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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정조(正祖)
1752(영조 28)∼1800(정조24).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7∼180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비(妃)로 맞았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조세(早世)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마음을 기울이며 학문의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였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고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써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아들일 뿐만 아니라,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택,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고, 나아가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으니,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을 수입하지 못하게까지 조처한 것도 이와같은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던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의 보완·정리를 위하여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 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 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 國朝寶鑑》·《대전통편 大典通編》·《문원보불 文苑黼黻》·《동문휘고 同文彙考》·《규장전운 奎章全韻》·《오륜행실 五倫行實》 등은 그 결과였는데,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뒷날 《홍재전서 弘齋全書》(184권 100책)로 정리,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여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하여,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였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하여 왕권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시키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庶孽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펴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중인(中人)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여기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게 되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그 문예부흥이 가능하였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안으로는 조선성리학의 이념인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정신적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있어 문화의 제반분야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畵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러한 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밖에도 《일성록 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 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 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었다.
한편, 그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노력을 치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그 인근의 용주사(龍珠寺)를 개수, 확장하여 원찰(願刹)로 삼기도 하였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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