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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출생(1945), 수필가, 서울대 언어학과 졸(1974),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죠지타운 대학원 졸(이슬람문학 및 중동관계 전공)(1984∼1986), 주 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근무(20년),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1992∼2012), 《한강문학》(2020) 추대등단, 한강문학 편집위원, 저서:《사하라》(김영사, 1987), 현)향토사연구 및 SNS 블로거, 발표작품:〈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어우당 유몽인〉, 〈오리정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 미술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외 |
①마크 트웨인 & 스토우 부인 하우스 탐방기
▲Mark Twain(1835∽1910) | ▲Harriot Stowe(1811∽1896) |
〈에필로그〉
케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파밍톤(farmington) 애비뉴에는 미국 문학의 2대 거목巨木인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저택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헤리엇 스토우의 집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집이 오누이처럼 서로 이웃을 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기서 부터 이 글 쓰기의 모티브(동기)를 잡는다.
《한강문학》은 원고량을 가늠하여, 마크 트웨인① 그리고 헤리엇 스토우 ②로 분재하기로 했다.
여기는 미국 북동부지역인 뉴잉글랜드에 있는 커네티컷 주이다.
지난 3월 20일부터 이곳 뉴잉톤 타워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작은 딸집에 체류한지 벌써 한 달 반이 넘어가고 있다. 딸 내외가 사는 이 아파트는 작은 사위인 제이닥(애칭)이 UTC로 출퇴근하는 파밍톤 타운과는 자동차로 10여분이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바로 파밍톤과 인접한 뉴브리튼 타운이다.
이 뉴브리튼 타운의 인구는 약 7만 3천명이다. 주도인 하트포드와는 약 15Km의 거리에 있다. 파밍톤이나 뉴브리튼이나 둘 다 주 도시 하트포드의 광역권 타운들이다.
커네티컷 주의 주 도시인 하트포드는 커네티컷 강(Connecticut River)이 그 도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흐른다.
이 강은 북쪽에 있는 캐나다의 퀘백 지역에서 발원하여 미국 쪽으로 들어 와 뉴햄프셔 주와 버몬트 주를 지나서 커네티컷 벨리를 지나 곧장 하트포드에 이른다.
그리고 이 강은 메사추세츠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다시 남부 커네티컷을 거쳐서 건너편에 롱아일랜드 사운드가 마주 보이는 대서양 연안에서 강물을 쏟아내며 그만 흐름을 멈춘다.
그런데 먼 옛날∽ 아! 지금부터 약 380여 년 전에 인근 플리머스 식민지와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살고 있던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635년에 바로 이 커네티컷 강변에 펼쳐진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로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역에 정착촌을 만들고 속말로 아예 말뚝을 박고 주저앉아 살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이 개척한 정착촌이 하트포드와 스프링필드였다. 그러나 중심지는 역시 하트포드였다. 특히 하트포드에 커네티컷 정착촌을 세운 지도자는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였다.
그 다음에 하트포드에서 커네티컷 강서 쪽에 있는 평야 파밍톤(Farmington)에 문학가, 사진작가, 화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시회개혁운동가 등 상당수의 진보적 성향을 지닌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00년대 초이다.
파잉톤(Farmington)은 옛날부터 농장(Farm)이 많은 타운(Town)이어서 그이름이 파밍타운(Farming+Town)을 줄여서 파밍톤(Farming+ton)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사람은 윌리엄 아이말리(William Imaly)라는 지주였다.
그는 이곳에 대농장인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개척하려다가 그 꿈을 줄여서 자기 이름을 붙인 아이말리 농장
(Imaly Farm)을 만들었던 것같다.
그런데 1853년에 죤 후커(John Hooker)와 그의 매형인 프란시스 질레트( Francis Gillette)가 아이말리의 땅을 몽땅 다 샀다. 이 죤 후커는 바로 토마스 후커가 하트포드 인근 지역을 커네티컷 식민지로 개척하는데 앞장 선 지도자의 후손이었다.
죤 후커의 부인인 이사벨라는 부부의 공동재산권을 주창하여 이를 1877년에 주의회를 통과시키는 등 남녀평등권을 주장했던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여성이었다.
이들 부부는 매입한 땅을 쪼개어 문학, 미술, 사진, 노예제도 폐지, 사회개혁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참여하고 있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팔게 된다.
물론 진보적 사상을 지닌 예술인이나 문학인들이 함께 인접해 살면서 서로 울타리 없이 담론하며 살 수 있는 타운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터를 값싸게 마련해 주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일부 땅을 산 사람 중에는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헤리엇 스토우도 끼어 있었다. 더욱이 헤리어 스토우는 바로 이사벨라의 이복 친언니였다.
①마크 트웨인 - 그는 누구인가?
바로 이 주소에 미국 소설 작가 중에서 2대 거물인 마크 트웨인과 헤리엇 스토우가 한 동안 오래 살았던 두 채의 집이 이웃해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뉴브리튼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 그 역사적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정차시키고 30∽40개의 돌층계를 올라가니 안내센터가 있었다. 이곳에서 유료 입장권을 산 후 일정 수의 그룹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안내 센터 바로 뒤에 있는 하우스겸 박물관에 입장하였다.
마크 트웨인의 집은 하우스 겸 박물관으로 꾸며서 일반에게 유료로 공개되고 있는데, 최소한 20여명이 모여야 문화해설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입장이 된다. 말하자면 개인이 마음대로 마크 트웨인의 집에 입장이 되지 않는다. 일종의 그룹 투어 형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는 1874년에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주재료는 벽돌과 목재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취미가 다양했고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을 많이 했고 실제 여러 해 동안 살기도 했기에 자기 집을 다양한 양식을 종합하여 특이한 집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의 설계와 건축은 물론, 집기의 배열과 배치까지 당대의 유명한 교회 건축가인 에드워드 포터(Edward Potter)가 담당했었다. 그러나 기본 건축 양식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고풍을 살리기 위해 고딕 양식에 마크 트웨인의 취향에 따라 리버 보트(River boat)의 윤곽이 드러나게 외관을 꾸몄다. 반은 기선 모양이고 반은 요새같은 모양으로 지었다. 일부 지붕은 뻐꾸기시계 모양을 하고 있다.
비록 집은 부인의 돈으로 지었지만 이 집에 들어와서 《톰 소여의 모험》을 창작 하여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마크 트웨인에게도 떼돈이 굴러들어 왔다.
그는 이 돈으로 1876년에 새로운 가구와 명화를 더 구입하고 내부도 새롭게 더욱 더 화려하게 재 단장하였다.
특히 3층은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휴식시간에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즐길 수 있는 멋진 당구대를 설치하였다. 응접실도 화려하게 꾸며서 술을 마시고 시가를 피우며 문학과 인생을 주제로 담론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미국의 유명한 《내셔널그래픽》 잡지는 유명인사의 10대 저택의 하나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 잡지에서 ‘이 저택은 모로코, 인도, 일본, 중국, 터키 등 여러 스타일이 섞여서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호화저택’ 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1층 현관과 응접실은 화려함의 극치라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 보아도 숨이 덜컹 멈출 정도로 화려했다. 모로코 궁궐의 내실보다 디자인이나 벽장식, 천장 장식이 더 자상하고 화려하다고 했다.
특히 19개의 방마다 색다르게 가구기 비치되고 장식되어 있어 특별함이 더했다고 했다.
식당은 온통 금박으로 치장했고 개인 서실은 청백색의 화려한 분위기가 참신한 아이디어가 솟아날 것 같은 인상적인 분위기였다.
그리고 1층에 있는 기묘한 화초로 가득찬 온실은
기막히게 좋아 보였다. 반원형 투명 유리창으로 덮힌 온실은 정원의 화초와 수목을 배경삼아 자연과 인공미가 앙상불되어 합일하는, 도의 경지를 자아냈다.
2층에는 안방 침실이 있었다. 초록과 노랑을 주색으로 삼고 한꽃 무늬가 장식된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크 트웨인, 문학가가 아닌 남자 ‘사무엘 클레멘스’가 그의 사랑하는 부인 올리비아와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던 화려한 낭만의 공간이 자랑스럽게 뽐내며 펼쳐지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침실에서는 꼭 부인 올리비아를 애칭인 “리비(Livy)”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을 “샘”이란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침상의 헤드보드는 검붉은 바탕색을 깐 갈색이었다. 아기자기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서 마치 중세의 귀족들의 침실에서나 느낄 수 있는 고풍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이 침대는 마크 트웨인 커플이 이태리 베니스를 여행할 때 한 가구점에 들려서 너무나 마음에 끌려서 애써 사 왔다고 한다. 헤드보드 밑에는 큼직하고 푹신푹신하게 보이는 베게가 옛 주인들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침대는 1910년 마크 트웨인이 케네티컷 레딩에 있는 자택 스톰필드에서 임종 때 함께 한 침대였다. 현재의 마크 트웨인 하우스 겸 박물관이 개관된 때 다시 제자리였던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아마도 가난한 집에서 거지 처럼 흙수저를 물고 태어 난 마크 트웨인은 언젠가 이태리 여행 때 왕자처럼 사는 모습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1881년에 그가 쓴 《왕자와 거지》는 엉뚱한 가공의 창작물만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왕자와 거지》의 창작 아이디어는 아마도 이집에 이사를 온지 7년 만에 이 침상에서 나오지는 않았을까?
이 집의 건축비용은 부인인 올리비아가 친정에서 받은 유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1881년, 땅 매입비는 31,000 달라, 건축비 7만 달라, 가구비 2만 2천 달라, 기타 난방시설 경보장치 등 다 포함하여 약 12만 달라가 저택을 완성하는데 든 총비용이었다.
이 집에 입주 한 것은 1874년이었다. 그 후 줄곧 17년간을 이 집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니까 1874년에서 1891년까지 이곳에서 거의 말년을 보낸 것이다.
물론 19세기에 돈 많은 미국 부호들이 자기네 집과 별장을 번지르르 하고 화려하게 지어서 남들에게 여봐라 하는 식으로 돋보이게 하려던, 이른바 졸부들의 도금시대의 양식도 가미하여 지었다. 그렇다 해도 이 집은 그 중에서도 호화 저택에 속했다. 방이 19개인데 각 방마다 디자인이 다르고 가구들도 서로 별나게 그야말로 다양하고 다채롭게 꾸며 놓았다. 몇 개의 방에는 로이스 콤포트 티파니의 작품들이 각자의 적당한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튼 당대 최대 최신의 기술과 재료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말년에 집안에 불행이 많이 생기고 경제적 사정도 좋지 못 해서 남에게 팔아 넘겼었다. 그 후에 한동안 사설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 역사적 건물로 지정받아 2003년에 〈마크 트웨인 박물관〉으로 다시 꾸미고, 유물을 정리하여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집에서 마크 트웨인은 그 유명한 소설인 《톰 소여의 모험》과 《학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창작해냈다.
이 세상에는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1001개의 명소가 있는데 그 중에 마크 트웨인의 집도 대부분에 한 축 낀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작은 마을인 플로리다의 가난한 집에서 그야말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4살 어린 나이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미시시피 강변을 따라 일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녔다.
첫 이사를 간 곳은 역시 강변에 있는 ‘한니발’이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톰소여의 모험》에서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등장한다.
이 마을은 미시시피 강변의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선객이 있으면 기선도 경유해 가는 부두도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어려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에 박혀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9세가 되면서 건강이 차차 회복되었고 그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8살 때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한니발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5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열 두 살이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눕기 전에는 지방판사와 변호사였지만 가계는 쪼들리는 편이었다.
가족 생계를 맏은 형 오리온은 벌이가 충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샘’(어린 시절 마크 트웨인의 애칭)은 학교를 그
만 중퇴하고 그 다음 해에 타운 신문인 〈미조리 쿠리어〉(Missori Courier)에 들어가 사환 겸 견습 식자공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형 오리온(Orion)이 운영하는 신문사 〈한니발저널〉(Hannibal Journal)에서 식자공 겸 편집직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 신문에 기사를 여러 편 쓰기도 했다. 그리고 21세 되던 해에 자기도 자립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고하고 한니발 마을을 떠났다.
그 때 샘(Sam)은 어머니께 성공을 할 때가지일체 도박과 술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줄곧 4년간 여러 신문사에서 현지 취재 기자로 일했다.
외지에 나가있는 동안에 샘(Sam)은 동생인 헨리가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던 ‘펜실바니아호’에 탑승했다가 1858년 6월에 그 배가 폭발하여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기도 했다. 그 때 헨리 나이는 20세, 샘은 23세였다.
‘샘’(Sam)이란 애칭은 마크 트웨인이 어렸을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본명은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이다. 그러나 집에서나 가까운 친구들은 ‘사무엘’ 대신에 그를 ‘샘’(Sam) 또는 ‘새미’(Sammy)라고 불렀다.
마치 토마스(Thomas)를 톰(Tom)이나 토미(Tommy)라고 부르듯이.
따라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필명(penname)이다. 마크 트웨인이 첫 작품을 발표했을 때 필명으로 ‘마크 트웨인’ 을 처음 사용했었다. 그런데 그의 필명인 ‘마크 트웨인’은 왜, 어떻게, 그렇게 지었을까?
당시 미시시피 강은 수많은 기선이 운항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샘의 꿈은 기선의 선장이나 수로 안내원인 도선사導船士, 즉 파일럿(Pilot)이 되는 것이었다.
샘은 어린 시절을 미시시피 강변에서 살아왔기에 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한 때 그는 파일럿(Pilot) 시험에 합격하여 기선(steam boat)의 수로水路의 깊이를 측정하고 뱃길을 안내하여 배가 얕은 물로 가거나 또는 암초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항상 강의 수심을 측정했었다. 때때로 홍수가 지거나 장마철이 되면 강의 수심도 달라짐으로 물의 깊이를 잴 수 있는 막대기나 로프에 척도가 마크(mark)되어 있는 자[尺]를 늘 지니고 다녔다.
웬만한 기선은 강물 깊이를 재는 단위인 패돔(fathom-6피트)으로 잴 때, 2패돔(12피트)이면 안전 깊이였다. 그러니까 수심이 약 3.6m 깊이면 배의 운행이 안전하다는 말이 된다.
미시시피 강의 뱃사람들이 수심 측정 단위로 패돔(fathom)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뱃사람들은 바다의 수심을 말할 때는 ‘한길’, ‘두길’ 이렇게 ‘길’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처럼 ‘길’은 일상용어에서도 쓰였다. 여기서 한길은 약 4m를 말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뱃사람들도 배 운항에 안전한 수심 깊이는 한 길(4m)로 생각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장에게 수로의 안전 깊이가 2파돔이 된다는 것을 알릴 때 ‘2파돔’에서 ‘파돔’은 생략하고, 다만 “눈금 둘!”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바로 “마크 트웨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눈금은 마크(mark)이고 둘은 투(two)인데, “눈금 둘”은 영어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된다.
중세 영어에서 쌍수가 발달되었기에, 실제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 내용에서도, 지역 사투리로 〈isn’t〉나 〈aren’t〉 대신에 뱃사람들은 〈ain’t〉를 즐겨 썼다.
아마도 자주 쓰는 어투(ain)에서 유추현상이 생겼을 터이기에 〈Tween〉보다 〈Twain〉이 직업적 특성상 보편적으로 쓰였고, 파일럿(Pilot)이 꿈이었기에, 필명에 트웨인(Twain)을 성(family name)으로 택한 것으로 유추된다.
따지고 보면, 중세에는 일부 지역에서 투(two)를 〈tween〉이라고도 했다.
영어에서 “2개 사이” 할 때 〈be+tween〉에서 〈between〉이 생겼다. 이 때 〈tween〉은 〈two〉를 말한다. 예컨대 영어에서 쌍둥이 자매를 트윈 씨스터즈(Tween Sisters)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특히 미시시피 강 뱃사람들에게는 〈tween〉 대신에 방언에 속하는 〈twain〉이 더 애용되었고, 이를 필명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미시시피 강에서 뱃사람들은 “트웨인!” 하면, “물길이 안전해요!” 라는 용어로 통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마크 트웨인은 22세였던 1857년에 미시시피 강을 운행하는 기선의 수로 안내원이 되었다. 그러나 1861년에 남북전쟁이 터지자 미시시피 강에서의 기선 운항이 중단되었고 실직자가 되고 만다. 그는 실직 상태에서 무작정 남부군에 입대하였는데, 노예제도 옹호에 회의가 생겼고, 또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겁이 나거나 자신이 없었는지, 2주 만에 그만 남군에서 탈영해버린다. 당시 미조리 주는 남부에 속했고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주였다.
그런 지역 분위기 때문에 샘은 지역 여느 소년들처럼 노예제도를 처음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형은 웬일인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샘이 남군에서 탈영하고 난 다음 어느 날, 부두에서 남부지역으로 팔려가는 12명의 남녀 흑인 노예들을 보았다. 노예들은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인 채,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샘은 이들이 마치 연어나 송어처럼 꾸러미에 엮여서 시장에 팔려 나온 상품으로 연상 되어 쇼크를 받는다.
또 얼마 후에는 한 백인 주인이 말썽을 부리는 노예에게 벌을 준다고, 빨갛게 달아 오른 쇳물을 퍼서 냅다 던지는 것을 보고 그만 대경실색하여 졸도를 하는 바람에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고 어느 글에서 실토한 적도 있었다.
그런 반면 무슨 까닭인지, 어떤 글에서 흑인(Blacks)과 가난한 백인들(Poor whites)은 인간 해충害蟲(human vermin)이라 써서, 지금도 마크 트웨인은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논란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을 목격한 후에 그는 당시 형인 오리온(Orion)이 사막지대인 네바다에서 일하고 있어 형을 찾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과 함께 역마차를 타고 서부여행도 경험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형 오리온(Orion)은 샘(마크 트웨인) 보다 10살 위였다. 처음에는 형이 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가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샘이 “마크 트웨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그 역할이 역전되어 죽을때까지 동생 신세를 지고 살았다.
부친 사망 당시 형 오리온은 22세였고, 샘은 12세였다.
샘이 학교를 중퇴하고 형이 운영하는 신문사에 취직 했을 때, 겨우 가족이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겨우 운영을 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제대로 보수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독단적으로 일을 지시하고 함부로 부려 먹었다. 그래서 이에 불만을 품은 샘은 형의 신문사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다행히 야간에는 짬짬이 도선사(pilot) 자격시험 준비를 해서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여객선의 도선사로 취직이 되었고 대우도 걸맞게 받고 월급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받았다. 월급은 250달라 였다. 지금 가치로 환산해 보면 약 7,000달라 정도라고 한다. 돈이 많이 생기자 객기를 부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돈은 책을 사서 독서하는데 소비했었다.
샘이 파일럿으로 돈을 잘 벌 때 이렇게 객기를 부렸다는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뉴올리언스에 있는 고급 식당에 갔다. 최고의 요리를 물으니 새우와 굴이라고 했다.
당시는 콜레라가 유행중이어서 해산물에 대한 위생문제가 대두되던 때였다.
“웨이터, 이 식당에서는 새우와 굴 요리가 최고라고요? 그런데 상하지 않고 싱싱하오?”
“물론입죠. 갓 잡아 온 생물이지요”
“그래도 난 믿을 수가 없소. 돈은 추가로 낼터이니 고급 브랜드 술 한 병을 쫙 뿌려서, 깨끗이 씻고 소독해서 요리를 해 오시요!”
“네? 브랜드 술로 씻어 오라고요? 술 값이 요리 값의 배나 되는데요?”
“허허! 이 친구 봐, 내가 돈 잘 버는 파일롯이란 말이요!”
이렇게 프린스(prince) 흉내를 낸다고 객기를 부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형에게 신세 진 것을 갚겠다고, 당시 최고급인 악어가죽 구두(12달라)를 선사하기도 했다. 현재 가치로 312달라의 구두였다.
아무튼 이때부터 가족 생계는 샘이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기선이 운항이 정지되었다. 샘도 그만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이번에는 형이 새로 미국 영토로 편입된 네바다에서 중견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어 형이 다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샘은 다시 형의 신세를 지는 형편이 된 것이다. 형은 네바다 행정 당국에서 제공해 주는 역마차를 타고 다니며 공무를 보았다. 톰은 이 역마차의 마부로 취업하여 형을 태우고 다녔다. 그러니까 요즈음 말로하자면 형이 타고 다니는 관용차의 ‘운전기사’ 노릇을 한 것이다.
형이 유일하게 동생보다 더 빛나던 때는 바로 그 때 뿐이었다. 그 후 샘이 마크 트웨인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버려 항상 동생의 그늘 아래서 살았다. 사실상 1897년 노후로 사망할 때까지도 동생의 경제적 후원을 받고 사는 처지였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미우나 고우나 형이었기 때문에 형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이나 형의 성격과 행동거지 등을 하나하나의 분신으로 여기며 자기의 여러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케랙터 형성에 투영시켜 고인이 된 형을 추모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마크 트웨인은 가문을 이어 갈 후손을 두지 못 했다. 외아들 랭던은 두 살을 넘기지 못 하고 유아 때 사망했다. 세 명의 딸 중에서 맏딸 수지는 24세에, 막내딸 진은 29세로 후손 없이 단명했다. 단지 둘 째 딸인 클라라는 88세까지 장수했다. 그녀도 외동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도 후손 없이 사망하여 그야말로 마크 트웨인은 친손이건 외손이건 간에 전혀 후손이 없이 다만 25권의 소설을 남겨 명목상으로 〈클레멘스 가문〉을 빛내고 있다.
여행이 끝난 후에 신문기자도 해 보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기자 생활을 통해서 만담과 재치의 명수인 재담가 아테머스 워더도 알게 되었고, 작가인 F.B. 하와도 친교하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느낀 바가 있어서 마크 트웨인은 자기도 글을 써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펜을 들게 된다.
그가 맨 처음으로 쓴 작품은 32세가 되던 1867년에 《칼라바라스의 저명한 뜀뛰 는 개구리》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 후에 다음과 같은 주요 작품들을 남겼다. 《철 부지의 여행기》(1869, 34세), 이 소설을 쓰고 나서 다음 해에 동부의 부잣집 딸인 올리비아 랭던(Olivia Langdon)과 결혼했다. 작품집은 《톰 소여의 모험》(1876, 36 세), 《도금 시대》(1873, 38세), 《학클베리핀의 모험(1884, 49세), 《인간이란 무엇인 가》(1905, 70세) 그리고 유고 작으로 《괴상한 타관 사람들》을 남겼다.
그의 소설이나 강연, 또는 신문에 쓴 글들에는 유머(humour)와 재치가 넘치는 재담이 많다. 촌철살인적인 날카로운 유머는 많은 작품 속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풍자하는데 한 몫을 했다.
“은행가란 맑은 날에 억지로 우산을 빌려주고, 비가 오는 날에는 냅다 우산을 재촉하여 되받아 가는 놈들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먹지 말아라”
“하기 싫은 일을 해보라. 입 꾹 다물고, 남이 바보로 여겨도 참아라. 입을 열어 서 바보가 되느니 입을 다물어 바보가 되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다”
헬렌 켈러와 만나서 그녀를 위대한 여성이 될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녀와 만났을 당시 켈러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트웨인은 이런 말 을 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앞을 못 보는 사람 같은 장애인을 가엾게 여긴단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은 몸이 멀쩡할지 모르지만 피부색이나 종교만으로 다른 이를 죽이고 차 별한단다. 그런 건 과연 멀쩡한 걸까?” 그래서 켈러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지만, 단지 몇 번 만났을 뿐임에도 그녀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된다.
마크 트웨인은 투자를 하다가 실패를 해서 쓴 맛을 본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투자에 대한 이런 익살도 남겼다. 더불어 유명한 일화로 신문에 쓴 칼럼으로
“모든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대놓고 썼다가 항의와 고소에 직면하자 사과문으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 (‘어떤’의 부정은 ‘모든’이고, ‘개자식이다’의 부정은 ‘개자식이 아니다’ 이다) 라는 말로 사과문을 썼던 적도 있다.
이는 《논리야 놀자》 같은 주로 어린이용 논리학 서적에서 자주 써먹는 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아이들 도서이기에 ‘멍텅구리’라는 단어로 순화되어 있다. 문장의 뜻을 뜯어보면 알 수 있지만, 두 문장 모두 미국 정치가들 중에 ‘개자식’ 이 포함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10월에는 투자를 절대로 하지 말라. 이 달로 말할 것 같으면, 주식투자에 특히 위험한 달이다. 다른 위험한 달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이다. 그 다음은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도 위험하다”
결국 일 년 열 두 달 모두 다 위험하다는 말이 아닌가! 사실상 1년 12달 다 위험 하다고 나와 있다! 결국 주식 같은 것은 1년 12달 결코 손대지 말라는 소리이다.
언젠가 한번은 자신의 사망설 뉴스가 엄청나게 그럴듯하게 떠돌았다. 이때 마 크 트웨인은 잽싸게 익살스러운 기고를 통해 이렇게 능청을 부렸다.
“그래! 마크 트웨인은 죽었다. 그런데 죽었다는 내 죽음에 관한 보도가 너무 뻥이 심하고 굉장히 과장되어 있다.”(Reports of my death have been greatly exaggerated)
이렇게 뉴욕저널의 기고문에 넣어 한 펀치를 날렸다. 말하자면 죽었던 마크 트 웨인이 자기가 죽었다는 뉴스가 너무 엉터리여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살아났다는 익살이다.
즉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냐고 사망설을 보도한 기자들을 유머러스하게 비난한 것이다. 이 말은 이후 《브이 포 벤데타》의 대사나 《킹스맨 : 골든 서클》의 공식 포스터 등 수많은 매체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매우 자상하고 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 올리비아를 매우 사랑하여 아내가 아프면 그는 이런 글을 나무에 걸어 둘 정도였다. “새들아, 너희들이 우는 것은 본능이니 울지 말라곤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울면 안 되겠니? 지금 우리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단다”
마크 트웨인이 올리비아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톰 소여의 모험》 등 많은 명작이 더디 나왔을 것이다. 부인 올리비아는 부잣집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돈 걱정 말고 이왕에 소설을 쓰려면 헤리엇 스토우가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처럼 베스트셀러나 명작이 되도록 쓰라고 자주 조언을 해주 었다. 그리고 헤리엇 스토우의 집 옆에 그녀가 친정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이른바 〈마크 트웨인 하우스〉를 건축했던 것이다.
당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는 명사들로 노예 폐지론자들, 여권운동자들, 문학인들도 부인 덕 분에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그들 대부분이 집 근처인 커네티컷 하트포드에서 살고 있는 이웃 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일생 동안 친교를 했던 사람은 작가이며 사회개혁운동가들인 헤리엇 스 토우 작가와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 Douglass), 윌리엄 하웰스(William Howells)였다.
특이한 점은 여성 브래지어의 후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가
당시 끈으로 묶게 되어 있는 브래지어 끈 때문에 옷 입는 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착안해서 발명 특허까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브래지어 대신 코르셋을 많이 입고 다녔기 때문에 트웨인이 발명한 후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 후크가 대박을 칠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아내인 올리비아는
“발명 같은 거 하려고 하지 말고 좋은 글이나 쓰세요” 라고 늘 조언을 했다.
그런데 마크 트웨인은 늘 글을 쓰면서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고 발명품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 했다. 그는 실제 발명품에 대한 3개의 특허권 소유자였다.
여성용 가슴 덮개로 뒷 쪽에 후크를 달아서 쉽게 착용할 수 있는 이른바 ‘블라자’는 바로 마크 트웨인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이 상품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당시는 너무나 앞선 ‘블래지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과학자나 발명가들과도 계속 친교를 맺어 왔다.
전화를 발명한 그래함 벨, 전구를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 경비행기를 제작한 라이트 형제들 그리고 니콜라 테슬라와도 친교를 했었다. 마크 트웨인은 발명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테슬라 실험실을 찾아가 하루 종일 그곳에서 머물기도 했다. 특히 1894년 봄에 테슬라 연구 실험실을 자주 방문했었다. 테슬라도 자기 연구소에 트웨인이 찾아오면 기꺼이 환영하며 아버지 나이 또래의 마크 트웨인에게 자기 발명품을 보여주곤 했다. 이렇게 니콜라 테슬라와 잦은교류를 하면서 계속 발명에 관심을 가져서 ‘풀 없는 신문 스크랩북’이나 ‘보드게임’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역시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제임스 페이지라는 사람이 만든 ‘페이지 식자기’(자동으로 식자를 교환해 가면서 인쇄할 수 있는 기계)에 3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비슷한 기계가 먼저 개발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이후 미국 경제대공황 등으로 인해 결국 파산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2015년 9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특히 에디슨은 1909년 그가 심장병으로 임종이 가깝다는 소식을 듣고 마크 트웨인이 임종했던 마지막 자택인 커네티컷 레딩(Rredding)에 있는 〈스톰필드 하우스(Stormfield)〉를 직접 찾아 왔었다. 그리고 최후 생전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그 필름은 남아 있는데 이 필름에 나오는 모습이 마크 트웨인의 마지막 생전의 동영상 모습이 된 것이다.
아무튼 마크 트웨인은 선량한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아서 평생 행복했으나 4명의 자녀 중 3명을 병으로 일찍 잃었다. 첫째인 장남 랭던은 생후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이때 슬픔이 얼마나 컷던지 자서전에서 트웨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 아들을 바깥에 데리고 나간 게 잘못이었다며 크게 자책할 정도였다. 남은 3명의 딸 중 2명인 큰딸 수지와 둘째딸 클라라는 각각 뇌수막염과 간질 발작에 의한 심장마비로 일찍 사망했다.
게다가 아내도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 심부전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죽은지 5년 뒤인 1909년에 남은 막내딸 진(Jean)마저 목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트웨인의 동생인 헨리도 증기선 폭발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을 했다. 이 때문에 트웨인은 죽기 전에 심히 우울증에 시달리다 1910년 74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편집인 하월스가 뉴욕의 장로교회에서 치루어주었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지인과 팬들이 무려 3천명이나 조문객으로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헬리 혜성이 지나갈 때 태어나서 살아생전에 트웨인 자신은 ‘혜성이 다시 지나갈 때 세상을 떠날 것’ 이라고 늘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실제로 그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트웨인은 생전에 이렇게 자주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1835년에 혜성과 함께 왔으니까 내년에 그 별이 오면 난 그 별과 함께 갈거라 기대하고 있지요. 만약 내가 헬리 혜성과 함께 가지 못 한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망이 되겠지요.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늘 환청으로 말해 주었지요. 〈의심하지 말라! 자, 여기에 헤아릴 수 없는 두 거물이 있도다. 그 둘은 함께 왔으니 함께 갈지어다!〉”
아무튼 혜성이 다시 나타나 사라질 때 마크 트웨인도 1910년 4월 21일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마크 트웨인의 예언이 정말로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면서 모두가 이를 희한하게 생각했다.
( I came in with Halley’s Comet in 1835. It is coming again next year and I expect to go out with it.
It will be the greatest disappointment of my life if I don't go out with Halley's Comet.
The Almighty has said, no doubt : “Now here are these two unaccountable
freaks;they came in together, they must go out together”.)
마크 트웨인의 묘지는 뉴욕 인근의 우드론 묘지에 있다.
마크 트웨인은 생존시에 계몽주의자로 제국주의를 혐오했다. 혐오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서 미국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다.
미국이 필리핀으로 쳐들어갈 때 제국주의 국가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전쟁으로 여겨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갈수록 미군이 필리핀인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에 분노하여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써서 미국을 학살자라고 분노어린 비난을 호되게 쏟아냈다.
때문에 이 책은 미국에서 24년간이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23년에서야 나오게 된다.
그밖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중미에서 벌어지는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지배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이를 풍자하는 글도 많이 썼었다.
이 때문에 “열등한 필리핀을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며, 필리핀 침략전쟁 및 학살을 옹호하고 또한 백인 우월주의 사상인 백인의 의무를 내세운 러디어드 키플링을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키플링이 그의 문학적 재능은 칭찬하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글도 썼다고 하는데 아마도 단순 혐오라기보다 애증에 가까운 연민의 투정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를 악마라고 비난하며, 그가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을 엄청 비난했다. 레오폴드 2세보단 덜하긴 했지만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 하는데 앞장서서 자원과 영토 탈취와 원주민 노예화 등 악행을 저질렀던 세실 로즈를 반어법으로 찬양하면서 비꼬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의 종교관은 그의 글에 나온 분노 어린 문장에서 당시 기독교 사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기독교에 대하여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랄하고 피를 흘리며 무자비하고 약탈하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서 우리의 신앙이라면서 자행되는 일이다. 지옥을 들이대면서 벌리는 범죄를 성경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지금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그는 절대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는 끔찍한 종교일 뿐이다”
트웨인이 늘그막에서 쓴 이 글은 100년 동안이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지난 2010년에서야 그의 사망 100주기 기념행사에서 비로소 공개된 글이다.
다만 트웨인의 ‘공식적’인 종교는 ‘장로교’였고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장로교 교회를 짓는 데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에머슨이나 헨리 소로우 등이 믿었던 이신론(Theism)을 신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노년에 젊은 테스라와 친교하면서 그의 종교관에 관하여 자주 함께 담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YMCA 간사이던 앤서니 콤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을 “진화가 안 된 원숭이” 라고 호되게 깠다. 콤스톡은 미국의 목사로 “대중문화가 사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근본주의자로 악명이 높았다. 콤스톡 때문에 한동안 미국 우체국에서는 해부학 교과서를 소포로 보낼 수 없었다.
21세기에 이와 똑같은 짓을 하던 게 바로 탈레반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는 에밀 졸라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라며 졸라를 옹호했다. 그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자 그를 추모하는 글도 남기면서 살해당한 게 아닐까 여기기도 했다. 졸라를 지지하는 문단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특이하게도 잔 다르크에 관심이 많아서, 그녀를 다룬 소설을 가명으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저서 《도금 시대》(Gilded Age)에선 미국 정치인을 더럽다고 엄청나게 풍자했으며, 정치적 비리와 선거에 대한 여러가지를 콕 짚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실제로 미국 정치인들에게 비난도 많이 받았으며 교회에서도 그를 사탄이라며 비난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금시대’라는 명칭은 실제로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겉으로는 번영하고 있던 시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겉보기만 번드르르하다 해서 도금한 것 같다는 뜻이다. 미국 교회들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가출을 유도하는 문제작이라고 아이들에게 읽지 말라는 권고를 하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이 한 말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다.
“거울에 비친 너의 모습을 늘 보고 웃어라. 그러면 너는 유머(humour)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나의 인생 좌우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