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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 문성(文成) = 道德博聞曰文 安民立政曰成 도덕과견문이넓은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하고 백성을편안히하고 훌륭한정사를세움(安民立政)을 성(成)이라한다.
호(號) 회헌(晦軒) 중니공자(仲尼孔子)를배우고자한다면 마땅히먼저 회암주자(晦菴朱子)을배워야한다고하고 인하여 회헌(晦軒)이라 호(號)하였다.
자(字) 사온(士蘊) 처음휘(諱)는 유(裕)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보(前譜)에 조선조문종(文宗)의어휘(御諱)를피하여 세상에서는처음휘 유(裕)로칭하였으나 서기一九八○년경신대보수보시(修譜時)에 휘를 향(珦)으로환원하였다. 혹이르기를 [자](字)가 사온(士蘊)이라한다.
약력(略歷)
(1243 ~ 1306 ) 처음 휘(諱)는 유(裕)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보(前譜) 에‘문종(文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세상에서는 다시 처음 휘 로 칭하고 있는데 이번 수보(修譜)할 때에 다시 뒤에 지은 휘인 향(珦) 으로 칭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字)가 사온(士蘊)이라 한다. 고려고종(高宗) 계묘년에 출생 하였으며 고려 원종(元宗) 경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배위(配位)는 한남군군부인김씨(漢南郡君夫人金氏)로 부친은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녹연 (綠延)이다. 후배(后配)는 서원군군부인염씨(瑞原郡君夫人廉氏)로 부친은 예빈경태자소보(禮賓卿太子少保)를 지낸 수장(守藏)이며 조고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극모(克모)이고 증조는 국자제주(國子祭酒)와 태사(太師)를 지내고 시호가 효문공(孝文公)인 신약(信若)이며 외조는 지삼사(知三司)인 의령(宜寧) 심문준(沈文濬)인데 부인은 자녀를 생육하지 못하였다. |
인적사항 배위(配位) : 한남군군부인김씨, 서원군군부인염씨 (漢南郡君夫人金氏, 瑞原郡君夫人廉氏) 부모(父母) : 부 (孚) 형제(兄弟) : 형제없음 자녀(子女) : 우기 (于器) [1] |
파(派) : 추밀공파 (樞密公:永儒:1派) |
세거지(世居地) : 순흥 |
묘소(墓所) ; 장단부 대덕산 구정리 자좌(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동 대덕산) 경기도(京畿道) 장단부 남쪽 송림의 폐지된 고을 동쪽 대덕산 북쪽 자좌(子坐)오향(午向)의 산에 있다.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京畿道 長湍郡 津西面 訥木里 口井洞 大德山) 자좌지원(子坐之原) 이다. |
시제 : 음력 10월 1일 |
안자묘 전경과 안자기념관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위패 모신 사당과 감실 신위
문성공 회헌 선조묘 (소재지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동 대덕산) 안자묘 (소재지:황해도 연백군 화성군 송천리)
안향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향교에 다 공자님가 함께 배향되었고 또 모신 사당이나 서원은 아주 많으나 대표적인 것만 올린다. 유명한 소수서원(http://www.sosu.pe.ky)은 직접 확인 하세요. |
도통사는 경북 진양군 왜평면 연산리에 소재하고 현액은 공자 76대손인 연성공 공영이선생의 친필임. 합호서원은 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소재한다 도동묘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소재한다 그외에도 전남 나주시 봉황면 와우리에 소재한 집성사과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소재한 만수사가 있으며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경내에 있는 숭보사가 있다. |
문성공 할아버지 설명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 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 ·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이진(李)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생애를 마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하여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한번은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이 “동국(東國)에도 성묘(聖廟:文廟)가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하고 답하였다 하며, 또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하여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그는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하였다면, 그는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적극적 의미에서 그를 ‘주자학 수용자’라고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조의 주세붕도〈죽계지서 竹溪志序〉에서 “고려의 사신(史臣)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道)라든가 이(理) 따위의 말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말할 수 있어도 그의 학문을 밝혀낼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사》를 읽을 때마다 안문성공전(安文成公傳)에 이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략)…… 역사는 그가 섬학전을 설치하고, 사후 문묘에 배향된 사실만을 들먹이는데, 식견의 비루함이 이와 같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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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1243∼1306)
자(字):사온(士蘊)
호(號):회헌(晦軒)
안향(安珦) 晦軒 文成公(初諱: 裕) 회헌 문성공(처음의 이름: 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안자(安子)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봉안되었다.
안향(安珦) 시대 : 고려시대
국적 : 한국
생몰년 :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정의 : 고려 충렬왕 때의 유학자(儒學者)
생 애
초명은 유(裕)이고,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경북 순흥 출신이며, 안부(安孚)의 아들이다.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하고,
교서랑(校書郞)·감찰어사가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고,
원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유교를 정통이라 여기게 되어 그 책을 베끼는 한편,
공자(孔子)와 주희(朱熹)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문교진흥(文敎振興)과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2현(賢)의 초상과 제기(祭器)·악기(樂器)·경서(經書)·제가서(諸家書) 등을 구해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 유교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사 상
그가 전한 주자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이끌어온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리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心性修養)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聖人)의 도(道)는 일용윤상(日用倫常) 속에서의 효(孝)·충(忠)·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적 덕목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倫理)를 경시하고 의리(義理)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하였는데, 주희는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았으며, 공자의 학문은 바로 주희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주희의 화상을 벽에 걸어 두었으며, 주희의 호(號)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회헌이라 하였다.
저 서
저서에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이 있다.
기 타
그는 죽은 뒤 1318년(충숙왕 5) 왕명에 의하여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또 조선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의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소수서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晦軒先生實紀 (古上 991.1 안92큁)
安珦 (1243∼1306) ; 字 士蘊, 號 晦軒, 本貫 順興.
木板本. -[發行事項不明].
4卷3冊 : 年譜 ; 29.5x20.6cm.
四周雙邊. 半匡 ; 20x15.5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안향에 대한 사적을 모은 책이다. 안향은 1260(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충숙왕 5)년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명종 4)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 문성(文成)이다.
안향의 실기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제1차로 1763(영조 38)년 17세손 극권(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과 세계비지(世系碑誌) 및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판각사업을 도통사(道通祠)에서 하였기 때문에 인자연보에서는 이것을 "도통본실기"라 부르기도 한다. 책머리에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 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안향의 16세손 석근(錫謹)의 발기가 있다. 제2차로 1816(순조 16)년 안재묵(安齋默) 등이 증보하였으며 홍석주(洪奭周)의 서문이 있다.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3차로는 안명열(安明烈) 등이 1883∼1884(고종 20∼21)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며 민영목(閔泳穆)의 서문이 있다.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안자연보에서는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4차로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으로 경남진주의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연산본실기(硯山本實紀)"라고 부른다. 5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이만도(李晩燾)의 서문이 있다. 【上溪光明室文庫】수장본은 "연산본실기"이다.
안향에 대한 연구자료로는 이 실기와 안자연보 등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헌실기》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은 그의 《윤문학사유고(尹文學史遺藁)》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신빙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김병구(金柄九)는 그의 《회헌사상연구》에서 대체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등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이 실기의 자료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序 ; 李鼎輔, 朴聖源, 宋明欽.
重刊序 ; 洪奭周.
三刊序 ; 蘇輝冕, 金尙鉉.
四刊序 ; 李晩燾, 鄭載圭.
目錄.
卷之 1. 遺集 ; 詩.
奏 ; 薦李?李玲等.
文 ; 諭國子諸生.
卷之 2. 附錄 ; 世系源流.
卷之 3. 附錄 ; 年譜, 列傳, 行狀, 眞像.
卷之 4. 附錄 ; 賜祭(英祖朝賜祭墓文, 正祖朝賜祭廟文, 太常朝賜祭墓文, 今上朝賜祭墓文), 祭紹修廟文, 祭墓文, 碑誌(墓誌, 墓碣銘, 神道碑銘, 松京遺基碑, 順興鄕閭碑), 祠院(紹修書院).
卷之 5. 附錄 ; 祠院(臨江書院), 道東廟, 寒泉祠, 門人, 贊述, 補遺錄, 追遠, 報本壇, 祝文, 壇記.
跋 ; 安錫儆, 鄭誾敎, 趙鎬來, 鄭泰鉉, 李商永, 金容禧.
안향(安珦)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晦軒先生實記(奎6882), 安克權(朝鮮)編.
1冊(76張) 圖 肖像 筆寫本 26.4×18.9cm.
序:閔泳穆·金尙鉉.
高麗 忠烈王 때의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鼻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수록한 책으로서 後孫 克權이 1764년(英祖 40) 初刊했으며 享淳 등이 1884년(高宗 21) 3刊했다. 그러나 본 奎章閣本은 筆寫된 것으로서 筆寫경위나 연대 등은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본서는 목록과 序文 등에 의하면 4卷으로 되어 있으나 1冊2卷만이 남아있는 逸本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본관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1260년(元宗 1) 文科에 급제, 1275년(忠烈王11) 尙州判官으로 있으면서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데 힘썼고 版圖 佐郞·殿中侍御史·國子司業 등을 지냈다. 그뒤 右司議·左承旨·征東行省員外郞 등을 거쳐 高麗儒學提擧가 되어 王과 공주를 扈從, 元나라에 들어가 《朱子全書》를 베껴썼고 孔子와 朱子의 畵像을 그려가지고 귀국해서 朱子學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각종 벼슬을 거쳐 1304년(忠烈王 30) 僉議侍郞贊成事, 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文敎의 진흥을 위해 贍學錢이라는 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했고 祭器·樂器와 六經·諸子·史등의 서적을 사들였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朱子學者(東方道學之祖)로 지칭되었다. 朝鮮 中宗때 豊基郡守 周世鵬이 順興의 白雲洞에 安珦의 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드니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책머리에는 目錄에 이어 閔泳穆의 三刊序(1884), 金尙鉉의 續刊序(1883), 蘇輝冕의 序文(1882), 李鼎輔외 序文(1763), 朴聖源의 序文(1764), 宋明欽의 序文(1764), 洪奭周의 序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遺詩 5수(題學宮, 贈太守李蘊古, 題松京甘露寺, 侍從忠宣王如元時感昑, 聯句), 次韻 1수(次晦軒安相國韻·白元恒), 遺文 2편(薦李산李진等奏, 諭國子諸生文), 眞像贊詩 4수(아들 于器, 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眞像贊文 4章(金尙憲, 申翊聖, 15代孫 重觀 등), 年譜(19代孫 在默編), 長湍墓祀記, 英廟朝致祭文, 正廟朝華城聖廟告文成公文, 今上致祭文. 遺文 중 「薦李산李塡等奏」는 密直副使致仕 李산과 典法判書 李진을 經史敎授都監使 교수로 천거한 내용이며「諭國子諸生文」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倫理로서 孝, 忠, 禮, 信, 修己하면 반드시 이룬다고 지적한 후 佛敎는 蔑倫悖義한 夷狄의 敎라고 비난하면서 저간의 好讀佛書의 경향을 개탄하고 諸生들은 新書를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권2}:麗史列傳, 言行記(申翊聖), 神道碑(大司成 金世濂), 墓誌(14代孫 應昌), 順興鄕閣碑 2章(鄭斗卿 등), 松京遺墓碑 2章(應昌, 金應祖), 諸賢記述, 諸賢詩律 6수(崔瀣, 權近, 李滉 등), 紹修院題詠 6수, 長湍墓致祭日感行 3수. 그리고 目錄에 보이는 {권3}과 {권4}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3}:順興白雲洞書院院誌, 建祠時開墓祝文, 奉安眞像跋, 配祀文貞文敬兩公時告文, 與安牧使瑋安承旨玹書, 上方伯沈通源書, 賜額紹修書院誌, 紹修書院記, 與愼齋周副學書, 答黃正字俊良書, 禮判答豊基郡守張文輔書, 禮曹移文, 禮判上安右相玹書, 眞像改修誌, 祭廟院文 8章, 竹溪辭 3章, 道東曲 9章, 配祀周愼齋時告文, 院規, 白雲洞書院田畓目錄, 祭式, 白雲洞文成公廟創建識, 白雲洞秋 享後序, 鳳岑書院長請狀, 書院通太學文, 太學通諭諸校院文, 上樑文, 重修上樑文, 禮曹回啓, 谷城道東祠記, 松都寒泉祠營建時文, 桃洞祠宇營建時告家廟文, 祠壇記, 館僕報來祝文, 長湍墓閣重修上樑文. {권4}:保宥錄, 世系錄, 門人錄, 太學館儒通諭諸道校院文. 序跋. 본서는 朱子學의 傳來와 발전, 계승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계승과 발전 등의 부문을 잘 밝혀줄 수 있는 {권3}과 {권4}가 없어진 것이 아까운 일이다.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晦軒先生實紀 {2} 〈一蓑 고819. an1h〉
安享淳, 1884년(고종21)
4권2책, 목판본, 19. 0 30. 6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安享淳이 1884년에 三刊한 것이다. (安珦에 대해서는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463을 참조할 것). 安珦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1820년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晦軒先生實紀》{1} (고4655-27B-1) 이다. 한편 본 《晦軒先生實紀》는 安享淳의 跋文에 의하면 그가 湖南을 여행하다가 宗親 安相溶을 만나, 이전의 《晦軒先生實紀》가 漏落됨이 많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重刊本을 편찬하기로 하고서, 안향의 文籍 三章과 시문 一首 등을 엮어 三刊한 것이라 한다. 중간본과 비교하여 볼 때, 순서 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이며 대동소이하다. 다만 三刊하면서 添加된 내용은 新增이라고 표시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蘇輝冕가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와 目錄이 있다. 그리고 {卷一} 이하의 내용은 순서 상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와 大同小異하다. 신증된 내용은 白雲洞題 이라 하여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 吳命修 등의 시문과 李滉, 安應昌등이 쓴 謁廟院文이 있다. (이하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3} 〈고4655-27A-1〉
安明烈, 1884년(高宗21)
4권2책, 목판본, 19. 4 29. 7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을 엮은 시문집으로 1884년 安明烈이 三刊한 것이다. 안향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 安克觀의 초간본과 1820년(순조20) 安在默의 중간본, 그리고 1884년 安享淳의 三刊本이 있다. 그러나 重刊本을 다시 간행한 三刊本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서의 跋文을 쓴 安明烈은 三刊本으로 安享淳의 것이 있지만, 누락된 것을 보충키 위해 다시 중간본들을 검토, 三刊本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기의 내용에 첨가된 것은 新增이라 표시하였으며 다른 三刊本의 新增 내용은 작은 글씨로 표시하였고, 본서 간행시 신주된 것은 본문과 같은 크기로 '新增'이라 표시 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目錄과 閔泳穆이 쓴 軒先生實紀三刊序 그리고 金尙鉉, 蘇輝冕등이 쓴 軒先生實紀續刊序가 있고 이하 {卷一}에서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신증된 내용으로 松京遺基碑(新增 安應昌), 次晦軒先生題學宮韻(新增 李滉), 次晦軒先生題松京甘露寺韻(新增 李堅幹), 致祭晦軒先生墓日感作(南胤寬, 吳明修 新增), 祭院廟文(新增)등이 있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4} 〈고 4655-27-1〉
편자 미상---〉安章甫, 연기미상---〉1883년(高宗20)이후
5권2책. 영본, 목판본, 20. 2 30. 5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엮은 그의 후손 安章甫가 19세기 후반 엮은 시문집으로 四刊本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463을 참조할 것). 本書 四刊 序文을 쓴 鄭載圭에 의하면 이미 《晦軒先生實紀》가 누차 간행되었고 또 1883년(고종20)에도 三刊本이 발간되어 嶺南 지역에 널리 퍼졌으나, 여전히 각 판본마다 차이와 漏落이 많자, 안향의 후손 安章甫가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다시 四刊本을 준비, 刊行하게 되었다 한다. 본서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권5}는 附錄으로 다루어진 것 같으나 現傳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마 여러가지 史籍에서 추록하여 增補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으로는 먼저 晦軒先生實紀序(李鼎輔, 朴聖源, 洪奭周)와 蘇輝冕, 金尙鉉 등이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 등 기간의 서문이 있고, 李晩燾, 鄭載圭가 四刊本을 간행하면서 쓴 晦軒先生實紀四刊序가 있다. 이하 目錄, {卷一}부터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와 대동소이하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4世 祖 文成公(휘 珦) 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京畿道 長湍郡 津西面 訥木里 口井洞大德山) 자좌지원(子坐之原) 이다.
장례식(葬禮式)에는 칠관십이도(七管十二徒) 제생(諸生)이 소복(素服)을 하고 노제(路祭)에 참사하였다. 그 위대했던 행적(行蹟)과 참정지공(參政之功)을 높이 찬양해서 *도덕박문(道德博文)이요, 안민입정(安民立政)이란 큰 뜻을 들어 문성(文成)이란 시호 (諡號)를 조정(朝廷)에서 내렸다. 1318년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戊午) 2월에 왕명(王命)으로 문성공 존영(尊影)을 도형(圖形)하여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 또 상향(桑鄕)인 순흥 향교(鄕校)에도 봉안(奉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즉 1319년 충숙왕 6년 기미(己未) 6월에는 문묘종사(文廟從祀) 즉 공자사당(孔子祠堂)인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셨다.
*문묘(文廟)는 중국(中國) 옛 주(周)나라 사성십철(四聖十哲)과 송(宋)나라 육현(六賢)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名賢)만을 엄선해서 섭사(攝祀)하는 사묘(祠廟)이다.*
1542년 즉 이조(李朝)11대 중종(中宗) 37년에는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在任)중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白雲洞)에 서원(書院)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嚆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創建하여 문성공의 진상(眞像)을 봉안(奉安)하였다. 그리고 그후 국내(國內) 여러곳에 서원(書院) 또는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봉향하고 있다. 1977년에는 경기도 의왕시 월암3리 부곡역(富谷驛) 동쪽에 안자묘(安子廟)를 건립(建立)하여 매년 음 9월12일 할아버지 기일(忌日)에 수많은 후예자손(後裔子孫)들과 회헌 성조님을 흠모(欽慕)하는 유림(儒林), 저명인사들이 참사(參祀)해서 기신제(忌辰祭)를 올린다.
부인(夫人)은 한남군군부인 김씨(漢南郡君夫人 金氏)이시고 우사간(右司諫)을 지내신 김록연(金祿延)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부좌(?左)로 모셨다.
후부인은 서원군군부인 염씨(瑞原郡君夫人 廉氏)이시고예빈경 태자보(禮賓卿 太子保)를 지내신 염수장(廉守藏) 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실전(失傳)되었으므로 할아버님 묘 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매년 음10월1일 세향(歲享)을 올려왔는 바 8.15 해방후 국토분단(國土分斷)으로 산소가 북한(北韓)에 소재(所在)하게된 불행(不幸)으로 10월5일 경기도 금촌교하(金村交河) 야동(冶洞) 판서공(判書公=9세 휘 종약(從約) 즉 할아버님의 5대손) 묘역(墓域)에서 망향제(望鄕祭)로 봉향(奉享)하고 있다.
문헌(文獻)
1.<마산의 인물>
2.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안향 1243-1306 사온 회헌 순흥 順興 시문성배향문묘 회헌실기
安珦 1243-1306 士蘊 晦軒 順興 順興 諡文成配享文廟 晦軒實記
안향(安珦) 순흥인
4世 안향(安珦) *구슬 향, 옥 이름 향*
할아버님은 고려(高麗)때 고명(高名)한 성현(聖賢)이시고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로서 동방(東方) 이학지조(理學之祖)라는 존칭(尊稱)과 추앙(推仰)을 받으시는 우리 안문(安門)의 명조(名祖)이시다. 초휘(初諱)는 유(裕) *너그러울 유, 늘어질 유* 이시고 자(字)는 사온(士蘊)이시며 호(號)는 회헌(晦軒),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시다.
1243년 고려(高麗)23대 고종30년 계묘(癸卯) 6월 경상도(慶尙道) 흥녕현 (興寧縣) 죽계(竹溪) 즉 지금의 경북(慶北) 순흥(順興)에서 탄생 (誕生)하셨다. 1260년 원종 원년(元年)에 약관(弱冠) 18세의 홍안 소년(紅顔少年)으로 문과(文科=요즘의행정고시)에 등과(登科=과거 급제)하셨다. 등과직후 교서랑(敎書郞 *당시 비서성 소속=현 청와대 비서)에 보직(補職) 되셨다가 수월후 한림원(翰林院)으로 전보(轉補)되셨다. 1265년 23세 되시던 해에 아드님 우기(于器)를 출생하시고 그해 송경(松京=당시 우리나라 수도였고 지금의 개성(開城)임 태묘리(太廟里)로 이사(移徙)하셨다. 1270년 28세 되시던 해 6월에 삼별초의난(三別抄의 亂)이 일어나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난군들에게 피납(被拉)되었는데 난군두목(亂軍頭目) 배중손이 안한림(安翰林)은 중요 인물(人物)인 즉 방면을 엄금하라는 특명(特命)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궁리 끝에 괴교(拐交)를 써서 탈출하셨다.
이때 원종왕이 의(義)로운 일이라며 찬사를 하셨다고 한다. 1272년 원종 13년 30세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승진(昇進)되셨다. 1275년 충열왕 원년(元年) 할아버님 33세때는 경상도 상주(尙州) 판관(判官)으로 영전(榮轉)하시게 되셨는데 그 당시 그 지방에 무당(巫女) 2인이 요망(妖妄)한 미신(迷信)을 받들고 상주(尙州)를 위시해서 경주(慶州), 합주 등 여러고을을 돌아다니며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신통술(神通術)로 선량한 백성(百姓)들을 현혹(眩惑)시키고 순수(純粹)한 정신문화(精神文化)를 혼란(混亂)케 하므로 특명을 내려서 그들 무녀를 잡아 엄벌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민심(民心)을 수습하여 민생(民生)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정명관(善政名官)이란 찬사와 호평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277년 35세때에는 판도사 좌랑(版圖司 佐郞), 그리고 36세때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 46세에 우사의대부(右司義大夫)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으셨다. 1289년 47세때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왕명을 받아 그해 윤10월 충열왕을 딸아 원(元=지금의 중국) 나라에 들어가셨다. 할아버님은 그 당시 연경(燕京)*원나라의 수도*에 머무르시며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시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을 모사(摹寫)하셔서 소중히 간직해 가지고 귀국(歸國)하셨다. 이때부터 이 주자학(朱子學)을 신중히 강독(講讀) 연구(硏究)하고 널리 포교하는 등 유학(儒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할아버님께서 원나라에 머무르실 때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돌아보시다가 읊으신 시(詩)한수가 있었기에 여기에 수록한다.
[詩]
粉 堞 縱 橫 萬 里 平 하니
居 民 賴 此 得 安 生 이라
當 時 若 數 秦 皇 罪 인즉
只 在 梵 坑 不 在 城 이니라
흰 성벽은 종횡으로 만리나 펼쳐 평탄하니
백성들은 이 성을 의지하여 편안히 살아가네
그 당시 만약 진시황의 죄를 따지려고 한다면
다만 시서를 불살은 죄지 성 쌓은 것이 무슨 죄랴
1294년 52세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동남도 병마사(兵馬使)를 제수(除授)받아 합포(合浦=지금의 마산)에 출진(出鎭)하여 무군휼민(撫軍恤民)하고 주군백성(州郡百姓)의 복지증진(福祉增進)과 민생(民生)안정(安定)에 심혈(心血)을 기우리는 등 헌신노력(獻身努力)하므로써 선정명관(善政名官)이라는 호평과 존경(尊敬)을 받으셨다. 그때 잠시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에 들리셨다가 읊으신 시(詩) 한 수가 있다.
[詩]
一 葉 飛 來 鏡 面 平 하니
輝 空 金 碧 梵 王 城 이라
嶺 頭 蒼 翠 排 嵐 影 하고
石 上 潺 湲 帶 雨 聲 이라
日 暖 庭 花 粧 淺 錦 하고
夜 冷 山 月 送 微 明 이
憂 民 未 得 ? 塗 炭 하니
欲 向 蒲 團 寄 半 生 이라
나무 잎이 날라와 거울같은 물위에 띄이고
황금벽옥으로 찬란하게 번쩍이는 범왕성을 이루었네
고개마루 푸른빛은 남색초록빛을 띄어있고
돌 위에 졸졸 흐르는 물은 비소리를 먹음었구나
따사로운 햇살받아 비단인양 뜰에 꽃은 피고
서늘한 밤 산위에 뜬 달은 희미한 빛을 밝혀준다
백성들을 걱정하나 도탄에서 건저내지 못하니
포단에나 향하여 반평생을 붙여볼가 하노라
1297년에 첨의참리(僉議?理), 세자이보(世子貳保)를 배명(拜命)하셨다. 1298년 56세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겸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등 요직(要職)을 맡으셨다. 1300년 할아버님 58세때에 광정대부(匡正大夫), 찬성사(贊成事)에 오르시고 이에 심가(尋加)해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正一品),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 제수국사(提修國史) 등을 치사(致仕)하셨다. 이와같이 할아버님께서는 평생(平生)을 고려국 조정(朝廷)에 몸담아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두루 역임하시고 국가사회에 공헌하신 위대한 성현(聖賢)이시다. 따라서 할아버님은 백왕가범(百王可範)의 명현(名賢)으로 존칭을 받으시는 위대한 어른이시다.
1301년 조정(朝廷)의 모든 벼슬을 사임 하신후에 사택(私宅)마저 국가(國家)에 헌납(獻納)하시고 개성(開城) 서부 양온동(良?洞)으로 이사를 하셨다. 1303년 61세의 고령에도 후진(後進)교육(敎育)과 인재(人才)양성(養成)에 힘쓰셨는바 특히 양현고(養賢庫)라는 교육금고(敎育金庫)를 만들어서 백관(百官= 현 모든공무원)들로부터 은포(銀布=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은과 주단포목 등등)를 각출(各出)케 하여 교육자금을 마련해서 당초 계획된 교육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익년(翌年)에는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만들어 흥학설교(興學設敎)에 여생(餘生)을 바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1306년 병오(丙午) 음(陰) 9월 12일에 향수(享壽) 64세로 애섭하게 서거(逝去)하셨다. 이 때 충열왕(忠烈王)이 장지(葬地) 및 위토(爲土)를 특사(特賜)하셨으니 그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장지(葬地)는 장단부 송림현 구정리(長湍府 松林縣 口井里 =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소재 대덕산(大德山) 자좌오향지원(子坐午向之原)이다.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안향(安珦)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성균관 대성전 - 조선조 문묘 -
成均館 大成殿 - 朝鮮朝 文廟 -
文廟란 중국 唐나라에서 739년에 文宣王으로 追尊된 孔子를 모신 祠堂을 말한 것이다. 儒敎가 세상을 다스리는 基本 理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漢나라 때부터 大聖至聖文宣王 즉, 孔子에 대한 祭禮를 行해왔으며, 朱子가 儒敎를 集大成한 宋나라 대에 이르러 體系的으로 孔子를 비롯한 聖人들의 位牌를 모시고 享禮하는 制度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朝鮮朝에 들어 儒敎가 나라의 統治思想이 되자 太朝 6년인 1397년에 明倫堂, 文廟, 養賢庫 등을 두고 儒敎의 聖賢들을 配享하였다. 그러나 文廟가 創建된지 얼마 되지 않는 太宗 2년 1402년 火災로 消失되어 太宗 7년 1407년에 重建되었다, 그 후 中宗 1년 1506년에 補修하였으나 壬辰倭亂으로 다시 損失된 것을 宣祖 34년 1601년부터 39년 1606년까지 年次 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文廟는 中央에는 國學으로 成均館을 두고, 地方에는 鄕校라 하여 全國 234個所를 設置하여, 中央과 地方의 敎育體系를 確立하고 敎育과 敎化의 求心點으로 그 役割을 다 하게 하였다. 거기에는 孔子를 비롯한 5聖과 孔門 10哲, 宋朝 6賢을 祭享한 大成殿과 우리나라의 東國 18賢과 孔子의 69弟子를 包含한 中國의 歷代先賢 94位를 합한 112位의 位牌를 東西로 從享한 東?와 西?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북쪽에는 學舍인 明倫堂이 있으며 科擧로 嚴選한 200명의 生進들이 入學 居處하는 東西齋가 따라있다. 學舍 明倫堂에서는 이들 儒生에게 四書五經의 九齋를 講讀하여 人材를 養成하였다.
1910년 日帝는 國權을 强倂하고 成均館과 鄕校의 財産을 分離하여 敎育을 一切 中止하여 國立大學의 機能과 民族敎育의 脈을 끊었다. 그 대신 1924년 植民地敎育을 위하여 京城帝國大學을 設立하니 당시 全國儒林들이 主權回復運動으로 義兵을 일으키고, 成均館을 敎育機關으로서의 機能回復을 선도하자 그 懷柔策으로 明倫專門學院을 設立하고서 日帝의 變質된 敎育을 强要하다가 1943년 閉校措置 하였다.
1945년 8.15 光復과 더불어 初代 成均館長으로 就任한 心山 金昌淑翁이 1946년 9월 25일 成均館大學을 設立하고 이어서 綜合大學校로 昇格시켜 初代 學長과 總長을 歷任하면서 成均館을 國家가 아닌 儒林이 本來의 敎育機關으로 復元하고 1949년 全國儒林大會의 決議로서 東西?에 從享된 東國 十八賢은 大成殿안으로 奉安하고 그 외 中國 九十四賢의 位牌는 모시지 않기로 하여 ?埋하였다.
지금의 文廟 大成殿은 文宣王(孔子)을 爲始한 五聖과 孔門 十哲, 東國 十八賢, 宋朝 六賢, 등 三十九聖賢의 位牌가 主從으로 奉安되어 있다. 地方의 鄕校에는 처음부터 牧使. 府使. 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은 中設位라 하여 5聖. 孔門 10哲. 東國 18賢. 宋朝 6賢등 39位를 奉安 하였으며, 縣令. 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은 小設位로 5聖과 東國 18賢. 宋朝 4賢(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등 27位를 奉安하였다.
成均館과 全國의 鄕校에서는 每年 陰曆 二월과 八월의 上丁日(처음으로 丁자가 드는 날)이 되면 文廟에 享祀 드리는 儀式인 釋奠大祭를, 每月 朔望에 焚香禮를 奉行하며 儒敎精神에 立脚한 道義闡明과 倫理扶植을 實踐하기 위한 敎化事業을 爲始하여 國家的. 民族的. 傳統文化的. 社會的. 事業을 竝行하고 있다.
2002년 8월 逸山 記.
* 文廟 大成殿 祭享位 *
五聖. 孔門十哲. 東國十八賢. 宋朝六賢. 등 三十九位
# 五聖
主擘 : 大成至聖文宣王 <孔子>
配享 : ?國復聖公顔子 <顔回> ?國宗聖公曾子 <曾參>
沂國逑聖公子思 <孔伋> 鄒國亞聖公孟子 <孟軻>
# 孔門 十哲
費公 閔損 <子騫> ?公 ?耕 <伯牛>
薛公 ?雍 <仲弓> 齊公 宰豫 <子我>
黎公 端木賜 <子貢> 徐公 ?求 <子有>
衛公 仲由 <子路> 吳公 言偃 <子游>
魏公 卜商 <子夏> 穎川侯 ?孫師 <子張>
<元來 孔門十哲의 顔回가 五聖으로 올려 配享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孫師(子張)를 追加하였다>
# 東國十八賢
弘儒侯 薛聰 <氷月齋> 文昌侯 崔致遠 <孤雲>
文成公 安珦 <晦軒> 文忠公 鄭夢周 <圃隱>
文敬公 金宏弼 <寒暄堂> 文獻公 鄭汝昌 <一두>
文正公 趙光祖 <靜庵> 文元公 李彦迪 <晦齋>
文純公 李滉 <退溪> 文正公 金麟厚 <河西>
文成公 李珥 <栗谷> 文簡公 成渾 <牛溪>
文元公 金長生 <沙溪> 文烈公 趙憲 <重峰>
文敬公 金集 <愼獨齋> 文正公 宋時烈 <尤庵>
文正公 宋浚吉 <同春> 文純公 朴世采 <玄石>
# 宋朝六賢
道國公 周敦? <濂溪> 豫國公 程顥 <明道>
洛國公 程? <伊川> 新安伯 邵壅 <康節>
?公 張載 <橫渠> 徽國公 朱憙 <晦菴>
以上 39位 祭享.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중종계묘건 명종경술이어필액 서원현액시차(中宗癸卯建 明宗庚戌以御筆額 書院懸額始此).
제향. 안 유(초명향 호회헌 고려 태학사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안 축(호근재 첨의찬성사 시문정 본순흥). 안 보(축제 정당문학 시문경 본순흥). 주세붕(호신재 호참 중추부동지사 시문민 본상주).
祭享. 安 裕(初名珦 號晦軒 高麗 太學士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安 軸(號謹齋 僉議贊成事 諡文貞 本順興). 安 輔(軸弟 政堂文學 諡文敬 本順興). 周世鵬(號愼齋 戶參 中樞府同知事 諡文愍 本尙州).
# 전라도(全羅道) 곡성(谷城)
*매헌영당(梅軒影堂)
숙종정사건(肅宗丁巳建).
제향. 안 유(호매헌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祭享. 安 裕(號梅軒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 경기도(京畿道) 장단(長端)
*임강서원(臨江書院)
효종경인건 숙종갑술액(孝宗庚寅建 肅宗甲戌額).
제향. 안 향(초명유 호회헌 삼사좌사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이 색(호목은 고려시중 한산백 시문정 본한산). 김안국(호모재 예판 대제학 시문경 인종묘배향 본의성). 김정국(호사재 안국제 예참 시문목 본의성).
祭享. 安 珦(初名裕 號晦軒 三司左使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李 穡(號牧隱 高麗侍中 韓山伯 諡文靖 本韓山). 金安國(號慕齋 禮判 大提學 諡文敬 仁宗廟配享 本義城). 金正國(號思齋 安國弟 禮參 諡文穆 本義城).
안유(安裕)
晦軒 文成公 諱 珦 (初諱:裕) 회헌 문성공 휘 향 (처음의 이름: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공(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 봉안되었다.
安子年譜 〈고1360-49〉
편자미상, 1917년
2권1책, 목, 29. 5 20Cm
이 책은 안향의 연보이다. {권1}은 고려 고종 30년(1243)부터 충렬왕 32년 丙午(1306)까지이고, {권2}는 忠淑왕 5년 戊午부터 1917년까지다. 趙鎬來가 쓴 〈발문〉을 보면 1910년 진주에 있는 학자들이, 硯山에 孔子祠를 만들고 주자와 안향을 모시어, 주자와 안향의 《연보》를 내기로 하였다고 한다. 鄭泰鉉의 〈발문〉에는 안향 연보의 원본과 《실기》(《晦軒先生實記》, 규6882, 규장각해제 사부3 563)를 합하여 《별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대 손이 在默이 편찬한 연보의 원본은 《실기》 {권1}에 있지만 상당히 소략하고 탈자가 있어 새로 만들은 것이다. 체제는 공자가 지은 《춘추》의 편년에 따라, 연차적으로 기술하고, 《주자연보》에 따라 상권은 안향의 연보를 적고, 하권은 죽은 다음에 그에 대한 기록을 적은 것이다. 《朱子年譜別本》 古 921.91-J868j〉과 함께 간행되었다 (조남호)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조선환여승람(창원) ■先正
○安裕: 초명은 珦이나, 國諱를 피하여 裕로 개명하였다. 호는 晦軒이니 興州인이다. 고려 元宗조에 文科에 급제하고, 학교의 쇄함을 걱정하여 瞻學錢을 드리게 하였고, 중국에 들어가 70子의 초상을 그리고 祭器와 樂器와 六經과 諸子史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시호는 文成公이다. 忠肅王조에 문묘에 배향되니, 일찍이 合浦를 진합하여 군사를 위무하고 백성을 구제하니 州郡이 편안하였다.
조선환여승람(창원) ■淸白
○安裕: 先正篇에 보인다.
1. 안유(安裕)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명환 고려 안유(安裕) : 유수(留守)로 있었다.
2. 제목 해동 18현
1. 설총(薛 聰) 본관 경주(慶州) 호 우당(雨堂)
신라고승 元曉의 자로 神文王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2. 최치원(崔致遠)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창후(文昌侯)
호 고운(孤雲) 신라때 당나라 수학 翰林學士
3. 안유(安 裕) 본관 순흥(順興) 시호 문성(文成)
호 회헌(晦軒) 고려 忠烈王때 修文館太學士
4. 정몽주(鄭夢周) 본관 연일(延日) 시호 문충(文忠)
호 포은(圃隱) 고려 恭愍王때 門下侍中
5. 김굉필(金宏弼) 본관 서흥(瑞興) 시호 문경(文敬)
호 한헌당(寒暄堂) 刑曹佐郞, 조선중종때 右議政에 추증
6. 정여창(鄭汝昌) 본관 하동(河東) 시호 문헌(文獻)
호 일두(一두) 縣監, 右議政에 追贈
7. 조광조(趙光祖) 본관 한양(漢陽) 시호 문정(文正)
호 정암(靜菴) 大司憲, 領議政에 追贈
8. 이언적(李彦迪) 본관 여주(驪州) 시호 문원(文元)
호 회재(晦齋) 左贊成, 領議政에 追贈
9 이황(李 滉)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호 퇴계(退溪) 大提學, 領議政에 追贈
10. 김인후(金麟厚) 본관 울산(蔚山) 시호 문정(文正)
호 하서(河西) 弘文館 校理, 領議政에 追贈
11. 이이(李 珥)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성(文成)
호 율곡(栗谷)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2. 성혼(成 渾) 본관 창녕(昌寧) 시호 문간(文簡)
호 우계(牛溪) 左參贊, 領議政에 追贈
13. 김장생(金長生)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원(文元)
호 사계(沙溪) 刑曹參判, 領議政에 追贈
14. 조헌(趙 憲) 본관 백천(白川) 시호 문경(文敬)
호 중봉(重峯) 僉正, 領議政에 追贈
15. 김집(金 集)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경(文敬)
호 신독재(愼獨齋) 判中樞府事, 領議政에 追贈
16. 송시열(宋時烈)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우암(尤菴) 左義政, 領議政에 追贈
17. 송준길(宋浚吉)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동춘당(同春堂)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8. 박세채(朴世采) 본관 반남(潘南) 시호 문순(文純)
호 현석(玄石) 左義政
안유(安裕)-안향(安珦)
4세조(世祖) 휘 안향(安珦)-고려사절요 편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병신 22년(1296), 원 원정 2년
○ 김지숙(金之淑)을 지도첨의사사로, 안향(安珦)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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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정유 23년(1297), 원 대덕(大德) 원년
○ 김지숙(金之淑)을 첨의참리 세자이사(僉議叅理世子貳師)로,
안향(安珦)을 첨의참리 세자이보(僉議叅理世子貳保)로,
최유엄(崔有渰)을 판밀직사사로, 이혼(李混)을 지밀직사사로 삼았는데, 모두 세자원빈(世子元賓)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윤보(尹珤)를 밀직학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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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관제를 고치고, 교하기를, “선왕께서 벼슬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놓으신 것은 모두가 인재를 얻어 모든 정사를 같이 다스리고자 해서였다. 과인이 어린 나이에 상국에 들어가 모시면서 직접 선제(先帝 세조황제)의 교훈을 받았고 상국의 제도를 눈으로 보아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외람되이 중한 부탁을 받게 되어 모든 현실의 폐단을 한결같이 모두 덜고 없앴으나, 다만 재집(宰執 재상)의 수효가 옛 제도에 배나 되어 조정의 논의가 있을 적마다 다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매사가 지체되고 있으니, 마땅히 수를 줄여야겠다. 또 지난번에 상국의 제도를 피하기 위하여 백관의 명칭을 고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혹 같은 데도 고치지 않은 것이 있고, 같지 않은 데도 고친 것이 있으며, 고친 이름 또한 옛 제도를 본받지 않아 마땅하지 않은 것도 있다. 과인이 즉위한 처음 해에 갑자기 과거의 제도를 고치면 물의를 일으킬까 두렵다. 그러나 수시로 개혁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던 바이다. 이제 역대의 관직을 상고하여 상국의 관직 명칭에 괸계되지 않는 것은 이를 바꾸어 놓고, 혹 긴급하지 않은 관사는 폐지해서 한 관사로 합하면 거의 관원은 줄고 사무는 쉽게 처리될 것이다.”하였다. 그리고는 조인규(趙仁規)를 사도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 참지광정원사로, 홍규(洪奎)를 수사도 영경령궁사(守司徒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 우복야 참지광정원사로, 인후(印侯)를 광정사 참지기무(光政使參知機務)로, 김혼(金琿)을 검교 수사도 영봉상시사(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로, 차신(車信)ㆍ이지저(李之氐)를 모두 검교 사도 자정원사로, 김지숙(金之淑)을 동지광정원사 참지기무로,
안향(安珦)을 참지기무 행동경유수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 겸 권참지기무(光政副使兼權參知機務)로, 최유엄(崔有渰)을 검교 사공 사헌대부(檢校司空司憲大夫)로, 이혼(李混)을 검교 사공 서경유수(檢校司空西京留守)로, 정해(鄭瑎)를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최충소(崔冲紹)를 동지자정원사 행중경유수(同知資政院事行中京留守)로, 박의(朴義)를 동지자정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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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기해 25년(1299), 원 대덕 3년
○ 중찬 송분(宋玢)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안향(安珦)을 수국사로, 민지(閔漬)를 동수국사로 삼고, 첨의 차신(車信)ㆍ최유엄(崔有渰)과 밀직 유비(柳庇)ㆍ
오인영(吳仁永)ㆍ유복화(劉福和)와 복야 홍선(洪詵)을 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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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계묘 29년(1303), 원 대덕 7년
○ 한희유를 도첨의 우중찬 판전리사사(都僉議右中贊判典理司事)로, 김혼(金琿)을 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侍郞贊成事判軍簿司事)로,
안향(安珦)을 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로, 최유엄(崔有渰)ㆍ유비(柳庇)를 모두 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참리(參理)로, 민지(閔漬)를 판밀직사사로, 정해(鄭瑎)를 밀직사사로, 이혼(李混)ㆍ권영(權永)을 모두 지밀직사사로, 김태현(金台鉉)ㆍ김심(金深)을 동지밀직사사로, 김연수(金延壽)ㆍ김문연(金文衍)을 밀직사 부사로, 곽응(郭膺)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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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과거에 찬성사 안향(安珦)이 학교 교육이 크게 무너지고 유학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좇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오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 칠관(七館) : 고려 때 국학에 설치한 일곱 개의 분과. 즉 《주역》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이택관(麗澤館) , 《상서》의 대빙관(待聘館), 《시경》의 경덕관(經德館), 《주례》의 구인관(求仁館), 《대례(戴禮 : 禮記)》의 복응관(服膺館), 《춘추》의 양정관(養正館), 병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예관(講藝館)을 말하는데, 칠재(七齋)라고도 한다.
▶ 십이도(十二徒) : 개인의 교육 기관인 12개소의 문도(門徒). 즉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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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 5(忠烈王五)
병오 32년(1306), 원 대덕 10년
○ 9월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안향(安珦)이 졸하였다. 안향은 흥주(興州 경북 순흥(順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장중(莊重)하며 조용하고 자세하여, 재상으로 있을 때에 계획을 잘 세우고 결단을 잘 내리니, 동료들은 다만 순순히 좇고 삼갈 뿐이며,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항상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儒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하고 생각하였다. 또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다. 김이(金怡)ㆍ백원항(白元恒)을 처음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하였고,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는 모두 젊을 때 유명하였는데 불러서 시를 짓게 하여 보고 말하기를, “제현은 반드시 귀하게 되고 또 장수할 것이나, 이(異)는 수명이 짧을 것이다."하더니, 뒤에 모두 맞았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晦庵先生)의 화상을 걸어 놓고 경모의 뜻을 극진히 하더니 마침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문장이 맑고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장사 때에는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차림으로 길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忠烈王[五]
[丙午三十二年 元 大德十年]
。○九月,僉議中贊致仕安珦,卒,珦,興州人,爲人莊重安詳,在相府,能謀善斷,同列,但順承惟謹,不敢爭,
常以養育人材,興復斯文,爲己任,且有鑒識初見金怡,白元恒,曰後必貴,又李齊賢,李異,少俱有名,召令賦詩,
觀之曰,齊賢,必貴且壽,異則不年矣,後皆驗,晩年,常掛晦菴先生眞,以致景慕之意,遂號晦軒,其文章亦淸勁可觀,及葬,七館十二徒,皆素服祭於路,諡文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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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기미 6년, 원 연우 6년
○ 문성공 안향(安珦)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세간에서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향이 비록 국자감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인재를 양성한 공적이 있으나 어찌 이것을 가지고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향의 문생(門生) 총랑(摠郞) 신천(辛蕆)이 극력 주청했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참고로 이글은 순흥안가 14대손 부사 안응창(安應昌)의 글이며 본 출처는 본 가문의 족보인 順興安氏世譜입니다.(순흥안씨세보 원문574~583) 墓地(묘지) 14대손 府使(부사) 應昌(응창) 공의 성(性)은 안(安)이요. 처음 휘는 유(有)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후의 족보와 역사책에 모두 표덕(表德,자(字)를 가리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 조선(朝鮮)조에 들어와 현종(顯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처음 이름으로 쓰고 있으며,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칭하였다. 선계는 경상도(慶尙道) 순흥부(順興府)(현재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에서 나왔다. 증조(曾祖)는 자미(子美)인데 보승별장(保勝別將)으로 신호위 상호군(神號衛 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조고(祖考)는 영유(永儒)인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부(孚)인데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치사(致仕)하였고 수태사문하시중(守太士門下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우성윤(禹成允)의 따님이다. 원종(元宗) 초년(初年), 공은 18세의 나이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고 교서랑(敎書郞)에 보직(補職) 되었으며,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옮겼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공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적들은 평소 공의 명망을 중히 여겨 그 부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안한림을 놓아주는 자는 처벌하겠다’ 하였다. 공(公)이 계책으로 빠져 나오자 왕은 의롭게 여기고 가상히 여겼다. 사명을 받들고 서도로 부임하여서는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칭찬을 받고, 불려와 내시원으로 들어오자, 내시원(內侍院)의 오래된 폐단을 아뢰어 제거 하였으며. 얼마 후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옮겼다. 충렬왕 원년(1274)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이 때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요상한 귀신을 받들면서 사람들을 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고을 사람들도 모두 달려와 귀신을 받들었으며 여러 고을들의 수령들도 모두 이를 따랐다. 무당이 상주에 이르자 공은 곤장을 치고 형틀을 씌웠는데, 무당은 귀신을 빙자하여 화를 내리겠다고 겁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는데 그 무당은 요망함을 끝내 부리지 못하였다. 상주에 부임한지 3년 만에 안렴사(按簾使)가 공의 훌륭한 정사를 칭찬하여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불려갔다. 얼마 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하였으며, 우사의(右司議)로 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任命)되고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공신(功臣)의 칭호(稱號)에 참여되었다. 공신을 축하하는 잔치에 공이 시를 지어 축하하자, 왕은 가상히 여겨 백미 50석을 하사하였다. 뒤에 합포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와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휼하여 고을이 편안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판공조사첨의(判工曹事僉意)에 이르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參知機務) 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참리(參里)가 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한 다음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公)이 수행(隨行)하였다. 하루는 원(元)나라 황제가 급히 왕을 불렀다. 충선왕이 두려워하자 승상이 나와서 말하기를 ‘수행한 신하 중에 가장 높은 자가 들어와 대답하라’ 하였다. 공이 들어가자 승상은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를 ‘네 왕은 어찌하여 공주(公主)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 하고 꾸짖었다. 공이 대답하기를“규중 안의 일은 밖에 있는 신하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또한 오늘에 물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승상이 돌아가서 황제에게 그대로 아뢰자 황제는 “이 사람은 대체를 아는 자라 할 것이니, 어찌 먼 지방 사람이라 하여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뒤에 찬성사(贊成士)에 임명(任命)되었으며, 얼마 후 도첨의 중찬(中贊)으로 승진되었다. 공은 학교가 날로 황폐해짐을 우려하여, ‘양부의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재상(宰相)의 직분은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먼저인데 지금 양현고(養賢庫)의 재원이 고갈되어 선비들을 기를 수가 없으니, 조정은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각기 차등을 두어 은과 폐백을 내도록 한다음, 이것을 양현고에 소속시켜 학전을 풍족히 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양부에서는 이를 쾌히 응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왕도 또한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내어 보조하였다. 밀직(密直)인 고세(高世)는 자신이 무인(武人)이라 하여 돈을 내지 않으려 하였다. 공은 마침내 탄식하여 이르기를 “부자(夫子:공자(孔子))의 도는 만세의 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아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니, 이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이니 어찌 돈을 내어야지 유학의 생도들을 기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하였다. 고세는 몹시 부끄러워하여 돈을 내었다. 공은 또 남은 재정을 박사(博士)인 김문정(金文鼎)등에게 맡겨, 중국에 보내어 선성(先聖:공자(孔子))과 72제자들의 화상을 구입하고, 아울러 제기와 악기, 육경과 여러 자서와 사서들을 구입하여 오게 하였으며 또 밀직부사(密直副使)인 이산과 전법판서(典法判書)인 이진을 경사교수(經史敎授) 도감사(都監使)로 추천하였다. 이에 금내(禁內)의 학관(學館)과 내시부(內侍府)와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과 칠관(七館), 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앞에 경서(經書)를 끼고 수업하러 오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러 생도 중에 선배에게 예우하지 않는 자가 있자, 공이 노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그 생도가 자신의 죄를 사과하자, 공은 경계하기를‘나는 여러 생도들을 내 자손처럼 보고 있는데 ,여러 생도들은 어찌하여 이 늙은 사람의 뜻을 체념하지 않는가?’ 하고는 인하여 그를 데리고 집에 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에 생도들은 서로 말하기를 ’공이 이처럼 선비들을 정성으로 대하시니 우리들이 만일 교화되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하고는 공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자고 서로 말하였다. 이후로부터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었다. 삼사좌사(三司左使)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로 재직해 있을 때 에 왕은 공에게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고 별세하니 바로 충렬왕 32년(1306)병오 9월 12일 갑신일로 향년은 64세였다. 왕이 친히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내리니 도덕에 대한 문견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정사를 확립한 것을 성(成)이라 한다. 공을 장례할 때에 십이도의 여러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다. 충렬왕은 공의 화상을 그려 문묘의 가운데에 모시도록 명하였으며 충숙왕 6년(1319) 기미에 문묘의 동무(東廡)에 배향하였다. 공의 인품이 장엄하고 후중하며 편안하고 자상하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상부에 있을 때는 계책을 잘 세우고일을 결단하니 동료들이 모두 사랑하고 사모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다투는 말을 내지 못하였다. 왕씨의 세대에는 기자의 교화가 멀어져 학교가 무너지고 폐지되었으며, 온 세상이 무식하여 다만 불교만을 숭상할 줄 알고 다시는 우리 유도가 있음을 몰랐는데 공은 홀로 혼탁할 때에 도학을 제창하여, 항상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공은 유학이 쇠함을 개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곳곳마다 향 사르고 등달아 부처에 기도하네. 香燈處處皆祈佛 (향등처처개기불) 집집마다 퉁소 불고 피리 불며 신에게 제사하네. 簫管家家盡祀神 (소관가가진사신) 홀로 몇 칸 되는 부자(스승, 즉 공자)의 사당에는, 獨有數間夫子廟 (독유수간부자묘) 봄풀만 뜰에 가득한데 찾아오는 이 없네. 滿庭春草寂無人 (만정춘초적무인) 공(公)은 학문을 힘쓰고 도(道)를 구하며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의 끊긴 도통을 이어 동방 성리학(性理學)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매양 후학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을 우선하여 고명정대(高明正大)한 경지에 이끌어서 긴긴밤에 밝은 촛불이 되어 나쁜 풍속을 크게 변화 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인재가 많이 배출되고 학교가 크게 부흥되었으니 이는 공을 힘입은 것이다. 공은 비록 정사를 그만 두고 집에 있었으나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는 일찍이 마음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빈객(賓客)들을 좋아하고 남에게 물건 주기를 좋아하였으며 문장이 말고 꿋꿋하였으며 또 훌륭한 식견이 있었다. 김이와 백원항이 영달하지 못했을 때 공이 이들을 보고 말씀하기를 이 사람들은 후일에 반듯이 귀히 되고 드러나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제현과 이이는 동년생으로 당시는 모두 명망(名望)이 있었는데 공은 이들로 시를 짓게 하여 보고는 말씀하기를 이제현은 반듯이 귀히 되고 장수를 누릴 것이나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 과연 모두 적중하였다. 말년에는 항상 회암 주선생(晦菴朱先生)의 화상을 걸어 놓아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고는, 마침내 회헌(晦軒)이라 호(呼)하였다. 일찍이 선비가 타는 거문고 하나를 집에 두고는 가르칠만한 선비를 만나면 이것을 타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덕망이 더욱 높아지고 명성이 널리 전파 되었다. 그리하여 원(元)나라 황제(皇帝)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원외랑(員外郞)을 제수하였으며, 얼마 후 낭중(郎中)을 가하고 해동(海東)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임명(任命)하여 표창(表彰)하였다. 공은 또다시 토지(土地)와 노비(奴婢)를 희사하여 태학(太學)의 경비를 보태어 생도들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생도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때마다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하고 있는바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공정대왕(恭定大王)은 공이 사문(斯文)에 공로(功勞)가 있음을 추념하여, 특별히 공의 자손들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기록하여 등용(登用)하도록 명하고 비록 서손이라도 또한 군역에 소속시키지 말아서 훌륭한 할아버지의 덕망을 높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태학의 여종들도 또한 궁중(宮中)으로 뽑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命)하였으니, 이는 공이 학교를 부흥(復興)하려는 뜻을 잊지 않아서 다른 부역에 옮겨 사역시키지 않고자 해서였다. 성종 임자년(1492)에는 공의 묘소(墓所)를 개수하고 나무꾼과 목동들을 금지하도록 명하였으며 중종 때 신재 주세붕은 풍기군수(風箕郡守)로 부임한 다음 가정 계묘년(1543)에 공이 평소 강학(講學)하던 곳에 서원을 창건하고 봄과 가을로 제사를 올렸으니 실로 우리나라에서 서원이 처음 생긴 시초였다. 가정 기유년에(1549)에 퇴계 이황선생이 군(郡)의 일을 맡게 되자, 학칙을 다시 정하고 도백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아뢰게 하자, 명종(明宗)께서는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현판을 내리고 인하여 태학사(太學士)인 낙봉 신광한에게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또 토지와 노비 경적을 하사하시어 공을 숭배하는 뜻을 표하였으니 여러 성조에서 공을 표창하고 영화롭게 한 것이 훌륭하다. 신재 주세붕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문성(文成)의 올바른 학문이 삼한의 누추한 학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하여 240여년이 흘렀는데 천리가 밝아지고 문교(文敎)가 부흥 되었으며 고려 말기의 익제 이제현, 포은 정몽주등의 여러 선현들도 모두 선생의 여파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先生)같은 분은 참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원조(元祖)라 이를 것이다 우리 도학이 없어지지 않음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하였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장단부 남쪽 송림의 폐지된 고을 동쪽 대덕산 북쪽 자좌(子坐)오향(午向)의 산에 있다. 위토(位土)가 묘소 아래에 많으며 관청(官廳)에서 세금을 면제하고 부역을 면제하여, 해마다 제향을 올려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의 선부인은 한남김씨(漢南金氏)로 우사간(右司諫) 김록연의 따님이고, 후부인은 서원염씨(瑞原廉氏)로 예빈경 염수장의 따님이다. 김씨(氏)는 모두 1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우기(于器)로 찬성사(贊成士)를 지내고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호를 죽옥선생(竹屋先生)이라 한다. 장녀(長女)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문욱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판전객시사(判典客侍事) 허수와, 통문서(通文署) 녹사(錄事)박제, 직사관(直使館) 한수연, <◆찬성사(贊成士)를 지낸 정경공 김원진에게 출가>하였다. 후배(後配) 염씨(廉氏)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광산김씨 정경공 김원진--->15세 김사원(金士元)(양간공파) (1257∼1319) 63歲. 고려 후기의 문신. 初名은 구(?), 또는 원구(元具). 아버지는 양간공(良簡公) 연(璉)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의 딸이다. 16세 김진(金진)(양간공파) (1292∼ ?)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적재(迪齋) 아버지는 정경공(貞景公) 사원(士元)이며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딸이다. 순평군은 문하시랑 철원 최충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인 목(牧)을 낳았는 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숙공(文叔公)이며 호가 겸제이다. 뒤에 이씨에게 장가들어 1남인 신(愼)을 낳았는 바, 노부판관(蓾簿判官)을 지냈다. 문숙공은 정승(政丞)인 광주(光州) 김태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원숭(元崇)을 낳았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성군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이다. 문혜공은 평리(評理)인 원주(原州) 원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인 원을 낳았는데 고려 때 형조전서를 역임하였으며 조선조가 개국한 다음 여러 차례 관직(官職)을 제수하였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는 바 시호를 경질공(景質公)이라 한다. 경질공 이후 여러 백년(百年) 동안 여러 자손(子孫)들은 대관(大官)이 대대로 이어져 경대부와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라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와 거의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특별히 외손이 번창하여 대대로 국모를 배출하고 성군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금지 옥엽(玉葉)같은 후손들이 매우 많으니 이 어찌 공이 선을 많이 쌓은 음덕으로서 그 뿌리가 튼튼하고 근원이 깊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신도(神道)에 옛날 표석(表石)이 있었는데 지금은 350년이 지나 이지러지고 망가져 읽기가 어려우니 우리 선조(先祖)의 체백(體魄)이 모셔진 곳이 그대로 매몰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깊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우리 부자는 힘의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기묘년에 종인(宗人)들과 재물을 모으고 돌을 사서 큰 비석을 세우고 또한 묘소에도 지문(誌文)이 없을 수 없음으로 다시 묘지(墓誌)를 구워 만들어서 무덤 속에 넣어 유구히 전하도록 하며 후일의 재난을 방지하려 하는 바이다. <숭정(崇禎)9년(1636) 병자년 겨울> 묘갈명(墓碣銘) 병서(幷書) 후손(後孫) 덕은 송병화 회헌(晦軒)선생은 원나라 초기, 고려 말기의 사람이시다. 그의 묘소는 장단의 대덕산 좌자의 산에 있으니 이것은 실로 충렬왕이 친히 하사한 지역이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여러 왕조(王祖)에서 혹은 봉하고 혹은 제사(祭祀)하여 지금은 600여년에 이르고 있다. 중략 이에 유학 후손(後孫) 덕은 송병화는 감히 서문을 짓고 명한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중략 선생은 계묘년(1243)에 흥주의 학교에 있는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후중하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차츰 성장하자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였으며 문장이 또한 일찍이 이루어졌다. 경신년(1260)에 급제(及第)하였는데 시관(試官) 유경이 시험지에 쓴 글을 보고 감탄하기를 후일에 반듯이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교서랑에 보직 되었다가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으며 을해년(1275)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있다가 상주(尙州)로 부임하였다. 중략 기축년(1289)충선왕을 따라 원에 갔었는데 이 때 주자의 책이 새로 연경에 유행하였다. 선생은 처음으로 이 책을 얻어 보고는 마음을 잠기고 돈독히 좋아하여 공, 맹의 정맥임을 알고는 손수 그 책을 기록하였으며 또 주자의 화상을 직접 그려가지고 돌아왔다. 갑오년(1294)에 동지 밀직사(密直司)에 있다가 동남도(東南都) 병마사(兵馬使)에 제수되어 합포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을 어루만지고 백성들을 보살펴 고을이 평안하였다. 정유년에 첨의(僉議)참리(參里)와 세자이보(世子李保)로 있었다. 선생은 유학(儒學)으로 내,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별히 이단을 배척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학궁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붙였는데 는 탄식을 하였다. 선생은 이에 집 뒤에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봉안한 다음 아침, 저녁으로 뵙고 절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고는 인하여 회헌(晦軒)이라 호하였다. 무술년(1298)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었는데 원나라 학관(學官:교수)과 성리학(性理學)을 변론하자 원나라 학관들은 공경하고 감탄하기를 ‘이는 동방의 회암(晦菴)이다’ 하였으니 선생이 중국 사람들에게 인정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에 선생은 시를 짓기를 이 인생에서 가장 무한한 애통은 백년 동안 천하의 오랑캐를 황제를 삼는 것이다(最是此生無限痛 百年天下帝單于)하였으니 이 당시 회경과 임천의 무리들이 이것을 들었다면 부끄러워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후략(後略)
1923년(충렬왕 20) 총랑(摠郞)으로 있을 때 언(彦)을 국문(鞠問)하라 했는데 예전부터 아는 관리(官吏)인지라 (彦)을 데려다가 화(禍)와 복(福)으로서 잘 타이르니 언(彦)이 실상을 토로 하므로 이에 대언(大彦)과 영(領)등을 베었다. 1308년(충렬왕 35)에 이혼(李混), 최균(崔勻), 승지 권준(權準)과 함께 번양왕(藩陽王)이 제정한 관제(官制)와 비판서(批判書)를 쌓아가지고 원나라로부터 서울에 돌아오니 권세(權勢)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舊官)들이 다 물러갔다. 홀로 임금을 뵈올 수 있는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1310년(충선왕 3)에 원나라에서 팔찰(八札)등을 보내어 황후책봉(皇后冊封)한 일을 반포했다. 처음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더니 구평궁(救平宮)으로 더불어 노비(奴婢)의 분쟁이 있자 황제가 제령(制令)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하므로 그 때 전서(典書)로서 그 안건(案件)을 주장하여 구평궁(救平宮) 위씨(韋氏)에게 노비(奴婢)를 돌려주니 대순(大順)이 노(怒)하여 팔찰(八札)과 같이 황제의 명(命)이라 하여 귀양가게 되었다. 1311년(충성왕 4)에 평양윤(平壤尹)이 되었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16년(충숙왕 4)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都監事)를 거쳐 1318(충숙왕 6)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있을 때 왕명으로 온천(溫泉)에서 잡은 새를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보본(報本)하는 것이요 내가 몸소 새를 잡아 올리는데 유사(有司)가 그렇게 반대한단 말이냐 내가 깊은 궁중(宮中0에 있어 경(卿)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알으랴"고 하였다.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父 문성공회헌유(文成公晦軒裕) 祖 판도판서(版圖判書) 부(孚), 曾祖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영유(永儒), 外祖 우사간(右司諫) 漢南金祿延>
1307년(충렬왕 34) 문과 추장제술과(秋場製述科)에 급제하여 1332년(충혜왕 3)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성균좨주(成均祭酒)로 통례문(通禮門) 부사(副使)를 겸하고 1333년(충숙왕 2)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擧)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1342년(충혜왕 4)에 지공거(知貢擧: 과거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고 1333년(충숙왕 후 2)의 호적이 있으며 시호는 장영공(章榮公)이다. 묘(墓)는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였으나 실전되었다가 1828년(순조 29)에 후손 성은(性 )과 수(燧)등이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配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안동)권씨(福州(安東)權氏) 父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 상호군(僉議評理 上護軍) 윤명(允明), 祖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병부상서 상호군(兵部尙書上護軍) 제(濟), 曾祖 병부상서 상장군(兵部尙書上將軍) 득공(得公), 外祖 삼중대광 세자사(三重大匡 世子師) 충렬공(忠烈公) 안동 김방경(安東 金方慶)>---◆>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書) 후학(後學) 대사성(大司成) 김세렴(金世濂)
학문과 도덕으로 문선왕(文宣王:孔子)의 사당(祠堂)에 배향되어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팔도(八道)의 3백 고을에 이르기까지 존경하면서 제향하지 않음이 없는 자는 오직 설홍유후(薛弘儒侯: 설총)와 최문창후(崔文昌侯: 최치원), 안문성공(安文成公), 정포은(鄭圃隱: 정몽주)과 조선조의 다섯 선생이 계실 뿐인데 학문을 처음 선창한 공로로 말하면 실로 안문성공(安文成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다섯 선생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후략(後略)
<묘소>
문성공, 회헌선조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동 대덕산에
안자묘는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으며 해방전까지도 전국의 자손과 유림과 현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력 9원 12일에 기신제를 경건히 봉행하였으나 현재로선 그 현황을 알 수 없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천왕의 특명으로 조선 총독이란 일본 최고관리가 당시화폐로 200원(지금화폐로 약2천만원정도)을 제수비로 헌랍하고 치제를 드린바있는 사우이다.
안자존영(회헌선조 존영)은 현존 가장 오래된 최고의 초상화로 국보 제 111호로 지정되어있다.
<숭보사>
숭보사는 문성공 회헌 선조께서 친히 부리시던 노비 100여명을 노예에서 풀어 주시고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성균관 봉제사를 책임지게 하셨다. 그 후 고려가 패망하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여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성균관을 새로 세우고 노비의 후손들에게 회헌선조의 뜻에 따라 성균과 봉제사 책임을 그대로 수행하게 했는데 100여명의 후손이 늘어나 그 때는 1000여명이 되었으며 그 노비 후손들은 자기의 조상이 되는 노비를 속양하여 주신 문성공 회헌 선조의 은혜를 사모하고 흠모하는 보은의 정성으로 성균관 경내에 숭보사를 세우고 문성공의 위패를 모시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두 차례씩 제향을 받들어 뫼셨다. 그런 뜻에서 숭보사는 즉 은혜를 우러러 경건히 보답한다는 뜻으로 숭보사라 전한다.
▲안향(安珦,1243-1306)묘장단군 진서면 대덕산(송림현 구정리)
고려시대 문신. 학자
본관 순흥(順興) 시호 문성(文成)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밀직부사(密直府使) 부의 자.
원종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난때 강화(江華)에 억류 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충렬왕1년(1275) 상주판관(尙州判官)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 감찰시어사(監察侍御使)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津)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 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里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관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官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田) 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죽은 뒤 충숙왕5년(1318)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를 초빙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朱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명종4년(1549)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의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안향(安珦, 1243∼1306)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 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 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88년 정동 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 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94 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 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 (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 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 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 (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기타 자료 모음
광산김씨 16세 김진(金진)(양간공파)(1292∼ ?)
장영공 호적 (章榮公 戶籍)
어미니는 순정군부인 안씨니 본관은 흥주로 외조는 문선왕 배향공신 선수(宣授)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유학제거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관대사제학 수사 판판도사 감찰사사로 시호 문성공인 안향(安珦)이니 고명은 유(裕)다.
외조는 문선왕 배향공신 선수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시랑중 유학제거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관대사제학 수사 판판도사 감찰사사로 시호 문성공인 안향(安珦)이니 본관은 흥주(興州)인데 아버지는 추봉수태사 문하시중 행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인 부(孚)요 할아버지는 추봉추밀원부사 상장군인 영유(永儒)요 증조는 추봉ㅅ힌호위상장군인 자미(子美)다.
김관(金管)
김해인 자(字)는 희범(希範) 호(號)는 정성헌(靖醒軒).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고려말(高麗末)의 문신(文臣)이다. 초명(初名)은 관(館)은 왕의 하사명(下賜名)이라 한다.
원종(元宗) 7년 (1266년) 그의 나이 17세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 교서랑(校書郞)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이때 안향(安珦)이 그의 재주를 높이사서 친교(親交)를 맺으니 두사람은 틈틈히 만나서 서로 학문(學問)을 논(論)하며 남다른 교분(交分)을 이어 갔다.
원종(元宗) 11년(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안향(安珦)이 강화(江華)의 적중(敵中)에 억류되니 그는 온갖 지혜(知慧)를 다해 안향(安珦)을 구출(救出)하였던바 왕(王)이 감동(感動)하여 그에게 상을 내렸다. 7년뒤 충렬왕(忠烈王) 3년 (1277년)에 판도좌랑(判圖佐郞)에 이어 감찰(監察)어사(御史), 국자(國子)사업(司業)에 올랐다.
충렬왕(忠烈王)15년(1289년) 그는 안향(安珦)과 함께 충선왕(忠宣王)을 호종(扈從)하여 원(元)에 가서 연경(燕京)에 머무는 동안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를 안향(安珦)과 함께 수록(手錄)하여 왔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온 시초(始初)가 된다.
소문쇄록(謏聞瑣錄)-조신(曺伸)
高麗文成公安珦(고려문성공안향) :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嘗作詩書于學宮曰(상작시서우학궁왈) : 일찍이 시를 지어 성균관에 쓰기를,
香燈處處皆祈佛(향등처처개기불) : 곳곳에 향등 달아 부처에게 기원하고
絃管家家盡祀神(현관가가진사신) : 집집마다 풍류 잡아 신을 제사하는데
獨有一間夫子廟(독유일간부자묘) : 홀로 한 칸 부자의 사당에는
滿庭春草寂無人(만정춘초적무인) : 봄풀만 뜰에 가득하여 사람 없이 쓸쓸하여라.
慨然以興起斯文爲己任(개연이흥기사문위기임) : 라고 개탄하고는, 유학(儒學)의 진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納臧獲百口于成均館(납장획백구우성균관) : 노비 1백 가구(家口)를 성균관에 바쳤다.
卒後配享文廟(졸후배향문묘) : 죽은 뒤에 문묘에 배향되어
血食中外(혈식중외) : 조정이나 민간에서 제사지낸다.
至今公之承祀宗子(지금공지승사종자) : 지금 공에게 제사지내는 자손이
連十代登科第(련십대등과제) : 10대를 이어 모두 과거에 올랐으니,
可謂食其報矣(가위식기보의) : 그의 보답을 누린다고 할 만하다.
公鎭合浦數月(공진합포수월) : 공이 병마사(兵馬使)로 합포(合浦)에 수개 월 머무르고 있을 때에,
朝廷將取士(조정장취사) : 조정에서 선비를 뽑으려고
促召之使主試席(촉소지사주시석) : 급히 불러 시석(試席)을 주관하게 하였다.
時霖潦水漲(시림료수창) : 그때 장마로 홍수가 넘쳐
公間關至星州(공간관지성주) : 공은 사잇길로 성주(星州)에 이르러
作詩贈李東菴曰(작시증리동암왈) : 시를 지어 이동암(李東菴)에게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夏初分鉞海邊來(하초분월해변래) : 첫 여름에 병마사로 바닷가에 와서
吟過三更致遠臺(음과삼경치원대) : 삼경을 지나 치원대에서 시를 읊조렸다
驛吏雷馳傳密旨(역리뢰치전밀지) : 역리가 번개처럼 달려와 밀지 전하기를
文闈火迫選賢才(문위화박선현재) : 향시에서 급히 인재를 뽑으라시네
星山暴潦乘槎渡(성산폭료승사도) : 성산의 넘치는 홍수를 뗏목 타고 건너서
月窟淸飆養桂摧(월굴청표양계최) : 월굴 맑은 바람에 청운의 뜻을 기르도다
預想奏名開慶席(예상주명개경석) : 미리 생각하노니 어전에 이름 아뢰고 경석을 열면
鳳笙檀板錦千堆(봉생단판금천퇴) : 어악 풍류 흥겨운데 비단이 천 무더기로다. 하였다.
公之父子相繼爲合浦都節制使(공지부자상계위합포도절제사) : 공의 부자가 서로 이어 합포도절제사(合浦都節制使)가 되었고,
而九代孫琛亦爲節度使(이구대손침역위절도사) : 9대 손 침(琛)도 절도사가 되었는데, 공의
次公詩云(차공시운) : 시에 차운하기를,
文成公後耳孫來(문성공후이손래) : 문성공의 8대 손이 여기에 와서
黑槊紅旗訪古臺(흑삭홍기방고대) : 검은 창 붉은 기로 옛 대를 찾노라
詩禮我家能積善(시례아가능적선) : 시와 예는 우리 가문의 적선이 될 만하니
武文何代不生才(무문하대불생재) : 문무 어느 대엔들 인재가 나지 않으리오
勤王一寸丹心在(근왕일촌단심재) : 나라 위한 일편단심 여기에 있으니
戀闕千莖白髮摧(련궐천경백발최) : 임금 향한 그리움에 천 가닥 백발이 생기도다
傳世靑氈期勿失(전세청전기물실) : 대대로 가문의 전통을 전하여 잃지 않기를 기약할 뿐
黃金不屑謾成堆(황금불설만성퇴) : 부질없이 무더기를 이루는 황금은 달갑지 않네. 하였다.
안씨보유록(安氏保宥錄)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紀)
고려 중기의 명신이요, 큰 학자였던 찬성사 안향은 일찍이 섬학전이라는 육영재
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을 낙성하여 학교를 크게 부흥시키고자 사재와 사노
비 백명을 국학에 모두 들인 일이 있는데, 조선 성균관의 하예들이 바로 그 노
비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 반인들의 인구가 날이 갈수록 점차 불어나 성균관 일
을 하는 것만으로는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쇠고기 전매권을
주었다. 그래서 생긴 푸줏간을 현방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또 곡예와 가무, 음
곡을 일로 삼던 재인 백정이기도 하여, 궁중의 잡희나 탈춤 광대놀이 같은 산디
놀음에 우인으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반인들은 어음과 곡성이 송경(고려의 서
울인 개성) 사람과 같아서, 여자가 슬프게 흐느껴 곡할 때는 마치 노래를 부르
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남자들은 의복이 매우 사치스럽고 혈기가 있어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왕이 싸움을 벌일 때는 곧잘 가슴이나 다리를 찌르는
버릇이 있으매, 서울 본토막이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이들 중에 관비
소생은 성균관의 재직이 되고, 타비 소생은 서리가 되었으며, 재직이 장성하면
수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반촌 북쪽에 단을 모시어 두고, 해마다 안향의
기일이 오면, 가기 돈과 포목을 내어 제수를 융숭하게 차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
냈으며, 안향의 후예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이가 있으면
"보라, 이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고들 했다고 한다.
실로 무엇이, 조금도 쉬지 않는 충정으로, 조금도 줄지 않는 수량으로, 몇 백
년의 세월을 두고도 변함없이 그 상전을 그리워하게 하랴. 그리고 그 길고 오랜
강물을 혈온으로 따뜻하게 할 수가 있으랴.
珦향 처음휘(諱)는유(裕)인데뒤에향(珦)으로고쳤다 전보(前譜)에조선조문종(文宗)의어휘(御諱)를피하여세상에서는처음휘유(裕)로칭하였으나 서기一九八○년경신대보수보시(修譜時)에휘를향(珦)으로환원하였다혹이르기를
[자](字)가사온(士蘊)이라한다 고려고종(高宗)계묘년서기一二四三년에출생하시고고려원종(元宗)경신년서기一二六○년에문과에급제하여벼슬이벽상삼한삼중대광도첨의중찬수문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賛修文殿太學士)로치사(致仕)하였다 일찌기도학(道學)을창명(倡明)하는일을자신의책임으로여겼으며 중니(仲尼孔子)를배우고자한다면마땅히먼저회암(晦菴朱子)을배워야한다고하고 인하여회헌(晦軒)이라호(號)하였으며선성선사(先聖先師)와七二제자의화상(畫像)및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과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들을구입해왔고 국학에섬학전(贍學錢)을설치하여인재를양성하는교육자금을만들었다 고려충열왕(忠烈王)병오년서기一三○六년九월一二일에별세하시니향년은六四세였다시호를문성(文成)이라하였으니도덕과견문이넓은것(道德博聞)을문(文)이라하고백성을편안히하고훌륭한정사를세움(安民立政)을성(成)이라한다 고려충숙왕(忠肅王)무오년서기一三一八년에문묘(文廟)에화상을그려걸게하고고향마을에치제(致祭)하였으며 충숙왕기미년서기一三一九년에문묘에종사(從祀)되다
유상(遺像)은여러본(本)이있는데순흥의소수서원(紹修書院)과장단(長湍)의임강서원(臨江書院)연기(燕岐)의합강(合江)송도(松都)의한천(寒良)재령(載寧)의문천(文泉)진주(晋州)의도통(道統)철원(鐵原)의모성(慕聖)곡성(谷城)의도동(道東)나주(羅州)의집성(集成)충주(忠州)의도통(道統)시흥(始興)의녹동서원(鹿洞書院)및장흥(長興)의만수사(萬壽祠)순흥의대룡산(大龍山)배천(白川)의송성영당(松城影堂)에각각봉안되었다[묘]묘소는장단군진서면눌목리구정동대덕산(大德山)자좌이다
[배]한남군군부인(漢南郡君夫人)김씨(金氏)로부친은우사간(右司諫)을지낸녹연(祿延)이다 [묘]공의묘왼쪽에쌍분부장(祔葬하다
[후배]서원군군부인(瑞原郡君夫人염씨(廉氏)로부친은예빈경태자소보(禮賓卿太子少保)를지낸수장(守藏)이며조부는이부상서(吏部尙書)를지낸극모(克髦)이고증조는국자좨주(國子祭酒)와태사를지낸효문공(孝文公)인신약(信若)이며외조부는지삼사(知三司)인의령(宜寧)심문준(沈文濬)인데부인은자녀를생육하지못하다 [묘]묘소는장단에있다하나표지가없어찾지못하고공의묘소오른쪽에사단(祀壇)을설치하다
고려조(高麗朝)충열왕때에장지(葬地)를하사하고묘역을둘러봉해주었으며 조선조성종(成宗)때에는묘소가있는산을봉(封)하고묘전(墓田)을마련하였으며 묘소수호군三○명을배치하다 또한제관을보내고희생(犧牲)과제수(祭需)를내렸다매년음력一○월一일에세사(歲祀)를행하다
동회(東淮)신익성(申翊聖)이언행기(言行記)를찬하고동명(東溟)김세렴(金世濂)이신도비(神道碑)를찬하며후손응창(應昌)이묘지명(墓誌銘)을찬하고극권(克權)이실기(實記)를편집하며재묵(在默)이연보(年譜)를편집하고명렬(明烈)이실기(實記)를중간하고도통사(道統祠)의사림(士林)이별본(別本)을증집(增輯)하다약재(約齋)송병화(宋炳華)가묘갈(墓碣)을찬하고연성공(衍聖公)공영이(孔令貽)가신도비를찬하다
후손훈(壎)이유장(遺狀)을기술하며면우(俛宇)곽종석(郭鍾錫)이유장후서(遺狀後敆)를찬한바총록에실려있다
安珦(안향)
李朝에들어와서文宗의御諱가珦이라 裕로바꿔부르다 世上에서는初諱로부르며 字가士蘊이라한다
一二四三年宋理宗淳祐癸卯生이며 一三○六年忠烈王丙午九月十二日에卒하니 享年六十四이시다
一二六○年元宗庚申에文科하여 壁上三重大匡都僉議中贊과修文殿太學士로致仕하시다
일찌기倡明道學을任務로삼고 孔子를배우고자하면 마땅히먼저 朱子(號晦菴)를배워야한다하시고 號를 晦軒이라하다
先聖과先師及七十子의 像을購入하고아울러祭器樂器와六經諸子史를사들이며 田宅藏獲을바쳐學錢을두다
諡號를文成이라하니 道德博問曰文이고 安民立政曰成이다
一三一八年忠肅王戊午에命하사圖形文廟致祭桑鄕하고 一三一九年己未에文廟에從祀하다
○遺眞이여럿있으니順興紹修와長湍臨江과燕岐合江書院에奉安하고
松都寒泉과 谷城道東과 晋州及忠州道統祠와 順興大龍山과 春川月谷과載寧文泉影堂에모시다
○墓는長湍府北松林縣東五里大德山口井里子坐다
配는 漢南郡夫人金氏이고 父는 右司諫인祿延이다 ○墓는부左雙墳이다
后配는 瑞原郡夫人廉氏이고 父는 禮賓卿인守藏이며 無育이다 ○墓는失傳하여先生兆右에祀壇을追設하다
○고려때부터墓山을環封하고 李朝成宗때에는墓田과守塚軍三十名을두고 官에서祭物을차리도록命하였고
每年十月一日歲祀를行하다 東淮申翊聖撰言行錄하며 東溟金世濂이神道碑를짓고 後孫應昌이誌를지었으며
克權이實記를엮었고 在默이年譜를만들고 約齋宋炳華가碣을짓고 衍聖公孔令貽가神道碑를지었다
인물 사전
자 | 사온(士蘊) |
호 | 회헌(晦軒) |
시호 | 문성(文成) |
생졸년 | 1243 (고종 30) - 1306 (충렬왕 32)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순흥(順興) |
활동분야 | 관료 > 명신 |
[관련정보]
[고려문과] 원종(元宗) 1년(1260) 경신(庚申) 원종 1년 경신방(庚申榜)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안향(安珦)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出仕方法 男 : 1 女 : 5 總 : 6 號 諡 號 안향(安珦)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자미 安子美 안향 ◆ 배우자 : ◆ 자 녀 :
姓 名
안향(安珦)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高麗 高宗 30年
死 亡 日
高麗 忠烈王 32年 9月
最終官職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文科
出 仕 日
高麗 元宗 1年
子 女
異 名
유 (裕)
회헌(晦軒)
字
사온 (士蘊)
문성(文成)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자녀
氏族源流
379
기본
高麗史節要
기본
高麗史
기본
安于器墓誌銘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최고관직
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
安珦
김(金)-한남(漢南)人 김녹연(金祿延)女
염(廉)-서원(瑞原)人 염수장(廉守藏)女-后配
안우기(安于器)
자녀(子) : 안우기(安于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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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 [子] 안자미(安子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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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 子] 영유(永儒) | ─ | [ 子] 영린(永麟) | ─ | [ 子] 영화(永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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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 子] 부(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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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 子] 향(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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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 子] 우기(于器) | ─ | [ 女] 문욱(文頊) | ─ | [ 女] 허수(許綏) | ─ | [ 女] 박제(朴제) | ─ | [ 女] 한수연(韓守延) | ─ | [ 女] 김사원(金士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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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 子] 목(牧) | ─ | [ 子] 신(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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