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현창사업대한 제언
대종보의 서문에 수억천만년이 지나도 사람인 이상 인륜도의가 말살될 리 없고 충효의 선행이 변할 수 없으니 숭조사상의 함양과 애종정신의 발휘가 인생 최대의 좌우명이며 선행이라 했습니다.
위대한 선조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알지를 못하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음은 자신을 포기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문경공, 정강공, 수찬공의 현창사업 이대로 좋은 가?
● 문경공 ⇒ 세종성대를 연출한 조선 500년 동안 재상 중의 재상이요 청백리 임. 태종이 진실한 재상이며 나의
주석이라고 했음.(조선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 함)
● 정강공 ⇒ 문종의 고명을 받은 의정대신(좌참찬 겸 판이조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세자빈객)이시며
사육신의 장두로 단종을 보위하다 순절,
● 수찬공 ⇒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성원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로 순절, 멸문지화를 당함 .
○정조14년 서기1790년 2월 19일 신원 복관되었으나 사회, 문화적으로는 명예회복이 되지 못하였음 |
〈현 실태 및 사례〉
● 동 시대 재상이었던 황희, 맹사성 등의 묘소는 왕능에 버금 감
⇒ 경암은 비각하나, 재사하나 없음
⇒ 정간공, 수찬공 연정리 설단 및 비문 예문에 맞지 않음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묵살
한 사례
● 석전의식(공자제향의식)을 찬정하고 성균관에 문묘(공자사당)
을 중창한 인물인데도 성균관에 배향이 되어 있지 않음.
※ 태조 6년 서균관전적(정6품)으로 석전의식을 개정하고 태종7
년 사헌집의(종3품)때 서장관으로 세자(양영대군)을 수행 명
나아에 가서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고 귀국하
여 의정부에 보고하여 성균관의 공자묘를 그와 같이 하였음.
조선조 최고의 예악(禮樂)의 대가임
● 고려사 편찬
⇒ 초판은 세종 3년 경암이 찬술 (세종실록)
⇒ 문종실록. 문종 원년 8월 30일 지춘추관사 좌찬성 김종서
우참찬 허후 공조판서 정인지가 산삭완료 말과 안장을 하사받음
※ 국어사전 →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김종서가 지어 문종 원년에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고, 역사교과서에는 정인지로 기록됨.
● 수령육기법(수령임기제) 세종 4년 이조판서 경암이 시행
⇒ 경암의 스승인 권근이 시행한 것으로 기록 (권근은 이미 사망)
● 속육전 편찬 세종 8년 참찬 경암이 찬정 ⇒ 이직으로 기록
● 고려사 절요 ⇒ 문종 2년 2월 20일 정간공이 찬술
※ 국어사전에는 춘추관 편찬으로 문종 2년에 완성 고려사에
없는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
● 세종실록 편찬. 세종의 묘호추봉
지춘추관사 정간공이 주관 했는데도 정간공의 존함 삭제.
● 종묘 공신당 위패에 文敬公의 시호가 文景公으로 잘못 기록
되어있음 ⇒ 종묘관리 사업소에서 고쳐주기로 약속 받음
● 국어사전에 경암과 정간공 수찬공의 존함이 없음
※ 계유정난 때 같이 순절한 황보인, 김종서 조극관 이양을
비롯하여 정인지,한명회 신숙주 경암의 문생, 후학들은 등재
되어 있음. 군수 현령을 지낸 사람도 등재되어 있음.
● P.C 워드로 문서작업 시 한글을 한문으로 전환할 때 허조, 허후
는 단어가 없음 ⇒ 웬만한 역사적 인물은 단어로 전환 됨.
● 성씨연합회에서 발간한 성씨총감에 하양허씨는 없음
⇒ 괴산에서 자기들을 등재하고 수찬공 이하는 삭제하여
가처분신청을 넣고 소송을 통하여 괴산을 삭제 하다 보니
주체측에서 전체를 빼어 버림.
● 숭모전에도 같은 사유로 정회원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음
⇒ 2010년에 대종회장이 아헌을 하고 성열종친이 집례를
하였음
● 박종국이 저술한 세종성왕이란 책에 경암의 존함이 없음
● 이한우가 저술한 ������태종이 조선을 열다������ 라
는 책에도 태종이 가장 신임하고 총애한 대신인 경암의
존함이 없음
● 임한용이 저술한 ������관기������란 책에도 세종실
록에 세종이 관기 제도에 대하여 경암에게 물어 정책을 결
정하였는데도 경암의 존함이 없음
● 조선조 인물평가라는 책에 686명의 역사적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 데 문경공, 정간공, 수찬공의 존함은 없음
● 청백리의 인명록에도 황희, 윤관, 맹사성은 등재되어 있는데 세종실록에 청백리로 기록되어 있는 경암의 존함이 없음
● 단종의 왕위 찬탈과 복귀란 책에도 정간공과 수찬공의 존함
이 없음
이런 굴욕과 억울함을 체념하고 살 것인가요?
문경공, 정강공, 수찬공의 내려다 보신다면… !!! |
《타 문중의 정부지원 현창사업 사례》
● 안동 농암 이현보(명종 때 문신) 생가복원 100억원
● 영양(석보 두들) 이문열 시인 생가복원 160억원
● 하동 일두 정여창 (성종 때 문신) 생가복원, 기념관 건립 80억원
● 달성 사육신 박팽년 육신묘 성역화 360억원
● 강능 매월당 김시습(생육신)기념관, 사당건립 36억원
● 구미 의병장 왕산 허위선생 생가복원, 기념공원조성 56억원
● 청도 시인 이호우 시비건립, 공원조성 62억원
● 가창 녹동서원 (임진왜란 때귀화 왜병장 김충선 배향) 50억원
● 영천 암고서원 (정몽주 배향) 서원 재건축 380억원
● 안강 옥산서원 보수(회재 이언적 배향) 70억원
● 선산 도계 월암서원(이계헌 배향) 보수 10억원
● 고령우륵의 고향에 가야금유적마을 조성 50억원
● 안동 도산서원(퇴계 이황 배향)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우리의 선조가 이분들 보다 무엇이 모자랍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요 ? |
우리도 한번 힘을 모아 도난당한 선조의 업적을 되찾고, 묵살당한 명예를 회복, 억울함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원들이 모금운동이라도 해서 인터넷 홈페이지부터
개설 합시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움니다.
文敬公 貞簡公 墓祭祝文改正 提案
■ 文敬公 祝文
《現行》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集賢殿 經筵
春秋館事 世子傅 贈諡 文敬公 府君
《改正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領 集賢殿 經筵
春秋館事 世子傅 兼判禮曹 判中樞院事 修文殿 大提學
知成均館事 贈諡 文敬公 府君
《理由》集賢殿領事 經筵廳領事 領春秋館事는 左 議政이 當然職으로 兼職하는 官職이고.
※ 世宗實錄을 보면
○修文殿大提學은 左贊成(종일품)에서 세 번째 吏曹判書가
되신 世宗 14년부터
(정이품이나 학자로서의 최고위직 -정승, 판서라고 다 하는 자리가 아님)
○判中樞院事(종일품)는 世宗 15년부터
○知成均館事(정이품-성균관최고위직)는 世宗 17년부터
○判禮曹事는 世宗 18년부터 兼職을 하심
右議政은 세종 20년 5월 19일∼ 세종21년 6월 11일
左議政은 세종 21년 6월 12일∼ 12월 1일(사임)
따라서 修文殿大提學, 判中樞院事, 知成均館事, 判禮曹事는
특별히 專門性을 고려하여 兼職을 除授하신 것이며 졸년까지 사임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없음
南秀文이 墓表를 쓸때 글자 수가 너무 많아 碑文에 다쓸 수가 없어 左議政으로서 當然職으로 兼職한 職位만 쓴 것으로 推定 됨.
● 成宗 5년 (1474년) 6월 申叔舟가 王에게 올린 箋文(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紀錄한 官爵을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藝文館 春秋館 弘文館 觀象監事 禮曹判書 高靈府院君으로 紀錄한 事例가 있음.
■ 貞簡公의 祝文
《現行》崇綠大夫 議政府左贊成 贈諡 貞簡公 府君
配位 貞淑夫人 京山李氏
《改正 案》崇綠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吏曹事 集賢殿大提學
知經筵 春秋館事 世子賓客 顧命三宰 贈諡 貞簡公 府君.
《理由》判吏曹事 集賢殿大提學, 經筵廳知事 知春秋館事
世子賓客은 職牒을 거두고 流配를 가실 때까지 兼職 하심
顧命三宰는 左參贊으로 계실 때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金宗瑞 와 함께 文宗으로부터 端宗을 保衛하라는 顧命을
받으심 (정충각에도 기록되어 있음)
● 配位 ⇒ 外命婦 一品(정일품.종일품)은 貞敬夫人이 맞음.
여러 종친 분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耕谷 俊 澤
첫댓글 경곡님께서 그동안 선조님 현창사업에 뜻을 두시고 각종 실록과 관련된 사료와 고서를 통하여 많은 연구를 하시고 계십니다.
정말 勳功忠義之 名家의 後裔로서 경곡님의 제언에 찬사를 드리며 저희들은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첨부된 자료를 다시 올려봅니다. 종원님들의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구 사는 명천 재찬 입니다. 아재글을보고나니 정말로 부끄럽읍니다. 전종원님들 힘을 합처서 경암할배 ,정간공,수찬공 할배를 세계적인 위인이라고 알리는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현창사업에 전원 참석하여 꼭 이루어 냅시다.아재 정말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