신했다. 1919년 11월 30일 18년간의 선교활동을 끝내고 암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성공회구역 차-4)에 안장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
영국 성공회 한국지부: 대한성공회에 대하여(공식적인 홈페이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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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
이러한 개신교와도 다르고 가톨릭하고도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과 형태를 지닌 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사실 종교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훨씬 컸기 때문에 그랬다. 정작 성공회 신학자들은 그렇게 크게 취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주 결정적인 분열의 씨앗을 잉태했던 것이 바로 헨리 8세의 이혼문제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혼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또한 힘든 점이 있었던 것이 당시 영국 교회의 대표주교라 할 수 있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 등 협력한 성직자들이 상당수 였다는 점이고 이들이 영국 교회를 종교개혁적인 신앙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주도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미사를 비롯한 전통이라는 이름에 유지되던 가톨릭적 관습에 깊은 회의를 느꼈고 동시에 섬나라 잉글랜드 교회의 독자적인 특성들에 이해하고 로마교회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당시 왕의 측근이었던 토마스 크랜머는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의 숙원이었던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발간해 지금의 성공회 예배 형식인 감사성찬례의 원형을 만들었다.
어쨌든 헨리 8세의 원래 의도도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교회조직을 만드는 것이지 영국 교회 체제 전체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개혁을 움직인 성직자들도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영국 교회만의 독자적인 신학을 정립하려는 의도였던 만큼 사실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가톨릭적 외적 요소들에 루터교나 장로교의 교리를 조금 첨가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세기로 가면 갈 수록 넓어지는 스펙트럼을 가진 성공회 신학을 단순히 정의하기는 힘들며 어디까지나 그 기원에 대해 단순하게 표현을 한 것이므로 위에 적힌 말을 성공회 신자에게 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하지만 가톨릭신자들은 거리낄것 없이 성공회를 디스하고 성공회신자는 이에 반박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한가지 더 헨리 8세가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용인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장로교식의 개교회주의가 헨리 8세가 원했던 목적들을 이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평적인 정치문화가 발달했던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교 체제 도입 후 최종적으로 주교감독제를 폐지한 것과 대비되게 중앙집권과 어디까지나 국가교회체제 도입을 우선시했던 왕에게는 수직적 계서제의 주교감독제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덕분에 초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른바 '청교도'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으며, 이들이 미국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정작 영국 국교회이면서 메리 1세나 제임스 2세 같은 가톨릭 신자인 왕에게 탄압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 시대를 제외한 대다수 시대에는 가톨릭이 탄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전 왕들의 잔혹한 종교탄압에 대한 교훈을 얻어 'Via Media'(중용의 길)이라는 모토가 성공회에 자리잡았다. 물론 그 당시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된 적은 별로 없지만...여하간 이 모토 역시 성공회의 태생과 그 정체성, 현실적 제도와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개혁하는 보편교회'라는 성공회의 모토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핵심이 되었다. 가톨릭적 전통과 외형을 보전하면서 신학과 믿음에서는 끊임없는 개혁을 추구하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포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임 제임스 1세때도 유지되어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톨릭교도인 그도 주교제 아래에 움직이며 보편교회와 개신교회를 동시에 추구하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국교회 체제를 강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보수적인 장로교 문화로 주교제가 폐지되고 성공회 신학이 매우 급진적인 예정설로 흐르게 된다. 이후 한동안 국가 교회로써의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다가 19세기 헨리 뉴먼 등을 중심으로한 옥스퍼드 운동으로 '보편교회'로써의 정체성과 가톨릭적 전통들을 다시 복원, 확산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 성공회의 이른바 '고교회파'와 '저교회파'가 확연히 구분히 되기 시작한다.
넓은 신학적 저변을 가지고 있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교파에 비해 적극적인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보편교회적 특성에서 로마 교황의 절대적 수위권을 거부하고 지역교회간의 권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동방정교회와도 대화가 가능하고 신학, 교의적인 측면에서 개신교와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교회일치운동에 빼놓을 수 없는 교단이 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3.1. 여타 개신교와의 비교 ¶
여타 개신교 교파들과 동시대에 생긴 종파고,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고,, 역사상으로 개신교세력과 연대를 많이 하였기에 현실적으로는 개신교로 인식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 신문이나 잡지에 끼어서 소개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교리나 교회제도 등을 보자면 다른 개신교와 차이가 많이 난다. 사도적인 보편교회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3중 성직제도, 주교감독제의 교회제도, 7성사 등 보편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의 이름에서와 표방하는 모토인 '개혁하는 보편교회'라는 말에서도 그 정체성이 짙게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들은 공교회임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다른 공교회(가톨릭, 동방정교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기에 여기에 밀린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1권에서 인덱스는 성공회를 구교라고 설명했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 아래 '가톨릭과의 비교' 문단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성공회가 가톨릭과 비슷하다고 가톨릭과 똑같다는 건 절대 아니다.3.2. 가톨릭과의 비교 ¶
태생이 이런 탓인지 성공회는 많은 면에서 가톨릭과 유사하며, 차이점을 드는 게 빠를 정도이다.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면 다른 개신교회랑은 달리, 천주교의 7성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 정교회처럼 신자들이 세례명을 가진다. 7성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세례나 제례에 대해서는 공교회들(가톨릭, 정교회)과는 완전 공유하고, 개신교에 대해서는 일부 인정한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 정교회 믿던 사람은 다시 세례 없이 성공회 신자가 될 수 있지만, 개신교 신자가 성공회 신자가 되려면 견진성사를 더 받아야 한다.왠지 성년식을 2번 치르는 느낌이지만 넘어가자[4] 한국 천주교는 성공회의 세례를 인정한다.[5][6]
성공회의 예배 양식 역시 비록 '성공회 기도서'의 영향으로 로마 형식의 미사와 세세한 측면에서 간소화되고 달라진 점들이 있으나 독자적인 '새럼 양식'의 전례와 미사를 연구하여 이를 조화시킨 감사성찬례가 있다. 기본적인 틀과 구조는 미사와 동일하며 이 역시 장엄전례로 드릴 경우 가톨릭 미사 못지 않게 엄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기 자신은 공교회(가톨릭, 정교회 등)를 주장하긴 하는데, 정작 다른 공교회들은 성공회의 공교회 속성을 부정한다.[7] 이런 일이 발생해 버린 것은 가톨릭 측이 에드워드 6세 이후 변경된 주교 서품 예식이 원래 서품 형식 대신 개신교적인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이로 인한 사도전승 단절을 교황이 직접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올리버 크롬웰 시대 주교제 폐지로 인해 더 이상 실질적으로도 주교직 전승이 끊긴 탓도 있었다. 이로 인해 동방정교회까지 이를 받아들여 개신교로 묶고 있는데다가 후술한 여성 사제 서품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관계가 많이 소원해지기도 했다.
참고로 이쪽은 가톨릭과는 달리 정교회처럼 사제급 성직자들이 혼인 가능하다. 그러나 정교회 주교는 미혼자만 가능한 반면 성공회에서는 혼인한 성직자도 주교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예컨대 2011년 2월 현재 캔터배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 # 참조. 물론 수도자는 결혼 못한다. 수도자 겸 사제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4. 조직 ¶
비록 출발은 영국 교회에서 출발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가 성공회의 대표성을 지닌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비록 그 역사적 대표성에서 무시 못할 영향력으로 가진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영국 성공회'역시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일부이다.
이 '세계성공회공동체'는 지역, 국가별로 독립적인 성공회 관구들이 공통의 신앙을 가지고 연대한 조직으로 이를 통해 성공회는 스스로를 보편교회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성공회의 출발점이자 지금도 영국 성공회의 정신적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이 전체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의장주교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체 성공회 입장을 조정한다. 이런 점때문에 운영방식은 10개의 독립교회를 중심으로 각 교회의 최고 주교가 각 지역에서만 재치권을 행사하며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동방정교회의 운영과 매우 흡사하다.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특별히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노력의 의무를 지녀 10년마다 전체 성공회 주교들의 회합인 '램버스 회의'를 주관한다. 어디까지나 의장주교이며 정신적인 수장을 맡는다는 점에서 수많은 지역 성공회들에게 권고와 자문 정도만 할 뿐이지 그 역시 캔터베리 관구를 제외한 다른 성공회들을 치리할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관구가 하나의 독립교회로써의 역할을 하기때문에 비록 10개로 나뉘어져있다곤해도 어느정도 계서화된 시스템을 구축한 동방정교회에 비해 지역교회에 독립성이 더 크며 이론적으로 같은 나라에 있어도 관구 자체가 다른 지역교회와 별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서는 다른 성공회공동체와 연결을 단절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성공회가 동성애자 사제인 진 로빈슨(Gin Robinson)을 주교로 서품하자 이에 반발하는 보수적인 교구들이 전부 미국성공회를 탈퇴하는 일이 벌어지고 새로운 성공회 공동체를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후에 있은 램버스 회의에서 보수적인 교구들이 전부 불참을 선언하는 일이 빚어졌다. 교구-관구-교황청 순으로 누층적 교계제도를 이루는 천주교에서는 일개 교구가 공동체를 탈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분권화 경향에 캔터베리 관구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세계성공회공동체 계약서'를 전 관구에 배부하여 이를 승인하여 공통적인 신앙과 보편교회질서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5. 대한성공회 ¶
한국에도 비교적 소수이지만 신자가 있긴 있다. 대한성공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2011년 2월말 현재 5만여명의 국내 신자가 있고, 3개 교구와 100여개의 성당이 있다. 서울특별시 시청역 3번출구 덕수궁 옆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성가(聖架) 수녀원이 있으며[8], 구로구 항동에는 성공회대학교도 있다. 성공회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계 대학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하다.
1967년까지는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관구 직할로 있다가 이때 처음 한국인 주교 이천환 바우로가 착좌하면서 서울의 주교를 의장으로 하는 독자적인 한국관구(대한성공회)가 성립하였다.
http://www.cathedral.or.kr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http://www.sister.or.kr → 성가수녀회
http://www.francis.or.kr → 성 프란시스 수도회(남자)6. 기타 ¶
성향은 크게 3개로 나뉘어진다. 구교에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성공회 전례를 잘 따르는 '고교파', 사회구원과 진보신학 성향을 보이며 가장 자유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광교파', 주교제도를 거의 신경쓰지 않고 개신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저교회파'. 서울교구의 성공회 교회들은 거의 고교파이고, 지방으로 갈수록 저교파 성향이 진해진다. 참고로 저교파 그룹은 감리교가 처음 생길 때 존 웨슬리를 따랐지만 선교적 사정으로 별도의 교회로 갈라질 때 나가지 않은데서 그 유래가 있다.
아무래도 다른 개신교 교파와는 달리 천주교와 크게 다른 점이 없기에, 옛날부터 천주교와 합치자는 얘기가 있었고 몇차례 긍정적 합의를 보기도 했으나, 여성사제 인정 등 여러가지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톨릭 측에서 일단 '결혼한 성공회 남성 사제를 조건부 인정한다'는 전제를 파격적으로 내세운지라 다시 적극적인 논의가 되고 있지만 한국 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의사를 부인하고 있고 거의 나라별로 분권화가 이루어져 있으며 [9] 영국 감리교와 성공회가 합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결론을 내기는 힘들어질 듯 싶다.[10] 앞서 말했듯 가톨릭 사제가 성공회로 가거나, 거꾸로 성공회의 보수적 사제들이 가톨릭으로 가는 외국 사례는 매우 많았다.
한국에서는 성공회대학교 학풍이나 장로교의 기복신앙과 기득권 지향적 면모와 대비되는 등의 영향으로 성공회가 진보적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 반대로 성공회 신자 수가 많으며 기득권에 속한다.[11] DC에 가면 미국의 '국립' 성공회 성당도 있고, 성공회 신자인 대통령이 가장 많이 나왔을 정도로 메이저 종교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사회적인 스탠스나 대통령 배출 횟수나 가톨릭이 마이너하다. 그러나 파시스트들과 한패였던 오점이 있기도 하다.
----- [1] 미국 독립후 Anglican이라는 말이 영국 왕당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Anglican 대신 Episcopal로 바꿔 쓴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대부분의 성공회 교회는 중립을 지켰지만, 일부 왕당파 성공회 성직자들은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 [2] 표준발음법상 '성'을 장음으로 발음한다. '성스럽다'는 의미의 한자 '성(聖)'은 장음으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 즉, 4대 성인의 '성인(聖人)'은 장음으로 [성ː인]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으며, '어른'이라는 의미의 '성인(成人)'은 단음으로 [성인]으로 발음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장단음의 구별이 많이 사라졌지만….
- [3]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하나이고 거룩하고(성) 보편되며(공)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회)를 믿나이다"에서 따왔다.
- [4] 다만 개신교인은 성공회에서 미사와 성찬 참석을 할 수 있다. 이게 장로교나 감리교와 공동예배를 할 수 있는 이유이다.
- [5] 성공회 사제가 준 세례는 아무 이의 없이 인정한다고 공칙된 바가 있다.
- [6] 참고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선의를 가진 동방 정교회인은 그 누구던지 천주교 7성사를 받는 것을 허용한다. 단지 정교회 측이나 천주교 측이나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지 않을 뿐이다.
- [7] 가톨릭이랑 정교회는 서로 공교회로 인정한다.
- [8] 주한영국대사관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사실 이 성당과 영국대사관 모두 예전 덕수궁의 원래 권역 안에 있는 것이다. 덕수궁 건물 중 하나인 양이재 건물이 주교관으로, 현재 대성당 경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
- [9] 천주교의 바티칸과 달리 캔터베리로 대표되는 영국 성공회가 전세계 성공회를 통제하지 못하고 대개 국가별로 설정되는 관구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특성이 가장 근본적 장애가 될 확률도 높다. 그래서 10년마다 전세계의 주교들이 모이는 렘바스 회의에 참여 안한다는 식의 행동이 가능하다.
- [10]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왔다.
- [11] 모 성공회 신자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에서 성공회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신부가 다른 미국인 신자들과는 다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누면서 동양인인 자신은 슬쩍 무시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 [12] 이신론자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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