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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오두막
그의 아픔 속에 당신의 아픔이 있다.
사 53장 1~6절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책은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이 책은 새들백교회의 릭 웨렌 목사님이 쓰신 책으로
전 세계에 3천만 부 이상이 팔린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신학교 9년을 다녔던 모든 신학을
총 정리가 되는 엄청난 책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고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왜 태어나야 했는가? 내가 왜 예배해야 하는가?
내가 왜 훈련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왜 봉사해야 하는가?
내가 왜 전도해야 하는가? 그 모든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삶과 저의 목회와 저의 모든 감동을
더욱 풍성케 해 준 것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었습니다.
그 후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독서를 했지만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최근 3년 정도는 독서 모임을 통해서
인문학 서적 등을 꾸준해 독서 해 왔습니다.
정말 좋은 책도 많았고, 인간의 지식 체계도 정말 놀랍고 대단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지식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책장에 많은 장서가 꽂혀 있지만,
점차 그 책의 제목만 기억되는 정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어령 박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의 서재를 꽃밭이라 했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에는 자신의 서재를 ‘시체실’이라고 했는데
마치 그 책들이 시체와 같이 되어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 때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읽고 엄청 흥분했지만
지금은 전혀 흥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각의 문법’ ‘에디톨로지’ ‘초협력’ ‘ 마음의 과학’
‘처신’ ‘해피어’ ‘프랑스의 아이처럼’ ‘기브앤테이크’ ‘돈의 인문학’
최근에는 ‘지리의 힘’ ‘명견만리’ 등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점차 그 책의 내용들이 점점 잊혀 져 가고 있고
시체실의 시체와 같이 저의 생각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새벽 별처럼 빛나고 있는 책은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이
저희 영혼에 큰 빛을 선사해 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오두막’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소설 ‘오두막’은 맥켄지 앨런 필립스라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맥’이라고 부르는 그는 미국 중서부의 한 농장 지대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주 술에 만취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는 끝도 없는 설교와 훈계를 늘어놓고,
즉석 성경 퀴즈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곤 했습니다.
열세 살 되던 해, 청소년 수양회에 갔다가 맥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도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은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는 지도 교사가 아버지의 직장동료라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며칠 후, 그 교사는 맥의 아버지에게 충고를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일 텐데, 그것이 맥에게는 큰 화를 초래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이모 집에 보내고,
뒤뜰에 있는 참나무에 맥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훈계를 합니다.
2주 후, 맥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가출을 결심합니다.
열세 살 소년에게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크게 탈선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갑니다.
20대 초반에는 신학교에도 갑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화해했으며
내네트 새무얼슨과 결혼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는데, 두 아들은 독립했고,
조시와 케이트 그리고 늦둥이 다섯 살 미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노동절 연휴, 맥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알로와 호수 주립 공원에 야영을 하러 갑니다.
간호사인 아내 낸은 연수차 시애틀에 갑니다.
맥은 세 아이와 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가 카누를 타고 놀다가 그만 뒤집혀 버립니다.
맥은 강물로 뛰어 들어 허우적 거리는 케이트와 조시를 구조해 냅니다.
한 참 후, 뭍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돌아보니, 벤치에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던 미시가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애간장을 태우는 초조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깊은 산 속,
버려진 어느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미시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미시를 살해한 범인은 어린 소녀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만이 밝혀 집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 되어
인적이 없는 오두막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시신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후, 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대한 슬픔’이 자리잡습니다.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가끔 웃는 일이 있어도, 그 웃음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해 여름 이 후, 그 거대한 슬픔은
‘투명하지만 무거운 누비이불처럼 맥의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눈비가 심하게 오던 날,
맥은 우체통에서 발신인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을 발견합니다.
그 엽서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맥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그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가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그 오두막’은 말할 것도 없이 미시가 살해된 곳을 가리킵니다.
맥은 엽서를 받아들고 눈앞이 하얘집니다.
‘파파’는 아내 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인가? 아니면 누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혹시 그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는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맥은 차마 그 엽서를 구겨 버리고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제 집으로 보내 놓고친구의 지프를 빌려 혼자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4분의 1의 내용입니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맥이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맥이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만난 장면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고
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과 다른지도 알 수 있었고
왜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분명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을 완독하면서
이 세상의 삶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맥의 오두막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오두막도 있을 것인데
‘내 인생의 오두막’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맥과 같은 극한의 상처는 아닐지라도
여러분에게도 상처입은 인생의 오두막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내 아들이 죽었을 때,
친구 만나러 간 아들이 어느 날 죽음이 되어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을 때
갑자기 부도를 맞고 재산을 다 잃어 버렸을 때
분노와 절망 속에서 인생의 오두막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깊은 상처, 아픔, 지울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때론 슬프기도 하고, 때론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론 후회와 자책감에 빠지기도 하는
인생의 오두막, 우리 모두에게 하나 쯤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저자 폴 영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산 사람입니다.
캐나다 태생인 그는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에서 열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폴은 원주민에게 깊은 성적인 학대를 당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잠시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다시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자주 그렇듯이,
그는 졸업할 때까지 열 세 번이나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돌아다니며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억누르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발버둥쳤습니다.
그로 인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생기고, 일중독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가까스로 정상인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억눌린 상처와 아픔이 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지독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게 됩니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난파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아내 킴은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로부터 11년 동안 남편의 치유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두막’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출판사에서는 하나님 이야기나 너무 많이 나온다고 출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소량의 책을 찍어 냈는데,
이것이 소문으로 소문으로 퍼져서 800만부 이상이 팔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해야 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을 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환란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맥과 같은 내 인생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오두막에서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맥의 딸 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미시는 연쇄 살인범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맥은 연쇄 살인범에 대한 원망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꾸어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맥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자
그 오두막에서 다시 만나자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오두막이 맥의 오두막이 있지만 예수님의 오두막도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오두막이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오두막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장입니다.
그가 찔림을 당하고, 그가 상함을 입고, 그가 채찍에 맞고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했던 그 골고다의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오두막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오두막에 맥의 오두막을 초대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상처입은 자가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자
절대자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상처와 아픔을 받으시고
자신의 상처와 그 아픔 속으로 우리를 초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부제로 ‘그의 아픔 속에 당신의 아픔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자신의 아픔 속으로 우리를 초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먼저 예수님의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고,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무엇을 짊어 졌다고 했습니까?
4절에 보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우리의 질고 때문에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그 질고를 지시고
그 질고 속으로 우리의 질고를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아픔 속에 우리의 아픔이 있습니다.
마치 고슴도치가 새끼를 품은 것과 같습니다.
고슴도치는 온 몸이 수 많은 가시로 둘러 있습니다.
한 번은 치타가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고슴도치는 온 몸을 똘똘 감고 가시를 돋구었습니다.
그러자 치타는 입 주둥이에 수 없이 가시에 찔린 채
고슴도치를 잡아먹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시를 우리 주님은 품어 주고자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의 가시 속에 우리의 가시를 끼워 주신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가시 때문에 어떻게 젖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 속에
새끼의 가시를 끼워 놓고 새끼에 젖을 주고 새끼를 사랑해 준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의 상처를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바로 이런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의 가시를 받아 주시고자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자신의 아픔 속에
우리의 아픔을 끼워 놓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결론 맺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자신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는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아픔을 갖고 있고, 누구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내 혼자일 것이라는 절망 속에 포기하지 마시고
견디고 버티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어도 견디고 버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오두막에서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고
그 선하심을 깨닫는 순간, 모든 상처가 치유됩니다.
‘오두막’의 맥의 상처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두막에서 만나 주시면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이 보게 하여 주십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그 여러분의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