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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서원(安樂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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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 ❏문화재지정: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1972.06.26지정) ❏배향인물: 송상현(宋象賢) 정 발(鄭 撥) 윤홍신(尹興信) 조영규(趙英圭) 노개방(盧蓋邦)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신여로(申汝櫓) 송 백(宋 伯) 김 상(金 祥) ❏창건연도: 1605년(선조 38) ❏사액연도: 1624년(인조 2) ❏향 사 일: 5월 25일 |
연 혁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선이 임진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첨사 정발(鄭撥), 다대첨사 윤홍신(尹興信) 등 부산지방의 선열을 모시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에 송공사단(宋公祠壇)을 건립한 것에서 비롯된다. 1624년(인조 2)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란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란 때 전사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을 배향하게 되었고, 1652년(효종 3)에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송상현의 학덕과 충절을 숭상 계승하기 위하여 내산 및 안락리(현 충렬사자리)에 이전하여 강당과 동서양재를 지어서 교육기관으로 삼게 한 것이 안락서원의 기원이다.
그 후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 터에 별사를 세우고 정부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및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735년(영조 11)에는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의 계청으로 1736년에 별사에 모셨던 이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함께 모셨으며 동시에 임진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홍신을 다시 모시고 또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한 송상현의 첩 김섬과 정발의 첩 애향을 충렬사의 동문 밖에 정려(旌閭)를 지어 기념하고 있다.
이처럼 안락서원은 임진란 때의 충신열사를 모셨기 때문에 뒷날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 때도 헐리지 않고 근년까지 그대로 내려오다가 1977년 정부의 충렬사 성역화 방침에 따라 경역을 확장하여 사당과 기념관 등 건물을 새로 짓고 그 보존과 관리에 힘쓰고 있다. 안락서원은 창건 이래 몇백년 동안 지방민을 교화하여 충군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이 고장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하는데 큰 이바지하고 있다.
1)주벽-송상현(宋象賢, 1551∼1592)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선조 3년(1570)에 20세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로 보임되었다.
선조 24년(1591)에서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었으니 임진란의 전년이었다. 부임한 이래 성의와 신의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성의 수축, 군비를 정비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에 왜적이 내침하여 4월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동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취병장(구 농주산, 현 동래경찰서 자리)에 진출하여 남문밖에 목비를 세웠다. 그 목패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응하여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이라는 결사의 글을 써서 적중에 던졌다.
그리하여 적은 3대로 나누어 14일 해가 저물기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15일 아침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송부사는 성중을 돌며 독전하였으나 대세가 불리해지자 조복을 갑옷위에 입고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붓을 잡아 부모님께 “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려지고 다른 진중에서는 기척이 없습니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 「孤城月暈 列陳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는 비장한 결의의 글을 남기고 의연히 죽음을 맞았다.
이 때 송부사를 보위하던 군관 김희수, 향리 송백, 종행인(하인) 신여노, 김섬(金蟾),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부민 김상, 이촌녀 등이 격투 끝에 장렬히 전사하였으니, 이들 또한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이들 중 하인 신여로는 어머니가 있기에 송부사가 독촉해서 집에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집으로 가던 중 부산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공의 후은(厚恩)을 입고 난을 당하여 감히 즉음을 아낄 것인가”하고 되돌아와 함께 죽었다.
또 김섬은 송부사의 첩으로 함흥출신 기생이었는데 부사와 함께 죽으려고 담을 넘다 적에게 잡히자 3일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부민 김상은 기와집에 올라가 적을 치니 마을의 두 여인이 같이 기와집에 올라가서 기와를 걷어 깨어주고 김상이 기와로 적 3인을 죽이고 모두 함께 죽었다.
송상현은 순절한 후 선조 27년(1594) 조정으로부터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으며, 효종 8년(1657)에 충렬공의 시호를 받고 숙종 7년(1681)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진증(進贈)되었다.
2)정발(鄭撥, 1553∼1592)
부산진성(釜山鎭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순절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의 자(字)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 원조(遠祖)는 고려왕조 때 군기윤(軍器尹)을 지낸 진후 (珍厚)로 뒤를 이어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계속하여 나왔다.
조선왕조 처음에 희계(熙啓)가 나서 태조의 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니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으로 봉해지고 시호(諡號)를 양경(良景)이라 하였다. 그의 손자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지례(之禮)가 있으며, 지례의 손자에 군수(郡守) 세호(世豪)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세현(世賢)이 있다. 세현의 아들 명선(明善)은 큰 아버지 세호의 양자가 되어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지냈는데, 관찰사(觀察使) 남궁숙(南宮淑)의 딸에게 장가들어 1553년 (명종 8)에 정발을 낳았다.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했고, 과묵하여 선비의 풍모가 완연하였다. 특히 소학(小學)에서 얻은 바가 많고, 자라면서 그 형과 같이 독행인(篤行人)으로 뽑혔다 하니 그 행실이 얼마나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약관(弱冠)에 이미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독하였으며, 아울러 손오병법(孫吳兵法)에도 통달하였다.
26세 때인 1579년(선조 12) 그는 문과(文科)를 버리고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것은 무과가 문과보다 쉬운 편이므로 빨리 출세하여 홀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함과 또 세상이 장차 무과출신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을 관망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3년 재임기간 중에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민들이 그의 어진 정사를 칭송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침 북변 종성(鐘城)에 여진족의 침구(侵寇)가 있어 원수(元帥)의 막하(幕下)로 부임하여 구란(寇亂)을 평정하였다. 그 뒤 거제현령(巨濟縣令)을 지내고 돌아와 비변사(備邊司)의 낭요(郎僚)가 되니 이는 무관 출신으로는 극히 어려운 자리었다. 하루는 대신들이 모여 앉아 국사를 의논하는데, 정발을 불러 기록을 맡아보게 하였다. 정발이 아무리 어려운 말과 글자라도 서슴치 않고 척척 받아쓰니,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무인(武人)이 어떻게 문장을 이처럼 잘하느냐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우연한 일이라고만 말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은 높이 나서 드디어 팔사(八司)의 낭관(郎官)을 겸하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벼슬이 승진되어 위원군수(渭原郡守)로 제수되었다가 임기를 마친 후 강섬(姜暹)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 (訓練院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司僕寺)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구할 기미가 보였는지라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로 올려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왜인의 침구 기미가 보이는데다가 바로 그 관문이 되는 부산진첨사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길을 떠나려 함에 정발은 그 어머니에게 하직하여 말하기를 「소자가 벼슬길에 오른 것은 오로지 어머님을 봉양코자 함이었으나, 이미 임금의 신하가 되었으니 또한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할 것입니다. 충과 효를 함께 다할 수 없사오니 어머님께서는 불효자식의 일을 걱정하시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가리고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가거라. 네가 가서 충신이 된다면 내 또한 여한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정발은 무릎을 꿇고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난 뒤 조용히 그 부인 임씨(任氏)에게 어머님을 정성껏 봉양하도록 당부하고 임지로 출발하였다. 정발이 부산으로 부임할 때 14세 되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름을 흔(昕)이라 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부자가 함께 임지로 떠났다.
부산진첨사로 부임한 정발은 왜적의 침구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주야로 그의 힘이 닿는 데까지 성을 지킬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임진 4월에 접어들었다. 초사흘 그는 망해루(望海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아들 흔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오늘의 이 잔치 뜻을 알겠는가. 이것은 너를 보내는 잔치이다. 네가 만약 천천히 간다면 기필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오늘로 빨리 가도록 하여라」고 했다. 흔(昕)이 말하기를 「과연 그렇다면 제가 어찌 아버님을 홀로 두고 여기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남아 있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자가 함께 죽음은 무익한 일이다. 너는 돌아가서 너의 어머니를 봉양토록 하라」면서 종자(從者)를 시켜 말에 올려 태워 떠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조방장(助防將) 이정헌(李庭憲)이 동래로 왔다가 정발의 초청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와 그와 함께 부산진성의 방비를 의논하였다.
예기한 대로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부대가 부산 앞바다에 쇄도하여 왔다. 정발은 전선(戰船)를 타고 바다에서 공격을 퍼붓고자 했으나, 이미 적의 배는 바다를 덮었는데 우리측은 겨우 전선 3척으로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물러 나와서 성밖에 있는 민가(民家)를 모두 불사르고 백성을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몰래 사람을 보내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날 밤 하늘은 유독 맑고, 달빛은 낮과 같은데 적은 이미 성의 주위를 포위하였다. 정발은 칼을 짚고 성루에 올라가서 장인(匠人)을 시켜 퉁소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군민이 모두 두려움을 잊고 평온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어쩌면 내일의 혈전을 위한 마지막 안식의 분위기를 조성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 적은 우리가 항복하지 않음을 알고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곳곳에 쌓인 시체들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중과부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戰勢)는 우리측에 불리하여 갔다. 화살도 동이 나고, 사망자가 급증하여 살아남은 사람의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윽고 한 비장(裨將)이 곁으로 와서 우선 성을 빠져 나가서 구원병이 오거든 다시 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정발은 격한 말로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인 즉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감히 다시 성을 버리자고 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하고, 군중에 영(令)을 내리기를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고 하니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었다. 부산진성의 항전은 처절했다. 최후의 한사람까지 사수하다가 죽어 갔다. 정발도 결국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무인답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성을 베개 삼아 호국(護國)의 귀신이 된 것이다.
성안의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성민이 모두 죽음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왜군들은 보복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까지도 모두 죽여 버렸던 것이다. 때문에 이 부산진 전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한 자는 전화(戰禍)를 기적적으로 모면한 사람과 당시 공격에 참여한 왜인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부산의 전황(戰況)과 정발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발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증직이 있었고, 숙종 7년에는 다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 내렸으며, 그 자손을 녹용(祿用)토록 하였다. 또 순절지(殉節地)에는 정공단(鄭公壇)을 세워 기일(忌日)에 향사하고, 동래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다대진첨사 윤흥신(尹興信)과 함께 춘추로 제향(祭享)하여 그의 넋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마전(麻田)에 있다. 함께 죽은 소첩 애향(愛香)과 종 용월(龍月)은 정공단에 합사(合祀)되어 제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열녀 애향은 충렬사 의열각(義烈閣)에도 모셔져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3)윤홍신(尹興信, ?∼1592)
윤흥신(尹興信) 공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事蹟)이 천양(闡揚)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관해 기록된 조엄(趙曮)의 윤공유사(尹公遺事)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 징비록(徵毖錄)을 보니 다대진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고 하였고, 또 재조번방지(再造蕃邦志)에는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키니 다대진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는데 징비록은 선조(宣祖) 조의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찬술한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인 신경(申炅)이 찬술한 바라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하였을 것이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임진란 후 160년을 지난 정축(丁丑); 1757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동래부사가 되어 도임한 이튿날에 충렬사를 참배하였는데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공과 부산진첨사 정공만이 제향되고, 다대진첨사 윤공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부산지역에서 전사하였는데 어찌하여 송·정 양공(兩公)만 한묘(廟)에 향사되고, 심지어 향리와 노비까지도 전사한 자는 함께 향사되었는데, 윤공만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던가 하고 심히 의심스러워서 읍지(邑誌)를 상고하고, 다대포에 가서 물어 보아도 세월이 지나고 전문(傳聞)이 끊어져 후예들도 알지 못하고, 후인이 천발(薦拔)하는 일도 없으니 당시의 윤공의 의열(義烈)이 드러나지 않게 됨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사년(辛巳年)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도내의 효열(孝烈), 절의(節義)를 표창하는데 윤공의 일도 그 한 가지였다. 예부에서 증직할 것을 정부에 올리고 정부에서 다시 상주하여 조만간 그 하회가 있을 것이나 마음속에 석연치 않은 것은 역시 윤공의 사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근자에 문득 구사맹(具思孟)의 조망록(吊亡錄)을 얻어 보았는데 그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첨사 윤흥신을 특서하고 주(註)하여 말하기를 왜적이 성을 포위함에 힘써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 부하가 말하기를 「내일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우선 나가 피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흥신이 말하기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어찌 차마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적이 과연 크게 이르니 군졸이 모두 도망갔다. 홀로 종일토록 적을 쏘아 죽이다가 성이 함락됨에 이에 죽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가지고도 충렬사에 합향(合享)되지 않는다면 충혼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후세 사람을 무엇으로 권장하리오 조엄이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윤흥신의 사적은 오래도록 드러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의 윤공사절기(尹公死節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충렬비(남문 앞에 세워져 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는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썼다.)를 읽고 윤공이 실려 있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고, 충렬사를 참배하고는 윤공이 참여되지 않았음을 슬퍼하였다. 그 유적을 방문하여도 이미 세월이 오래되어 그 자취를 살필 길이 없고, 지방 노인들에게 물어 보아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금년 봄에 내가 금정산 범어사에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국조전망인시식책자(國朝戰亡人施食冊子)를 보니 다대포첨사 윤공의 이름이 송·정 양공의 이름 밑에 크게 씌어 있었다.
공의 정충(貞忠)으로 유사(遺祠)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만 절간의 시식을 받게 되니 이 어찌 사림(士林)의 향모(向慕)하는 뜻이 산승(山僧)의 숭모함만 같지 못하리오 윤흥신의 순절 사적은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조번방지와 구사맹의 조망록, 범어사의 시식책자 등에 그 이름과 사적의 일부가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다대포에서 4월 14일에는 성을 지켰으나, 15일에 다시 밀려온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임진란 후 1백70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윤흥신의 사적은 오랫동안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다가 조엄, 강필리 등에 의해서 발현되고, 영조 임진 2월에 와서 비로소 충렬사에 제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약전(略傳)도 세우기 어렵다. 다만 그는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때 화를 당한 윤임(尹任)의 아들이라는 것 만 기록 되어 있다.
4)조영규(趙英圭, ?~1592)
자는 옥첨(玉瞻)이며, 직산인으로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 암리에서 출생하여 명종 6년(1551)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초관을 거쳐 사복시 주부, 판관이 되고 이어 제주판관, 무장현감이 되었다. 그 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가 다시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왜적이 쳐들어왔다. 병사 이각은 성을 버리고 먼저 달아나 고 열군(列郡)은 풍미하여 믿을 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탄식하였으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말을 달려가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공은 장차 어찌하겠소” 하니 송상현은 “마땅히 이 성을 굳게 지킬 따 름”이라 답했다. 이에 그도 “이 환란을 당하여 마땅히 그대와 같이 이 성을 지키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을 따름이라”라고 했다.
송상현이 그의 손을 잡고 크게 기뻐하자 그는 “나는 죽음으로 싸우기를 결심했으나 다만 노모가 양산에 계시니 돌아가 하직한 후에 다시 오겠다”하고 곧 양산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작별을 고했다. 말을 달려 동래로 오니 성은 이미 포위되어 위급한 가운데 있었다. 칼을 빼 들고 거세게 말을 채찍질하니 적이 잠깐 피하는 틈에 성중에서도 그가 다시 오는 것을 알고 급히 성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송부사와 같이 힘써 싸우다가 순사하였다. 숙종 때에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장성 모암서원, 양산 충렬사, 동래 충렬사에 배향하고 있다.
5)노개방(盧蓋邦, 1563~1592)
노개방(盧蓋邦)의 자는 유한(維翰)이요,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밀양(密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文材)가 있었음은 그의 동학(同學)인 배대유(裵大維)의 제문(祭文)과 조존성(趙存性)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피나는 가난 속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끝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없어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려는 뜻에서 자원하여 동래향교의 교수직을 맡았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1백74년 되는 해에 동래부사 엄린(嚴璘)이 적은 「동래교수 증도승지 노공 유사기(東萊敎授 贈都承旨盧公遺事記)」에는 노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하여 가장 완비된 전기를 쓰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노개방(盧蓋邦)의 선대(先代) 사적은 확실하지 않고 다만 「국조과방록(國朝科榜錄)」에서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라 하고, 밀양 유림에서 기록한 것에서는 부인이 여흥이씨(驢興李氏)로 학생 경옥(慶沃)의 딸이며, 그 증조부는 한림(翰林) 이태 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계해(嘉靖癸亥), 즉 명종 18년(1563)에 나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교수로 부임하여 30세에 동래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남문비기(南門碑記 : 송시열이 찬한 사적비로 지금은 시립박물관에 이관 보존 중임)에서도 노교수는 임란직전에 어머니를 뵈러 밀양에 가 있었는데 난이 일어나 동래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와 향교로 갔으나, 이미 선성(先聖)의 위패를 성중의 정원루(靖遠樓)로 옮겼으므로 통곡하여 성문을 두드렸다.
성문이 열림에 곧장 위패 앞으로 나아가서 예를 올리고 위패를 모셔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다. 적이 쇄도함에 부사 송상현과 제생(諸生) 문덕겸(文德謙) 등과 같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그 처(妻)도 또한 밀양에서 적을 만남에 남편의 과거 합격증을 안고 벼랑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이상이 노개방에 대한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충과 효와 예는 선비들의 기본교양임에 이 선비정신을 다 실천하려고 노력한 이가 바로 노교수인 것이다. 미관말직(微官末職)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러한 그의 충절로 뒤에 그의 사적(事蹟)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증직(贈職)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 되었으며, 또 향리(鄕里)인 밀양의 중봉서원(中峯書院)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6)문덕겸(文德謙)
제생이란 향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덕겸(文德謙)은 교수 노개방(盧蓋邦) 밑에서 공부하던 학생으로 난을 당하여 선생과 같이 순절한 사람이다.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이 밀양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 적이 밀려 왔으므로,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先賢)의 위패를 스스로 성중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함에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다.
그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서 동래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당시의 집은 여고리(餘古里)였던 모양인 듯 적병이 북으로 올라간 뒤에 종 검산(儉山)이 몰래 덕겸의 시체를 여고리로 옮겨다 묻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건중(建中)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부인 민씨가 자부(子婦) 정씨(鄭氏)와 9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고부(姑婦)와 함께 길가에서 죽었다.
종 검산이 여주인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岩窟]에 숨겨두고 두 시체를 업고 가서 묻었다.
문덕겸 부부는 한 묘에 묻혔으며, 손녀는 자라서 동래인 김천상(金天祥)에게 시집갔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유생(儒生) 이동형(李東馨)에게서 비문을 받아 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검산은 또 주인집 토지 문서를 우물돌 밑에 묻었다가 뒤에 찾아 내니 이로 인해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문덕겸은 뒤에 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1737)에는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7)그 외
송봉수·김희수·신여로·향리 송백·부민 김상을 배향하였으며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충렬사 내 유적
충렬사 내에는 본전과 의열각, 기념관, 소줄당, 군관청,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임란 동래24공신 공적비, 충렬탑등 볼 유적들이 많이 있다.
2)기록화
①부산분전순국도 동래보국충정도
②내성수사결의도 동래민중분전도
③다대진성결전도 수영유격전투도
3)순절도
①동래부순절도 및 부산진순절도
②송상현공종가동래부순절도
3)유품
①동래부사의 갑옷 및 투구
②부산첨사의 갑옷 및 투구
③다대첨사의 갑옷 및 투구
④동래부사의 전복(戰服)·전립(戰笠)·혁화(革靴)
4)교지(敎旨) 치제문(致祭文)
임진왜란 때 충신 37인, 효열(孝烈) 4인을 봉향하고 있음으로 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무사하였다. 사우 외에 대소 8개의 묘각이 있고, 사우와 소재당 사이에 동문·서문·중문이 있는데, 이 3문은 1972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담장을 설치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3,823㎡의 경역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참고-동래구지
충렬사 http://cys.busan.go.kr/
청아당 http://www.chong-a.ne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