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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安牧) *기를 목,(다스릴 목)-문숙공(文淑公)
1派6世-안목(安牧)
시호(諡號) 문숙(文淑) = 勤學好問曰文道德純一曰淑
학문을부지런히힘쓰고 묻기를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도덕(道德)이 순일(純一)함을 숙(淑)이라한다.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정당문학(政堂文學)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藝文直提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목(牧)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25대 충열왕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 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 임오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였다.
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
(僉議中贊修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判典理司事)
문정공(文正公)쾌헌(快軒)설암(雪庵)김태현(金台鉉)공과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의 따님이시다.
외조는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이시다.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에 추봉(追封)되이시다.
묘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슬하(膝下)에 원숭(元崇), 원형(元衡), 원린(元璘) 등 3자와
1녀(민유(閔愉)) 여흥인(麗興人 : 대제학(大提學))를 두셨다
차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고
또 그 다음 원린은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안목(安牧)
자(字) 익지(益之), 호(號) 겸재(謙齋)
안목(安牧) 순흥인
6世 안목(安牧) *기를 목, (다스릴 목)
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高麗)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 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忠誠)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餘生)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純祖) 임오(壬午)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문숙공(文淑公)휘 ) 6 世 (1파)
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
1290년 (충렬왕, 경인년)에 출생한 휘목(安牧)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향(向)의 손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겸재(謙齋)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 김씨(化平郡夫人 金氏)이며,
첨의중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딸이다.
관직 및 업적
1315년(충숙왕)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원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1339년(충숙왕, 기묘년)에 장령(掌令)으로서 전주(銓注)를 관장하여 공신(功臣)의 관작을 하사받았다.
그뒤 밀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시독관(書筵侍讀官)을 지냈다.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에 이르렀다.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에는 파주(坡州)의 교외에서 시(詩)를
벗삼아 한가로운 여생을 보냈다.
제향
360년 5월 (공민왕 경자년)에 별세하니 71歲로 장수하셨다.
조정에서는 순흥군(順興君)에 추봉하고, 문숙(文淑)이란 시호를 내렸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되었다.
묘(墓)
고조하 자좌(子坐) 지원이다.
부(父)
안우기(安于器)
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先親)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高麗) 24대 원종 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 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文科)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朝廷)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모(母)
정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이시고 그 선친(先親)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墓)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모(母)
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묘등이 모두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 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배(配)
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정공(文正公)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자(子)
안원숭(安元崇)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배(配)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자(子)
안원형(安元衡)
차자(次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자(子)
안원린(安元璘)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녀(女)
민유(閔愉) 여흥인(麗興人 : 대제학(大提學)
형제(兄弟)
제(弟) 안신(安愼) 후실소생
차자(次子)이신 신(愼)할아버님 댁이 분파(分派)하셨는 바
이 할아버님께서 로부판관(鹵簿判官)을 지내셨으므로
판관공파(判官公派)라고 호칭한다.
문헌(文獻)
1.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안목(安牧) (충숙왕조)
高麗史 卷三十九 世家 卷第三十九
恭愍王 9年 5월
五月。戊子。順興 (1360년 5월 2일 음력)
五月。戊子。順興君安牧卒。
아들이 대언에 임명되므로 시를 지어 보임[示子拜代言]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
安牧)이 처음으로 넓게 밭을 개간하고 큰 집을 짓고 살았다.정당이 시를 잘하여 한구(句)를 짓기를,
하였다. 그 손자 원에 이르러 지극하게 창성하였는데,
안팎으로 차지한 밭이 무려 수만 경(頃)이나 되고 노비도 백여 호나 되었다.
늙은 고목 천여 그루가 10리에 그늘을 이루고 거위와 황새가 그 사이에서 울고 떠들었다.
공은 매를 팔 위에 올려놓고 누런 개를 데리고 매일 왕래함을 낙으로 삼았다.
지금도 남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
坡州西郊。荒廢無人。安政堂牧始墾之。廣作田畝。大搆第而居之。政堂能詩。
嘗占句云。牧笛一聲長浦外。漁燈數點洛巖前。至其孫瑗極盛。內外占田無慮數萬頃。
奴婢百餘戶。老樹千章。成蔭十里。鵝鸛呼噪其間。公臂蒼牽黃。日往來以爲樂。
至今分占餘土而居者百許人。皆其子孫也。
안목(安牧)
?∼1360(공민왕 9). 고려 말기의 문신. 자는 익지(益之), 호는 겸재(謙齋)이다.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유(裕)의 손자이고,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2년[1325]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30년(충혜왕 즉위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그 뒤 밀직제학·밀직부사를 거
쳐, 충목왕 4년 [1348]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공민왕 1년 [1352]에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상사(上司)에게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파주(坡州) 서쪽에 숨어
시와 거문고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시 한 수를 보면 청려(淸麗)한 격조가 있고
물외(物外)에서 초연히 소요하는 기상이 보인다.
긴 포구 밖에서 목동의 피리소리 들려오고, 牧笛一聲長浦外
낙암 앞 고깃배에서 등불 깜박이네. 漁燈數點落岩前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 것이 문(文)이고[勤學好問曰文],
도덕이 순수하고 전일한 것이 숙(淑)이다.[道德純一曰淑]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묘갈명을 지었다.
안목(安牧)
?∼1360(공민왕 9).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익지(益之), 호는 겸재(謙齋).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유(裕)의 손자이고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즉위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그뒤 밀직제학·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
뒤에 순흥군(順興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高麗文淑公謙齋安先生墓碣銘 幷序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六 ㅡ 송사 기우만(奇宇萬)
文淑公 謙齋(安牧)先生 墓碣銘 幷序
後學 幸州 奇宇萬
謙齋先生於晦軒孫也竹屋子也 仕高麗官至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 封順興君 諡文淑 早遊李東庵之門其子益齋先生爲見而知之遺像有贊有曰儉而不固和而不流確乎守度儼乎揚休稱其爲文成之孫克勤於行克簡於辭醞藉其文平淡其詩宜其遊東庵之門位躡二府不爲不遇年踰七旬不爲不壽惟其任用未究於勻衡功德未洽於生靈槩見其陰陽合德剛柔相濟盖有王佐才具命世需用而未究未洽爲所慨惜也此雖寂寥數語而全體大用畢呈而無餘蘊 先生諱 牧 宇益之 安氏貫順興 曾祖諱 孚 文版圖判書 贈太師 祖諱 裕 卽晦軒先生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諡文成推理學之宗從祀夫子廟 考諱 于器 卽竹屋先生贊成事 順平君 諡文順 克繼先美 妣 鐵原郡君崔氏 父冲若 門下待中 先生生忠烈王庚寅 忠肅王乙卯登第 初授典校寺事轉至密直副使 踐歷淸顯竟躋二府歷事四朝凡時政得失生民利病知無不言言無不盡累忤於時莁遯于坡山之西郊代食維好琴書自娛嘗有詩曰牧笛一聲長浦外漁燈數點落嚴前 非惟詩韻淸絶亦見無求於世超然物表之意卒於恭愍庚子五月戊子克讓于長湍大德山口井里負子原從先兆也 配 化平郡君夫人金氏政丞台鉉女 葬同原異兆 生一子一女 男 元崇 政堂文學 順城君 諡文惠 順城三子 長 瑗 典書 我朝微不起 諡景質 次 祖同 副提學 季 垂 翰林 積慶累仁椒聊蕃衍或黼黻王庭或柯則士林菀爲國望至今數十世而未艾也 墓舊有碑年久泐頑至不可讀 宗議改竪請爲銘銘曰於奕文成學宗孔朱講究天人以啓後儒先生之生實維思孫祖晦孫謙一丳其傳王佐才具盖其所抱見而知之贊非阿好維其任用未究於勻衡功德未洽於生靈其具則在我不用何病於先生
문숙공 겸재(안목)선생 묘갈명
문숙공 겸재(안목)선생 묘갈명-기우만(奇宇萬)
겸재(謙齋)는 회헌(晦軒)의 손자요 죽옥(竹屋)의 아들이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이르고 순흥군(順興君)으로 봉호를 받았고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일찍이 동암(東庵 李瑱)의 문하에서 교유했기에 그의 아들 익재(益齋 李齋賢)선생과는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지내는 처지였다. 익재는 겸재公의 유상을 찬하기를, ‘검소하면서도 고집스럽지 않고 화하면서도 유동되지 않으며, 법도를 지킴이 확고하고 아름다움을 들어냄이 엄연하니 그를 문성공의 손자라고 칭찬하였다. 능히 행함은 부지런히 하고 말은 간결하게 하며 그 글은 깊이가 있고 그 시는 평이하고 담백하였으니 마땅히 그를 동암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하겠네. 지위가 2부(二府)에 올랐으니 불우하지는 않았으며 나이도 70을 넘었으니 수(壽)하지 아니함은 아니었네. 오직 그가 임용되어 균형(勻衡)을 궁구(窮究)하지 못하였고 공덕이 생영(生靈)에 흡족하지 못하였으니 사론(士論)은 오히려 유감 되는 바가 있네.’하였다.
그의 음양(陰陽)이 합덕(合德)하고 강유(强柔)가 상제(相濟)하니, 대개 왕을 보좌할만한 재능을 구비했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경륜을 모두 갖추었으나 지위가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개탄스럽고 애석하도다. 이는 비록 씁쓸한 말이나 전체로는 대용(大用)되었음을 말함이니 여온(餘蘊)이 없느니라.
선생의 휘(諱)는 목(牧)이요 자(字)는 익지(益之)며 안씨의 관향(貫鄕)은 순흥(順興)이다. 증조의 휘는 부(孚)요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판서를 지내고 태사에 증직되셨다. 조부의 휘는 유(裕)인데 즉 회헌(晦軒)선생으로 도첨의중찬수문전태학사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는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 받고 공부자(孔夫子) 사당에 배향 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우기(于器)로 즉 죽옥(竹屋)선생이니 벼슬은 찬성사요 순평군(順平君)으로 책봉되고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공은 선친의 아름다운 덕을 잘 계승하였다.
선비(先妣)는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로 문하시중 충약(冲若)의 따님이다. 선생은 충렬왕 경인(庚寅 1290)년에 출생하시어 충숙왕 을묘(1315)년에 과거에 급제하시고 처음 전교시사에 제수 되었다가 전임하여 밀직부사에 이르고 청현직을 역임하여 이 부(二府)를 거쳐 사조(四朝 4조정)를 두루 밟아 시정(時政)의 득실과 백성에 대한 이해와 병폐를 알아 할 말은 빠짐없이 직언하였고 말씀하실 때에는 마음에 거슬리는 일 까지도 극진히 할 말을 다하였다. 파주의 서교에 은둔하여 오로지 밥보다 금서(琴書)를 일찍 오락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公은 시가 있으니 ‘길게 들려오는 목동의 피리 소리 장포 밖에 들리고 고기 잡는 등불 몇 점은 바위 앞에 비치네’ 하였으니 오직 시운(詩韻)은 아니더라도 청절(淸絶)함은 또한 볼 수 있으니 세상에 초연하여 물질을 탐함이 없음이다.
공민왕 경자년 5월 무자(戊子)에 별세하여 장단의 대덕산 구정리 자좌에 장례하니 이는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化平郡君夫人) 김씨로 정승 태현의 따님인데 장례는 같은 산에 봉분을 따로 하였다.
일자일녀(一子一女)를 낳았으니 아들 원숭(元崇)은 정당문학 순성군(順城君)에 시호가 文惠(문혜)이다. 순성군(順城君)은 삼 자(子)를 두었으니 장자는 원(瑗)인데 전서로 조선조에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시호가 경질(景質), 차자는 조동(祖同)인데 부제학, 계자는 수(垂)인데 한림)이다.
선생은 선행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베풀어 후손들이 번창하여 조정에서 나라를 돕거나 사림의 한 가지가 되어 나라의 유망한 씨족으로 오늘날 수십 세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 맥은 번연(蕃衍)히 이어지고 있다.
묘 앞에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읽을 수 없으니 종의(宗議)로 개견(改堅)코저 하여 명문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위대하다. 문성(文成)이여./ 학덕(學德)이 공주(孔朱)의 도(道)에 조종(祖宗)이로다./
왕(王)과 인(人)을 강구(講究)하여 후유(後儒)를 계도(啓導)하였다./
선생께서 생(生)하시어 실(實)은 오직 손자(孫子)로다./
조(祖)는 회헌(晦軒)이요. 손(孫)은 겸재(謙齋)이니 한 꼬치로 전승하였다./
왕을 보좌(補佐)에 재능(才能)을 구비(具備)했으니 대개 포부(抱負)한 바로다./
보면 알 수 있으니/ 찬사(贊辭)가 아부(阿附)가 아니로다./
오직 그의 임용(任用)에는 균형(勻衡)에서 궁구(窮究)치 못했고/
공덕(功德)에는 생령(生靈)에서 흡족(洽足)치 못했다./
그 구비(具備)했다면 내게 있을 것이니/ 불용(不用)됨이 어찌 선생의 병(病)이랴!
文淑公 謙齋(安牧)先生 墓誌銘
公諱牧 姓安氏 宇益之 順興人 自號謙齋 曾祖曰孚 版圖判書致仕 贈守太師門下待中 祖曰裕 都僉議中贊 諡文成從祀聖廟 考曰于器 贊成事順平君 諡文順 勤學好問曰文 慈和編服曰順 妣鐵原君夫人崔氏 門下待郞冲若之女也 公登第忠蕭王朝 由典校寺事轉遷密直副使恭愍王朝 封順興君累官至政堂文學及卒 贈諡文淑 勤學好問曰文 道德純一曰淑 娶化平金氏政丞台鉉之女 生一子一女曰元崇政堂文學順城君公卒女適大提學閔愉 於至定二十年庚子歲葬干長湍府大德山北子坐午向之原卽祖若考之塋側也 金夫人之葬同原異室 崇禎己卯歲修幽堂改刊舊碣略誌故實藏諸壙南俾諗于後
戊子(1648년) 春, 12代孫 府使 應昌 謹誌
문숙공 겸재(안목)선생 묘지명
12대손 부사 응창(應昌) 지음
공(公)의 휘(諱)는 목(牧)이요, 성(姓)은 안(安)씨다. 자(字)는 익지(益之)니 순흥인(順興人)으로 자호(自號)는 겸재(謙齋)다. 증조(曾祖)는 부(孚)로, ‘판도판서’로 치사하여 ‘수태사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향(珦)으로 ‘도첨의중찬’이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으로 성묘(聖廟)에 배향되었다. 고(考)는 우기(于器)로 찬성사(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封)하였고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평하며 두루 복종함’을 ‘순(順)’이라고 하였다. 비(妣)는 철원군(鐵原郡)군(君)부인 최(崔)씨로 문하시랑인 충약(冲若)의 딸이다.
공은 충숙왕 때 등제하여 전교시사를 거쳐 밀직부사, 공민왕 때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돌아가자 시호를 문숙공(文淑公)에 추증하였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요 ‘도덕이 순일(純一)함’을 ‘숙(淑)’이라 하였다.
화평(化平)김(金)씨와 혼인하였으니 정승 태현(台鉉)의 딸로 일자일녀(一子一女)를 낳았다. 아들은 원숭(元崇)으로 정당문학이요 순성군에 봉해졌다. 딸은 대제학 민유(閔愉)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지정 20년 경자(1360)년에 돌아갔고 장단부 대덕산 남쪽 자좌오향원에 세장을 모셨으니 곧 조부(祖父)와 선고(先考)의 무덤 곁이며, 김(金)부인의 장지는 동원(同原)의 이실(異室)이다.
숭정 기묘(1639)년에 유택을 수리하고 옛 비석을 개간하면서 간략하게 옛 사실을 기록하여 무덤의 남쪽에 묻고 이를 후손에게 알리노라.
무자(1648)년 봄에. 12대손 부사인 응창은 삼가 기록하다.
安謙齋眞贊 有序
安文成公。爲世儒宗。余未弱冠。一拜於途。遂蒙顧遇。因識其孫謙齋。後十年。吾先君東菴公。掌試春闈。謙齋射策登科。由是予二人者。交游最久。至正庚子。謙齋歿。明年秋覩遺像。悵然書其側。
儉而不固。和而不流。確乎守度。儼乎揚休。稱其爲文成之孫兮。克勤於行。克簡於辭。醞籍其文。平淡其詩。宜其游東菴之門兮。位躡二府。不爲不偶。年俯七旬。不爲不壽。惟其任用未究於鈞衡。功德未洽於生靈。士論猶有所憾焉。一丘一壑之放曠。足以過庾亮。一觴一詠之淸眞。何曾比季倫。是則我輩想平生而難忘。覩遺像而益感者也。
안겸재 진찬 유서 (安謙齋眞贊 有序) 이제현(李齊賢) 안 문성공(安文成公)은 일대에 있어서 유학자의 종장이었다. 내가 아직 20도 못 되었을 때 한 번 길에서 뵈옵고 드디어 사랑을 받았으며 인하여 그의 손자인 겸재(謙齋)를 알게 되었다. 그 후 10년에 나의 아버지 동암공(東菴公)이 과거에 고시관으로 있을 때에 겸재는 책(策)으로 응시하여 과거에 올랐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사귐이 가장 오래 되었다. 지정(至正) 경자년에 겸재가 죽었다. 이듬해 가을에 남아 있는 그의 화상을 보고 섭섭하여 그 옆에 적는다. 검소하였으나 고루하지 않았고 온화하였으나 지나치지 않았다. 확고히 법도를 지켰고 엄연히 아름다움을 발휘하였으니 그는 문성공의 손자로서 알맞았었다. 실천에 노력하고 말은 매우 적었다. 온자한 그의 문장이었고 평담(平淡)한 그의 시(詩)었으니 동암(東菴)의 제자로서 마땅하도다. 벼슬이 양부(兩府)를 다 거쳤으니 출세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으며, 나이는 70을 넘으셨으니 수를 못했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벼슬이 균형(鈞衡)에 이르지 못하고 공덕이 백성에 흡족히 미치지 못하여 사림(士林)의 여론은 오히려 유감으로 여긴다. 그러나 산수(山水) 간에서 마음대로 지내던 생활은 유양(庾亮)도 못 당할 것이요. 시와 술로 즐겁게 놀던 풍류는 계륜(季倫)도 비할 바 못 될 것이니 이것은 우리들이 그의 평생을 생각하여 잊기 어려우며, 남긴 화상을 바라보며 더욱 감개 깊은 것이로다. ◇ 책(策) : 과거에서 선비를 시험보이는 문체(文體) 중의 하나. 대개 시(詩)·부(賦)·표(表)·책(策) 네 가지가 있다. ◇ 유량(庾亮) : 진(晉) 나라 사람. 유량이 무창현(武昌縣)에 봉(封)해져 있을 때 가을 밤이면 늘 남루(南樓)에 올라 산수의 자연을 즐겼다.《晉書 庾亮傳》 ◇ 계륜(季倫) : 진(晉) 나라 산간(山簡)의 자. 산간은 술 마시기를 즐겨서 항상 고양지(高陽池)에 술을 두고 만취해 돌아오곤 하였다.《晉書 山簡傳》
동문선 제51권 찬(贊) 차박지평운정안겸재[次朴持平韻呈安謙齋] 박지평의 시를 차운하여 안겸재에게 드리다 백문거(白文擧) 새해엔 길조가 많다고들 말하더니 / 盡道新年多吉兆(진도신년다길조) 경사로운 가문에 영광이 모였네 / 端知慶閥萃榮光(단지경벌췌영광) 전해오던 낡고 검소한 선인 댁이 / 傳來古儉先人宅(전래고검선인댁) 화하여 풍류학사당이 되었구나 / 化作風流學士堂(화작풍류학사당) 우스워라 늙은 내가 백발이 성긴 주제에 / 自笑老夫華髮短(자소로부화발단) 노래하는 기생의 푸른 눈썹이 귀엽단 말가 / 猶憐歌妓翠眉長(유련가기취미장) 이보게 내게 파려(유리)잔을 들라 하소 / 請公命把玻瓈盞(청공명파파려잔) 한평생 들끓는 속을 씻어볼까 하옵네 / 澆我平生氷炭腸(요아평생빙탄장)
동문선 제15권 칠언율시(七言律詩) 기안겸재(寄安謙齋 ) 안겸재(安謙齋)에게 부치다 지난해의 시사는 모두 간담이 떨어질 일 / 時事去年皆破膽(시사거년개파담) 지금은 현재가 경쟁적으로 반린하는 날 / 賢才此日競攀鱗(현재차일경반린) 공을 기용한 게 평소의 기대엔 덜 차는데 / 起公未滿平生望(기공미만평생망) 공의 행장 옛사람과 비슷해 오히려 기쁘오 / 却喜行藏似古人(각희행장사고인) 가정집 제18권 율시(律詩) ◇ 반린(攀鱗) :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공명(功名)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하안겸재이절(賀安謙齋二絶) 안겸재(安謙齋)를 축하하다 2절 집안은 단지 삼강을 바르게 세우면 될 것이니 / 持家只要正三綱(지가지요정삼강) 휘장 치고 풍악을 좀 울린들 상관이 있으리오 / 隔幔絃歌也不妨(격만현가야부방) 거울이 나뉘지 않았으니 맞춰 볼 것도 없는 일 / 鏡自未分何更合(경자미분하갱합) 먼지를 털어내고 보면 전보다 훨씬 더 빛나리라 / 拂塵還勝舊時光(불진환승구시광) 증리 때문에 채빈을 어찌 폐할 수야 / 豈爲蒸梨廢采蘋(기위증리폐채빈) 애증이 끝내 천진을 뺏지는 못했구려 / 愛憎終不奪天眞(애증종부탈천진) 잠시 헤어졌다 만나는 것은 보통 있는 일 / 暫時離合渾閑事(잠시리합혼한사) 술잔 들고서 한번 웃고 넘기면 되리이다 / 付與樽前一笑新(부여준전일소신) 가정집 제15권 율시(律詩) ◇ 안겸재(安謙齋) : 겸재는 안목(安牧 : ?〜1360)의 호이다. 그가 언젠가 처를 집에서 쫓아냈는데, 원나라 사신 독만(禿萬)이 그 집에 숙소를 정했다가 그 연유를 듣고는 “아낙네는 머리카락은 길어도 생각은 짧으니 탓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소이까. 한 여자가 하늘에 원망하면 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으니, 그대는 잘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니, 안목이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마침내 처음과 같이 부부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高麗史 卷105 安牧列傳》 안목은 안향(安珦)의 손자이다. ◇ 거울이……일 : 부부가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종적을 모르게 된 것도 아닌데, 굳이 당사자인지 확인하고 나서 재결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진(陳)나라 때 태자사인(太子舍人) 서덕언(徐德言)이 진 후주(陳後主)의 누이인 낙창공주(樂昌公主)와 결혼하였는데, 시국이 불안하여 장차 헤어지게 될 것을 예감하고는, 동경(銅鏡)을 절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공주에게 주면서 정월 보름날에 도시(都市)에 내다 팔도록 하였다. 그 뒤 과연 부부가 서로 헤어졌는데 서덕언이 도시에서 그 거울을 찾아서 맞춰 보고는 “거울과 사람이 함께 떠났는데, 거울만 돌아오고 사람은 안 돌아오는구나. 항아의 그림자는 다시 볼 수가 없고, 공연히 밝은 달만 휘영청 빛나네.〔鏡與人俱去 鏡歸人不歸 無復姮娥影 空留明月輝〕”라고 거울에 시를 써서 보냈다. 그때 공주는 월국공(越國公) 양소(楊素)의 집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 시를 본 뒤로는 음식도 들지 않고 울기만 하자, 양소가 그 내막을 알고는 마침내 서덕언에게 공주를 돌려주어 부부가 해로(偕老)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本事詩 情感》 ◇ 먼지를……빛나리라 : 한번 곡경(曲境)을 치른 뒤로는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부부의 금슬이 예전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 증리(蒸梨)……수야 : 야채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과 같은 사소한 잘못 때문에, 제사 음식을 정결히 마련하여 조상을 모시는 주부를 쫓아낼 수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증리는 증려(蒸藜)의 속칭으로, 야채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효자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이 후모(後母)에게 올릴 야채를 잘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를 내쫓고는 종신토록 다시 장가들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卷9 七十二弟子解》 또 《시경》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마름 풀 뜯으러 남쪽 시냇가로 가네. 마름 풀 뜯으러 저 개울가로 가네.〔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시는 법도에 따라 제사 음식을 정결하게 마련하려는 주부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록한 것이다. ◇ 애증(愛憎)이……못했구려 : 일시적인 감정이 천연의 본성을 동요시키지는 못해서 다시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안목(安牧)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1 女 : 1 總 : 안목(安牧)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목 ◆ 배우자 : ◆ 자 녀 :
姓 名
안목(安牧)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高麗 恭愍王 9年
最終官職
정당문학(政堂文學)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子 女
異 名
號
겸재(謙齋)
字
익지(益之)
諡 號
문숙공(文淑公)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金台鉉妻王氏墓誌銘
기본
金台鉉墓誌銘
기본
高麗史
기본
安于器墓誌銘
기본
氏族源流
379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7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安牧
김(金)
안(安)
안원숭(安元崇)
1세 | [子] 안자미(安子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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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 子] 영유(永儒) | ─ | [ 子] 영린(永麟) | ─ | [ 子] 영화(永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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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 子] 부(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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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 子] 향(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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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 子] 우기(于器) | ─ | [ 女] 문욱(文頊) | ─ | [ 女] 허수(許綏) | ─ | [ 女] 박제(朴제) | ─ | [ 女] 한수연(韓守延) | ─ | [ 女] 김사원(金士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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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 子] 목(牧) | ─ | [ 子] 신(愼) |
배위(配)는 화평군부인 김씨(化平郡夫人 金氏)이며,
첨의중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딸이다.
『세보』에는 해양군대부인(海陽郡大夫人)이라고 되어 있다.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은 4남 2녀를 두었다. 이는
박윤문(朴允文)처대광(大匡) 밀성군 박공(密城君 朴公)의 부인해양군대부인(海陽郡大夫人)이며,
김씨부인(박공의처)이 가장 막내이다.
해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海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밀성군 박윤문(密城君 朴允文)의처에 의함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은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이 가장 막내이다. 선부의랑(選部議郞) 광식(光軾)은 이복 오빠이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과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의 부인, 급제한 광락(光輅)은 모두 친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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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정공(金文正公) 묘지-김태현(金台鉉)
공의 이름은 태현(台鉉)이고, 자는 불기(不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기부터 벼슬하여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증조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조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경량(鏡亮)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는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중략---
장녀는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 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차녀는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명이 있는데 하나는 아무개로 별장(別將)이며, 다음은 아직 이름이 없다.
---중략---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짓고, 자금어대(紫金魚袋) 김원준(金元俊)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金文正公墓誌
公諱 字不器金氏本光之望族白國初已入仕代不絶人大王父神虎衞中郎將諱允世贈尙書左僕射王父金吾衞大將軍諱鏡贈門下平章事父監察御史諱湏累贈門下侍中侍中嘗於 ---중략---
女適典校今藝文直提學安牧封翼陽郡夫人次適藝文供奉朴允文孫男二人曰某職爲別將次未名
---중략---
〔출전 : 『拙藁千百』 권1〕
김태현(金台鉉)의 배(配)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 王氏) 묘지명 및 서문
목은(牧隱) 이색(李穡) 지음
부인의 성은 왕씨(王氏)이고, 개성군(開城郡) 사람이다. 조부 근(覲)은 우리 태조의 11세손으로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고, 아버지 정조(丁朝)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戶部尙書 翰林學士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금마군부인(金馬郡夫人)인데,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 서춘(瑞春)의 딸이다.
부인은 14세에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에게 시집갔는데, 바른 자태와 정숙한 덕은 훌륭한 가문[高門]의 배필이 될 만하였다.
부인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광철(光轍)은 밀직사(密直司)로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으나 8년 전에 죽었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차남 광재(光載)는 삼사우사 겸 전리판서(三司右使 兼 典理判書)였는데 집으로 물러나 지금은 무덤 곁에서 (侍墓를 하고) 있다. 3남 광로(光輅)는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였으나 일찍 죽어 자녀가 없다. 큰딸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밀직사 우대언 좌사의대부(密直司 右代言 左司議大夫)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세 명이 있다. 큰 손자 승조(承祖)는 천우위 해령별장(千牛衛 海領別將)이고, 둘째 손자 흥조(興祖)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이며, 셋째 손자 회조(懷祖)는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충용위 호분별장(忠勇衛 虎賁別將)이 되었다. 손녀는 다섯을 두었다. 큰 손녀는 개성소윤(開城少尹) 최충손(崔冲孫)에게, 둘째 손녀는 합포만호(合浦萬戶)▨▨▨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에게, 셋째 손녀는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유혜부(柳蕙符)에게, 넷째 손녀는 숭복도감판관(崇福都監判官) 홍인철(洪仁喆)에게, 다섯째 손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시집갔다.
증손자 세 명과 증손녀 다섯 명이 있으나 모두 어리고, 외손자는 여섯 명이다. 안원숭(安元崇)은 군부판서 진현관(軍簿判書 進賢舘)이고, 박밀양(朴密陽)은 급제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되고, 박태양(朴太陽)은 급제하여 고공낭중(考功郎中)이 되고, 박소양(朴紹陽)은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元)에 들어가 형호지▨원수부주차(荊湖池▨元帥府奏差)가 되고, 박삼양(朴三陽)은 급제하여 충주판관(忠州判官)이 되고, 박계양(朴季陽)은 좌우위정용(左右衛精勇)의 산직(散職)을 받았다.
외손녀는 한 명으로,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 右常侍) 민유(閔愉)에게 시집갔다.
외증손자는 15명이다. 민덕생(閔德生)은 상서좌사원외랑(尙書左司員外郞)이고, 민수생(閔秀生)은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민▨생(閔▨生)은 직사관(直史館)이며, 박숙▨(朴淑▨)은 서림장판관(西林場判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아직 관례(冠禮)를 올리지 않았다.
외증손녀는 17명이다. 한 명은 금오위 정용낭장(金吾衛 精勇郎將) ▨▨에게, 한 명은 요양등처 행중서성 우승지(遼陽等處 行中書省 右承旨)에게, 한 명은 비서감(秘書監) 김사렴(金士廉)에게, 한 명은 우부대언(右副代言) 기왈용(奇曰龍)에게, 한 명은 국자직학(國子直學) 성▨(成▨)에게, 한 명은 견예부 별장(堅銳府 別將) 구희(具禧)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결혼하지 않았다.
외현손은 다섯 명이 있다.
부인은 91세에 이르러 내외의 여러 자손들이 이와 같이 창성하였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라의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어머니에게 평생 곡식을 주었는데, 광철, 광재, 광로가 모두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였으므로 부인의 영예가 ▨▨(매우 컸다?). 외손자 박씨 또한 훌륭함을 갖추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였다.
지정(至正) 16년 병신년(공민왕 5, 1356) 3월 18일에 침소에서 돌아가시니, 이 해 4월 9일에 덕수현(德水縣) 해운산(海雲山)의 문정공의 무덤에 장례지냈다.
부인은 자애롭고도 엄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고, 여러 친족들을 은혜롭게 어루만져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 모두 자신의 어머니처럼 여겼다. 시어머니 고씨(高氏)는 예빈경 지제고(禮賓卿 知制誥) 영중(瑩中)의 손녀로 이른 나이에 홀로 되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하여 백하고도 두 살의 장수를 누렸는데, 부인은 더욱 부지런히 모셨다.
성품이 불교를 좋아하여 금으로 『화엄경(華嚴經) 삼본(三本)』을 쓰고 ▨▨하였으니, 문정공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또 『법화경(法華經)』을 모두 이백여 권을 이루어 함(函)과 돗자리에 서적이 가득 찼는데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반드시 문정공의 기일에는 (그 불경을) 읽고 외우며 공양을 바쳤다. 항상 염불하였는데 돌아가실 때도 ▨▨▨▨하였으니 그 신앙이 독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내가 수묘(守墓)하는 오두막으로 삼사공(三司公, 金光載)을 ▨▨ 뵈었다. 공이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가 문생(門生)이 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덕입니다. 그대가 묘지명을 써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하고 물러날 수가 없어서 ▨▨▨▨ 차례대로 적는다.
아, 선을 쌓거나 악을 쌓게 되면 재앙과 복이 그에 따라 온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문정공의 도덕과 공명이 세상에 밝게 빛나고, 삼사공과 그 형 광철이 모두 큰 재목으로 중용되어 ▨, 아들의 성(姓)이 크게 떨쳤으니 모두가 그 가문을 칭송하고 있다. 부인의 내조가 아니었으면 이보다 성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명(銘)을 지어야 할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문정공의 어짐은 백세(百世)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부인이 그의 배필이 되니 공손하고 온화하였다.
아들 세 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평생 나라에서 곡식이 내려주니 복을 받은 것이 많지 아니한가.
나이는 90을 넘어 ▨▨▨ 많은데
맏형과 막내는 이미 ▨▨▨하도다.
둘째인 삼사(三司)도 머리가 하얗게 세었는데
묘 곁에 머물며 상(喪)을 마치니, 슬프다, 여뀌와 쑥[蓼莪]만 자라나도다.
덕수현(德水鉉) 양지바른 해운(海雲) 언덕에
▨▨▨▨ 살펴도 거짓됨이 없도다.
지정(至正) 18년(공민왕 7, 1358) 3월 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開城郡大夫人王氏墓誌銘幷序 牧隱李穡撰
夫人姓王氏開城郡人祖諱覲我太祖十一世孫朝請大夫禮賓卿致仕考諱丁朝贈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戶部尙書翰林學士承旨妣李氏金馬郡夫人左司諫知制誥瑞春之女夫人年十四歸于文正諱台鉉貞恣淑德克配高門生子五人長男光轍以密直使封化平君先八年卒謚文敏次光載三司右使兼典理判書退于家今在墓側次光輅嘉安府錄事早卒無子長女適政堂文學藝文舘大提學安牧次適密直司右代言左司議大夫朴允文孫男三人長承祖千牛衛海領別將次興左右衛保勝郞將次懷祖中成試忠勇衛虎賁別將女五人長適開城少尹崔冲孫次適合浦萬戶▨▨▨玄城君權鏞次適兵部員外郞柳蕙符次適崇福都監判官洪仁喆次適內府副令朴門壽曾孫男三人女五人皆幼外孫男六人安元崇軍簿判書進賢舘朴密(?)陽及第刑部員外郞朴太陽及第考功郞中朴紹(?)陽中成均試入元爲荊湖池▨元帥府奏差朴三陽及第忠州判官朴季陽左右衛精勇散女一人適奉翊大夫右常侍閔愉外曾孫男十五人閔德生尙書左司員外郞閔秀生中成均試閔▨生直史館朴淑▨西林場判官餘未冠女十七人適金吾衛精勇郞將▨▨一適遼陽寺處行中書省右承一適秘書監金士廉一適右副代言奇曰龍一適國子直學成▨一適堅銳府別將具禧餘未幷外玄孫五人夫人年至五十二歲而內外諸孫若此之盛夫豈偶然耶國制三子登科廩其母終身光轍載輅俱中進士第而夫人▨▨其榮外孫朴氏亦濟其美時人欽之至正十六年丙申三月十八日卒于寢是年四月九日窆于德水縣海雲山文正之瑩夫人慈嚴聰慧持家有法撫諸族有恩人▨▨之咸若已母姑(?)高(?)氏(?)禮賓卿知制誥瑩中之孫早年而寡老益康享年百單二歲夫人事之愈勤性愛佛金書華嚴經三本▨▨文正之願又成法華經諸凡二百餘卷函盛褥籍極其精緻讀通供養必以文正之忌常念佛至於屬纊之時▨▨▨▨其篤信如此予▨▨謁三司公于守墓之廬公潛然曰汝門生吾母之德汝其誌(?)之予義不可辭退列其▨▨▨▨而序之曰嗚呼積善積惡殃慶隨之不忒文正公道德功名赫然於世而三司公與其兄光轍皆以宏材重▨子姓振振咸稱其家夫人之所以內助者不旣多乎是宜銘銘曰」
文(?)正(?)之(?)賢百世不磨(?)夫人配之克柔以和有子三俱(?)踐文科終身國廩受福不那壽過九
十▨▨▨多伯兮叔兮已▨▨▨仲也三司白首皤皤居墓終制痛栽蓼莪德水之陽海
雲之阿▨▨▨▨省克無訛
至正十八年三月日
〔출전:『光山金氏族譜』(1935)〕
자(子) 안원숭(安元崇)
안원숭(安元崇)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3 女 : 6 總 : 안원숭(安元崇)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원숭 ◆ 배우자 : ◆ 자 녀 :
姓 名
안원숭(安元崇)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정당문학(政堂文學)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子 女
異 名
號
字
諡 號
문혜공(文惠公)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安輔墓誌銘
기본
高麗史
출사방법
氏族源流
379
시호
氏族源流
379
자녀
文化柳氏嘉靖譜
7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6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종합
父 : 安牧
安元崇
원(元)원주(原州)人 원선지(元善之)女
안(安)-유원지(柳原之)妻
안수(安垂)
안조동(安祖同)
안(安)-김수(金垂)妻
안(安)-김추(金錘)妻 * 初室
안원(安瑗)
안(安)-성석린(成石璘)妻
안(安)-기전룡(奇田龍)妻
안(安)-김사렴(金士廉)妻
녀(女) 안(安)씨
여흥(驪興)人 민유(閔愉)의 처(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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