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派2世- 안영유(安永儒) *길영,선비유
추봉(追封)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
할버님은 시조 상호군 공의 장남이시다. 1201년 즉 고려 20대 신종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23대 고종때 추밀원부사(정3품),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6k지점인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구道講里)지장산(智藏山)서록(西麓)신좌을향지원(辛坐乙向 之原)이시다.
세전(世傳)하는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喪主)인 아드님 안부(安孚)-태사공(太師公)孚)이
14세때(1233년)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안상(安瑺-14世)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허물어진 상태이므로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세웠다.
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안위(安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에 재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를 올렸다.
그후 매년 음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한다.
또한 재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1648년 인조때 후손 순원군(順原君)안응창(安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 족보(慶州朴氏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돼 있다.
따라서 부인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永儒(영유)
韓氏譜에儒가濡로되다
一二○一年宋나라寧宗嘉泰辛酉生이며
樞密院副使上護軍에追封되시다
配는姓氏失傳이다
○墓는順興道講里智藏山辛坐다
後孫判決事인안상(安瑺)이榮州의長(군수)일때 永慕庵을創立하고 三月十月두번行祀하고
判書 위(瑋)가撰碣하며 응창(應昌)이 撰誌하니 總錄에있다
○慶州朴氏譜를본즉大阿손文忠公仁範後孫인門下侍中文烈公璜이松菊齋平章事月山君節孝公소를生하며
石灘平章事鷄林君忠文公純을生하며그女에安永儒라하였으니前譜에실리지않았으나朴氏舊譜에이미있어관甥이昭然하여기록한다
1파조 2세 추밀공 (휘 영유)묘(一派祖 樞密公 諱 永儒墓)
소재: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감곡부락 (영모암)
안영유(安永儒)
안영유(安永儒) 순흥인
2世 안영유(安永儒) *길영 , 선비유*
할버님은 시조(始祖) 상호군 공(公)의 장남(長男)이시다.
1201년 즉 고려(高麗) 20대 신종 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때 추밀원부사(정3품),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別世)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6k지점인 부석면 곡리(浮石面 甘谷里=구 道講里) 지장산(智藏山) 서록(西麓) 신좌(辛坐) 을향 지원(乙向 之原)이시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상호군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묘(墓)
순흥 부석면 감곡리(浮石面甘谷里) 지장산(智藏山) 신좌(辛坐) 지원(之原)이다.
2世 祖(휘 永儒) 묘
세전(世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喪主)인 아드님(휘 부孚)이 14세때(1233년)
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 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 안상(14世安瑺)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허물어진 상태이므로 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 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세웠다.
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 안위(安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祭祀)를 올렸다.
그후 매년(每年) 음(陰) 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奉享)한다.
또한 재실(齋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 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1648년 인조(仁祖)때 후손(後孫) 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墓)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父)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학살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배(配)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慶州朴氏) 족보(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 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 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 돼 있다. 따라서 부인(夫人)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確認)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族譜)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자(子)
안부(安孚)
할아버님은 1220년 즉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 7년 경진생(庚辰生)이시다.
소시(少時)에 호문조학(好文早學)하여 약관(弱冠)에 흥주(興州)의 주리(州吏)를 지내시다가 한때 의업(醫業)에 종사하셨다.
1244년 고종 갑진(甲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정의대부(正義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 치사(致仕)하셨다.
후에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副因)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이시다.
추봉추밀원부사안영유묘갈
(追封樞密院副使安永儒墓碣)
시대 조선
연대 1559년(명종14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960cm, 너비 110cm ,두께 45cm
출토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안위(安瑋) / 금축(琴軸) / 미상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2리(慶尙北道 榮州市 浮石面 甘谷2里)에 있는 안영유의 묘갈이다.
1559년(명종 14년)에 세워진 이 비는 후손인 안위(安瑋)가 비문을 짓고, 생원(生員) 금축(琴軸)이 글씨를 쓴 것이다.
안영유(생몰년미상)는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할아버지로, 추밀원부사 상호군(樞密院副使 上護軍)에
추봉(追封)되었던 인물이다.
비문에는 따르면 그의 후손인 안상(安瑺)이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부임하여 안영유의 묘소에 참배하였다가,
묘역을 개수하면서 영모암(永慕菴)이라는 12칸의 재사(齋舍)를 세워 관리하였다고 한다.
追封樞密院副使 安永儒 墓碣銘 幷序
公姓安氏 諱永儒 順興人 追封樞密院副使上護軍 考曰子美 追封神虎衛上護軍 子曰孚 中議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
追封守太師門下侍中 皆以太師公子文成公珦貴顯也 諺傳 太師公幼時 遇一術士愛公英秀 指智藏山中一麓言
葬此必世貴 遂葬公 文成在高麗 位冠百僚 配食文廟 道德政事 垂範萬世 厥後子孫 貂蟬相繼 將三百年于茲
今之立於朝者 繼姓 則有舜佐 以進士 歷仕淮陽府使 公信再登文科 奉常副正 於公十一代孫 瑋玹同登正德辛巳科
瑋以承政院右承旨 陞兵曹參判 玹以議政府左贊成 陞左議政 瑺以吏幹顯由刑曹正郞 再轉爲榮川郡守 景嵂以蔭
翊衛司衛率 寬登科 承文正字 吾兄弟三人 與景嵂寬 皆十二代孫 景嵂之子宗道 登科 選入藝文檢閱 若外孫
則靑紫滿朝 卿相布列 豈非先祖積善裕慶之應歟瑺到榮 先訪內外諸族 則居豐榮醴者甚蕃 相率而拜于廟 墓乃辛坐乙向
歲久頹毀 傍有偸葬 相與嘆曰 先祖墓至此極 我輩之罪 修墳墓 立刹守之 必免此患 共擇子孫之尤勤幹者 主其事
去偸葬之穢建立菴之議者 進士李玠李克儉文明凱其人也 參奉權鎰 又其次也蕫工役 構小菴者 李檃也 於是
名率其鄕之內外孫 輪材瓦 出財力以相助 派別之族 亦有效之者 爲屋十二間 菴以永慕爲名 取終身慕之之義
而又期後世子孫之無窮矣 時則嘉靖戊午孟夏也 嗚呼 世以吾門 咸稱孝友 今內外諸孫
各盡心力 猶恐不濟 又相怡怡若在一家 此其孝友之情 愈遠而愈篤也 後之子孫毋忘今日之心 則先祖之墓
永有依歸矣 銘曰 道講之墟 山名智
藏 卜云其吉 終焉允藏安我先祖 協于休祥 積善于躬 子孫寖昌 偉哉文成 事高麗王 追崇樞副 不顯其光 世漸之遠
三百年强 先墓未修 孰無衋傷 默佑後昆來守傍鄕 訪求雲仍 幾十其良 相率展拜 牲醴馨香 修其塋域 立菴其傍
子孫世守 曰篤不忘 惟孝惟友 慕切羹墻 諸孫之賢 祖德之彰不失靑氈 厥慶應長 竹溪沄沄 小白蒼蒼 吾門之興
與之無彊 牧老有言 豈爲我誑 後孫嘉善大夫兵曹參判瑋撰 生員琴軸書 嘉靖三十八年十月日
後孫通訓大夫行榮川郡守 瑺立石
추봉추밀원부사안영유묘갈
공의 성은 안씨요 이름은 영유(永儒)이며 순흥인으로, 추밀원부사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아버지는 자미(子美)인데,
신호위 상호군에 추봉되었으며, 아들은 부(孚)인데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사 판서를 역임하고 수태사 문하시중에
추봉되었으니 이는 모두 태사공의 아들인 문성공 안향이 귀하고 현달했기 때문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태사공이 어릴 때에 한 술사를 만났는데 공의 영특하고 빼어남을 사랑해서 지장산(智藏山)의 한 기슭을
가리키며 ‘이곳에 묘를 쓰면 반드시 대대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장지를 그곳으로 정하였다.
문성공은 고려 때에 지위가 신하들 중에 으뜸이었고 문묘에 배향되어 도덕과 정사가 만세에 모범이 되고 있다.
그 후손들은 고관대작이 서로 이어져 지금 거의 3백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을 살펴보면 직계로는 순좌(舜佐)가 진사로서 회양부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공신(公信)은 두 번 문과에 급제해서 봉상시 부정으로 있으니 공의 11대손이 된다.
그리고 위(瑋)와 현(玹)은 함께 정덕(正德) 신사년 (1521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위는 승정원 우승지로서 병조 참판에 올랐고,
현은 의정부 좌찬성으로서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상(瑺)은 관리로서 사무 능력이 뛰어나 형조 정랑을 거쳐 다시 옮겨서 영천군수가 되었고, 경률(景嵂)은 문음(門蔭)으로
익위사 위솔을 지냈으며, 관(寬)은 문과에 급제해서 승문원 정자로 있다.
우리 형제 세 사람과 경률과 관은 모두 12대손이다. 경률의 아들 종도(宗道)는 문과에 급제해서 예문관 검열로 선발되었다.
외손으로 말하면 푸르고 붉은 관복을 입은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경대부와 정승이 줄지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조께서
선행을 쌓아서 얻은 경사의 보응이 아니겠는가!
상(瑺)이 영천에 부임해서 먼저 내외의 여러 집안들을 방문해 보니 풍기, 영천, 예천에 거주하는 자손이 가장 많았다.
이들을 함께 데리고 선조의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묘는 신좌을향(辛坐乙向, 서서북방을 등지고, 동동남쪽을 향함)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무너졌으며 옆에는 몰래 쓴 무덤도 있었다.
자손들은 서로 탄식하기를 “선조의 묘가 이처럼 형편없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들의 책임이다.
묘소를 보수하고 재사(齋舍)를 세워 지키게 한다면 이러한 병폐를 면하게 될 것이다.” 하고
자손 중에 부지런하고 일을 주선할 만한 자를 뽑았다.
몰래 쓴 묘소를 제거하고 재사를 세우자고 주장한 자는 진사 이개(李玠), 이극검(李克儉), 문명개(文明凱)였으며,
참봉 권일(權鎰)이 또 그 다음이었다. 공사를 하여 작은 재사를 세운 이는 이은(李檃)이다.
이에 각기 그 지방의 내외 자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재목과 기와를 운반했으며 재력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다른 파의 집안들도 또한 이것을 본받아 도운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12칸의 집을 짓고는 ‘영모암(永慕菴)’이라 이름지었다.
종신토록 조상을 추모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때는 가정(嘉靖) 무오년 (1558년) 초여름이었다.
아! 우리 안씨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가문이라고 모두들 칭한다.
지금 내외의 여러 후손들은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행여 이 역사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 하였으며,
또 서로 화순하여 한 집안에서 사는 듯하니 이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이 멀면 멀수록 더욱 돈독한 것이다.
후세의 자손들은 오늘의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선조의 묘소를 영원히 수호 보존하게 될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도를 강론하던 옛터
그 이름은 지장산이라네.
길지라고 말하길래
자리 잡으니 참으로 좋도다.
우리 선조를 안장하여
아름다운 복이 내렸으며
몸에 선행을 쌓아
자손들이 점점 번창하였네.
거룩하신 문성공은
고려 왕조를 섬겼으며
추밀부사에 추봉되신 선조는
그 빛이 더욱 드러나셨네.
세대가 점점 멀어져
300년이 지났는데
선대의 묘소 수리하지 못하니
그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선조께서 묵묵히 후손들을 도우시어
와서 이웃 고을의 수령이 되게 하셨네.
그리하여 마침내 후손들을 찾아보니
훌륭한 분이 수십 명이었네.
함께 와서 성묘하고는
향기로운 제수를 올리고
묘역을 보수하고
그 옆에 재사를 세워서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며
영원히 잊지 않으려 하네.
효도와 우애로써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네.
여러 후손들의 어짊은
조상의 덕이 드러남이니
가업을 잃지 아니하여
그 경사가 영원하리라.
죽계의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소백산은 짙푸르니
우리 문중의 흥성함은
그처럼 끝이 없으리라
목은 노인의 하던 말이
우리를 어찌 헛되게 하리오.
후손 가선대부 병조참판 위(瑋)가 글을 짓고, 생원 금축(琴軸)이 글씨를 쓰다.
가정(嘉靖) 38년 (1559년) 10월 후손 통훈대부 영천군수 상(瑺)이 비석을 세우다.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