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 받는 표적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2:21-52 요절 : 누가복음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세상은 비방천지입니다. 교만해서 비방하고, 억울해서 비방하며,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비방합니다. 최고의 학벌과 남다른 지능을 소유한 사람들이 2002년 겨울 이후 상고출신 재야 변호사에게 빼앗길 수 없고 질 수 없다고 생각한 대통령자리를 잃고서 끝없는 비방으로 날을 새우고 있습니다. 어제는 저의 아들 다윗이가 처음으로 반성문을 썼습니다. 아빠 안볼 때 컴퓨터 게임 한 것을 은샘이가 드러내어 말하자 은샘이가 꿈을 꾸고서는 헛소리를 한다며 도리어 은샘이를 비방했습니다. 거짓말한 것과 은샘이를 비방한 것 때문에 반성문을 썼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사는 이 세상은 비방과 비난으로 가득 차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방받는 영혼에는 깊은 상처가 남고 비방을 듣는 영혼들은 지치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므온은 예수님을 비방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분이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흥함을 위하여 비방 받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비방 받는 표적 예수님을 영접하여 상처받은 분들의 영혼이 나음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비방하는 소리에 지치고 피곤해진 영혼들에게는 평안과 안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part 1. 비방받는 표적
21절을 보십시오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예수’란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미리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눅1:31) 예수님의 부모들은 방향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결례의 날이란 마리아를 위한 결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산모에 대해서 7일간을 부정한 기간으로 규정했고 그 후 33일동안도 집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희생 제사를 드려 정결케 된 후에야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밖에 나갈 수 있는 결례의 날이 차자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율법을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에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기념하고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초태생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맏아들을 성전에 데리고 가 제물로 드릴 수는 없으므로 다른 짐승을 드리거나 은 다섯으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맏아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대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은 맏아들을 대속하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정은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겨우 비둘기 한 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인생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다 겪으시며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되심은 모두 우리의 슬픔과 운명과 아픔을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겪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고 우리를 부요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나가자 놀랍게도 이분이 하나님의 메시야이심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은 시므온 이었습니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하여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고 있으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를 말합니다. 시므온은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갈망하고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므온에게 그가 고대하는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은 성전에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들이 메시야를 알아보게 해주십니다. 메시야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호서대 캠퍼스에 성령께서 임하사 많은 학생들이 메시야를 만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과 감격이 심령에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성령에 충만한 시므온에게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 예수님은 운명과 슬픔을 가진 시골 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에게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넘쳐 났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 자체가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임하시는 생명의 빛이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부모들은 매우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은 다시금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자세히 증거합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가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은 많은 사람들을 흥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많은 비방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죽는 순간에도 유대인들은 죽어가는 예수님을 향해서 비방을 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이 비방들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끊임이 없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가?’‘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베푸는 것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일하는 것이 아닌가’, ‘창기와 세리들의 친구로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자로다’ 별의 별 비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세움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죄로 인하여 사단의 비방거리가 된 우리를 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비방을 받고 스스로 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방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저주와 운명을 가져가셨음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서 세움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그 인격과 내면이 깊고 넓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비방받으시되 비방하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못박은 자와 예수님을 떠나간 자들과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 주님을 비방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비방받으시되 비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을 본 로마 백부장은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에라도 우리를 비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비방받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비방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마리아의 마음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은 그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만 찌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들의 마음도 찔리는 듯 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안나였습니다. 안나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로서 선지자였습니다. 안나는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녀는 7년 결혼생활한 후 과부가 되었는데 84년간이나 수절하며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안나도 성전에 나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아기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안나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나가 증거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구속 곧 자유케 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택한 성 예루살렘을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민족이 이스라엘과 그 성 예루살렘을 식민지로 삼고 노예처럼 종처럼 부리고 착취하듯이 죄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점령하고 노예처럼 종처럼 마음대로 부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게 노예가 되고 사망권세아래 신음하는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속박을 끊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미움에 사로잡히고, 원망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든 영혼들을 자유케 해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따라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강해지며 성장하셨고 지혜가 충족하며 성장하셨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 위에 있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예수님은 비방 받는 표적이 되셔서 우리를 흥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얽매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빚에 매여 있습니다. 카드빚, 은행빚, 보증빚, 사채빚 때문에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한 명이 신용불량 또는 잠재적 신용불량자입니다. 빚만 없어진다면! 부채만 해결이 된다면! 그러면 살 것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빚보다도 더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얽어매는 것이 있습니다. 죄 문제 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야말로 카드빚보다도 더 사람을 옥죄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는 사채보다도 더 사람을 피 마르게 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고독의 고통은 맛보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최고급 승용차가 있어도 화려한 홈시어터로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아무리 즐겁게 하여도 고독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믿음직한 남편도 결국 내가 아니고 남입니다. 자식들도 조금만 성장하면 문을 탁 닫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고 때가 되면 독립하여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외롭습니다. 이 근원적이고도 고통스런 고독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죄인된 인간에게 찾아오는 죄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에게 불안과 두려움은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와 같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세력에 한 번 휩싸이게 되면 secom을 달고 담장을 높이고 제아무리 든든한 요새를 쌓아도 그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4학년이 되어 장래의 불안에 휩싸이면 하루 종일 책을 보아도 한 페이지의 진도도 나가지 못합니다. 불안과 두려움도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 중 하나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 중에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들이 아직 젊지만 어느 때인가 나의 삶에 끝이 있고 그 삶의 끝이 나의 모든 소중한 것들로부터 나를 영원히 이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깨닫는 날이 옵니다. 그 때 우리는 죽음의 강한 권세가 어떤 것인가 깨닫게 됩니다. 사망의 권세는 인간을 허무하게 합니다. 슬프게 하고 절망스럽게 합니다. 내 생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사망의 강한 권세 앞에 덧없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너무나 나약하다는 사실을 슬픔과 절망 속에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런 때가 옵니다. 누가 이 죄와 사망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바꾸어 이 죄와 사망을 나로부터 비켜가게 하겠습니까?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히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의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당하는 표적으로 세움을 입으신 분이십니다. 그 몸으로 죄와 사망의 저주를 다 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역사 할 수 없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대속하사 자유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본문을 보면 이 예수님을 아기 때에 먼저 알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간절하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사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사모하고 간절하게 기다린 사람들에게 그 기도대로 메시야를 만나는 기쁨과 영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시므온은 오랜 인내를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메시야를 갈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의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살아 생전에 메시야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으리라는 약속과 소망을 주시고 때가 되어 그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안나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7년의 결혼생활과 84년의 긴 과부생활은 그를 눈물나고 슬픈 운명의 여인이 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뉴스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사람이 실생활 중에서 당하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안나를 깊은 고통과 아픔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슬픔’을 당하게 되면 그 슬픔 때문에 인생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마련입니다. 저의 시골 친목계 총무 친구의 어머니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사망하자 깊은 슬픔속에서 지내시며 식사를 거르며 술로 시간을 보내시다가 1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동네에 남편을 심장마비로 갑자기 잃은 저희 어머니 친구 분도 심각한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나는 자신의 슬픔을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극복하고, 주야로 하나님을 섬기며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앙과 인내로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슬픔과 아픔을 당한 연약한 자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슬픔과 아픔이 많은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만의 깊은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사람에게 가거나 세상으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인내로 이를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참 구원자 예수님을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는 자들을 한번도 저버리지 않으시는 우리의 구원자 이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을 향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문제일 뿐 오직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참된 만족과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우리의 참되고 유일한 구원자 이십니다. 나를 위하여 비방받는 표적이 되진 예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part 2 내 아버지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41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12살 이상의 성인들은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유월절에는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매년 유월절 때마다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시자 부모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갔습니다. 모든 명절의 전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모들은 그만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두고 그냥 올라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동행하는 일행들 틈에 함께 있는 줄로만 알고 하룻길이나 올라 왔습니다. 예수님이 없음을 발견 한 후 같이 가는 친족들 가운데에서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가야 했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예수님의 부모들은 성전에 있는 예수님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46,47절을 보십시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 말씀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혜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요즘 말씀공부를 할 때 너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를 풀어 와서 자기가 풀은 것을 매우 간단히 구술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목자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양은 그저 받아 적기만 합니다. 또 소감이나 일용할 양식메모가 때때로 피상적이고 의무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본래 우리 모임이 처음 생길 때 Sarah Berry 선교사님이 1:1 성경공부를 소개하셨는데 그분이 인도하시는 성경공부는 목자보다도 양이 더 많은 말을 하며 진행되었습니다. Sarah Berry선교사님과 1:1을 한 학생들은 대개가 목자보다도 자기가 더 많은 말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 지금처럼 불러주고 받아 적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함께 배우는 사람이 적극 참여하여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공부가 그냥 듣기만 하는 공부보다 7배의 교육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목자들은 정답만을 가지고 양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성경선생들은 양들이 말씀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듣고 묻고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이 틀린 답을 말하더라도 급하게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과 열정을 가지기 까지 인내와 이해로서 섬겨주어야 합니다. 급하게 바로잡으려 할 때 양들은 입을 닫아 버립니다. 또 목자는 말씀 자체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은혜를 중심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은혜는 때에 맞게 간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은혜를 소개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자체와 말씀의 은혜를 가리지 않도록 절제해가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많은 성경선생들이 자신의 영적 투쟁과 은혜에 집착한 나머지 말씀 자체의 은혜와 뜻까지도 자기의 받은 은혜에 맞추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이 스피릿 있고 은혜가 넘칠 때 그 나머지 성도들은 오히려 조용하고 썰렁해 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부담을 느끼고 입을 닫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선생과 말씀공부할 때 양들은 묻는 것을 중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성경선생 앞에서는 듣는 것 말고는 달리 자신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말씀과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과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목자들은 세심한 영적배려를 아끼지 말아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선생들이지만 예수님과 주의 종들 앞에서는 양이므로 우리들도 말씀에 대해서 순수하고 어린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고참행세를 하고 장로행세를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더욱 빈곤하고 공허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좀 더 뜨겁게, ‘듣기만 할 뿐 아니라 묻기도 하며’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는 캐면 캘수록 더 많은 보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광산과 같습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주는 말씀을 받아먹기만 하지 말고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서 우리의 내면과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부모들은 사흘만에 찾은 아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걱정을 하며 찾았는지 말하고 어찌해서 부모를 따라 나서지 않고 이렇게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밀접한 관계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칭하시고 성전을 ‘내 아버지집’이라 칭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얼마나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성을 갖고 있는지 나타내어 줍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또는 ’전능자‘로 불리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란 호칭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엄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매우 파격적인 호칭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며 그 자녀들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성을 맺으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밀접하고 친밀한 믿음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고생만 시키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늘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억지로 쓴물을 먹게 하시는 분으로 인식하며 다분히 운명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지 못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기초로, 그 아들 예수님을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믿음을 새롭게 할 때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변치 않고 견고하게 할 때 세상에서나 교회 내에서 비방과 아픔을 겪을 지라도 능히 극복하고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흥하게 하기 위하여 비방 받은 표적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비방과 저주를 친히 그 몸으로 지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씻겨지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과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임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또 예수님과 같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갈구하는 영적인 종들로 가득 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 심령을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