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1:1-2
(1) 바울의 문안과 축복
(디모데후서 1:1-2)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으로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보냈는데 오늘부터 강해 하는 더모데 후서는 전서를 보내 고, 얼마 후에 보낸 서신입니다. 디모데 전서가 목회 상의 제반 규준을 다룬 것이라면 후서는 복음 사역 자로서 갖추어야 할 영성과 인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마다 전제되는 서언이지만 바울은 특별히 자신의 사도 직이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에 대하여 위엄 있게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직분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떤 권위 있는 사람에 의하여 부여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상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의 소명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직분 자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1. 자신에게 주신 직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느니웨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했을 때, 요나는 이 사명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사명은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 끝내는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그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나에게 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사도 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과 생애를 다 바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살아도 그리스도요 죽어도 그리스도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은 가식이 아니라 정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명 의식이 그의 마음속에 솟구칠 때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내가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나 내 맘이 뜨거워 견딜 수 없나이다’고 말한 예레미야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2 \ 1:1-2
2. 디모데에게 준 축복
하나님의 종들은 말에서나 서신에서나 심방에서나 항상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사역 자의 가정이나 사역 자들에게는 더 큰 축복으로 복을 축원해 주어야 합니다.
(1) 은혜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네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지어다’고 하는 축복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가장 사모해야 할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대가 없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때를 따라 풍성히 받아야 하며 피차 주의 이름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 축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긍휼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생활을 하거나 그런 동정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추해집니다. 그렇다고 얻어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쌍해 여기심을 받는 일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기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내 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간구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시145: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선대 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시72:13절에서 하나님은 특히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55:27절에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히4:16절에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지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 간구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평강의 축복입니다. 평강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죄악의 문제가 풀렸을 때 내 맘 속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사48:22절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결론 : 바울이 디모데에게 축원해 준 축복이 오늘 아침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임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 1:3-8
(2) 복음과 고난
(디모데후서 1:3-8)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생활을 했으며 그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밤낮 간구 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만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렇다기보다 바울의 생활 전체가 기도화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도 생활에 갈급한 주부는 기도할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방법을 일찌감치 찾아냅니다. 밥하면서 기도합니다. 빨래하면서 기도합니다. 버스 안에서 기도합니다. 그는 눈을 뜨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합니다. 기도란 자신의 마음을 주님과 연결시켜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아뢰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골방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일정 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였지만 항상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역사성 있는 종교심
디모데의 신앙은 바울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답고 칭찬해 줄만 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 가장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믿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지라’고 하신 것은 다윗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진실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거짓 없는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이 같은 믿음은 이미 외조모로부터 내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전수되고 그 어머니로부터 아들인 디모데에게 전해진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수 천년간 내려오면서 그 말씀의 일점일획도 떨어지거나 부쳐진 것이 전혀 없이 아직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에 대해서는 선지자가 증거 하였고 사도들이 증거 했으며 인류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2:1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4 \ 1:3-8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디모데는 목회자로써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사를 말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 안수자 중에는 물론 사도 바울이 들어가 있습니다. 6절에서 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란 표현은 바울이 다모데에게 안수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때 디모데가 받은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해 너로 생각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종의 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평안함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가져야 할 능력 가운데 가장 권장할 만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고 하는 주님의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다음에 사랑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은사입니다. 특별히 목회를 하는 주의 종들에게 이 사랑의 은사가 결여되면 사랑의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은사로 받지 않으면 열매 맺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자기를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힌 일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죄로 인하여 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위하여 갇힌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갇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랑할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세상의 어둔 권세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교회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5 \ 1:9
(3) 하나님의 부르심의 섭리
(디모데후서 1:9)
바울이 9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은 성경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비밀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인가? 기독교 교리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 해답이 이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간략히 주린 말로 표현한다면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성경 도처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마태를 부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비록 신약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43:1절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무에게나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르심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당신의 소유물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절대로 실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는 결국은 내어쫓깁니다. 요10:27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아려 저희는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른다는 말씀에는 끝까지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고난의 길이라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낙오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의 이유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신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 5 \ 1:9
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1:26-29절 말씀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 ).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우리는 죄인으로써 그 죄 값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는 일에 절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오직 자기 뜻에 따라 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어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까?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영원하신 당신의 영광에 두셨기 때문에 피조물의 지혜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다 하여 그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고 하나님께 따지거나 힐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만드심을 받은 자는 만드신 분에게 순종해야 하며 그 분에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9:18-23절 말씀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 ). 우리 인간의 지혜로 이해가 될 수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토기장이처럼 자신의 원하시는 뜻을 어떤 일이라도 처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떤 표준으로 언제 세우신 것입니까?
영원 전부터 이미 세워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나에 대한 구원은 어제오늘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계획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영원 전부터 세우신 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누가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힐문하고 그 뜻에 대항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다음에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속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은혜란 댓가 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귀중한 것임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7 \ 1:10-12
(4)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섭리
(디모데후서 1:10-12)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무엇이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셨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는 오직 우리 인간의 창조가 그 중심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만물만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영역을 더럽혔습니다. 만물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으로서만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롬8:19-21절에 있습니다. (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일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역사에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보이는 우주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계5장에서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등장했을 때, 네 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24장로들과 천천 만만의 모든 천사들과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들이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속죄로 나타나심
그러면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들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원수는 죄와 사망입니다. 이 원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을 타락시켰으며 자기 종으로 만 8 \ 1:10-12
들어 버렸습니다. 이 인간의 죄가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를 온통 사망으로 오염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망을 폐하시기 위해 죄 없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심으로 그 섭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들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이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완성이요 그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고 귀중한 일꾼은 복음 전파의 사역 자들인 것입니다.
3. 복음을 맡은 바울의 사명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일꾼이 이토록 영광스럽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에서 누려 온 명예와 지식과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가장 존귀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우리의 직분은 복음을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분에 대해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뽑힌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부끄러워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한 것은 바로 이런 연고에서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고난에는 놀라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고난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고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바로 그 고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택정 하시고 이런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결론 :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생애에 고난, 핍박, 시련이 와도 이 복음을 위해 기쁘게 감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 1:13-18
(5)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1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는 믿음과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스스로 본 받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지켜야 가능한 것입니다.
1. 부탁한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 지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함께 그의 생애를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본 받는다는 말은 그 말씀대로 살아 나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때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그 말씀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신뢰할 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 때에 나타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또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은 모두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 받아 지킬 때의 두 가지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믿음과 사랑’으로써 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사랑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행실의 본이 되어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지키는 일은 내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께 의뢰하여 그의 도우심을 간구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시며 영의 결실은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우리들로 이 같은 생활의 결실을 위해 계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10 \ 1:13-18
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2. 끝까지 전도인의 사명을 이루라
전도인의 사명은 쉽고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이 다 바울을 배신하여 세상으로 등을 돌린 일에 대하여 바울은 탄식하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오네시보로와 같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성경에 남겨졌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지만 잠깐동안의 고난을 인하여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 버린 자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힘겹고 또 소망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어렵다 해도 그 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자기 생애의 끝날 까지 달려가는 경주장이 성도들의 한평생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고 말씀의 길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오네시보로란 사람을 굉장히 칭찬하면서 주님께 그가 자기를 선대한 일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때로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요건 속에서 오네시보로를 통해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가 바울을 자주 유쾌케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다음에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바울을 존귀히 보았으며 더욱 가까이 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섬기는 일에 바울의 손발처럼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 일에 대하여 주의 날에 이 일에 대한 주의 긍휼을 주님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행실의 본으로 삼아 사랑과 믿음과 성령으로 지키면서 여러분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 2:1-2
(6)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디모데후서 2:1-2)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한 자만이 복음의 충성된 사역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런 사역 자가 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운 것처럼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쳐 부탁할 때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바울의 부탁
복음의 일꾼은 은혜 속에서 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믿음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그리스도인은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강하기는 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결심은 그에게 유혹이 왔을 때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베드로의 강한 의지와 담대함은 혈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에게 위기가 왔을 때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바울을 따랐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울의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했지만 그것이 끝까지 계속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동참이 혈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야 참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말은 은혜로 말미암아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이시며 성령이 이 일을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라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일꾼을 쓰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꾼을 쓰십니까? 충성 12 \ 2:1-2
된 자들을 쓰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달란트를 빼앗아 다섯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있는 자는 더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충성된 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태한 자는 그가 받은 사명까지 빼앗겨 충성된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자신이 맡은 직분이나 사명에 있어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빼앗기게 됩니다. 성도들이 더 나은 직분을 받는다거나 더 많은 직분을 받는 일은 그만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일은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마저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에 충성하는 일에는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제각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혹은 책망을 받기도 하고 혹은 칭찬을 듣기도 하는데 충성된 자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살피시고 반드시 찾으십니다. 시101:6절에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 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맡아 그 일에 헌신하는 일은 주님을 수종 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충성된 자와 동거하십니다. 그로 하나님을 수종들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 딤전1:12절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충성 되이 여기시어 주신 것인 줄 아시고 맡은 사명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 \ 2:3-4
(7)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디모데후서 2:3-4)
바울은 3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군사란 말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감에 초점을 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 된 자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군사 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란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는 군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을 지칭할 때에도 천군 천사란 말로 나타냅니다. 하늘의 군사는 하나님 편에서 사탄의 군사들과 싸우는 영적 군병들입니다. 계12장에는 하나님의 군병들인 하늘의 군사들과 사탄의 군병들인 악령들과의 치열한 전쟁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싸움의 결과 사탄과 그의 군병들은 공중에 있을 곳을 상실하고 땅으로 내어 쫓기는데 이 때부터 지상에는 무서운 종말적인 환난이 오게 되며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12:7-9절에서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을 왜 군사들이고 한 것입니까? 사탄과 싸우는 영적 군병들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는 좋은 군사들입니다.
2. 군사들의 세 가지 유의점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군사라고 비유하고 군사로서의 세 가지 유의점을 밝히면서 강하고 담대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지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본적인 중심 인물로 삼고 자신을 닮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생각과 권면은 그의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중심에서 나온 진실한 권면인 것입니다. 군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난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 14 \ 2:3-4
들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맡겨 주신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군인의 신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은 4절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며 하나님께서 그의 생활을 보장해 주십니다. 국가에서 군인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과 순종보다는 육신의 생각과 정욕적인 생활에 얽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군사들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그리스도인 들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드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자신의 삶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르신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모든 생애의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5:9절에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엡5:10에서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히12:28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얼마나 힘써 왔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임을 잊지 말고 군사된 사명을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15 \ 2:5-7
(8) 경기의 법칙
(디모데후서 2:5-7)
바울은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경기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올림픽 경주를 의미하며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과 연결시켜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1. 경기의 법칙
선수가 경기에 나간 이상, 일 등에 입선하여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경기에는 많은 선수들이 참여합니다. 그러나 면류관을 차지할 선수는 단 한명 뿐입니다. 금 메달리스트만이 영광을 얻으며 많은 상금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일등으로 달려야 상을 받는다고 말씀해 줍니다.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한 말은 우리가 장차 그 나라에 가서 받을 놀라운 상급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는 놀라운 특색이 있습니다. 세상의 달리기 경주는 많은 사람이 함께 달려 그 중에서 등수를 뽑지만 신앙의 경주는 달리는 사람이 자기 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범대로만 잘 뛰면 누구라도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경주에서 일 등을 하려면 어떤 법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표점에 대하여 히11: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분이 우리의 달리기 목표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아무리 달리기를 잘 했다 해도 이 목표점이 분명치 않다면 그런 경주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가야 일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생애를 무겁게 하는 인생의 짐입니다. 이 짐을 벗어버려야 잘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내로써 끝까지 달려가야 일 등을 할 수 있는 경주입니다. 이 요건만 갖추면 누구라도 일 등의 영광을 차지하여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아무리 달라기를 잘해도 법대로 경주하지 않으면 그 경기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법대로 달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6 \ 2:5-7
2. 그리스도인의 달려가는 자세
달리기 경주에서 올바른 자세로 뛰지 않으면 일 등을 차지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뛰어야 하는 것입니까?
(1) 변화 받은 심령을 가지고 뛰어야 합니다. 이 코스는 달리기 이전의 심령 상태로는 달릴 수 없는 곳입니다. 변화 받기 이전의 심령은 이 세상 코스에 익숙한 심령입니다. 이 심령으로는 아무리 달려도 목표 지점에 다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이 코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달려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육신의 자기를 죽이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자기 십자가란 경주 중에 오는 시험, 핍박, 어려움 등으로 많은 시련이 따릅니다. 이것을 벗어버리려 다간 큰짐을 짊어지게 됩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코스는 뒤에 있는 것은 잃어 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곳입니다. 뒤에 있는 것이란 세상 것으로 지난날 우리가 쫓아갔던 것으로 이 경주 코스에는 무익한 것입니다. 이 줄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롯의 아내가 이 줄에 얽매어 뒤를 돌아보다가 소곰 기둥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4) 이 코스는 일사불란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이 경주 코스를 달릴 수 없습니다. 이 경주는 죽느냐 사느냐의 결사적인 경주입니다. 한눈을 팔면 함정에 빠지며 함정에 빠지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면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틈을 주면 우는 사자처럼 기회를 엿보는 사탄의 공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수고하는 농부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말합니다. 수고 한 농부가 제일 먼저 곡식을 먹는 것처럼 수고하는 복음 전도자는 양무리의 곡식의 첫열매를 먹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모두 천국을 달리는 경주장에서 지금 경주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경주를 시작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경주의 법측을 잘 지키고 그 길을 달려가면 반드시 면류관을 받는 소망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17 \ 2:8-10
(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디모데후서 2:8-10)
바울은 8절에서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과 앞으로 그 사람의 할 일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억이 그 사람의 행동과 인격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대상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억이란 말은 자기 생애의 중요한 사안을 마음에 새겨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자기 생각의 중심에 깊이 새겨 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인 들은 온 생각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집중시켜야 하는 뜻입니다.
외아들 가진 어머니가 그 아들을 생각하듯이, 장사꾼이 돈 버는 일을 하루 종일 생각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은혜 생활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데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에 명심해야 할 일은 그 분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두 가지로 밝혀 주었습니다.
(1)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윗의 씨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씨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으로 그리스도는 약속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아들은 구원의 능력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2)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들어 내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지만 그의 죽으신 일로 모든 죄인의 죄 값을 갚으셨기 때문에 죄는 소멸되고 의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망이 의를 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를 음부에 묶어 두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 값을 다 갚았으며 18 \ 2:8-10
죄를 용서받아 의를 얻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신앙 생활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2. 메임 받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원수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핍박합니다. 전도자를 옥에 가두는 것은 이 도리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막기 위해 바울을 옥게 가두었는데 그러면 그로 인하여 복음이 메임을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형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와 그 가족이 복음을 받아 드려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복음의 유명한 말씀을 남길 수 있게 되었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들을 학대하고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줄어든 것도 아니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수효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로마 자체가 기독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수용하여 기독교가 온 유럽을 휩쓸었고 복음이 세계를 정복하는 일에 크나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한 것입니다.
바울이 영오의 몸이 된 것으로 복음의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하여 총독 앞에서 임금들 앞에서 로마의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참았습니다. 바울이 참은 것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는 순종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전파되기 위해 전도 인들에게 고난도 주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복음 전도자는 그 육신의 몸이 메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메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외치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19 \ 2:11-13
(10) 미쁘신 주님
(디모데후서 2:11-13)
바울은 13절에서 주는 일향 미쁘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낱말의 뜻은 믿음직하다,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한 것은 ‘이 말은 믿음직하도다’는 말로 믿음에서 나온 바울의 감탄사인 것입니다.
1. 주와 함께 죽는 자의 축복
주님의 말씀은 믿음직합니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말씀이 미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 믿음직스러운 진실성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소망을 둘 것입니까? 그 말씀 가운데 다만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거짓이 없으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바울은 세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롬6:3-7절 말씀을 보면 4절과 5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내 몸의 죄 값의 지불이심으로 그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0 \ 2:11-13
이 원리를 우리는 우리의 몸의 행실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롬6: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주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2.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라
바울은 12절에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12:1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고통을 참으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우리는 능히 인내로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란 말과 왕 노릇 한다는 말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천년왕국에서의 상급으로 첫째 부활자들에게 주시는 영광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20:4절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활자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해 참는 인내의 극치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일입니다.
롬8장에는 현재의 우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련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이기시기 바랍니다.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 이상 가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는 소망 가운데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