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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博川 최정순
꿈,
아버지가 나에게 오라고 손을 흔들어
안타까움에 가슴 조이다 깨고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
급한 마음 추스르며 전철 타고,
시내버스 타고, 온양 기산리 가니
지금은 남의 땅 되어 버린
논과 밭 가로지르는데
논에도 밭에도 일하는 아버지 있었다.
고샅 들어서니 아버지 반기고
팔아 버린 집에서도 아버지 손 흔들며 웃는데
꿈에서 본, 바로 그 모습 아니던가.
사람은 죽어도 산사람과
함께 사는 법
막연한 보고픔이,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이렇게 가슴 저미는가
오래 묵힌,
아버지 돌아선 그림자 곰삭아져
툭! 떨어진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버지에게 가족사진을 바치며,
博川 최정순
당신의 정원
대대로 내려온 그것,
각종 꽃들 만발하고
수목 울창하여
훌륭했지요.
남과 북,
미군과 중공군의 대포,
정원 초토화되고
사선 넘어,
남으로, 남으로
죽은 듯 흘러들었지요.
당신은 일본 대학 가봤고,
김일성대학에도 가봤잖아요.
그런 당신이,
무지렁이 터 잡아 사는
초야의 집성촌락
설화산 기슭 똬리 틀고,
가족 위해 숨죽이며
다시 일군 정원 아니던가요.
매일 찾아드는 검정양복들,
틈만 나면 부르던 전갈 독사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나요.
주름의 강 건너
저승꽃 피우던 만년
다시 당신의 정원은 벌레 먹었네요.
저녁이면 북녘 바라보며
망향가 지어 불렀던 당신,
이제 가슴에 맺힌 한 모두 버리셨나요.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
아직도 혼자인 당신 영정 안타까워
여기 딸, 가족 모두 모인 사진
가져다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당신과 함께, 당신 북의 고향, 가기 위해.
♥
임진각에서
博川 최정순
음력 원단(元旦),
칼바람 칼춤 추는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
아버지 영정 들고
서성이는 눈물의 어머니
망부 혼 달래며
자리 떠 날 줄 모르는데
생전 다시 가보지 못한 고향
혼불이나마 마음 놓고 날아가라며
북녘바라기 할 때
방송작가 카메라 앵글 초점
아버지 영정 떠날 줄 몰랐네.
아버지 집안,
공산당 분단 위원장
백부 실력자 손가락 안 들고
학구열 높은 장손 아버지
월반 일본 조기 유학
탄탄대로 거침없었네.
집안끼리 튼 혼사
사랑 알밤처럼 튼실해
이를 시기한 신
전쟁으로 갈라놓고
남과 북 갈 수 없어
전처 그리움 애태웠는데
망자 되어 찾아가니
아버지 알아나 볼까,
간이역
博川 최정순
기차 서지 않는 허공 매달린 역
반세기 넘게 남북 빗장 걸고
딴죽 걸며 지나친 역
독사 까마귀 떼만 들끓는 역
칼날 같은 세월 아버지 머리
흰 눈 내리고 듬성듬성하던
이마저 모두 빠져 버렸다
오늘도 공중에 매달린
간이역 보며 아버지,
박천 가는 기차 기다린다.
등대
博川 최정순
모진 해풍 홀로 껴안으며
자식들 항해 밝혀주다
해무 속 영원히 갇혀 버린 성
붉은 울음 울다 지쳐
온몸 하얗게 바래지면
누더기 그림자 던져놓고
멀리 떠난 자식들
눈 바라기 하며
홀로 한숨짓는다.
아버지의 시
博川 최정순
아버지
비망록 속
숨죽이며
고인처럼 누워 있던 시
앞 다퉈
벌떡 일어나
딸 시집 안에서 기지개 펴고
백 개 한 맺힌 불망기(不忘記)되어
평안북도 박천 땅으로
철책 넘어 성큼성큼 걸어간다.
♥
봉린산 심원사
博川 최정순
지금은 갈 수 없는
부친 고향
평북 박천군 산양리
산정(山頂) 바위 봉황새 나래 펴고
아래 너럭바위 기린 목 닮아
봉린산(鳳麟山) 심원사(深源寺)
배흘림 통 굵은 기둥 보광전에
조모 백일기도 스며들어
얻은 부친,
고향바라기 하며 기도할 때
법당 창 쏟아지는 별빛
높새풍 예제없이 춤추고
야화 성글게 뒹구는 뒤란
목어 홀로 울 적
청천강 새밭 추억
마음 황포 돛배 싣고
서해로 흘러, 흘러
꿈에서나 만나네,
봉린산 심원사 조모를,
♥
아버지 고향
博川 최정순
개구멍 없어도
동네 모든 닭 개 고양이
제집 나드는 울바자 밑
참대 숲 뒤 울 안 장독 소 우리
참새 식솔 무리지어 편히 앉는 시골,
아버지 고향일세.
올챙이 쫓는 병아리
호드기 부는 개구쟁이들
홍매화 진달래 개나리 화들짝
모란 난초 살구 꽃 병풍
칡소 워낭소리 울리는 산골짝,
아버지 고향일세.
백두산 혈 받아
대지 정기 챙겨주는 청천강
물 흔한 마을
어름치 금강모치 둑중개
철엽 물장구 재미지던 강가,
아버지 고향일세.
너럭바위 쌓인 옥수수
홀테 호전기 쉼 없는 가을
한 식솔 분주한 가을걷이
기러기 늪가 노닐며
풍작 노래하는 곳,
아버지 고향일세.
먹이 찾아 나선
산악 수리개 푸드득
눈꽃 살금살금 떨어지면
사랑방 모여
고치곶감 무구덩이 무
동치미랭면 먹던 박천 고을,
아버지 고향일세.
아버지 나의 아버지
博川 최정순
(1)
송골불 밝혀 청천강가 가면
털게 갈댓잎 잡고 그네 타는
평북 박천군 봉화면 전부
경주 최씨 집성촌 대가족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지
밭 만 평
논이 한 마을 크기였어.
네 할아버지 산간지역 돌밭
황소 두 마리로 다랑이밭 일구었지
봄이면,
너럭바위에 흙 덮고 감자 고구마 심었어.
가을이면,
네 할머니 콩 한 가마 쑤어 축구공만 한 메주 만들고
큰 항아리 동치미 담았지
겨울이면,
메밀 갈아 바가지 구멍 내려
동치미 국물에 찬 국수 말아먹고
부침이 해먹고
감자떡, 수수떡, 옥수수떡도 만들어 먹었어.
네 할머니 음식 솜씨 그만이었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가 그것들 먹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2)
일정 때 왜놈 우리 물자 착취 위해 기찻길 만들었어.
네 할아버지 수확한 것 모두 왜놈이 거두어 갔지
네 할머니 소나무 껍질 떡 해먹였어
솜씨 좋아 목화 심어 물레 실 세 겹씩 짜내 양식도 구했지
해방 되자 수확하면 당에서 나와 일일이 세었어.
한 평에 얼마나 거두었나, 따져 정부가 관리했지
뭐 별로 좋은 세월은 아니었어.
그래도 재미있었지
송아지 동무 있어 즐거웠고
청천강 변 소 꼴 먹이던 언덕배기 큰 나무 능 쪽 아래
구럭 던져 놓고 문적 보다
심심하면 황소 풀어 이웃 소와 싸움 시켰지
그때 황소 발길질 옆구리 채인 상처 남았단다.
그래도 좋았지
황소 등 올라 청천강 변 나가 물 수제비 뜨고
허리끈 잡고 서로 밀고 잡아당기며
왜놈들 씨름놀이도 했어
그네 잘 타고
나무 잘 타고
산 잘 타서 짐승도 많이 잡았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3)
동네 무당 아들 즈네 엄마 돈 잘 번다.
거드름 피워 '곧바로 해라야.'
죽살이 두들겨 팼어.
무당이 쫓아와 종 주먹이었지
별명이 호랑이 할아버지
무당 앞에 성난 체 꾸짖다 가버리면
'야, 잘했다, 잘했어. 남자는 그래야 되야.'
호탕하게 웃으셨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달려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4)
중학교부터 일어, 러시아어, 영어 독학했지
월반으로 조기 졸업하고
분단 위원장 아들이라
김일성대학서 초청장 왔어
그것이 내 배 밑구멍 뚫을 줄이야
그래도 좋아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날아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5)
할아버지 북쪽 하늘 바라보며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
아들아, 딸아, 나는 그때 그 말씀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어.
할아버지 혼불 되어 북으로 간 지 오래되었는데
내 머리 속에 왜 이렇게 생생히 남아 있지
얘들아, 나도 너희 할아버지 따라 북녘 가고 싶구나.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무엇이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더냐
아버지의 겨울
博川 최정순
능구렁이 구불텅 중령 돌아서
삼신三神과 함께 사는 유서 깊은 산골 마을
산등성이 타고 뒤늦게 내려오는 봄 기다리며
동네 초입 치성 칠성나무 새끼줄
오색 헝겊 수많은 염원 달고
나무 붙잡고 헐떡거리는데
햇살 담아 고드름 눈물 뚝뚝, 떨굴 때
마을 사람 아버지 사랑방 모여
붉동나무상 펼쳐 윷놀이 하다
날 저물어 호롱불 속
옛날이야기 도란도란 꽃피우는데
북방 동장군 막는 덧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워 윷만 구별할 뿐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겨울 끝 하루를 보낸다.
♥
한설
博川 최정순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화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동천冬天 선벽鮮碧에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 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덮으면
가마솥 꿩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 함께 하겠지요.
겨울 풍경
博川 최정순
산 내천 얼음골
넓은 평야 쌀농사 거두고
층층 밭 잡곡 실어 나르면
밀 옥수수 엿 되고
찰 가루 튀겨 깨 콩 잣 송홧가루 강정
소쿠리마다 배 불룩하고
메밀 도토리 상수리 묵 쑤어
베보자기 깔아 묵판 담아 두면
안 먹어도 배부른데
알궁둥이로 뒹구는 누런 호박 거둬
호박죽 펄펄 끓는 솥으로
다랑이 타고 겨울 오면
먹거리 지천
아버지의 겨울 풍경
아버지의 추억
博川 최정순
평양 학창 시절 참 좋았어.
동쪽 대동강 서쪽 보통강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지
금수산 을밀봉의 을밀대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 부벽루
많은 추억 흩뿌리고 다녔지
언제나 다시 가볼까
감은 아버지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1)
博川 최정순
봄 오면
흐드러지게 피는 꽃동네
평북 박천군 봉화리
엄한 할아버지
고풍스런 임하풍미(林下-風味)
빛바랜 검정 두루마기처럼
정갈한 기와지붕 아래
오순도순 정겨운 가족 풍경화
일제 강점기 끝나
허튼 것 없던 시대
열심히 흡입하던 수업
포성(砲聲) 배앓이
숨죽여 살던 아버지
인민군 입대 명령서
집총(執銃) 싫어 숨다
정혼녀 마을 피신하여
돼지우리 안 덤불 속
한 달 숨어 지내다 남행
책보 등에 업고
할머니 챙겨준 전대 허리 묶어
밤을 낮으로 남쪽 능선 따라 발걸음 재촉
비질 총알보다 더 무서운 배고픔
고래 심줄 같이 질긴 목숨
온양 설화산 허벅지에 둥지 틀었다
오전 수업 듣다
받아든 인민군 입영통보
아버지 마지막 수업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2)
博川 최정순
종전의 아버지
대전 한 고등학교
국사 가르치다
학생들
눈 앞
정보과 형사들에 연행
북한출신성분증명불충분
공산당원집안김일성대학출신인민군탈영
미군통역병미군정찰통역병미군작전령포로
요주의인물명단1급
휴전에 간첩 취급
어디든 정착 못해
날마다 불려 가고 고문 받고
걸레 된 자존심 깁고 기워 가며
한 달 만에 막을 내린
아버지의
마지막 우리 역사 수업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1)
博川 최정순
나 있던 박격포 부대 전선에 십 리 는 좋이 떨어져 조금은 안전했지
하지만 사방이 적이요 위험지대였어 싸우다 혼자 되면 포로가 되던
가 복귀하던가. 탈영하던가. 그래야 했지 나 하는 일 적군 동태 알
아내는 것 무기는 무엇이고 언제 후퇴하였는지 그런 것 내가 하와
이 사람과 통한 것 피차 일어 영어 잘 알아 의사소통 가능했던 때
문 속지 말라는 많은 삐라 하늘서 눈처럼 뿌려지는데 중공군 가냘
픈 피리 소리로 국군 마음 들쑤셔 고향 생각나게 하고 한국군 아리
랑 확성기 틀어 중공군 자수하게 했지 장거리 소포에 엎드리고 박
격포 소리에도 엎드리니 양쪽 사격하는 사이로 통과하여 건너편 산
후퇴하라 했어 후퇴하다 숨 가쁘면 시체 덮고 바짝 엎드려 숨 돌리
다 먼저 간 아군 쫓아가려니 때는 늦었네. 이왕 죽을 바에 포복이 무
슨 소용이던가. 비질하는 실탄 속 뛰고 뛰었지 그러다 숨 가쁘면 엎
드려서 쉬다 다시 뛰었지 사람 목숨 길며 짧기도 한 모양이여 전사
한 시체 넘고 넘으면서 마침내 아군 있는 곳 도착하였어. 몇 명 남지
않은 우리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후퇴 거듭했지 전시 군인 식
사 늘 사잣밥 언제 어느 곳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까 후방 내려 갈
수록 민간인 많이 볼 수 있었지 부모 형제 생각나서 반갑기는커녕
슬픔부터 앞서네. 혼자 살겠다. 배반했다는 죄책감 뜨거운 눈물 지렁
이 되어 꿈틀거리고 아, 나는 누구 위해 싸워야 하며 부모 형제 가슴
에 총부리 겨눠야 하는가. 이 아픔 접고 차라리 죽어 버릴까 갈등도
많았어, 충주 주둔했던 우리 부대 실종 군인 보충시켰는지 다시 이동
했지 차에 올라 바람인 듯 어데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적막강산 어둠 깔
린 밤 부대는 침묵 속에서 전진 중 느닷없이 굉음 신음 소리 정신 가
다듬어 팔 다리 움직여 보니 때는 늦었지 기운 없어지고 정신 흐려져
그냥 엎드렸네. 정신 차려 보니 장호원 병원이었어. 알고 보니 칠흑
같은 밤에 앞길 헷갈려 급경사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차 뒤집히고
실렸던 박격포 실탄 괘짝 우리 덮쳤지. 지나간 인생 돌이켜보니 파
리만도 못한 목숨 힘들었던 사연 생각 하면서 통곡하건만 누가 알아
주겠니. 차라리 저 허공의 달이 되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바라보련만
웃는 낯 해후 자위하면서 무덤 없는 붉은 노래 보낸다. 아버님 어머님
'기다리지 마시고 만수무강 하세요.'그리고 난데없는 휴전 휴전선은
철통선이 되고 말았어. 죽어서나 가보려나 그리운 저 북녘 땅.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2)
博川 최정순
김일성고지 찾아야 서울 뺏기지 않는 중요한 고지여
바로 이 고지 쟁탈전 시작 되었어 비행기 폭격 동시
박격포 가세 무성히 자랐던 식물 말없이 사라지고 몬
지만 폴싹폴싹 총 한 방 쏘지 않고 김일성 고지 점령
마음 놓고 기뻐할 때 웬 날 벼락 산 중턱 사방에서 공
격 때 이미 늦었네. 북쪽 장거리포 아군 비행기 폭탄 쏟
아 부어 정신없네. 막 대결하며 한 곳 뚫어 목숨 걸고 김
일성고지 후퇴 갱신히 살아났지 그 많던 전사자 중 나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일 병사 보충 돌진 굴마다
수류탄 던지며 김일성고지 재탈환 경천동지 아비규환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막감 전쟁 끝나 이제 고향 간다
기쁨 넘쳤는데 하늘의 무슨 뜻이던가. 휴전 돌입 이게
말이 되는 소리던가 이기든 지든 끝 봐야 부모 형제
볼 것 아니던가 유엔군 일본으로 사라지고 갈 곳 없는
이 몸 반겨줄 사람 없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지 명절
오면 고향 생각 절로 나 한 맺히니 터질 듯 아픈 가슴
아 누가 알아주랴 술 먹고 나면 왜 나만 외톨일까 눈물
앞 가려 잠 못 이루는 밤 뻐꾹새 슬피 울어 밖에 나오니
보름달만 휘영청 달에 부모 형제 눈물짓고 서 있었지
이런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 나만 겪는 일 아니겠지 불효
지은 죄인 몸 쇠약해져 병원 갔더니 웬 날벼락인가 암
진단 받고 보니 더 생각나는 건 부모 형제 눈물만 강을
이루는구나! 병원 침대 누워 과거사 돌이켜 보니 자식
노릇도 아비 노릇도 못한 나 실낱 목숨 하루 하루 지내
며 창문에 뜬 달 보며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네.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3)
博川 최정순
머리 잔설 내리면
외롭고 슬픈 일
정해진 유한자가
자연에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희한 얼룩진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강
가슴 속 뭉쳐진
검은 숯덩이 안고
이렇게도
카론의 강
빨리 건너야 하는가.
* 카론의 강 : 죽음의 강, 카론은 죽음의 강을 건너 주는 저승사자.
아직도 전투 중
博川 최정순
북진 몇 번 밀고 올랐다
후퇴 남행, 또 몇 번
전투 중 먹을 것 없어
죽은 사람 주머니 뒤져 먹고
눈을 뭉쳐 먹기도
강원도 계곡
아버지,
사선 넘나들며 배곯을 때
축구공만 한 벌집 벼랑서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
무섭고 달다 안 먹는 거
벌떼 쫓아내고 독식
목숨 삼줄처럼 질긴 것
아버지,
전투 굶주림 지쳐 잠들어
하얀 할아버지 나타나
지팡이 가리켜 깨어 보니
붉게 빛나는 꽃 한 송이
백년 묵은 산삼 아니던가.
머리 큰 구멍 물 가득하여
꿀맛으로 먹고
며칠 꿈속 헤맸네.
꿈에 가본 고향,
깨어 보니,
아직도 전투 중
아버지의 비망록
博川 최정순
아버지 비망록,
일기 아닌 일기 속에
전쟁 상처들
알알이 박혀 있는데
선혈 낭자한 교전
백골 산야 나 뒹굴고
한 서린 젊은 넋들
하늘에서 눈 부라리며
남과 북을 번갈아 보며
피눈물 흘리고 있다,
아버지의 꿈
博川 최정순
부모 찾아
재 넘고 강 건너
노녘 구름 발치
평북 박천 봉화리 고개
오늘은,
해빙解氷 되어 자식 올까
남풍 바람결 자식 소식 올까
청천강 물결 자식 모습 보일까
부모는 숨죽여 기다리는데
휴전선 독사처럼 누워 혀 날름 이고
독수리 먹구름 속 발톱 치켜세워
아버지 감시하는데,
지뢰 묻힌 무인지대無人地帶에
차가운 겨울비만 주룩주룩 내리네,
아버지 꿈결에서.
아리랑 성냥
博川 최정순
미루나무 작은 막대기 끝
얼싸안은 유황
날아갈 듯 여인의
장고춤 그림 팔각 성냥
전기 없던 시절 집들이 선물
언제나 아버지 동무였다.
논밭 둔덕 쉬며 노녘 바라기 하다
담배 한 개비 유황 하나 부딪히면
담배 연기는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버지 콧노래,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
하늘 저 멀리서 들리는 장고 소리
세마치 덩 덩따쿵따
중모리 덩기닥 쿵 따기닥따쿵쿵닥 쿵
허공 가르며 내려치는데,
어깨 들썩들썩 흥겨웁다가
한스러이 흐느끼는 아버지의 콧소리
쉽게 켜지는 가스불처럼
아리랑 팔각 성냥과 함께
아버지 추억 지워질까 두렵다,
♥
아버지의 첨성대
博川 최정순
경주 시내 술병 모양 첨성대 있지
천체 움직임 관찰하던 곳이었어.
하늘 알아 책력 만들어야 명실 공히 천자거든
당나라에 신라 자주국 알리는 쾌거 아니던가.
자갈 황토 섞은 벽돌로
아버지 첨성대 닮은 뒷간 만들었지
동네 사람들 신기한 눈으로 보고
외지인 사진 박으며 설왕설래
마을 사람들 아버지 흉내 내려 하나
번번이 실패했어.
수학 교사하던 아버지
수학 공식 이용한 작품이거든
원통부 구멍으로 바람 나들며 속삭이고
정井자형 꼭대기 북두칠성 환히 웃으니
뒷간에서도 천자가 된
아버지 기분.
누가 알아줄까.
두 여인의 노래
博川 최정순
아버지 고향
박천 봉화리 할머니
호롱불 밤새 바느질
풀 먹인 옷가지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구김살 없이 펴 반드러워
아버지 품새 내려면
다듬이질 마주 앉아
박자 맞춰 노래하며 두드려야 제 맛
아버지 입혀 남으로 보냈다.
온양 거르미 어머니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다듬이질하며 노래
두 여인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네 같은 풍속도
접동새 구슬피 우는 달밤
아버지 옷 다듬는
남과 북 공간 허무는
한 많은 두 여인의 소리
아버지 꿈길 밟히어
서둘러 북에 가셨나 보다
설화산 동화
博川 최정순
개암나무 잎 져
설화산 하얀 이불 덮이면
산토끼 잡으러
동네 사람 여럿 올랐지요.
송아지만 한 노루 만났어요.
사람들 추적하다 지쳐 포기하였지요.
아버지 혼자 세 바퀴 돌아
맨 손으로 잡았어요.
동네 노루 잔치 발였지요.
산등성이 토끼풀 많아
소쿠리 차고 나무하는 아버지 따라 나섰지요.
풀꽃 반지 엮어 가며 토끼풀 뜯다
아버지 목에 토끼풀 목거리 걸어 주었어요.
아버지 소년 되어 환하게 웃었지요.
아버지 풀섶 여기저기 튀는
개구리 잡아 졸대 꿰어 집에 가
돌멩이 세 개 세워 불 피워
뒷다리 구워 나에게 주었지요.
내가 먹고, 엄마 먹고, 동생 먹고,
돼지 먹고, 닭도 먹었어요.
우리 집 개구리 잔치 벌였어요.
골짜기 참외밭 너구리
다 파먹는다. 담요 들고
아버지 밭고랑 사이 누워
칠흑의 밤 불침번 섰지요.
사위가 안 보여도
너구리 다가오는 기척과 안광 쫓아
너구리 몽둥이로 때려잡았어요.
동네 너구리 잔치 벌였지요.
황토밭 밤고구마
아버지 호미로 캐내면
졸졸따라 마대자루 담아
50여 자루 가득 채웠어요.
땅거미 지고
노녘 산봉우리 불빛 세 개
왼쪽 중공군,
오른쪽 일본군,
중앙은 미군,
오늘은 그만 싸우자는 휴전의 불
아버지 고구마 잔치 벌이며 나 놀렸지요.
다랑이 밭 파꽃
흰 물결 출렁이던 날
물앵두 다다귀다다귀
빨갛게 익은 가지 꺾어
병석의 아버지 드렸지요.
먹지도 못할 물앵두
봄이 이만큼 익었다고요.
내 아버지에게 해 줄
잔치는 그것뿐이었어요
많은 추억 어쩌라고
준비하지 못한 사별
심심산천 물앵두 익어가며
예제없이 그리우면
아버지 빈자리 무엇으로 채울까요.
그리고 오늘은 무슨 잔치 벌인다지요?
설화산 전설
博川 최정순
개밥바라기 흔들며 수탉 홰치면
산새들새 세수하고 먹는
우듬지 까치밥
이웃집 경운기 일 나갈 채비
인기척 개 짓는 소리
시골 기상음
아궁이 나뭇가지
타닥타닥 타들면
부뚜막 올라앉은 가마솥
소죽 여물 구수하고
어머니 새벽동자 달그락달그락
뒤란 굴뚝 구름 꽃 피워내는데
들깨 참깨 팥 콩 햇살 껍질 투둑,
도리깨 탁! 탁! 탁!
아버지 가을걷이
논들 밭들 사역질 땀 흘려 흙 밟아
대지는 땅거미 까미하고
아버지 등허리 굽어 가는데
시냇물 물길 막아 더위 식히던
부끄러울 것 없었던 벌거숭이 소녀
살사리 하늘거리던 신작로
숫눈길 뽀드득뽀드득
밟는 재미 환장하여
화로 밤 고구마 새까맣게 태웠지
아버지 지게 동바 풀어내
진달래 수줍은 잎 따 먹고
산딸기 새콤달콤 따 먹으며
머루 다래 으름 입 안 가득 따먹고
그럭저럭 보내온 아름다운 세월
열구름인 듯 가뭇없는데
이제 설화산 자락
고샅길 풀섶 헤쳐
찾아 나서면 아버지 없어
그리움 깊어 가는데
풀벌레 소리 애처롭고
주인 잃은 밭 잡초만 무성하다.
겨울 추억
博川 최정순
하늘 얼고
땅 어는 계절
사랑방 군불 지펴
불길 뱀처럼
방고래 타고 들어
구들장 쩔쩔 구우면
식솔들 모여앉아
끝말 이어기기 놀이
막히면,
아궁이 안 군고구마
시렁 속 말린 고구마
부뚜막 위 누룽지
가져와야 되는데
두 자리 끝말
세 자리 끝말
다양도 하다
나는,
항상 술래
아버지,
막힘없어
시새움 눈길 던지면
아버지,
슬그머니 져 주고
부엌으로 간다
참새
博川 최정순
함박눈 밤새 소리 죽여 소복소복
햇살 받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날 때
참새 무리 먹이 찾아 볏가리 날아들면
재잘재잘 소란스럽다.
Y자 나뭇가지에
넙적 고무줄 새총
살금살금 접근
눈치 챈 참새 도망간다.
참새 날아오는 길목
곡식 뿌려 놓고
삼태기 부지깽이 고여
줄 매어놓고
기다리던 아버지
포르르 날아든 참새들
삼태기에 가뒀다.
구어 먹고 볶아 먹던
아버지처럼 고소한 참새의 맛
지금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겨울 동화
博川 최정순
동지섣달 동장군
칼 뽑아 여기저기 난도질
문고리 쩍쩍 손 달라붙고
가마솥 물 꽝꽝 얼고
외양간 소 코뚜레
고드름 맺히는 겨울
옷 버리면 어머니에 혼날까
장롱 속 잠자는
한여름 바지 꺼내 입어
콧물 묻은 주머니 얼고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산 중턱 비닐포대 타고
눈길 날아오면
아버지 걱정 담은 눈
나무 낫으로 깎아
팽이 썰매 연 윷가락 만들어 주어
동무들과 재미있었는데
아버지 따라 가버린 겨울의 끝자락에
추억만 대롱대롱.
아버지 시험
博川 최정순
늘 인자하지만
공부에는 한 치 양보 없었지
책 펴놓고 산수 예습 시험
주눅 들어 언 바위 되니
우물쭈물 화끈화끈
걱정만 앞서고
해답 못 찾아 갈팡질팡
긴장감 하늘 찌르는데
눈치 없는 동생 녀석
등 뒤에서 번번이 정답
아버지 눈 흘기며
책도 안 보고 답 맞추는
동생보다 못하다고
혀 짤짤, 차는데
1분 하루같이 긴 시간
시험만 끝나 봐라,
너 따귀 한 대 갈겨줄 테니.
아버지의 망향가(1)
博川 최정순
눈 시린 가을 하늘
적단풍 선혈처럼 붉고
금파(金波) 물결 들녘 수놓을 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임진강 변 통기타 튕기며
북쪽 하늘 바라보고
노래 부르는 사람 있었네.
아버지 예전 모습
같아 너무 반가웠지
통한(痛恨)의 가락
바람결 가물가물 흩어져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는
또 다른 아버지 망향가.
아버지의 망향가(2)
博川 최정순
태천군 연변군 운전군
둘러싸인
평안북도 박천 땅
청천강 대령강 하류
충적평야 넓게 이루고
청천강 대령강
얼싸안고 서해로 흘러드니
먹고 살기 어려움 없었네.
청룡산 봉린산 수리산 사이
강냉이 익어 가는 마을
긴 돌담 이어진 고샅길 정겨워
고향으로, 고향으로
달려가던 아버지 눈길.
실수 아닌 실수
博川 최정순
춘풍 푸른 내음 가득 실어 나르면
찔레꽃 독한 향기로 하얗게 웃고
배추흰나비 파꽃에 훨훨 날아들면
출렁이는 보리의 푸른 파도에
종다리 하늘 땅 오르내리며
봄 찬양할 때.
아버지 논길 나서며
흥겨운 휘파람 가락에
바지게 모종 가득 담아
동네 사람과 총총 벼 심고
논 웅덩이 물 가득 대어
한 해를 준비한다.
다섯 살배기 어린 소녀
벼 포기 사이 꼬물꼬물 유영하는
재미있고 신기한 올챙이 끌려
맨발로 들어서면
미끌미끌 진흙 논바닥
소녀 올챙이 잡는데 정신 팔려
벼 포기 깔고 이리 철퍽 저리 철퍼덕
한나절 그렇게 보냈는데
포탄 맞은 듯 망가진 벼 포기 진영
새참 이고 지나던 동네 아줌마들
총총 벼 절단난다
혀 차고.
소식 듣고 달려온
아버지 망연자실.
아버지 벼 동냥하여
듬성듬성 논 메웠는데
간격 여유로우니 굵은 씨알 되어
풍작 이루었다.
푸른 유월
博川 최정순
산과 들
푸름 덧칠하고
논밭 농작물 한창인데
해 지평선 걸려 어둠 내려앉을 때까지
호미 낫 든 아버지 허리 구부리고
논길 밭길 어정거리다.
가끔 담배연기 내 품으며
북쪽 하늘 바라보고 서 있어
그때, 어리석은 딸년
그저 먼 하늘바라기 하나 했었지
오늘, 논둑에 우뚝 서
아버지 어른거리는 모습 따라
아버지 눈길 머물던
저 먼 북으로, 북으로 내 마음 가네
평안북도 박천 고을로.
봉숭아꽃
博川 최정순
황금 사과 손댄 적 없어
나 건드리지 마
결백 주장하는 봉숭아꽃
담장 밑 작은 모습으로 펴
한여름 장맛비
핏빛으로 피고 지는데
아버지,
꽃잎 따 돌에 곱게 빻아
백반 섞어 내 열 손톱 친친
다음 날 풀면
빨간 단풍 곱게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
한의 피눈물 자국
결백 자국이었네.
어린 날의 사계(四季)
博川 최정순
전쟁 끝나 먹거리 부족하던 때
봄이면 담장 안팎 과실수 둘러 심어
물 주고 거름 주며 자식 기르듯 정성 쏟아
청사(靑蛇) 빛 가지 하늘 잡으러
오르고 올라 열매 덩실덩실 다니
해마다 복숭아 모과 배는
풍작으로 주저리주저리
설익은 복숭아 잡으러 나무 오르다
떨어져 코 깨지고
맛 들지 않은 배 손 넣으려다
떨어져 머리 깨지니
아버지,
키 작은 청포도 몇 그루 심어 주고
곁에 우물 파주어
한여름 시원하게 보내고
가을이면 시고 떫어 쳐다보지도 않던
모과 따 흑설탕 넣고 끓여 주고
겨울이면 군밤 곶감
입 회자되어 즐거웠는데
아버지 따라 모두,
어디로 꼬리 감추었는가
색안경
博川 최정순
이른 봄 흐드러지게
빗질하는 양광(陽光)
소녀 혼자,
돌 틈 달래 냉이 소쿠리 담아
얼음장 밑 손 벌겋게 씻어
해거름 녘 장 다녀온 부모
아홉 살배기 반은 되고
반 질은 저녁밥
한 숟갈 밥 국
입 들어갈 때마다 돌 씹혀도
밥맛 좋아,
냉이장국 잘 먹었어,
덮어 주던 부모
아버지,
장에서 사온
안주머니 앙증스런
색안경 빼내 건네주었는데
이제 중년 고개 넘은
아줌마,
간직하고 있던
색안경 꺼내 써보면
옛날 모습 어린다.
추억
博川 최정순
돌담 온통 에두른 호박
여름비 맞아 아기 얼굴 몸통
주저리주저리 황금 꽃
일벌 분주히 날아드는데
어머니 수꽃술 따 암꽃술에
벌에게만 맡기지 말고
이렇게 해줘야 장마에도
호박 안 떨어져
이 꽃 저 꽃 꽃가루 묻히며 다닌다.
어머니 애호박 채쳐 놓고
아버지 밀가루 밀대 밀면
졸깃한 칼국수 되고
모기 쫓으며
쑥 연기 피어오르는 마당
멍석 위 둥근 밥상엔
보시기 속
열무김치 풋고추 가지 나물
아버지 수저 들면
어머니 먹으라는 눈신호 줘
우리들 달려들어 먹던
애호박 넣은 칼국수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흘러간 아버지의 추억.
양지꽃과 매화의 대화
博川 최정순
아버지 처음 세상 보고
울음 터트린 2월 탄생화 양지꽃
세상 어디나 뿌리 내리고
작고 노랗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웃으며
타인 마음 만져주는 꽃
우리 집 뒤란
아버지 나 닮았다며 좋아했던 매화
너도 매화처럼,
고결하고 결백하게 살라고 늘 일렀지
장에 간 양지꽃
사랑 담은 얼굴로
매화 달린 내 리본 사왔지.
빨간.
아버지의 수박
博川 최정순
아버지 유기농법
어성초 삭혀 진딧물 죽이고
퇴비 볏짚 푸지게 땅 힘주어
수박 줄기 두세 개만 남겨놓고
바쁜 가위질
하늘에서 불볕 햇살 고문하고
지열 올라 숨 턱턱, 옥죄는데
수박 햇살 받아 힘차게 자라
달고단 과즙 배불러 만삭 임산부
어린 소녀인 나는,
솥단지처럼 커다란 수박 발견하고 환호성
아버지,
가위로 꼭지 잘라 배 쩍, 갈라주면
빨간 속살 속 여러 개의 검은 눈
나를 보며 웃는다.
♥
파도
博川 최정순
억겁을 사납게 몰려들어
물 부수고 바위 깨는 파도야
어미 품에서 갈라져 나온
몽돌 부수지 마라
너한테 지지 않으려
둥글게 살고 있지 않냐
세월의 파도에
고개 숙인 아버지.
물고기
博川 최정순
망망대해 유람하다
황망간 어부 그물 들어
유리 상자 갇힌 신세
다른 물고기에 지느러미 잘리고
비늘 기계총처럼 여기저기 뜯겼구나.
도마 위 흩어진 살점들
혀 날름이는 기름통 튀겨져
한갓 식도락가 입에 들 것
너의 이념이 무엇이든
너의 사상이 무엇이든
대가리 하나에 먹물 눈 둘 남아
너 닮은 아버지
한스럽게 쳐다보네.
임진강에서
博川 최정순
남북 바다
자유롭게 유영하다
임진강 들려 깜박 졸던
그물 따라 올라온 황복
회 치고 끓여 놓아
소주 곁들이는 아버지
솜털구름
강 위 둥실 떠가다
아버지 보고 눈짓한다.
강 이편저편 떠돌며
자유롭게 활주하던 물새
아버지에 손짓한다.
자신들과
어서 북녘 고향 가자고
아버지 술 잔 놓고
강 위 물상들만 멀거니 바라본다.
청천강 변
博川 최정순
찔레꽃 향기 대지 흠뻑 적시고
고향 그리움 가슴 가득 메우면
종달새 하늘 땅 한恨 소식 전하며
천지간 넘나들어 가슴앓이 하고
보리 물결 바람에 하늘하늘 춤출 때
보리 알곡처럼 익어 가는 그리움
살며시 다가와 눈에 잡히면
아버지 고향,
청천강 변으로
구름만 바람 따라 잘도 흘러간다.
겨울밤
博川 최정순
꼬리 없을 것 같은 긴 겨울밤
자유 찾아 와,
감옥 아닌,
감옥 갇힌 아버지
이북 고향 부모 형제 그리움
잊기에 버리기에 너무 마음 쓰라려
눈물 펑펑 쏟으며 처연한 달빛만 보다
고향에서 먹던
절구에 찹쌀 찧어
손바닥만 한 떡 채반 말렸다가
가마솥 참기름 튀겨 자식들 먹였다
사르륵사르륵, 눈 내리는 밤에.
씨름
博川 최정순
상대 마주 줄 끝 허리 반 감아
왼손 끈 놓고 오른손 잡는
아버지 일본 유학 때 배운 씨름
샅바 당겨 매치기 조선 씨름 달리
허리 힘 상대 무너뜨리는 기술
거르미 단오 날,
동네 사람들과 단판 승부
동네 사람들 모르는
일본식 씨름
잘하는 아버지
맷돌 콩국 먹는 단오 날
아버지 유명짜하였다.
아버지,
혼령들 세상에서도 그러겠지요.
막걸리
博川 최정순
농사철 쉬지 않고
흙 갈아엎고
씨 뿌려 가꿔
자식들 뒷바라지
아버지 피땀
거기 살아 숨 쉬는데
아버지 새참 막걸리 심부름
어린소녀 쭈그러진 주전자 들고
동네 어귀 내달렸는데
아버지 잘 아는 주막집 덤 주니
꼭지는 꼴딱꼴딱
소녀는 아버지에 가며
아까워 찔끔찔끔 들이키고
맛있어 주전자 유두 빨고
가벼워지는 주전자
붉어지는 소녀 얼굴
가슴 턱턱 막는 가쁜 숨
소녀는 집에 도착
주전자 뚜껑 연 어머니
"막걸리 어디로 증발했다냐."
아버지 한 사발 죽, 들이키고
"네가 사온 막걸리라
맛있다 어, 시원하구나.
고맙다"
미꾸라지의 추억
博川 최정순
삽자루 아버지 따라
어린 소녀 앞장
은행나무 단풍 빛
찌그러진 주전자
동네 어귀 지나 논 들어
촐랑촐랑
아버지 푹푹 삽질
미꾸리 꿈틀꿈틀
주전자 담으며
소녀 조잘조잘
미루나무 까치 깍깍 깍
산속 비둘기 구구구
어쩌다 잡힌
각시붕어 빨강 까망 노랑 줄무늬
꽃 무지개 자랑하는데
어머니.
너무 예쁜 건 먹는 게 아니라며,
개울 방생
미꾸라지 무 콩 위 깔고 양념
물 부어 장작불 익혀내면
한 식솔 푸짐한 밥상,
아버지와 함께 가버린 추억
♥
온양 장터에서
博川 최정순
오늘은 일요일
아버지 따라 우시장
설화산 장딴지께서 십 리 길
온양 오일장 실옥리 우시장
새벽 찬 이슬 주인 따라
인근 소 다 모였는데
중계인 흥정 걸고 구전 받는 틈새
때깔 빛난다. 빗질
건강하다며 등짝 쳐대는
왁자한 우시장 풍경
우시장 아침 8시 파장
썰물처럼 빠져나간
우시장 근처
주막집 술청 장사치 북새통
남았니. 본전이지 밑졌네.
막걸리 사발에 쏟아지는 육두문자
소장수 아버지
남우세스러워 손잡고 나와
들어서는 먹자골목
팥죽 떡 빵 국수 국밥
눈 잎 즐겁던 장터 풍경
백화점 마트 밀려
아버지처럼 사라지고 없다
오늘도 온양 장터 기웃거리며
사라진 쇠전에서 없는 아버지 찾는다.
아버지의 순수
博川 최정순
흰 저고리 검정 두루마기
평북 박천 땅 아버지
알록달록 화려한 꽃무늬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끼 어머니
인연의 끈 하나 되었는데
생선 좋아하는 육지 남자
생선 싫어하는 섬 여자
환경 기질 다른 두 사람
어떻게 이어져 가시버시 되었을까
자식 키우고 당국 감시당하며
얼굴 저승꽃 내려앉기까지 무엇으로 버텼을까
언제까지나 궁금해 하며 살았지
고향 등지고 서울 유학하다
방학 맞아 고향 찾아들면
고향집 더 작아진 모습으로 반기고
고개 올려 쳐다보던 앞마당 싸리나무
얼굴 밑으로 기어들고
집 에두른 설화산 산세 점점 작아지는데
그때도 아버지 어머니 어린아이처럼
고추 밭고랑 숨바꼭질
키 큰 아버지 키 작은 어머니
못 찾겠다. 꾀꼬리, 노래 부르다
아버지,
툇마루 걸터앉아 낫으로
수박 돌려 깎는 모습 여전한데
어머니 섬 기질 나와 깐족거리면
아버지 내 들을까 일어 영어로만 다퉜어
끝내 어머니 헤헤, 웃고 말았지
그것이 그린비의 순수 아니었겠어.
아, 그리운 하늘 아버지.
해금강
博川 최정순
사자바위 천년 송 사이
일출 황금빛 내던지면
단잠 깨는 장생포 앞바다
해풍 간질이면 아기섬 웃고
언덕 위 풍차 기지개 켜는데
수억 년 버틴 십자동굴
바닷물 들락날락 사통하고
신선 내려와 놀던 신선대
괭이갈매기 아우성
고향 떠난,
아버지의 배따라기들.
비망록
博川 최정순
아버지 비망록 넘치는 낱말
평북, 박천군, 청천강 변, 어머니
소쩍새 울음보다 애절한데
웃고 울면서 써 내려가
낱장마다 스며 있는 복장 터지는 농담들
가슴에 비수 되어 칼질하고
아버지 그리며 골짜기 헤매는 마음
기댈 곳 없으니
설화산 기슭 초승달만 외롭다.
아버지의 산
博川 최정순
당신 얼굴 표정 없어
아픔 가신 줄 알았는데
가슴 깊이 패여 눈물 흐르고
산짐승 배설물 가득하네
원줄기 그리워 가슴앓이 하는데
멧부리 튀어 떨어져 나간 자식들
아버지 마음 모르고 저마다 잘나 사는데
산은 매일 허물어지고 갈라져
시체처럼 눕는다,
진남포항
博川 최정순
어둠 팔 벌려
평택항 감싸 안고
살진 보름달빛 흩뿌리면
화물 운반 크레인 잠들고
중국 가는 여객선 닻 올리면
봄날 고양이처럼
사위 잠들어 가고
가로등 긴 그림자 끝
누운 박천 고향 추억
아버지 마음 배에 실어
진남포향으로
동풍에 푸른 돛 달고
이물 돌려 달려가네.
낙엽
博川 최정순
겨울 가는 길목
누리 포탄 맞은 낙엽
작달비 바람
몸 비틀며 나뒹구는데
한국동란 때 쓰던
군화에 심어 놓은 노란 국화
벌 나비 가뭇없이 사라지고
다니던 가로수
기생 옷자락 모두 벗으니
마음만 어수선하여
거지주머니처럼 주저리주저리
아버지 마지막 모습 닮았네.
아버지 흔적 좇아
쏙 수리 감나무 아래 서면
낙엽은 아버지 비운
술병 소리 내며
굴러 간다.
괴꼴
博川 최정순
외롭고 고달픈 길
쉰 넘어 육순 접어드니
눈물방울에 어리는
평안도 부모 형제
모습 흐물흐물 풀어져
안개에 갇히고
청춘 뒤안길 돌아보니
먹구름장 세월 비켜가
그늘져 쓸쓸한 까마귀 발자국
꾹꾹 찍혀 있는데
타작할 때 나도는 벼알 섞인
짚북데기,
아버지 모습처럼.
아버지 환갑잔치
博川 최정순
가족의 배 안전 운항 위해
사나운 풍파와 싸워 온 삶
저잣거리에서 경찰서에서
고생만 한 아버지
어머니 무당 찾아
오십도 못 살 단명수
점괘 듣고 맞은 아버지 쉰아홉
어머니 얼굴 햇살처럼 퍼지는 웃음
회갑연 고희연 모두 챙겨 주겠다며
없는 살림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자식 노릇 한답시고 전자올겐
일 년 넘게 연습
흑돼지 한 마리 동네잔치
흥겨운 자리
준비 기간 짧아 서툴러도
정성 하나로 연주하니
아버지,
삼백 년 사는 것 부럽지 않다
칠일 동안 동네 사람 음식 나눠 먹으며
건반 위 손가락 춤추고
아버지 덩실덩실
모든 시름 놓은
행복한 모습에
딸은 기쁨의 눈물 흘렸지
그런데, 회갑연은 왜
빼먹고 가셨나요, 아버지.
갈증
博川 최정순
팔 길게 늘여 허공 저으면
손끝 닿을 것 같은 고향
이념의 철책
갈 수 없는 멀고 먼 나라
피 터져라 불러 봐도
어머니는 메아리마저 없다
벌써 세상 바꾸셨나.
저승사자 배 타고
죽음의 강 건너셨나.
목마른 갈증 적실 길 없는데
하늘 구름 세월 붉어
아버지 마음도 붉다.
구름
博川 최정순
바람결 쫓기고 쫓겨 어디론가
휘청거리며 흘러가는 먹구름
폭풍에 갈기갈기 찢긴 몸뚱아리
팔다리 한 맺힌 무서리 내려
석류알처럼 벌겋게 충혈 된 가슴
다독여 어루만지며
나그네 혼불 되어
북녘 고향 찾아 간다오.
쓸쓸한 오월
博川 최정순
모종하고
솎아주고 김매기 한창
아버지 전화로 슬쩍
느들 바뻐?
농사일 때 놓치면 안 되는 겨!
자식들 일손 보태러 모여들어
번들거리는 광택에 향기로운 승용차
모판 비료 농기구 소독기
얼음물 막걸리 간식거리
짐차 식당차 둔갑했었는데
모종하고
물주고 북 주는 하루
홀로 밭일 끝내 허리 펴니
해 서산 기울어
오동나무꽃 아카시꽃 향기
코끝 간지럽히는데
밭고랑 황구렁이로 길게 누었고
옮겨 심은 생명들 나란히 서
산들바람에 조막손 흔들어
하늘에서 내려온 아버지
들판 한가운데서 쓸쓸히 웃는데
햇살 아래 들꽃만 눈부시다.
춘난(春蘭)
博川 최정순
척박한 고산지대
바위틈서 날아와
봄이면 산기슭 양지에
분홍과 흰색으로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너
평북 박천 땅 떠나
인생의 숲 길 잃어
넘어지고 자빠지며 산 삶
살아남기 위해
격렬한 파도에 맞서고
뒤틀린 소음 털어내다
분노로 바뀌면
너를 보며
아버지는,
늘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탁족만리(濯足萬里)
博川 최정순
사선 넘고 넘어
다시 사선 오가며
설화산 계곡
발 담그고
표표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천 길 벼랑 위 옷깃 떨치고
만리 흐르는 냇물 발 씻노라
유월 초하루
천하 덮는 햇살
흰배추나비 표표히 날고
대지는 현현히 고양되어
양기가 천지간 충만한데
선거 앞둔 세상
선거만큼 어지럽고
날씨는 무더워
세숫대야 찬물 발 담그고
아버지 탁족만리(濯足萬里)
다시 배우네.
무창포
博川 최정순
기차 타고 웅천 내려
시내버스 타거나
변산반도 옆구리 간질이며
21번국도 달리다 보면
개양할미 서해바다 선물
석대도 열림 길
사대주의자들
모세 기적이니 뭐니
떠들어 대는 열림 길 만난다.
밀물 썰물 따라 여닫는 길
학망 중 제길 잃어
독살에 갇힌 망둥어
눈 크게 뜨고 숨만 헐떡헐떡
국방군 인민군 조류에
갇힌 신세 망둥어 비슷하다
썰물에 언제나 저 휴전선 열릴까
아버지,
무창포에서 손꼽아 기다린다.
대왕암
博川 최정순
아버지 함께 떠난 여행
신라 왕릉 집결처 경주 시내
한참 떨어진 외로운 대왕암
보문 지나 해 맞으러 가보니
황금빛 해무海霧 가득한데
문무왕 누운 황금빛 암석岩石
갈매기 황금빛으로 날고
심문왕 만든 동해 배수로
장방형 우물엔
감은사지 둥실 떠 있다.
아버지 잃어버린 고향과 함께.
아버지의 사모곡
博川 최정순
산간마을 칠흑 같은 어두운 밤
고향 할머니 눈바라기
할머니가 지어 준
마지막 핫옷 입은 아버지
츠렁바위 넘어갔다.
담뱃불 등대란다.
아들 찾아라.
할머니 말씀에
맥없이 타들어만 가는
아버지 담뱃불
담뱃불
남으로, 남으로
설화산 감나무골
둥지 틀어 앉았는데
쏙수리 감나무 즈음
들려오는 아버지 사모곡
그리움 한별 되어 터져 나온다.
아버지의 유서(遺書)(1)
博川 최정순
아버지 유서 쓰려고
어머니 볼펜과 종이를 건넸어.
움푹 패인 두 눈에
생기 잃은 동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네.
당신의 인생이 통한이기에 몇 자 쓰다가
애면글면 손을 쉬기도 여러 번
오자가 많아지면 어머니 고쳐주기도 여러 번...,
애써 태연한 척 지켜보자니 가슴 아린다
분위기 바꾸려 헛말을 늘어놓지만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절필은 비수(悲愁)의 덩어리
당신의 부모님께 크나큰 불효자식임을 통념한다.
그런 당신 옆에서 순연해져 눈길 둘 곳 없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철없이 굴었던 일들 자꾸 커진다.
사후에 자식들 구순히 지내라 당부한다.
홀로 남은 어머니 귀찮아도
안부 자주하고 비싼 것 안 사줘도 좋으니
소홀함이 없이 종종 들리란다.
유서 몇 자 쓰다가 흐르는 눈물
눈치 없이 글자를 흐려놓아서
어제도 그제도 쓰다가
알게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려
다 못쓴 유서"여보, 오늘도 우느라 그럴 거면 차라리
쓰지 말자"고 어머니 안쓰러워하네.
그래도 써야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인데.
당신 마누라님 자식들에게 홀대 받을까 봐
재산 정리해 준다며
마누라님 앞으로 사는 집 명의 해준단다.
한 끼 라면으로 때울지언정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잠잘 집이니
"혹여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의 하나
집은 처분하지 말라는 당부다.
농사를 짓지 못하니 사용 안 하는 농기구
알아서 처분하고
몸이 아프니 "평소 알아서 약 먹는 것 거르지 말라"
나 없어도 약 잘 챙겨 먹으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멀건 한 곡기는 사잣밥이라 말하는 아버지
차마 눈 둘 길 없어 짐짓 고개 돌린다.
하늘도 회색빛이다.
암세포
博川 최정순
이산가족 상봉 시작하던 날
아바이 암 덩어리 기지개 펴
실낱 희망 절망으로 바뀌고
기약 없는 상봉에
아바이 매일 죽어 가는데
2010년 11월 3일.
티브이 속 금강산 면회소
치매 박씨 할아버지 딸 손잡더니
갑자기 정신 돌아와
"고사리 손 이제 주름만 가득하다'
우는 모습 보고
아버지 따라 울었지
밤 새워 울었지
아바이 백부 북한 고위직
가족 상봉 가시 울타리
생전 가족 만나지 못하는데
아나운서 눈물의 상봉 어쩌구
이바구 잘도 놀린다.
암세포 몸 전체 장악하고
득의만면하여 웃던 날
아바이 북녘
혼불 되어 날아갔지
그리고 딸은 알았네.
아바이 암세포 의미를
기다림
博川 최정순
고향 잃고 타향 터 잡아
고통 점철된 어려운 삶
말술 줄담배 허파 정상인 삼분의 일
보호막 얇아져 암세포 활개 치나
농사꾼 정신으로 산
일본 유학생 김일성대학 졸업생
결장암 덩어리 떼 내고 삼 년
아버지 대소변 받아내며
지병 자심한
어머니 조각 잠자는데
자식들 저마다 핑계 있어
고향 오지 않고
두 노인네 고생 깊어 가는데
며칠 한 번 어쩌다 자식들 전화만
말하기 힘들어 반가운 눈물만 어리는데
어머니 퉁바리, 울긴 왜 울어
아버지 아무 말 없이 송수화기 내려놓고
눈물 글썽여 방문 열어 달라며,
"우리 애들 아직도 안 오나?"
아버지 암에 묻다.
博川 최정순
밤새 고향 그리다
눈물 져
얼굴 부었는데
밤새 많은 눈
소리 없이 대지 감싸
하얗게 색칠해 놓았지만
나의 삶
고개 뒤로 회한
파노라마 펼쳐져
얼룩진 먹물로 남았구나.
이렇게 더 살아야 하는지
접어야 하는지
몸 속 자라는 암
동무되어 함께 가고
수십 년 지난 세월 속
아직도 눈앞 어른거리는
고향산천, 그리고 부모형제
암아,
나 언제 데려다 줄거니
고향에,
선인장 꽃 (1)
博川 최정순
사랑, 열정, 정열
너처럼 생명 질긴 풀도 드물 것
자갈밭 모래밭 바위틈 틈, 틈
작은 틈새만 있으면 뿌리 넣어 새순 틔운다.
..
선인장의 삶 아버지,
달포 내내 친구 되던 선인장 꽃
마지막 한 송이 남겨둘 즈음
울 안 물앵두 다다귀다다귀 시뻘겋게 절정 이루고
둥굴레꽃 별처럼 피어나
푸르른 5월을 노래한다.
선인장 꽃처럼
아버지 시들어 가는데
어머니와 나는,
선인장 가시에 찔린 아픔에
눈물 마를 날 없어
아버지 정지되어 가는 시간 속으로
함몰한다.
선인장 꽃 (2)
博川 최정순
아버지,
대수술 받고 누워 있자
어머니,
배 불쑥 나온 작은 항아리
선인장 심어 아버지 눈높이 두다
봄 되자,
타원형 납작한 잎사귀
선인장 붉은 꽃망울 몇 개 열리더니
나팔꽃처럼 아래로 고개 숙여 피어
나선형 이층 짓다.
어머니,
먼저 핀 꽃 지려면
막 피려고 몽우리 진 곳
아버지 쪽 돌려놓다
선인장 꽃 정면에서 보면
고개 숙여 별 감흥 없었는데
아버지 누워 있는 각도에서 확인하니
꽃의 아름다움 배가 된다
자식들 화분
아무 꽃이든 담겨 있으면 그만
어머니,
고개 숙여 핀 꽃으로
아버지,
무료함 달래주는 효과 생각해낸 거지
어떻게 알았을까,
어머니는,
선인장 생명력을!
아버지의 마음을!
산소호흡기
博川 최정순
숨소리 거칠어 가슴만 타는데
틈틈이 시간 물어
대답한다.
밤 한 시에요
밤 한 시 오 분예요
밤 한 시 십 분예요
아직 그것밖에 되었니 아침은 아직 멀었네.
이놈에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 드는데...,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더 이상 말할 기력 없으신지 손짓만 한다.
무슨 말인가 궁금하기만 하다
날이 밝자
이별 선물 산소통 사 산소호흡기 해드렸다.
아버지 얼굴에 웃음꽃 활짝 피며
얘야, 시원하다.
말문이 트인다.
불효자식 마지막 선물
산소호흡기 받고
아버지,
흡족히 웃는다.
어머니와 나는,
돌아앉아 눈물 쏟는다.
안락사
博川 최정순
암세포 구석구석 새끼 쳐
야금야금 갉아먹는데
온몸 예리한 면도날
갈기갈기 헤집어
퍼져 가는 통증
참을 길 없어
아버지 입에 단 말
안락사, 안락사,안락사
간호하는 어머니, 나의
입에서도
지켜보는 아픔 참을 길 없어
안락사, 안락사,안락사
마약 성분 강도 높여
아버지 잡수고
어머니 드시고
나 먹고
안락사 위해.
유골함
博川 최정순
수원 영화장 십자가 진 아버지
고열에 한 줌 재 되어 사라졌다
아버지 생전 흔적 유골함 담아
보자기 질끈 매고 임진강 당도하여
흐르는 강물 아버지 뼛가루 띄우니
물 위 둥둥 떠 북으로만 간다.
혼백이라도 고향 찾아가
정혼녀 다시 만나기를
어머니,
합장하고 기원 한다
망향초(望鄕草)
博川 최정순
일죽 유토피아
아버지 안치하고
오는 길섶
모질고 척박한 땅
무더기 지어 피는
아버지 닮은 흰 망초꽃
황금빛 놀에 환하게 웃고 있네.
누구를 탓하랴
그저 세월이 그랬던 것
너도 가족과 이별하고
바람결 묻어와
이 강산 수많은 사연 흩날리며
청천강서 설화산 거쳐
아버지 따라 일죽까지 오지 않았더냐.
순결한 학의 삶으로
길가에 조용히 누워
바람 따라 잔잔히 물결치며
미소 짓는 망초 꽃
흰옷 즐겨 입고 늘 웃으시던
아버지 닮았구나.
너를 망향초라 부르리라
아버지의 영정 사진
博川 최정순
봄, 어머니
여행 길 나서는데
천추의 한 맺힌
영정 사진 따라나서
나란히, 나란히
진달래 핀 산길 걸어가네.
너무 다정하여
사람마다 물었지
"누구예요?"
어머니 웃으며 답했어.
"내 신랑이야!"
사각 틀 속 아버지
웃고만 있었지
사람들,
"할머니 놀이 오는데
할아버지도 왔군요."
라고, 말했어.
아버지 미소 지으며
돌아섰지
항용 마음 밭에 계시는
아버지 오늘도 웃고 있네.
노안도(蘆雁圖)
博川 최정순
눈 덮인 겨울
물가 갈대밭 기러기 한 쌍
모안(母雁) 자는 머리맡
부안(父雁) 영정 사진에는
보리밥 시금치국
귤 하나 초코파이 둘
늘 조촐하다
부안 영혼 먹고 남은 것
모안 먹다 울면
부안도 영정 속에서 운다.
상주해수욕장
博川 최정순
아버지 영정 안고
추억 따라
어머니 남해 끝
상주해수욕장 찾아왔는데
허리통 굵은 해송 사이
사지 활짝 벌리고
누워 있는 바다엔
낮이면 갈매기
옛 추억 찾아 활공하고
나래 접어 은모래와 속살거리다
밤이면 초승달에 숨죽이네.
아버지 동행했을 때도 그랬지
오늘도,
그리움 지친 어머니
눈물 감추려
바닷물에 몸 담근다.
부부바위
博川 최정순
총소리 포 소리 요란하여
지축 몸살 앓고 선혈 낭자하던 날
해 달처럼 오래 살자 맹세하던 정혼녀
기약 없는 이별에
가지 말라 애원하였는데
인민군 쫓겨
별 울고 달 우는 밤
혈혈단신 넘은 삼팔선
온양 거르미 둥지 틀어
식솔 이룬 세월 강물처럼 흐르고
정혼녀 죄인 되어 오매불망 전전반측
전쟁만 없었더라면 휴전선만 없었다면
재회하여 오색주단 청실홍실
백년해로 인연일 텐데
새 되어 날아가신 아버지
내세에는 칠보산 부부바위처럼
끌어안고 떨어지지 마세요.
삼우제(三虞祭)
博川 최정순
아버지 장사 지낸 후
세 번째 제사
혼백 평안하라고
어머니 정성 들이다 깜빡
우윳빛 너럭바위
계곡 물가 서 있는데
검은머리 하얀 비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할머니
가슴까지 내려온 흰 수염
무릎 흰 머리 너펄 할아버지
근엄하고 다정한 눈길
어머니 한참 보다
아버지 손잡고 사라지더라고
마고님인 듯 산신령님인 듯
현몽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조상 곁에서
잘 지낸다는 꿈이라며
오랜만에 어머니
얼굴 가득
함박웃음 담네.
보라색
博川 최정순
파장 짧은 자외선 중간 색
질병 내쫒는 귀족 색
아버지 보라색 좋아
두루마기 저고리 바지 중절모
온몸 보라색 두르고 사셨지
폭풍 격랑의 세월을
배 갈아 탄 아버지
저 멀리 일죽 유토피아 안치실
보랏빛 유골함 보라 꽃 꽂혀 있네.
보라색 저고리 치마 입은
어머니 손길
세월가면
博川 최정순
박격포 밀려
남으로, 남으로 향하다
설화산 산골 마을
고향 닮아 둥지 틀고
결혼하여 학부형 되고
사돈 되며 세월 흘러
암세포 몸뚱이 갉아먹어
자주 찾던 병원 길
그마저도 갈 수 없어
대쪽 같은 어머니 두고
널빤지 흰 천 씌워 방문 나갔네.
세월 가면 서녘에서나 만날까,
그리운 아버지.
붉은 벽돌집 성당
博川 최정순
평택서 삼팔국도 타고
승용차 는적는적 달리다 보면
장호원 터미널 지나
다리 건너
왼쪽 산 아래
선혈처럼 붉은 큰 벽돌집 성당
어머니,
손가락 허공 푹, 찌르며
네 아버지 말한 교회야
전쟁 때,
공산군 점령 연합군 점령
이쪽저쪽 총탄 수난 겪어
피로 얼룩진 성당인데
그 아픔 하늘에 알리려
십자가 높이 매달아
아직도 피 철철 흘리며
철탑 뾰족하게 일어서 있다고.
♥
군항제에 내리는 꽃비
博川 최정순
벚꽃 질 무렵
진해 군항제 오니
꽃비가 폭포로 쏟아지는데
생전에 함께 왔던 날도 그랬지요,
아버지.
꽃비에
당신 사랑의 편린들
번뜩거려 정겹게 보이네요,
아버지.
갑자기 부는 사나운 바람
꽃비는 강물 되어 흘러가고
당신의 모습도 멀리멀리 흘러가네요,
아버지.
금은화(金銀花)
博川 최정순
네 이름 곱구나.
덩굴식물 인동초(忍冬草)
청송(靑松) 타고 올라
노랗고 붉은 꽃 피우고
겨울 모진 눈보라
참고 견뎌
소나무와 푸르름 더하니
아버지 모습 아니던가.
첫 어버이날
아버지 추모관에서
어떻게 보내셨지
인동초 붙잡고 물어보네.
비루월(悲淚月)
博川 최정순
오늘도 겹겹
덮개로 쌓이는 세월
속 잊혀 가는 삶의 편린들
일월(日月) 아름다움
모두 삶의 옷 하나씩 벗겨내기
위한 과정 불과하거늘
가지 잘리고 뿌리 뽑혀
쭉정이로 삭아가던 아버지
억겁으로 가는 카론의 배 몸 실었는데
일죽 유토피아
카론은 아버지 내려놓고
다시 죽음의 강 배 저어 가고
아버지 참배 마치고
나는 카론의 강가에서 달 보고 있다
눈물 얼룩진 비루월(悲淚月).
한밝뫼
博川 최정순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0.1㎦ 화산재
유럽 항공대란 일어났는데
먼 옛날 한밝뫼(白頭山) 화산 폭발
10배나 100배 넘는다,
전문가 분석 있었지
발해 거란에 멸망한 것
한밝뫼 대폭발 때문
원귀만 늘어 갔었고
오늘도 이산가족 한밝뫼 주변
원혼으로 떠돌다
하늘 못(천지天池) 고여
20억t 물 되었네.
전쟁 상흔 안고 살다
죽은 수많은 눈물
어찌 아버지뿐이랴
답 없는 탁상공론 뱀 떼 출몰하고
원귀 마그마 되어 오늘도
한밝뫼가
소리 없이 대폭발한다.
천안 함
博川 최정순
번개와 천둥, 폭우 속
격랑의 세월
참혹하게 파괴된 과거를 안고
벌거벗은 몸뚱아리로 우뚝 섰다는데
참혹하게 파괴된 잿더미에서
세상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검은 세월 혼란만 가증되고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져 가는 전쟁
아버지의 머릿속
해마다 6월이면
악령처럼 되살아나는데
분단을 잊는 세대
아니, 잊게 만드는 정치 술수에
아버지처럼 땅으로 잦아드는
오늘과 내일의 수 많은 목숨들
아버지처럼.
죽어서 갈 곳 없는 구천의 영혼들이여!
첫 제사
博川 최정순
살아가면서 바가지 깨지는
소리 안 나기란 어려운 것
어머니와 골은 깊어 가고 대화 불가
서로 연락 두절하고 살았지
탈 쓰다 그때그때 바꾸는 동생들
어머니 사주 받고 덩달아 외면
모친 생각하는 척 탈 또 바꾸면
마주 보기 역겨워
나도 피하기 시작했어.
그러다 아버지 첫 제사 놓쳤는데
무슨 이유 핑계 댄들
살아 있는 자들 용서될 일이던가
어머니 눈물 흘리며 한숨 섞인 푸념
"자식들 다 필요 없어!"
맏 노릇,
어려서 동생들 어머니 역할 마다않고
자라서 부모 동생 경제까지 해결했었지
늙은 아버지 대수술을 받고 눕자
언제나 당부했었지
"엄마, 병든 남편이라도 옆에 있을 때가 좋은 거야."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
"잔소리장이 없으면 편하고 자유스럽지."
지압전기 장판 깔고 누운 아버지
5분 여마다 몸 돌려 바꿔 드릴 때면
심장 파고드는 신음 소리 아구구아구구
어머니 화장실 간 사이
아버지 반대쪽 뉘어 달라 나 불렀어.
병환에 지친 몸 마른 낙엽처럼 가벼워
양손 가슴에 얹고 속으로 울었지
아버지 누운 자리 눌러보니 딱딱하고 울퉁불퉁
덜 아프도록 지압전기 장판 위 이불 두 번 접어 까니
아버지 편하고 폭신하다 좋아했었어
인정머리 사나운 머머니,
뼈뿐인 앙상한 몸에 돌 지압전기 장판 깔았으니
얼마나 아팠겠는가. 고통스러웠겠는가.
게다가 수시로 부른다고 신경질 내며 털썩!
빨리도 안 죽는다고
후렴이 꼭 붙었다,
아버지 돌아가시자 효부라도 되는 양
어머니 대성통곡,
그때야 남편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자식들 밉다고 첫 제사 불참하다니
아버지 저승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섭섭했을까
선물
博川 최정순
대지 지글지글 불 피우며
홍염(紅焰) 가마솥처럼 삶아대고
열기 밤까지 살아남아
사람 못 살게 들볶는데
계절도 끝은 있는 법
삼복맹장(三伏猛將)
아직 물러가지 않았어도
아, 오늘이 입추던가
어둠의 장벽 가르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귀뚜라미 노랫소리
가을 알리는 전령이던가.
그것을 가슴에 담아
가슴으로 옮기고 싶네.
아버지 일죽 유토피아로.
♥
알밤
博川 최정순
대수술 받은 이듬해
거동 순조롭다며
뒷산 올라 버섯 따고
밤 주워 가루 만들어
손수,
전 부치고
수제비 뜨고
튀김 만들어
몸 좋아진 것 같아 좋아하면서
철없이 먹어치운 불효자식
저승길 마지막 선물이었네
산길 지나다
떨어진 아람 밤송이 보니
아버지 생각에
차마 줍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네.
사부곡(思父曲)
博川 최정순
아버지는 남자의 잣대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데
아버지 닮은 남정네 어디에도 없었네.
머리 올린 남자
아버지 자에 올려놓지도 못하여
남자 포기하고 살아온 삶
나의 가슴 머리에는
항상 아버지만 남아 있어
아버지, 지금도 설화산 밑에서
고개 빼고 기다릴 것만 같아
날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꿈
퍼뜩 깨어보면,
병든 내 몸뚱어리만 허우적거려
눕고 숨 쉬는 것도 버거운데
산소호흡기 동무하며 산
아버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시는 마지막 날
큰딸은 하늘 보고
다리 잘린 짐승처럼 울었다오.
지금 어디메 계시온지
내 곁일까, 평북 박천일까
아버지 머무는 곳 찾아
오늘도,
내 마음 이리저리 헤매네.
아버지의 배따라기
博川 최정순
서도 민요 잘 부른 아버지
배따라기 늘 입에 달고 살았지 그래,
이 세상은 폭풍과 해일의 바다
당신은 한국동란과
이후 과도기 험난한 여정
가족의 배 선장이었지
안전운항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분노와 체념 사이 오가며
가슴 얼마나 불태웠을까
그것은 끝내 내장에서
시커멓게 타 암으로 자랐지 그리고,
혼불 되어 고향에 귀항했지
♥
아버지의 그림자
博川 최정순
이유 없는
그리움이
뭔지 알아질까.
오래 묵힌
뒤돌아선 그림자
곰삭아져
툭! 떨어진
그리움 하나
있다.
그것은 아버지
사진
博川 최정순
아버지, 기억하세요.
어린 손녀 공방서 구운
재활용품으로 만든 데칼코마니 찻잔
선물할 때 함박웃음 지으며 좋아하셨지요.
그 손녀가 아들을 보았어요.
손녀는 아들에게
증조할아버지 사진이라며 주었지요.
증손자 침 묻은 손으로 더럽혀도
얼굴 마구 일그러뜨려도
당신의 자손이니까.
아버지는 좋기만 하겠지요.
낮에 나온 반달
博川 최정순
아버지,
요람에 싸였던 손자 어느덧 청년 되어
한 쌍 원앙 거듭나 축복 받는 날
어머니 도라지꽃 빛깔 한복 곱게 단장하고
아버지 가신 빈 자리 대신하였습니다
아버지,
삼 일이면 되가겠지 두고 온 북녘 고향
남하하여 피붙이 없이 떠돌다 어머니 만나
북쪽 하늘 보며 현구고례見舅姑禮하던 날
북극성 통곡하는 향수의 밤이었다지요
아버지,
바닷물 깊이 몸 담근 몸뚱이 허리 동강 나
분단 신음하며 산하 철책서 서리꽃 피 흘리다
은하수 물에 하염없이 그리움 담금질하며
유경流景 그림자 베이고 있었지요
아버지,
노을 진 내밀內密의 숲 품고
보내지 못할 편지 썼던 아버지처럼
불꽃처럼 돋아나는 심혼 날마다 공책에 쓰며
그리움을 달고 사는 어머니,
손자 결혼식장에선
낮에 나온 반달이랍니다.
♥
망부의 한
博川 최정순
천지 피로 물들이며
포성 목 터지게 울던 날
평북 박천 봉하리 막혀
말고개 숨 가쁘게 넘으며
가슴 터져라 통곡했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고독한 발걸음 눈물 흘리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데
떠나는 사람 붙잡지 못하여
기적 소리도 목이 쉬도록 울었지
휴전선 허리 동강 나
아득한 망연자실
평생 속울음 안고 살았을 아버지의 한
철없이 산 내 가슴 적신다.
종이학
博川 최정순
종이학 접으며, 아버지
날개 있지만 세월의 무게
짓눌려 날지 못하는
주둥이 있어도 재갈 물려
목청껏 노래 못하는
텅 빈 가슴 활활 불태우고
속으로 잦아드는 울음 삼켜
반미치광이로 세상 버티다
종이학에 그리움 실어
북녘으로 날리며 살았지
살아서는 죽어 있었고
죽어서야 종이학 타고
고향으로 가셨다.
이복 언니의 사부곡(思父曲)
博川 최정순
어찌 여기 왔는가
반세기 넘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저 자석 같은 힘에 끌려
인연의 등불 따라
남으로 남으로,
아버지 따라왔더니
아버지 간 곳 없고
시름없이 가신 아버지 빈 자리
비처럼 피눈물로 통곡하네
어찌어찌해서 왔는가
아버지 핏줄
이승과 저승 소통하며
철조망 꽉 막혔던 운명 앞
서로 주름져 얼싸안은 짧은 만남
저 멀리서 어느 날 바람 되어 찾아왔네.
♥
하얀 카네이션
博川 최정순
자식 농사 소박하나 구순하여
아이들 명랑하고 씩씩하니
저승 가면 조상님 뵐 면목 선다며
서쪽 하늘 보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
아버지 낳으시고 아껴 준 어진 은혜
염치없는 핑계로 피하고 피하다
창졸지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니
아쉽고 그립기 그지없어라
목매어 불러도 대답 없는 북녘 고향
그리고 그리다 지친 한 많은 세월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 가신 지 몇 년 지나
하늘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모으고 모아 어렵사리 시집 펴내니
북에서 온 혈육 언니 시집 보고
인연인지 기적인지 기별 닿아
어버이날 영전에 꽃 두 송이 바치니
부족하고 부족한 딸들의 회한
아버지 가슴처럼 숯덩이 같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며
딸들이 올린 하얀 카네이션 달고
아이처럼 밝게 활짝 웃고 계시네.
핏줄의 끈
博川 최정순
아버지 혼불 북녘 하늘 날아가고
아버지 찾아 동토凍土 탈출한 이복언니
남쪽에서 한 편 드라마처럼 만났네
아버지 1·4후퇴 박천博川 허위허위 떠날 때
뱃속 생명 키우던 정혼녀 귀에 속삭여 두었던가
아들 나면 아무개라 이름 짓고
딸 나면 무엇이라 필히 이름 지으라고
끝없는 인연 필연의 꼬리 물고 물어
아, 언니와 이름마저 같을세
사랑의 마음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되어
마음으로만 허우적거려 찾고 찾으니
아버지 흔적 어디에도 가뭇없는데
한 떨기 쓸쓸한 꽃이 되어
저 멀리 천상에서 지상에서
넓고 넓은 팔 드넓게 벌리고 벌려
우리를 얼싸안으며 기다리네
영혼으로 혈육血肉의 끈 이어 준
아버지는.
아버지
博川 최정순
흙 일궈 잡초 뽑아
채소 키워 솎아 먹으며
잘된 것 장에 팔고
자식들 골고루 나눠 주던 당신
그런 행복한 세월
영원이라 생각했지요, 정말
터밭 당신 그림자마저 없어지고
흰머리 덮는 할머니 되었는데, 이젠
심신마저 병들어 허공 보며
눈물 쏟는 날만 더 많아지는군요
당신 향한 그리움 사무쳐
별무리 청옥처럼 피어오르면
은하銀河에도 감출 수 없는 나만의 그림
당신의 초상화
당신은 분명 어디엔가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 여전히
다시 만나지 못하는
또 서러운 새날을 맞이합니다.
금강송
博川 최정순
아버지 널 얻으려
젖무덤 안 자리한 유벽乳癖처럼
힘겹고 아픈 다리 멍울 참고
어릴 적,
뒷산 가득했다던 할아버지 말 믿고
고향 산 돌사닥다리 정상 올라
소나무 제왕 금강송 찾으니
일제 무차별 수탈정책
밤에도 관솔불 켜 도끼질
송진은 태평양전쟁
비행기 연료로 소진되고
마구잡이 근대화 개발
산업화 이면으로 사라져
어디에도 없네
촘촘한 나이테 많은 송진 젖처럼 흘러
천년이 흘러도 썩지 않을 너,
임금 사대부 관재棺材로
속은 황금빛 황장목黃腸木으로
천년 궁궐 고찰 대들보
천년의 영화 이어 가던 너,
이제 전설 속에 묻혔나
아버지 천년 편히 쉴 널감은
어디에도 없네.
혜성
博川 최정순
직선 서둘러 그으며 낙하하던
긴 꼬리 묻었던 눈물 털었나요
그 옛날 당신 떨어져 누운 자리
이제 발모가지 덮는 숲길로 변하여
시월의 어우러진 잡풀 붉게 태우고
동짓달 고추바람 서리 옷 둘렀는데
나 호올로 규화목硅化木 의자 앉아
당신 뒤따르는 자손들 보며
서글픈 별나라 전설 나누다
당신들처럼 세상사 모두 내려놓고 싶어
가이없는 서러움 울컥 토해내니
한별곡恨別曲 되어
모진 삭풍에 흩어지고 맙니다.
낮달
博川 최정순
밤길 잃은 한 마리 흰 사슴
하얗게 빛바래 야윈 빈 껍질로
먹빛 어두운 기억 훌훌 털고
여기저기 잘려 나간 희망의 가지 모아
삿된 것 버리고 초연히 천공에 둥실 떠
시나브로 모든 고통 이리저리 흘려보내고
갖은 이념에 찢기우고 망가진 온몸 추슬러
어제의 그리움 목울음 삼켜 다시 퍼 올리며
중천에 하얀 꽃으로 눈부시게 피는구나.
♥
민들레
博川 최정순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의 민들레.
♥
자유로에서
博川 최정순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나비
博川 최정순
멀고 먼 고향 소식 그리워
화선지 앉은 너의 모습
붓길의 물감 마르기 전
핏빛 목단 사방에 덧깔면
꽃처럼 하늘하늘 여울지는
가는 봄의 설운 상념들
텅 빈 공백에 흩뿌리운다
그리움 가득 묻은 호수
저어 오는 작은 조각배 벗처럼
따뜻한 봄바람 되어 화선지
옷 주섬주섬 입혀 주니
거친 파도 갇힌 질긴 인연들일랑
싸늘한 빛에 모두 묻어 버리고
너는 홀로 고독한 혼 되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구나.
♥
무정
博川 최정순
이별 한 장단 튕기며
하늘 휘몰아 운다
춤추는 등나무 등줄기 바람
어설프게 휘어지도록 붙잡고
우웅웅 한스럽게 후두둑 터지는
다시 못 올 가락이던가
서해로 천길만길 서해로
두메 계곡 휘돌아 울며불며
한 서린 중중가락 신명내다
크고 작은 분화구마다
당신의 행성
매몰차게 부숴 버리고
애간장 녹이고 녹이다
사라지는 은결스런
당신의 무정.
님의 뒷모습
博川 최정순
까닭 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 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당신
博川 최정순
둘레둘레 사위 살펴보아도
지금은 당신의 모습 없어
매순간 포개지는 슬픈 음조들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
바람과 소근거리는 나뭇잎
의자 몸 길게 펴 누워 있는 길목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당신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오롯이 웃고 있는데
갈색 마음의 여백 채우고 채우면
성큼성큼 달려와 줄 것만 같은
향기롭고 상큼한 당신은
욕망의 잔혹한 묘사 비밀스레 그리다
조각조각 맞추는 능란하고 능란한 붓질
내 마음의 붉은 종피種皮 속
알알이 폭죽처럼 터트린다.
♥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막내동생 결혼식
博川 최정순
손잡은 오빠 손에
저승 아버지 내려와 인도하니
시월의 꽃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탐스럽고 예쁜 수련
깨끗 청순한 마음으로
피어나라 나의 축복 기도 속
금강보다 더 굳게 맺은 백년가약
축하객 천둥 우뢰 박수 소리
신랑 신부 반기는데
아버지 가신 빈자리
어머니 이슬로 채운다.
꽃불
博川 최정순
봄 오면 아름다운 꽃들 얼굴 내밀고
서로 반기며 눈웃음 짓지요
사랑스런 해맑은 미소로
봄버들 봄바람에 살랑거리면
하늘 어디선가 눈가 이슬 맺혀
북녘 바라보는 아버지
수없이 오가는 봄
아, 작별 인사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
부모 형제 그리며 산 모진 세월
그리움 꽃잎 되어
텅 빈 가슴에 겹겹이 내려
당신의 꽃무덤 적시니
아버지 꽃불로 환생하여
아지랑이 타고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딸
博川 최정순
아버지 재 되어 조용히 누워있는
안성 일죽 유토피아 추모관
낮잠 꿈결에 아득히 펼쳐져
차 몰아 허위허위 달려가니
얼마전 차 냉방 장치 고장나
섭씨 40도 계기판 넘나드니
감싸는 열기 정신마저 아득한 채
피서객 몰려 차 거북 걸음
한참만에 추모관 도착하니
거기도 갈 데 없이 염천일세
아버지 살아 생전 좋아하던
재단 올릴 시원한 팥빙수
깜빡하고 한 사발 준비 못했네
마음으로만 극락왕생 기원하며
시린 가슴 토닥여 등 돌려
쩍쩍 갈라지는 농토 뒤로하며
지척지척 평택 돌아와
허기진 제 배나 허겁지겁 채우는
못난 딸.
스켓치
博川 최정순
아버지 웃통 벗고 일하는 밭
비처럼 쏟아지는 해 눈부시고
밤새 웅크리고 잠들었던 채소 기지개
들꽃 예쁜 잎 펼쳐 향기 자랑하니
나비 흥얼흥얼 마실다녀 꽃가루 나르고
꿀벌 잉잉거리며 드넓은 대지 찬양하네
해 붉은 머리 자랑하며 중천 떠올라
종다리 하늘 높히 오르내리며 재재거릴 때
엄니 들참 준비하여 지아비 일터 나왔지
아버지 이마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방울
수건으로 쓱 훔치고 하늘보다
걸죽한 막걸리부터 한 잔 마셨지
잠시 틈내어 호박 모종 옮기던 어머니
아버지 보며 행복한 웃음 지었지
아버지 일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