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학교 11기 통영 하동 기행문
11기 별팀 권소희
감수 : 11기 광팀 유창구
(감수로 기록해달라고 졸라서 할 수 없이 넣어줌)
짧은 댓글 하나에도 창작의 아픔을 느끼는데 “1박 2일 동안의 기행문”을 남기겠다는 망언이 무척
부적절한 언행이었다고 생각하며 써본다.
떡, 김밥, 커피등 다양한 먹거리와 개인 필수품이 담긴 준비물을 받아보니, 마치 빈틈없게 준비된 패키지여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운영진의 깨알 같은 정성에 매우 감동하며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 통영, 하동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동안 자기소개도 하고 이름과 얼굴을 익히며, 저마다 1박 2일 여행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마음도 풀어놓았다.
일찍 출발한 덕에 점심 전에 박경리선생의 고향인 통영에 도착 했다.
박경리선생의 묘소가 있는 기념관에서는 작가의 중요한 업적과 작품들을 전시해놓았고 생전에 글을 쓰시던
원주 단구동의 집필 장소도 재현해 놓았다.
선생을 기념할 수 있는 뜻 깊은 추억의 장소는 문학이 소통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전시관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 짧은 산책로를 걷다보면 묘소에 이르게 된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마을 펜션에 머무르시다가 “이곳에 집짓고 살면 좋겠다”라고 하신말씀이 유언이 되어
이 곳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생전에 화려한 것을 멀리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묘소는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늘과 숲과 바다의 푸르른 빛이 유난히 돋보이는 언덕위에 봉문, 그리고 조그마한 상석하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 폭의 수채와도 같은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매료되었다.
생전에 즐기셨던 담배와 커피를 놓고 묵념을 했다.
그리고 직접 텃밭을 가꾸고 토지를 집필했던 단구동 집에서 담아온 흙을, 우리는 한줌 한줌씩 정성스럽게 묘소에 흩뿌렸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유작인 옛날의 그 집 中에서....
글로써 한 생애를 살아내신 작가의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풍요로운 자연에 둘려 쌓여
무한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통영이 처음이다. 여러 번 올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소소한 일들로 인해 주저앉았다.
토지학교를 신청하게 된것도 통영, 하동 여행 때문이었다.
하여, 해저터널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고, 한산대첩의 현장이었으며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이 있는 줄도 몰랐다.
무식이 횡횡해도 어쩔 수 없다.
착량묘 아래 해저터널이 있었다. 한낮 더위를 피해 들어가니 서늘한 기온이 제법이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어 노후화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관광명소로 제구실을 하고 있어 놀라웠다.
터널 중간에 역사의 애환을 담고 있는 공사장면과 운하의 변천사가 안내되어 있었다.
만조시 해저 13M라는 표지판을 보고서도 바닷속을 걷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통영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답게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유치환, 김춘수, 초정 김상옥등 많은
예술의 거장들이 태어난 곳이다. 박경리선생도 통영 사람들에게는 “예술의 DNA”가 흐른다고 말할 정도로
작은 항구도시는 예술의 흔적들로 넘쳤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역사적 의미를 지닌 근현대적 건물들이 동시에 존재해 있었다.
겁나게 오래된 이문당서점도 문을 열었고 중앙우체국의 빨간 우체통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움의 연서“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예술의 질이란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중앙시장 뒤편으로 이어진 동피랑 마을은 비탈담벼락에 다양한 색채를 입혀 동화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가벼운 예술장식이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고 했던가? 많은 여행자들은 다양하고 재치있는 그림에 즐거워하며,
감성적 자극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강호에 무림고수들이 이렇게 많은데 예술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저 즐길수있는 능력만 있으면 종일 꼼꼼하게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는 동피랑마을, 참으로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2년마다 벽화가 바뀐다고 하니 벽화축제 기간에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통영에서의 마지막 방문지인 이순신공원으로 이동했다.
통영하면 이순신장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당시 학익진이라는 탁월한 전술로 일본 수군을 전멸시켜
세계4대 해전으로도 평가받고 있는 한산도대첩. 최대 승전지다.
당시에 사용하던 화포인 천자총통을 한산도가 마주한 곳에 전시해 놓고 있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이순신동상은 지긋한 눈길로 한손에는 커다란 칼을, 한손은 저 멀리 도쿄를 가리키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필생즉사 필사즉생은 이순신장군의 묘비명으로 남았다.
늠름하고 당당한 애국심의 표상, 커다란 감정의 파도가 온 마음을 적시고 지나갔다.
바쁘면 바쁜대로 적응하며 하동 최참판댁으로 출발했다.
하동포구에서 잠시 쉬며 강바람도 쐬고 감미롭고 서정정인 음악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나가던 나그네도 리듬을 타며 같이 어울렸다. 섬진강 모래톱에서 재첩 잡는 손길은 분주하기만하고
매실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평사리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고 식당에서 비빔밥으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했다.
어쩌면 제일 중요한 일정중의 하나인 토지문학공원 활성화에 대한 발표시간에는 상금이 걸려있어 흑심을 품어보았지만
뻔히 보이는 컨텐츠가 발목을 잡았다. 용정, 훈춘의 자매결연등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린 광팀이 상금을 받았다.
이른 아침, 구천이가 질풍처럼 내달려 시대의 고통을 울분으로 토해내던 고소산성에 올랐다.
평사리 악양의 넓은 뜰과 섬진강이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황금보리밭과 모내기를 마친 초록 논이 생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서희松 길상松으로 불리는 부부송과 동정호의 운치 있는 풍광도 기름진 들녘의 풍요로움으로 더해주었다.
아침을 먹고 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평사리의 기억을 떠올리며 최참판댁과 용이네 칠성이네 함안댁....도 둘러보았다.
온전한 집중력으로 25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써내려온 왔던 발자취를 따라 화개장터, 쌍계사를 거쳐 천은사에 도착했다.
편지쓰기.
손 편지를 썼던게 언제인가.
카톡으로 문자로 대신하던 안부를 진중하게 쓰려니 머리속에서 생각만 빙빙 돌뿐...... 편지 받아든 이의 표정을
그려보며 한 참을 쓰다 지우다.
조용한 경내를 산책하다보니 고정된 주소를 갖지 않고 언제든 내킬 때 떠돌이 생활을 할 수 있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장소를 바꾼다는 것이 곧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는 것일 수 있으므로.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무사히 원주에 도착했다.
이번 1박 2일의 통영, 하동 여행은 운영진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단연코 불가능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참 고맙다.
일관된 줄거리를 따라 같은 곳을 보며 경험하는 소속감이 좋았다. 그리고 모두들 시간을 준수해주었고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도 없어 더 즐거운 여행이었다.
9만원 내고 거저먹은 이번여행의 감사는, 11기를 잘 수료해서 12기때 봉사하러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자세히 쓰셔서 눈에 그려지듯 하네요.
그런데 옆지기께서는 곁다리.....
10기 정태화
글에서 정성이 느껴집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다시 통영 하동 여행하는것 같은 글 잘읽었습니다
ㅎㅎㅎㅎ 정말 다시 한번 통용. 하동을 다년온 듯한 느낌입니다.
권소희. 유창구 두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