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간 당시 〈한강이여 한 번 범람하라!〉고 목울대를 높였다. 도시의 골목길이 인간 삶의 실핏줄이듯 한강의 지류는 국토의 실핏줄. 한강은 실핏줄을 모두 모아 보듬고 수십만 년 이상을 묵묵히 흘러내린다. 그 강물 따라 사람은 사람과 이어지고 강물은 지류를 보듬고 꿈을 한층 부풀리며 인간의 정념을 실어 나른다. 한강은 인간의 삶을 꿈을 역사를 대자연의 흐름에 아로새기며 흘러내렸다. 《한강문학》은 한강 물길을 따라 그 꿈의 궤적을 따라간다. -. 김종상 시인께서 한강수 관련 고시 31수를 선정하고, 한강을 주제로 한 주옥같은 본인의 현대시 12수를 함께 보내주셨다. 경강京江의 풍경과 인간의 발자취가 한강물의 흐름 위에서 지휘자(김종상 시인)의 의도에 맞춰 유장하게 수준水準을 맞춘다. 과거와 오늘이 미래를 향하여! -. 9호 한강이천년 에서 다음호 내용을 예고하는 “리드詩”에,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의 꿈에 “경주를 흠뻑 젃시며 오줌 누는 꿈”을 주제로 신계전 시인(양구문인협회 회장)께 청탁했었다. 그 결과, 양구에서 절구絶句 〈배꼽의 상채기〉 를 흘려보냈다. 금수강산 한강 상류! 금강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 북한강 물을 강원도 구비굽이 돌아 양구에서. -. 이번 10호 한강이천년 리드詩 에서는 한강 하구에 우뚝 의연하게 태고부터 자리 잡고 있는 강화도江華島를 향하여 달려간다. 본래 훨훨 날아다녔던 여인처럼, 가볍게, 한강 본류, 서울 강서구에 하강(?!)한 신재미 시인(한강문인협회 협동조합 이사)께서 보낸 절구 한 수! 〈아, 우리의 한강!〉!! 미래를 열어 갈 강화도를 향하여 옥고玉稿를 스냅하듯 흘려보낸다. 민족의 애환이 얽힌 강화도에 정착한 江華學派!!! 민족사의 박물관!!!! 민족의 미래를 열어 갈 강화도를 향하여!!!!!
|
다산茶山의 시詩
한강물은 쉬지 않고 흐르고
삼각산은 끝없이 높은데
강산이 바뀌고 변해도
당파 짓는 무리들 깨부술 날이 없으니
간사한 무리들 없어질 날 없네
한 사람이 중상모략을 하면
여러 입들이 너도나도 퍼뜨려
간사한 말들이 기승을 부리니
정직한 자는 어디에 발붙일 것인가
봉황鳳凰은 원래 깃털이 약해
가시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고 싶네
방랑이 좋아서는 아니로되
더 있어야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고
대궐문은 포악한 자가 지키고 있으니
무슨 수로 나의 충정忠情 아뢰리
옛 성인 훌륭한 말씀에
향원鄕愿은 덕德의 적賊이라고 했지.”
-다산의 시 〈고의古意〉 全文
“강산도 바뀌건만 왜 인간의 못된 짓은 바뀔 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당파싸움만 하느냐”며 탄식하면서 귀양살이 가기 직전에 다산이 지은 시詩이다.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18년의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은 간신(奸臣)들의 비방(誹謗)을 못견뎌 벼슬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고자 했다.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자연과 중상모략(中傷謀略)만 일삼는 무리들과의 대비를 통해 부정적 사회상을 비판했다.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 같다.
제공 : <정윤훈鄭允爋>(성균관대 문자학교수)
사라진 섬, 저자도楮子島
조선시대 현종 5년(1664년) 정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강 남쪽에 있는 저자도楮子島에서 판결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세력 있는 양반집의 노비私奴인 선先이란 자가 같은 마을 사람인 세현世玄이란 사람과 씨름角力을 하게 되었다. 세현은 힘이 장사인데다가 기술까지 뛰어나서 선이란 노비가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평소 힘깨나 쓴다고 으스대다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강변의 모래펄에 얼굴을 처박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자 선은 너무나 어이없고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놈이 씨름을 좀 잘한다고 나를 모래펄에 처박았겠다. 어디 두고 보자!”
집으로 돌아간 그는 곧바로 부엌칼을 들고 나와 단숨에 세현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동네사람들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를 현장에서 붙잡아 밧줄로 묶은 다음 관가에 넘기려고 하였다.
“네 이놈! 아무리 권문세가의 사람일지라도 노비인 주제에 사람을 죽였으니 마땅히 관가에 가서 벌을 받아야 한다. 당장 형조로 가자!"
한편 집에 있다가 남편이 노비의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세현의 부인 임생任生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남편을 죽인 원수를 그냥 살려 둘 수 없다고 결심했다. 임생은 부엌칼을 들고, 밧줄에 묶여 땅바닥에 꿇려 앉혀있는 선에게로 다가갔다.
“네 이놈아!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내 남편을 죽였어? 너는 내 손에 죽어봐라”
임생이 사정없이 찔러 대니 노비는 찍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씨름을 하다가 졸지에 두 사람이 죽었으니 사건이 커졌다. 관가에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었다. 백성들의 범죄를 담당하는 형조刑曹에서 조사한 결과, 이 사건은 너무나 기이하여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결국 임금에게 고하게 되었다.
“부인이 남편을 위해 복수했을 때 적용할 만한 법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표창을 해야 할 정도의 열녀烈女에 해당하므로 사형에 처할 만한 죄일지라도 덮어 주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쓰는 율律에 의하면, ‘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살해되었을 때 흉악한 행위를 한 자를 자손이 멋대로 죽인 경우에는 곤장 육십 대에 처하고, 현장에서 즉시 죽인 경우에는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부부는 삼강三綱의 하나인 만큼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위해 복수한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죄인에게 곤장 육십 대의 벌을 내리는 것이 어떠할까 아뢰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일단 현장에서 죽인 이상 곤장 육십 대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타당치 못할 듯하다.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여 임생은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게 되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지만 중랑천이 흘러내려와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 강기슭에는 물을 따라 쓸려 온 토사와 자갈이 쌓여서 삼각주처럼 만들어진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섬의 일부가 유실되었지만 1930년대에 측량된 기록에 의하면 저자도는 동서의 길이가 2천 미터, 남북의 길이가 885미터로 118만 제곱미터나 되는 넓은 면적을 가진 섬이라고 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압구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모래와 자갈을 마구 채취해 건물을 짓는 바람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저자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고, 동서로 흐르는 물길과 남북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의 모양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데다가 길고 긴 백사장과 무성한 갈대숲이 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섬은 고려 말에 재상을 지냈던 한종유韓宗愈의 소유지로 되어 그의 별장이 있었지만 조선이 개국하면서 왕실의 땅으로 된 뒤 19세기까지 소유권이 그대로 내려왔는데, 왕실의 소유가 된 후에도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즐겨 찾으며 시를 짓고 놀이를 했던 곳이다.
저자도는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 한민족 생활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뱃놀이와 연회를 즐기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국가적인 차원에서 비를 오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비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강물에 실려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백사장이 잘 발달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를 하는 장소로도 인기기 있었으며,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 그것을 사고파는 거래가 성행하면서 저자도의 주변 마을에는 ‘닥점’이라는 것이 생겨나기도 했다. 명종 5년(1550년) 윤 6월의 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내린 폭우로 삼전도와 저자도의 인가 10여 가구가 허물어졌고, 100여 가구가 침수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저자도는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놀이터가 되기는 했어도, 일반 백성들이 생활을 하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도가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또 있다. 조선조 위정자들이 세상을 속이는 미신迷信이라고 배척했던 무속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과 우주의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통치이념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접합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면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핵심적인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저자도였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하면서 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삼는 농경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은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가뭄은 위정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무속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의 신앙과 불교 등을 철저하게 배척하면서 귀신을 섬기지 않았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였지만 가뭄이 들었을 때만큼은 민간의 제사방법을 통해서라도 비를 내려 달라고 하늘에 비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초기인 태종 때부터 말기인 고종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을 때면 서울과 지방의 곳곳에서 왕실과 관료들이 앞장서서 백성들과 함께 기우제를 올렸다는 내용의 기록이 왕조실록에 수없이 등장한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우제는 보통 12회에 걸쳐 행하였는데, 삼각산, 남산木覓山, 한강, 용산강, 저자도, 산천의 우사雩祀, 사직社稷과 북교北郊, 종묘宗廟, 모화관慕華館의 연못, 경회루慶會樓와 춘당대春塘臺 등에서 지내고, 마지막 열두 번째 기우제는 5방의 토룡제土龍祭를 행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저자도에서 지내는 것은, 용의 모양을 그려서 제사를 지낸 다음 강물에 가라앉히는 방식인 화룡기우제畵龍祈雨祭가 중심을 이루었다.
다양한 형태로 거행되었던 조선시대 기우제 중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존재이면서 강을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믿었던 용龍과 연못을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믿었던 도마뱀蜥蜴에게 제사를 지내는 화룡기우제畫龍祈雨祭와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라고 할 수 있다.
석척기우제는 도마뱀을 잡아서 독에 넣고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독을 두드리면서 비를 빌도록 하는 기우의식祈雨儀式인데, 비를 내려 주지 않으면 도마뱀은 죽을 수밖에 없으니 빨리 비를 내리게 하라는 내용으로 된 협박과 명령의 화법을 가진 노래를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화룡기우제는 비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고 믿었던 용의 영험을 이용하는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용을, 맛난 제사음식과 용왕경龍王經과 같은 주문으로 잘 대접한 다음 그것을 강 속에 가라앉히는 것이 이채롭다. 저자도가 화룡기우제를 지내는 중요한 장소로 된 까닭은 이곳에 물의 신을 모시는 사당水神祠이 있어서 백성들이 오래전부터 받들어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詩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 저물어 가는 저자도 물가에는
수신사의 무당 북소리 둥둥 나는데
마을사람이 중얼거리며 외는 주문소리 살짝 들어 보니
규중 여인들의 한 많은 사설이 대부분이었네
楮子洲邊落日時
㪳㪳巫鼓水神祠
村人密聽呢喃奏
多是閨中怨女詞
이 시에서 보듯이 저자도는 조선조 전 시기에 걸쳐, 한편으로는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놀이터 구실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강을 터전으로 살았던 민초들이 슬픔과 한을 풀어내는 해원의 장소로 작용하면서 상층과 하층의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 문화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룡기우제畫龍祈雨祭〉 제사는 경일 庚日, 신일辛日, 계일癸日에 지낸다. 수풀이 우거진 연못이나 강이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관에서 파견된 제관들과) 60이 넘는 노인耆老들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먼저 술과 고기를 바쳐서 사령신社令神에게 고하여 아뢴다. 장소가 결정되면 높이 약 60센티미터, 넓이 3.9 제곱미터 정도의 삼단으로 된 제단祭壇을 쌓고, 사방 스무 걸음 정도 되는 거리에는 흰 줄을 쳐서 경계로 삼는다. 제단 위에는 대나무 가지를 심고, 고운 비단에 용龍의 그림을 설치한다. 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도록 한 검은 물고기를 그리고, 주변은 북쪽 하늘의 중앙을 뜻하는 천원天黿에 있는 열 개 별자리를 두르고, 중앙은 백룡白龍이 되어 검은 색의 구름을 토해 내도록 그린다. 아래에는 파도 모양을 그린 다음,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한 모습의 거북이가 실과 같은 검은 기운을 토해 내도록 한다. 용은 금색과 은색, 그리고 곱고 붉은 빛깔金銀朱丹로 형태를 꾸민다. 또한 검은 깃발을 세우고 머리를 잘라 낸 거위의 목에서 피가 나와 상에 흐르도록 한 후 물을 묻힌 버드나무 가지로 용龍의 윗부분을 씻어 낸다. 비가 오기를 사흘 동안 기다렸다가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낸 다음 용 그림을 가져다가 물속에 가라앉힌다. 비가 내린 뒤에는 감사의 제사를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에서 지내는데, 이것을 기우보사제祈雨報祀祭, 혹은 보사제報謝祭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보사제를 지내기도 했다. |
검룡소부터 한양까지
- 한강은 조선 최대의 교통과 물류유통의 근간이었고 복합적 문화공간이었다.
한강의 시원始源 검룡소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대덕산 금대봉 아래에 있는 검룡소儉龍沼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한강의 발원지에 대해서 조선시대까지는 오대산의 서대西臺 봉우리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인 우통수于筒水로 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정확한 실측을 한 결과 검룡소가 우통수보다 몇십 킬로미터가 더 긴 것으로 밝혀져 검룡소를 한강의 발원지로 확정하였다. 검룡소에서 솟아난 물은 서쪽으로 흘러 정선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골지천骨只川이 되는데, 오대산에서 내려온 송천松川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한강의 뗏목이 출발하는 여량餘良의 아우라지이며 한강의 본류를 형성하는 물줄기다.
*사진 : 검룡소
아리랑의 원조, 정선아라리
아우라지는 정선아라리가 태어난 지역이다.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한 정선아라리 노래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준다. 여량에 사는 처녀와 유천에 사는 총각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을 하였는데, 처녀는 매번 유천리 부근에 있는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간다고 하면서 강을 건너가서는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늦은 여름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지난밤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자 처녀는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던 처녀는 아우라지 강을 건네주던 뱃사공을 원망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아우라지 지장구 아저씨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노랫말에 나오는 “지장구 아저씨”는 지池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아우라지에서 뱃사공을 하면서 장구를 잘 치고 아라리를 멋들어지게 불렀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골골마다 여울목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갖 사연을 담고 있는 아라리는 아우라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 평창, 태백 지역에 걸쳐 널리 분포하는데, 전국에 퍼져 있는 아리랑의 원조가 된다.
한강수로의 수운 발달
아리랑의 본고장인 이곳 여량의 아우라지는 한강 하류에 있는 서울까지 뗏목이 떠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정선아라리는 뗏목아라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뗏목을 엮어 물길을 타고 도회지의 나루까지 나르는 사람들을 떼꾼이라고 하는데, 나무 수요가 많을 때는 전국에서 떼꾼들이 모여들었다. 나무를 끈으로 묶어 물에 띄운 다음 목적지까지 옮겨갈 수 있도록 만든 뗏목은 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뗏목은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이 별로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정선에서 출발하는 뗏목은 한강의 강물을 이용해 나무를 운송하는 수단으로서 조선 초기부터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년)5월18일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강 나루를 관리하는 도승漢江渡丞 벼슬을 하는 심지沈旨가 와서 아뢰기를, “충청도 제천의 군인 김중선金仲善 등 6인이 청풍에서 뗏목을 타고 양평 부근에 이르렀다가 큰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려 3인은 물에 빠져 죽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해 내었습니다.”라고 하니 특별히 심지에게 한 계급을 올려 주고, 김중선 등에게 쌀을 내려 주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이었던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어서 한강 뗏목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침에는 남산 향나무에 깃발 나부끼고
저녁이 되면 한강에는 뗏목이 떠 있네
朝飛木蜜旆
夜泛漢江槎
조선 초기의 기록에 한강의 뗏목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로부터는 인제에서 내려오는 북한강과 정선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의 물길을 통해 나무를 뗏목의 형태로 실어 날랐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의 뗏목을 통해 나무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무분별하게 베어졌던지 숙종 25년(1699년) 8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좌의정 벼슬을 하는 서문중이 아뢰기를, ‘황장목 같은 목재를 함부로 벌목할 수 없도록 지정된 황장금산黃腸禁山이 이미 모두 민둥산이 되었고, 오직 삼척과 강릉에만 약간 쓸 만한 목재가 있는데, 장사꾼들이 서로 짜고 그것도 베어 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은 재목도 침범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방의 수령守令 가운데에서 파견할 사람을 정해 정선旌善과 영월寧越 사이의 뗏목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또 판윤判尹 벼슬을 하는 이언강李彦綱은 청하기를, ‘파견할 관리 한 사람을 더 정하여 우마牛馬를 이용해서 영남嶺南으로 운반하는 길을 나누어 지키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아울러 옳게 여겼다.
*사진 : 뗏목
한강과 정선의 뗏목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영동과 영서 지역의 나무를 잘라 한강을 통해 뗏목으로 운반하는 수단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짓기 위해 전국의 나무를 징발할 때 한강의 뗏목길이 활성화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정선의 뗏목은 떼꾼들에 의해 길고 긴 한강을 따라 이동했으며, 영남으로 가는 목재는 단양과 제천 부근의 매포, 청풍에서 내렸다. 또한 이곳부터는 물은 많아지고 위험한 여울은 적어져서 비교적 안전해지므로 더 큰 뗏목으로 만든 후 서울을 향해 내려와 광나루, 노량진, 마포 등의 나루에 닿아서 목재로 쓰일 곳으로 향했다.
뗏목의 운행은 주로 4월부터 11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아우라지에서 떠날 때 뗏목의 크기는 지름이 40센티미터 정도가 되는 통나무를 8~10개 정도로 엮어서 한 떼를 만드는데, 이것을 동가리라고 하였다. 영월과 중간 지점 정도인 가수리에 도착하면 동가리 6~7개를 엮어서 반 바닥짜리 뗏목으로 만들었다. 영월에 닿으면 평창강으로 불리는 서강西江에서 뗏목을 다시 합쳐 한 바닥의 뗏목을 완성하였다. 뗏목 한 바닥은 대략 120개에서 150개 정도의 통나무를 엮은 규모였다.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물이 많을 때라도 닷새 정도는 걸렸다. 도중에 휴식을 취하고 숙박을 해야 하는 것이 떼꾼들의 일과였다. 영월을 지나면서부터는 물의 양도 많아지는데다 영남으로 내려가는 목재를 내리기도 하고, 서울로 가는 뗏목을 다시 메기도 하는 까닭에 이 부근에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충주와 단양에서 서울로 가는 뱃길은 물의 양이 많아 영남과 강원, 충청 등지에서 세금으로 걷힌 곡식을 실은 세곡선稅穀船이 늘 드나들었고, 서해에서 서울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소금배까지 오갔으므로 단양의 매포, 제천의 청풍 등에는 이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술집과 객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떼군들과 소금배등은 모두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니 응당 이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성황을 이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 : 주막집
떼꾼 아리랑과 꽁지갈보
아우라지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떼꾼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 부른 아리랑을 “떼꾼아리랑”이라고 한다. 그들이 부른 노래 중 한 부분을 보자.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영월 덕포 꽁지갈보야 술판 닦아 놓아라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 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별여 놓아라
여울은 강폭이 좁아지고 경사가 심해지면서 물살이 아주 세게 흐르는 곳을 가리키는데, 된꼬까리여울은 한층 심하게 꼬꾸라질 듯이 흐르는 물살이 있는 곳을 지칭한다. 특히 이런 곳은 물이 빙빙 돌기도 하여 뗏목이 이곳에 한번 갇히면 떼꾼들만의 힘으로는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이런 여울은 떼꾼에게 있어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덤과 같은 곳이기에 노래의 가사에까지 등장한 것이다. 꽁지갈보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팔면서 떼꾼을 유혹하는 작부酌婦를 가리키는 말이다. 꽁지는 짐승의 꼬리나 사물의 맨 끝을 낮잡아 부르는 것으로, 이들을 꽁지갈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술과 몸을 파는 작부들은 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남정네들을 유혹하는데, 처녀처럼 보이려면 머리를 길게 땋아서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단발령이 내려진 후 많은 사람들이 긴 머리를 자르게 되었고, 남성이나 여성이나 짧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술집 작부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한복을 곱게 입기는 했어도 머리가 짧아서 댕기를 땋거나 틀어 올려서 비녀를 꽂을 수도 없게 되자 아예 머리를 뒤로 합쳐서 끈으로 묶어 버리거나 두 갈래로 나누어서 묶는 정도의 치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떼군들이 이들을 가리켜 꽁지갈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애교가 섞인 것이면서 정감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래를 들은 술집의 작부들 역시 떼꾼들에게 화답을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재작년 봄철이 되돌아왔는지
벳사공 아재들은 또 내려오네
놀다 가세요 자다 가세요
그믐 초생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이렇게 주고받는 수작을 건넨 다음 뗏목을 풀어 놓은 떼꾼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서울을 향해 다시 떠나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매포나 청풍에서 상인들에게 뗏목을 넘기고 돈을 받아 꽁지갈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영월이나 정선의 군수 월급이 20원일 때 이곳까지 뗏목을 타고 내려와서 넘기면 30원의 목돈을 벌었다고 한다. 만약 뗏목을 타고 서울까지 가서 넘기게 되면 소 한 마리 살 정도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고 하니 떼꾼들에게는 다른 일거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정선에서 아리랑을 조사할 때 떼꾼이었던 사람에게 들은 것이데, 한번 뗏목을 타고 내려가면 엄청나게 큰 목돈을 받지만 결국 그 돈을 거의 다 꽁지갈보에게 바치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농사철이 한창인 정선의 고향마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자신의 눈에는 그런 것이 들어올 리가 없었고, 언제 또 뗏목이 뜨는지에만 온 신경이 가 있었다고 하였다. 떼꾼들이 뗏목을 넘기고 값으로 받는 목돈을 떼돈이라고 했다. 이 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란 뜻으로 지금까지도 쓰는 표현이다. 결국 떼돈의 유래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뗏목을 넘기고 받는 돈이라는 것이 된다.
한강에서 떼돈 번 사람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강의 뗏목은 1908년, 삼림채벌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조직적인 목재 약탈이 시작되자 더욱 활성화되었다.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울창했던 우리나라의 삼림이 황폐해진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 들어오는 목재의 25퍼센트 정도는 정선에서 나온 것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고, 서울로 유입되는 화물량의 40퍼센트 정도는 나무와 목재가 차지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나무가 뗏목으로 운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뗏목으로 내려온 나무들이 부려지는 곳으로 가장 적합한 곳은 서울의 중심가와 가까운 마포나루였고, 다음으로는 뚝섬과 광나루 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마포에는 나무를 목재로 만드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재소製材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무를 켜서 목재로 만드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먼지가 많이 나서 이 주변에는 돼지고기를 구워서 파는 집이 번창하였다. 이것이 훗날까지 이어져 마포갈비의 유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 물줄기를 타고 즐비하게 내려오던 뗏목과 떼돈을 받아서 술집으로 향하는 떼꾼들, 강가에 늘어선 수많은 제재소와 주변의 돼지고기 갈비집 등은 모두 한강을 중심으로 삶을 살았던 민초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소중한 한강문화콘텐츠라고 하겠다.
(본고는 저작권자인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의 허락을 받아 《한강에 배 띄워라, 굽이굽이 사연일세》(손종흠著)의 내용 중 일부를 본지의 편집방향에 맞춰 재구성 및 윤문, 일부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10한강이천년3 기획특집-리드시
아, 우리의 한강!
신 재 미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나라
들 지나면 이 강이고
산모퉁이 돌아서면 저 강인 나라
물길도 길인 것을
가만히 두면 막힘없을 텐데
땀 흘려 막아 놓고
연일 뉴스에서는 그럴듯한 사진 한 장 내 보이며
거북이 등이다 100년만의 가뭄이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하늘 탓 한다
애초 재앙을 부른 것은
인간들의 잔꾀이건만
만물 불러내 범인 만들기에 바쁘니
몸살을 앓는 것은
산하(山河)이다
금강을 덮은 녹조
낙동강 녹조가 신곡보 탓만은 아닐 게다
한강도 예외는 아니다
연둣빛 물든 강변일지라도 거닐다 보면
살아나는 것은 동심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고
흥얼흥얼 읊조리다 보면 곡조에 갇힌 선조들을 만난다
금성평사(錦城平沙)에 떠오른 일출
덕양산 지나 산 그림자 길게 늘어트리면
방화대교 아래엔 행주대첩(幸州大捷) 승리의 노래가 흐른다
붉은 물결은 쉼 없이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먼 고향 태백 검룡소(명승 제 73호)를 떠나
산천 굽이굽이 돌아
동방의 작은 나라 수도 심장부를 어루만진 사랑
흐르던 길 두고 한 달에 한번은
천지인(天地人)의 뜻 모아
거슬러 오를 줄도 안다
그릇이 무엇이든지 맞출 줄 아는
그리하여 쌀 한 줌 페트병에 싣고 가는 사공 없는 배
황해도 해변으로 인도하는 기이한 사실을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 것도
골지천의 가는 물줄기 잡고
오늘도 하늘과 내통하는 문 열고 닫는
두악(頭嶽)의 힘이리라
한강!
가까이 서서 또는 먼 곳에서 보아도
기적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는
우리의 젖줄 생명의 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