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소설>
『아빠를 깨우쳐 준 느티나무』
손 병 흥
아빠하고 엄마와 태식이는 설날을 맞아 시골에 갔습니다.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 꾸러미를 한 아름 안고서 새로 산 때때옷을 예쁘게 차려 입고서 말입니다.
고향 마을 동구 밖에 이르자 큼지막한 느티나무가 제일 먼저 반갑다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여름방학 때 보았던 싱그러운 잎사귀들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가을에 이미 낙엽이 되어 모두 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그 나무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앙상한 가지끝 마다 반가운 손짓으로 윙윙 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겨울잠을 자고 있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태식이는 짐짓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마을이 들어설 때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나이가 자그마치 수백 년이나 되는 아주 큼지막한 당산나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닙니다. 단지 이 겨울 추위에도 아량곳 않은 채 두툼한 외투도 없이 그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아빠, 겨울나무는 너무 불쌍해 보여요."
태식이는 이렇게 여쭤 보았습니다. 아빠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말했습니다.
" 그렇게 보이니? 그렇지만 새 봄이 되면 마른가지에 또다시 새움이 파릇파릇 돋아난단다."
"그럼 지난여름에 보았던 모습으로 금방 되살아나겠네요?"
아빠는 걸음걸이를 멈추지 않은 채로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란다. 연한 연녹색의 새잎들이 점차 자라나서 짙은 녹색의 잎들로 변하게 된단다. 네가 봤던 여름이 되기 전에 예전처럼 녹음 짙은 잎사귀로 숲을 이루게 된단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빠는 걸음걸이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태식이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엔 그럴 수 없이 자상하셨던 아빠였지만 오늘따라 왠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마음이 조금 섭섭하였습니다. 아마 아빠도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고향방문길인지라 마음이 마구 들떠 있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태식이는 고개를 돌려 그 나무를 한 번 더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 아름드리 큰 나무는 반갑다는 손짓을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나긋나긋한 걸음새로 걸으시며 옆에서 가만히 부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으시던 엄마께서 모처럼의 말문을 열었습니다.
"태식이 아빠. 저 나무에 얼킨 얘기가 아주 많겠네요?"
이렇게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아빠께 물어 보았습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문을 이었습니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얘기만 해도 아마 몇 십 가지는 될 걸……."
"그럼 어디 재밌는 이야기 한 가지만 심심하지 않게 들려줘요."
아빠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다음에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잠시 후 마른침을 다시 한 번 더 꿀꺽 삼킨 다음에,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천천히 이어나갔습니다.
"그 때가 아마도 내가 태식이 저 애보다 한두 살 많았을 때 일거야.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선 어디 먹거리와 주전버리가 너무 풍족하지가 못했었잖아. 그래서 같은 또래 애들 셋이서 저 앞을 흐르는 냇가로 가서 물장구를 치며 멱을 감다 지쳐 돌아오던 길이였어. 저 당산나무 위쪽 산비탈에는 참외나 수박과 가지와 오이 등을 심어 논밭들이 참 많았었지. 서로 누가 먼저랄 거도 없이 의기투합하여 살금살금 기어가 제 머리통 보다 큰 수박 덩어리를 몰래 따 버린거지.
그 땐 배도 너무 출출한데다 오랜 물놀이 뒤의 갈증으로 다들 목이 몹씨 말라 있었기도 하고 말이야. 모두가 다람쥐 같이 날쌘 동작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저 당산나무 밑까지 냅다 뛰어 왔었지. 그리고는 각자 작은 주먹으로 그냥 수박을 으깨어 마구 신나게 먹고들 있었지.
한참 그렇게 굶주려 걸신 든 사람처럼 정신없이 맛있게들 먹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섰는지 그 밭 주인집 할아버지가 긴 담뱃대를 치켜 들고서, '네 이 나쁜 놈들, 모두 그 자리에서 꼼짝말어!' 하고 버럭 고함을 치시는 거였어. 우리 모두는 허겁지겁 그저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보니 그만 들켜 버리고 말았던 거지.
그야말로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하면서도, 입가엔 수박 물을 질질 흘리는 채로 모두들 겁에 잔뜩 질려 버렸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 순희네 할아버지는 '그려, 다음부턴 절대로 남의 것을 몰래 따 먹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겠지 이놈들! 또다시 한 번만 더 그랬다간 혼쭐을 내고 너희들 집에 모두 일러 바칠거야. 네 이놈들 잘 알아들었지?' 하시고선,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쉽사리 용서를 해주셨던거지. 그리고는 남은 것마저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니까 천천히 다 먹고들 가거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를 먼저 떠나시는 거였어.
너무나 쑥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몹씨 놀래기도 했었지. 한참동안이나 모두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순희네 할아버지의 뒷 모습만 쳐다보고 있다가, 끝내는 남겨진 수박을 다 먹을 수가 없었어. 왠냐면 이미 목마름이고 배고픔 따윈 저멀리 싹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지.
우리 셋은 너무 혼이 난 이후 론 이제 부터는 절대로 남의 것을 따 먹지 않기로 저 느티나무 아래서 세끼 손가락을 걸고서 맹세 했었단다. 어찌나 챙피 했던지 그 순희네 할아버지 집 앞을 간혹 지나칠 일이 있더라도 일부러들 애써 고생하며 먼 길을 돌아서 엉뚱하게 다른 길로 가곤 했었지.
더욱 걱정스러웠던 겄은 혹시나 그 촉새 같은 순희가 알게 되어 동네방네 소문도 내어 버리고, 다른 애들이나 학교 선생님에게라도 일러 바쳐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욱 컸었지. 하지만 그 순희네 할아버지는 그 후로 돌아가실 때 까지도 굳게 입을 다무셨어. 근 삼십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일을 회상할라치면 아직까지도 마구 오금이 저릴 지경이야……."
그때까지 엄마와 태식이는 귀를 쫑긋하여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쑥 엄마가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당신, 알고 보니 꽤나 개구장이 였겠군요. 더 이상 안 들어 봐도 뻔하군요."
"그렇지만 어디 시골서 자랐던 사람치고 이런 저런 추억거리가 한 두가지씩 없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렇게 마구 야단들을 맞아가면서 다 철이 들어갔던 거지."
"그래도 그렇지. 남이 애써 힘들이고 땀 흘려 잘 가꾸어 놓은 농작물에 손을 댔다는 것은, 한마디로 심보가 나빴기 때문인 거예요. 당신 말 대로라면 시골이 고향인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 밖에 더 돼요. 그런 쓰잘데 없는 어거지 제발 부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당장 크게 가슴을 치고 뉘우치세요. 어디 당신 내 말이 틀렸어요?"
"그래 맞지 암 맞고 말고… 하여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 때의 주위 환경은 아주 열악하고 다들 심하게 어려웠을 때라, 모두가 배고픔을 그렇게 라도 해서 조금씩 허기를 달래기도 했었다는 말이지.
그리고 한동네 사람들이자 거의 일가친척들이 주인인 밭에서, 고만고만한 또래들의 애들이 어쩌다 한 번쯤 그렇게 슬쩍 나쁜 짓거리를 하는 일들이 이따금씩 많았었다는 얘기지. 안할말로 그 땐 동네 형뻘들이 심심찮게 남의 것을 우리들처럼 서리를 하는 것을 종종 봐 왔었거던.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이었던 지라, 어디까지나 군것질과 간식거리 삼아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당시엔 시골 인심들이 아주 좋았었던 때인지라, 애써들 용서를 해주시곤 했었지……."
"당신, 그래서 고향에 올 때마다 항상 마음이 들떠시는 거군요. 나야 뭐 도회지에서 줄곧 자랐으니까 그런 추억거리도 별로 없을 뿐더러, 그런 나쁜 생각마저 아예 할 수도 없어서 그래요."
태식이는 저러다가 잘못되어 다툼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쌓여, 아주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았습니다.
다행히도 말싸움이 그 쯤에서 끝이 났을 때에는 이미 마을 안길에 도달 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집은 동네 뒤쪽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도 대문 밖에 미리 나와 바깥을 쳐다보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할머니의 옆으로는 누런 복슬이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태식이는 두 손바닥을 입가에 대고서는 큰 소리로 '할머니~!' 하고 길게 외쳤습니다.
이에 할머니는 대답대신 알았다는 듯이 반가움으로 가득찬 손바닥을 크게 휘저어면서 흔들어 주었습니다.
태식이는 다소 오르막인 골목길을 마구 달렸습니다. 찬 겨울 바람이 귓가를 윙윙 울리고 지나갔습니다.
엄마가 새로 사주신 하얀 털모자가 달린 두툼한 겨울잠바도 함께 달음박질을 하였습니다.
태식이가 한달음에 뛰어가는 모습은, 마치 나풀나풀거리며 훨훨 꽃을 찾아 다니는 나비와도 같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빠 엄마께서도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종종거리며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에게 전해 드릴 선물 꾸러미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이처럼 즐거운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멀기도 하였지만 마냥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하나도 고단하지가 않고 내심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저만치서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던 복슬이가 태식이를 알아 보고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먼저 반갑게 마중을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너무나 반가운 표정으로 아주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주름살로 가득차신 할머니의 쭈글쭈글하신 얼굴이 어느 새 깨끗하게 다림질을 한 듯이 활짝 펴졌습니다.
마침내 태식이는 허리가 꾸부정하신 할머니의 품속에 안기어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더욱 신바람이 나서 두 배로 커져버린 태식이의 올망졸망한 눈망울은 샛별처럼 빤짝 거렸으며, 또한 초롱같이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태식이의 자그마한 가슴팍은 쉼 없이 팔딱거리며 콩닥 거리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