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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를 향한 탐구심은 〈한국학〉 정립에 관한 열정이며, 선학들이 “못 다 그린 눈”에 관한 그리움이고 슬픔이며 아쉬움이다. 10호 편집이 본래의 예정대로 집행, 진행됐다면, 〈2017년 하계세미나〉는 한 여름철 역시 강화도에서 집행됐겠다. 조금 늦었지만, 아쉬움을 담고, 시월 상달 길일을 택하여 강화로 달려갈 계획이다. 작년 여름, 척사위정파의 거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생가에서 개최했던 ‘2016년 하계세미나’는 강화도로 사유思惟를 이끌기 위한 키워드였겠다. 18세기 말부터 일기 시작한 격랑의 국제정세를 헤쳐 나갔던 선학들의 열정과 고민, 우국충정을 탐색하고, 미래의 한국을 이끌어갈 참신한 〈한국학〉의 태동을 준비하는 열망이 그 본질이다. 이 시점에서, 강화학江華學으로 인한 민족적 각성의 집적은, 미래의 한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로드맵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 한편, 문화, 역사, 철학의 방점을 찍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한강문학內 강화학연구원〉 |
江華로 가는 길道 1/ 이건창, 이건승 형제와 梅泉, 石田 형제 編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다.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 왕양명王陽明의 가르침이었다. 질質의 참 됨만이 네가 갈 길이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는 물을 바가 아니다”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했을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江華學의 가르침이었다. |
李建昌의 詩세계
1.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理想國家에서 시인詩人의 추방을 요구하고 있다. 시인과 화가畫家는 그들의 작품에서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으되, 시詩나 그림은 마치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진리眞理 그 자체를 이중二重의 거리로 띄어 놓는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에 있어 진리眞理는 곧 도道로서 표현된다. 詩는 곧 道,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구도자求道者에 있어 궁극의 목표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된다. 영재가 전라도 보성寶城으로 귀양 간 것은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이 귀양살이에서 구도자求道者로서의 그의 자세는 더욱 철저해지고 문학관文學觀 역시 크게 변천한다.
“내가 과연 시인詩人이라 불리어서 좋다는 것일까”
조선朝鮮 오백년에 이 길의 제 일인자로 자부했고, 남들도 그렇게 일러오던 그다.
“그것이 과연 최종적인 가치價値의 실현實現에 얼마만큼의 의의를 갖는다는 것일까”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귀양이 풀리자 서울의 관가官街를 피해서 그가 돌아간 곳은 강화도江華島 남쪽 끝, 파도가 철석거리는 사곡沙谷 마을이었다. 일찍이 하곡霞谷과 원교圓嶠, 신재信齋, 초원椒園 그리고 대연岱淵, 사기沙磯 등이 이 벽진 곳에서 양명학陽明學을 가꿔 내려오기를 무릇 250년, 그것을 온통 강화학江華學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계산지학稽山之學(王陽明이 講學하던 書院의 이름에서 온 것임), 정백자성명지학程伯子性命之學 이라 부르고, 때에 따라 그들 스스로 실학實學이라 부를 경우도 있다.
대개 오늘날 유행어의 하나가 되어 있는, 같은 이름의 ‘실학’과는 심히 그 내용이 다른 범주에 속한다. 마흔 일곱의 한창 나이로 영재의 만년은 이렇게 여기서 닫혀진다.
2.
영재의 문장을 칭송하고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하나로 꼽은 이는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었다. 뒷날 영재의 시문을 한데 모아 《명미당집明美堂集》 10권 8책이 1917년 중국에서 출판되기까지 마침 회남淮南 땅으로 망명, 어느 출판사에 몸을 담고 있었던 창강의 도움이 컸다. 오늘날 영재에 관한 문학적 평가가 이 때 창강의 편집으로 자리가 굳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데엔 이러한 경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불만이 있다. 창강의 일방적인 문학관이 지나치게 안이한 솜씨로 배인본排印本의 내용의 산정刪定에 간여하지 않았던가. 고인故人의 바로 밑에 동생이자 유고遺稿의 전적인 제공자이기도 했던 해경당海耕堂 이건승李建昇 역시 압록강 저쪽 회인현懷仁縣 흥도촌興道村에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 문원汶園 홍승헌洪承憲과 함께 망명 중에 있었다.
明美堂集의 排印에 관한 상확商確으로 창강과 해경당 사이에 오고 간 서한 몇 통을 우연한 기회에 입수한 바 있는데, 창강의 일방적인 刪定에 대한 해경당의 답신은 사뭇 분노에 찬 어조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고본稿本 〈남천기南遷記〉도 그러한 소식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남천기는 고종高宗 30년, 가을에서 이듬해 여름에 이르기까지, 영재가 전라도 보성으로 귀양길을 가고 오던 동안, 그 동안에 손을 댄 詩文을, 영재 가 아들 범하範夏와 함께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내용을 일일이 明美堂集과 대조해 볼 때 거기에 실리지 못한 것이 절반이 넘는다. 말하자면 인삼人蔘의 대를 취하고 뿌리는 버렸다고나 할까. 滄江은 寧齋의 작품을 다루되, 오늘날 문제가 될 수 있는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삭제해 버린 것이다.(삭제목록 기술생략)
3.
배인본에서 무시된 편장 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방서邦瑞와 남일南一과 미중美中 등 무명의 소년들을 상대한 寧齋의 저작들이다. 邦瑞(고진주高璡柱의 字)는 23살, 南一(송명회宋明會)은 21살, 美中(이광수李光秀) 21살, 이들은 영재가 보성 정지내(亭子村) 역마을로 귀양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 담양 등에서 달려온 문학청년들이다. 이들은 영재와 함께 넉 달을 위 아랫방에서 함께 지냈다. 귀양살이 하는 죄인의 몸이고 보면 일상 기거하는데 제약이 많은 법. 영재에게 허용된 방 한 칸을 미닫이 문으로 칸을 막아 둘로 나누었다. 밤이 깊으면 독서로 들어간다. 갓을 쓴 세 영상影像이 크고 작게 미닫이 창호에 비추어서 흔들리는 광경이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邦瑞의 글 읽는 소리가 유독 아름다웠다 한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생과 제자가 시를 읊기를 한 식경. 영재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풍증風症으로 부자유스런 한쪽 팔을 의지해 벽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굳이 먼 길을 달려 와서 세 젊은이들은 죄인의 고생을 사서 나누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결코 앞으로 있을지 모를 어떤 출세의 길을 계산한 때문이 아님을 선생과 제자는 잘 알고 있다. 이름난 문장가를 지척의 거리에서 모시고 무엇인가 그것을 이 기회에 내 몸으로 부딪쳐 보려는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다. 영재는 이들 세 젊은 영혼들에게 무엇으로 채워 주어야 할 것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대로 詩나 文章의 길이 궁극의 목표가 되어서 좋을 것인가. 詩나 문장이 인생 최종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얼마만한 의의가 있는 것일까.
방서와 남일과 미중 세 젊은이들을 상대한 네 편의 저작4), 그리고 역시 젊은 나이의 이상설李相卨에게 주는 장장 9백 73字의 書翰5). 결코 단순한 연장자로서의 교회敎誨가 아니다. 진실과 대결하고 시대의 양심 도전하는 구도자求道者로서의 그의 자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스스로 詩人임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이야기다. 구례 황매천黃梅泉이 시사詩社를 모으고, 윤유당尹酉堂, 許卯橋 두 사우社友를 시켜 영재와 창강의 詩를 책으로 엮어 보겠다는 의견을 물어 왔다. 영재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내가 과연 시인詩人이라 불리워서 좋다는 것일까. 미상불 오십五十을 바라보게 된 이 날 이 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이 길에 쏟았던 것이 사실일지 모르되, 가다가 古文에 쏠리고 가다가 송학宋學에 잠기다 보니, 내 시작詩作이란 결국 물건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창강과 매천의 시를 천지가 떠나가도록 칭찬하는 영재. 이것은 결코 겸손한 치사가 아니다. 매천이나 창강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는 영재의 심사가 서면의 배후에 있다.
4) 〈送高君邦瑞序〉, 〈贈宋南一序〉, 〈贈邦瑞南一美中〉, 〈借竹幹設示諸生〉 등.
5) 〈興李殿試相卨書〉. 이해 李相卨이 스물네살로 殿試에 及第한 데 대한 寧齋의 간곡한 당부를 적은 글. 전년 가을 寧齋가 寶城으로 귀양길을 떠날 때, 少年 李相卨은 새벽길을 南大門 밖까지 따라 나와 老先輩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4.
梅泉이나 滄江은 참으로 寧齋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寧齋가 그들을 파악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도 寧齋의 심중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서 심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다.
梅泉과 寧齋가 서로 교우 관계를 맺은 지는 앞뒤 20년6). “地下의 歸震川이 큰 절을 올리고, 方望溪가 번쩍 눈을 떴다(震川加額望溪瞠)”고 寧齋의 문학 세계를 기린 이는 梅泉이었다. 滄江과 寧齋와는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滄江의 경우, 그의 詩가 서울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고 평가되기까지 寧齋의 추만推挽이 계속 필요했다. 滄江은 또 滄江대로 寧齋의 문장을 칭송하되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하나로 높였고, 홍연천洪淵泉, 김대산金臺山과 나란히 근세삼대가近世三大家의 하나로 그 칭예稱譽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滄江이 끝내는 寧齋의 진정한 이해자가 되지 못했다고 보려는 소이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에 부득불 언급하고 지나가야겠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저쪽에 객원으로 가 있으면서 대부부의 시간을 40만권 장서 속에서 보냈다. 滄江이 중국에서 간행한 각종 형태의 자가문집自家文集을 거의 빠뜨림이 없이 읽어 가면서 30년에 걸친 寧齋와의 ‘막역한 사이’의 심교心交가 滄江문학의 형성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있다7). 滄江은 곧잘 寧齋의 詩를 백거이白居易의 그것에 비겨 설명한다. 그랬구나, 寧齋가 백거이라면 창강은 응당 원진元稹의 위치에 서 주어야 한다. 그러나 滄江은 끝내 元稹이 되어 주지 못하고 말았다. 그 좋은 예를 하나 다음에 들어 본다. 寧齋의 많은 詩作 중에서 하필이면 〈고령가高靈歌〉와 〈위마행喂馬行〉의 두 편을 손꼽고 滄江은 자랑하기를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에 방불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미상불 양자가 서로 닮았다는 점, 滄江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이들이 마치 白居易나 寧齋의 詩의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진수眞髓인 것처럼 거론의 대상을 삼을 때 잘못이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은 백거이가 평생 패복佩服해 마지않던 두보杜甫 5백자 장시長詩의 한 토막이다. “권세가들의 안채에선 술과 고기가 썩어 가는데, 담 넘어 길바닥엔 얼어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시대에 감응하는 시인詩人의 양심은 모름지기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白居易는 부르짖었다. 이 부르짖음이 다음에 올 백거이의 시의 세계를 결정한다. 〈진중음秦中吟〉 10편이 그렇고, 〈신악부新樂府〉 50편이 그렇다. 白居易는 만년에 그의 평생 詩作을 정리해서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풍유시諷諭詩, 둘째, 한적시閑適詩, 셋째, 감상시感傷詩, 넷째, 잡률시雜律詩. 후세에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첫째로 諷諭詩, 둘째로 閑適詩가 되어야 할 것이며, 감상시와 잡률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특히 잡률시 따위는 없어서 마땅한 것들이다. 秦中吟, 新樂府는 첫째 부류에 속하고, 長恨歌, 琵琶行 따위는 밑바닥 잡률시에 속해서 백거이 자신이 그 가치를 거부한 작품들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잡률시 중 아까울 것이 없는 장한가 따위는 차라리 그러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장안의 창기에서 시골의 상부孀婦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좋아라고 극성을 부린다” 라고 원진元稹에게 보낸 그의 長文의 서한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다.(白氏長慶集 〈與元九書〉) 원진은 백거이가 평생의 동지로서 서로 허락한 사이다.
백거이의 주장이 중국문학사에서 차지할 위치를 처음, 바로 잡아 준 이는 호적胡適이다. 1928년 4월 상해刊 〈新月〉紙에 발표된 〈元稹, 白居易的文學主張〉이 그것이다. 胡適은 여기서 백거이와 원진으로 대표되는 문학을 有意的, 自覺的 문학이요, 중국 문학사상에서 하나의 혁신을 불러일으킨 움직임이었다고 주장한다. 胡適의 이 때 주장은 그 뒤로 〈백화문학사〉 제16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래 중국 문학의 사적史的 서술에서 力點의 소재가 크게 바꿔지게 됨은 물론, 정진택의 文學史講에서 그 좋은 본보기를 읽을 수 있다. ‘사회성 詩’ 또는 ‘사화문제 詩’라는 새로운 술어의 등장 역시 백거이 문학에 대한 호적의 새로운 평가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는 주장한다. 앞에서 “시대의 양심” 또는 “시인의 양심”이라 부른 것은 유의적, 자각적 술어를 그렇게 번역해 본 것이다.
궁금한 것은 9세기 중국에서 파문을 일으킨 문학 주장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하는 문제다. 백거이하면 〈장한가〉, 〈비파행〉을 연상하고 詩句의 말초적 구사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白居易가 어떻고 杜甫가 어떻고, 한 마디로 말해서 “長安의 倡妓와 다를 것이 없는 文學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6) 梅泉이 도보로 천리길을 걸어서 상경한 것은 高宗 18년(1881), 寧齋의 文名을 사모하고 그를 만나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러나 이 첫 번 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길에서야 비로소 양자 상봉의 길이 열렸다. 이 때 西江 湖洞의 寧齋家는 당대 詩客으로 알려진 姜瑋, 滄江, 荷亭 呂圭亨, 鄭萬朝 등의 집회소처럼 되어 있었다. 창강과 영재와의 만남은 이보다 또 십수년 앞선다. 창강 단신 오로지 寧齋를 만나기 위해 開城에서 서울로 달렸다. 寧齋 15세 때 이야기다.
5.
江華學派 李建昌의 詩 〈전가추석田家秋夕〉, 〈협촌기사峽村記事〉
〈전가추석田家秋夕〉
시골 농가에선 명절이래야 일 년 열두 달에 추석날 하루가 있을 따름이다. 한 해 동안 굶주렸던 배를 마음 놓고 채울 수 있는 날이 이 날 하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마을에선 막걸리를 걸른다 뒷마을에선 황소를 잡는다 밥이야 국이야 법석들인데, 서쪽 마을 저만큼 오두막집 한 채에선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연기 새듯 들려 나온다. 유복자 어린 것을 무릎 위로 끌어안으며 지난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간 남편을 생각한 것이다.
모진 흉년의 지난 한 해를 밀기울과 소나무 송쿠(속살)로 보내고 초봄에 씨앗 한다고 어디서 구했던지 벼 한 줌을 움켜쥐고 사립문을 들어서며 바들바들 떨던 그 손!
이 씨앗 한 알인들 굶주린 창자를 달랠세라 한 되지기(一升落) 아닌 한줌지기 논배미에 심어 놓고 죽어간 내 남편.
한 해 한 겨울 굶주리기는 부부가 일반이었건만, 이 몸은 나무토막이던가, 남편 따라 죽지도 않고 살아남아서 오늘이 추석이라네. 아기야, 누렇게 익은 저 황금물결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그나마 이런 시름도 더 계속되지 못한다. 난데없이 달겨든 나으리들이 세속 받을 것 있다고 문짝을 발로 차며 호통 치는 서슬의 푸름이어!9)
9) 이 작품은 고종 14년 7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寧齋가 26살 나이로 御史가 되어 忠淸右道로 암행하던 때, 그가 현지에서 목도한 바를 서사한 것이다.
〈협촌기사峽村記事〉
깊은 산골에 화전민으로 쫓기어 몇 해가 되고 보니, 일 년 계량하고도 서숙이야 보리가 제법 몇 섬인가 남아돌게 되었다.
머슬로 지고 내려가서 전년엔 주먹만 한 송아지 한 마리. 금년엔 또 방 한번 손질한다고 흙손 한 자루, 그리고 놋쇠 숟가락 한 자루는 코흘리게 아들놈 차지. 자주 댕기 한 가닥은 불쌍한 마누라 차지.
아무려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데 손가락으로 죽그릇을 휘젓고, 새끼로 머리를 땋아서 얹게 할 수야 있나. 오순도순 웃음꽃이 피는가 싶었던 것도 잠깐이었다.
산중에 호랑이 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이웃 고을에 화적 들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벼락치듯 달겨든 관교官校 떼들은 그러면 생사람 잡는 악귀惡鬼들이던가. 훔치고 부수고 그리고 뒤에 남긴 것이란 오직 남은 식구들이 우는 울음뿐. 땅을 치고 하소하는 그 울음마저 기운이 진해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두자미백향산지간杜子美白香山之間이 幾百을 헤아리는 寧齋의 詩作 중에서 굳이 두 편 뿐일까. 寧齋로 하여금 이러한 작품을 낳게 한 저변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 글의 서두에서 江華學 250년의 내력을 말한바 있다. 江華學은 “모진 핍박과 갖은 곤궁 속에서 성취한 인간의 존엄과 그 발견의 歷史”이기도 했다. 어느 한 분인들 江華學을 계승한 이로서 求道者의 자세를 견주지 않는 분이 없다. 寧齋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그 祖父 이시원李是遠에게서 이어받았다.
8) 하버드대학 교수. 호적胡適선생의 제자다. 우리의 대담對談이 있은 지 수주가 지난 뒤, 양楊교수는 〈韓國的社會性詩〉란 훌륭한 론고論槁를 작성, 필자의 연구실을 찾아주었다. 《사학회지史學會誌》제이십집(1971년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간史學硏究會刊,비매품) 게재.
江華學 최후의 광경
석전石田 황원黃瑗이 살던 곳은 구례 천은사泉隱寺 아래 월곡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는 월곡 저수지가 있다. 1944년 2월 17일 미명, 호남광부湖南狂夫가 저수지에 투신한다. 투신 당시 입고 있던 옷깃에 꼭꼭 접어 넣고 꿰매 숨겨놨던 절명시絶命詩가 발견된다. (당년 75세)
석전은 파리한 얼굴에 구레나룻 수염을 하고 있었다. 시력이 매우 나빠 두꺼운 돋보기가 얼굴의 반을 가렸다. 입이 무거워 좀체 말을 잘 하지 않았고, 음성은 굵은 저음이었다. 챙이 넓은 낡은 갓을 쓰고 작은 체격에 두루마기는 너무 커 헐렁한 행장을 하고 있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석전翁이 자심自沈한 것을 4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된다. 조카 황위현黃渭顯의 부탁으로 “石田 黃先生 墓碑銘”을 찬하면서, 한 마디를 못 박고 있다. “구례 황아무개 하면 모두들 자리를 피했다”(求禮之黃 趨時者皆避之). 일제치하에서 당국의 검열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맏형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자진自盡할 때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吾無可死之義) 라는 유서를 남겼었다.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上不負皇天秉彛之縠, 下不負平日所讀之書) “그저 분해서”(寧不痛哉) 라는 것이다.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 융희 3년(1909)에 이 나라의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을 때, 매천은 이미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상실한다. 죽기 전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무덤을 둘러보는 것이 마지막 한풀이로 남는다.
구례에서 서울까지 천리 길을 혼자서 걷는다. 서울 화동으로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을 찾고, 강화도 사골(沙器里)로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을 찾아, 셋이서 강화도 건평리의 어느 초가집 뒤켠 둔덕 위에 애무덤처럼 누워있는 영재의 무덤 앞에 엎드린다.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己離群). 억새, 쑥대밭 우거진 무덤 앞에 술잔을 놓고 매천이 남긴 오율五律 한 구절이다. 돌아오는 길에 셋이서 서울 남산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하직의 통곡을 고한다. “나는 강한 자가 약자를 삼키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이 서러울 뿐이다”(吾不怨强者食弱 而弱者見食於强).
매천과 석전 형제의 죽음은 각각 1910년과 1944년으로 35년의 세월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은 일제가 한민족 말살에 광분하던 암흑기와 일치한다. 그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세상에 나온 것은 광주光州 최승효崔昇孝의 정성으로 간행되었다. 《黃梅泉 關聯人士 文墨箤編》 3책이다.(미래문화사刊,1985). 파지로 무게를 달아 팔려갈 뻔 했던 한지韓紙 더미에서 한 묶음의 고문서를 건져내고, 그 중에서 書簡과 詩文, 墓碑銘 등 460여점에 번역과 주석을 달았다.
영재 이건창의 매화시梅花詩이 이러한 것이 있다.
버들이 가늘어서 실이랍디까
무엇으로 오늘 설, 꿰매어 입고
매화가 희어서 쌀이랍디까
무엇으로 빈 밥솥 안친다지요.
盡日淸齋坐小龕
時聞廚婢語呢喃
絲絲楊柳裁衣好
粒粒梅花作飯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저만큼 안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양천관養泉館 서주보徐周輔가 없는 돈을 꾸려서 비싼 값을 주고 세 길이나 좋이 될 매화나무 한 그루와 실버들 한 그루를 좁은 뜨락에 심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영재는 감격한다. 당장에 칠언절구七絶 두 수를 지어 보냈다. 그 둘째 절이 위의 것이다. 매화가 술이라면 바가지 긁는 소리는 안주 구실을 한다. 영재의 부부생활은 반듯이 평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영재 이건창(1852-1889)이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던 월사매月沙梅는 옛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명나라 사신길에 북경 곤명원에서 나눠 가져왔다던 ‘악록선인’이란 별칭을 가진 매화나무였다. 성균관 반촌泮村의 김아무개로부터 접붙인 묘목을 구해서 서강의 집으로 옮겨 심었다. 한강이 호수처럼 보이는 서강 이건창의 사랑채는, 강위姜瑋, 여규형呂圭亨, 정만조鄭萬朝, 김택영金澤榮 등이 맹우盟友가 되어 자주 시회詩會를 열던 곳이다.
보성에서 귀양길이 풀리자, 이건창은 벼슬길을 하직하고 강화도 시골로 낙향한다. 갑오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마흔 셋일 때다. 매화나무는 뱃길로 양화나루에서 강화도 시골(吉祥面 沙器里) 앞바다까지, 그리고 사랑채 앞에 뿌리를 내린다.
뿌리를 내린지 십 이년 만인 을사년(1905) 겨울, 이건창의 아우 이건승이 구례 황매천에게 매화나무 소식을 알려 온다. 한동안 시들어서 죽은 줄만 알았던 매화나무가 왕창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이상한 조짐이었다. 매화나무를 심은 주인공은 죽은 지 이미 七년이 지났다. 많은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이 해 따라 죽어 갔다. 절의지사만이 아니었다. 지난 해(癸卬 八월), 외아들 석하錫夏가 죽었고, 복중인 며느리가 지난봄에 또 죽어 갔다. 암울한 세상에 남은 것이란 늙은 이건승 부부 뿐이다.
죽어간 며느리는 진천서 시집 온, 문원汶園 홍승헌洪承憲의 딸이었다. 홍문원은 장차 이건승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을 망명길에 오를 사람이다. 문원은 강화도 월사매를 진천으로 나눠 가져가서 초평리 여러 맹우들에게 접붙여 나눈 장본인이도 하다. 뒷날, 홍백 매화가 피고 질 때면, 그가 남기고 간 맹우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지난날의 그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경술년(1910) 11월 16일자, 석전이 같은 고을 구례 왕수환王粹煥에게 보낸 서간書簡의 내용에 의하면, 매천이 자결했다는 비보를 서울 친지들에게 알리고 연락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매천의 제자 김상국金祥國이 한달여 서울에 머물며 백방으로 난곡을 찾고 있었다. 석전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적고 있다.
“요즈음 사원士元(김상국의 字)의 편지에 난곡이 간 곳을 모른다지만, 이 노인이 하늘로 솟았을 리 없고, 바다 건너 중국으로 뛰었을 리 만무할 바에야 기껏 명치明治 땅 안에 갇혀 있을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휘젓고 찾아다닌다는 것인지, 사원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본고는 西餘 閔泳珪 교수의 《江華學 최후의 풍경》(우양출판사刊)에서 인용, 부분교열 했음을 밝힙니다.〈편집자〉
왜, 강화학江華學 인가?
-강화학 복원을 위한 서언
단산 정윤근 丹山 鄭允根
황해도 해주, 민족시인, 2000년 丘山門 道學處 中/ 多勿興邦團, 丘 山義塾 총무, 弘益人間生命사랑회 결성, 《한강문학》 고문/ 시집 : 《티끌세상 하늘보기》
2017년 여름, 전국에 내린 폭우와 폭염 속에서 과거 이 나라가 겪어야했던 질곡의 시대를 다시 꿰매고 손질하여 바른 모습의 이 나라 민족의 역사와 인정人情을 되찾고자 《한강문학》과 함께 대장정을 시작했다. 각고면려刻苦勉勵 해 온 시절의 의인들의 철학과 기꺼이 목숨을 바꾼 선각들, 강화학의 계보를 더듬는 일은 교감 과정에서 무척 고통스러웠다. 한편, 오늘의 이 시대가 처한 국내외의 질서, 현실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며 이로서 큰 위안을 받는다. 앞으로 예상되는 강화학과 관련하여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의 문집, 자료를 찾은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다. |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을 생각하면 그립다. 나는 그를 만나 보지 못했다. 1980년 대 후반 부산에서 그의 문집 《강화학 최후의 광경》을 만난 것으로 그의 성명을 가슴에 새겼다. 그의 사상, 철학이 현대 대한민국의 사상철학의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 한 달간 강화도를 다섯 번 다녀왔다. 그러면서 그를 다시 기억 하게 된 것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문집도 다시 찾아보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하곡 정제두와 이건창을 거쳐 난곡에 이어, 위당에서 서여까지 그리고 정양모에 이르는 200여 년간의 세월이 우리나라 안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 일만 년의 생활 속에, 현대에 이르러 위당은 그의 생애에, 이 민족의 찬란하며 숭고한 역사를 어렵사리 복원해낸 선각자였다. 민영규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이라는 비장미 도는 제목으로 자신의 스승 위당을 그리워한 것이다.
오늘, 《한강문학》이 기획하고 진행할 강화학의 재조명 계승의 거보에 시작하는 이 글을 쓰는 나는 무거운 심정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 철학 사상의 새로운 깨우침이 절실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이념, 사상철학이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슬픔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홍익인간 철학이 공식적으로 이 땅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철학사상을 이야기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당은 양명학 연원에서 조선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양명학의 조선식 재해석을, 강화학을 유지시켜온 선각자들에 대한 깊은 외경심으로, 자신의 세계를 기꺼이 강화학의 부활을 위해 던졌던 것이다. 그는 삼십대 이후 조국의 일어버린 상고역사 복원에 전심전력으로 매진했던 것이다. 그런 덕으로 우리는 옛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199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심경호 등에 의해 저술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전3권이 출판, 강화학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한강문학》은 이런 저술, 자료를 통해 향후 우리나라 정신사상 철학의 방향을 세워 나가게 될 것으로 기대가 크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세미니는 10월에 개최해도 됩니다.
심경호 교수 저술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곡학의 종지를 이어간 이건창 이후의 조선 후기 학자들의 노고에 오늘을 살아가는 후학의 입장에서, 그저 감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