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사 회주 무공
길에서 만나는 생각과 인연
세상 살다보면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운수납자라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무는 것이 우리 출가스님들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떠나는 걸음은 가벼워도, 가야 할 곳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안동 근처 등운산 자락 고운사를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됩니다.
고운사로 올라가는 숲길은 고요한 선정의 자리입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숲을 이루며 자라나는 나무처럼, 혹은 가냘프지만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풀처럼, 푸르름을 띄며 세월 잊은 고운사 가는 숲길은 성성합니다. 자연 안에 있으면서도 출가사문의 고운사는 높은 벽 하나 없어도 자연 그대로 고향 같은 그런 사찰입니다.
산천 곳곳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우리나라이지만 그 가운데 때 묻지 않은 곳도 많지요. 그래서 일 년 내내 침묵의 성을 쌓아 만든 작고 작은 인연들을 마음에 모아 길을 찾아 나섭니다.
떠나려 바랑을 꺼내놓는 것 만으로 설레어옵니다. 마지막 불사라고 공을 들이고, 회주라는 소임을 살다보니 살림살이가 제법 많이 늘었습니다. 문 가까이 둔 바랑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사찰 살림살이를 살다보면, 홀가분하게 떠나도 다시 곧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단지 떠난다는 이유만으로 꼭 필요하지도 않는 짐을 꾸리면서 다가올 인연에 대한 설렘을 가져봅니다. 세납 육십이 넘고서도 이런 설렘이 있기에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인연이 다한 자리라 생각이 들면 다시 떠나는 가 봅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은 산을 찾습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 산에 올라가서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수행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산을 찾음으로서 숲엔 길이 만들어지고, 후인들은 그 길로 산을 찾고 사찰을 찾아 들어오지요. 그 인연들을 훗날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인연을 가볍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산에 난 길은 쉽게 따라 걸을 수 있지요. 하지만 산에서 살아가는 저는 숲으로 난 길을 만나면 조심스레 제 모습을 떠올립니다. 수많은 인연으로 얽히고 설킨 인연의 길목에서 제 모습을 관조합니다. 나의 길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며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이렇게 산길을 걸으며 수행 아닌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저의 작은 위안입니다.
길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모습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의미를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조고란 주의한다, 살펴본다의 뜻이고, 각하는 발밑이란 뜻이니, 조고각하는 발밑을 주의해 소홀히 행동치 말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이 뜻은 원래 자기 발밑도 못 보는 사람이 자꾸 남의 발밑을 먼저 보려고 하는 것을 경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흡사 제 허물을 갖고 남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 아닌가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남 최고의 지장도량 고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 고운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등운산 자락에 있습니다.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며 지장보살 영험성지로 유명합니다. 옛부터 이 지방에서 내려오는 민담에 죽어서 저승 가면 염라대왕이 묻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지장도량 고운사에 다녀왔는지 물어 본다는 겁니다. 마곡사 기둥을 돌아보았는가 하는 염라대왕의 질문과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의 우환과 즐거움을 함께 한 고운사라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생전에 꼭 가보아야 하는 사찰이기에, 염라대왕을 시켜 어떻게든 가게 만드는 이 땅의 불심의 깊이를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있는 사찰 고운사는 눈에 큰 들어오는 전각들이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초라해 보이는 고불전과 사천왕상 등의 고운사는 내방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작으면서도 정감 있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조계종의 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본사 격에 비해 고운사는 어쩌면 다른 본사 수말사 사찰보다 작게 느껴지는 사찰 입니다. 그러나 지장도량답게 고운사는 자연과 함께 다른 사찰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아한 기세를 품고 있습니다.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는, 고운사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참배객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그 옆으로 명부십대왕의 상호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하지요. 이런 이유 등으로 해동제일의 지장도량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화엄종의 시조 의상 대사가 창건한 고운사
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고운사의 창건과 관련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29년(영조 5) 신유한이 지은 <고운사사적비>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신유한은 1728년 <운수암기>를 지은 데 이어 <고운사사적비>도 지었는데, 이 자료에는 ‘고운사에 대해서는 신라의 의 상 조사께서 자리를 잡은 이후 이 사찰을 개창하였습니다. 고려 건국 초에는 운주화상이 계속해서 이 곳을 중수하였으며, 송나라 천우 선사가 더욱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도선 스님이 발원하여 석조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다층의 부도도 봉안하였다.’고 고운사의 창건과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 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 의 천하명당에 위치했다고 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합니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과 여지 대사와 여사 대사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최치원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고운사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지요.
고운사를 세상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호랑이입니다. 일명 ‘사찰을 지키는 호랑이’라 불리는 벽화가 고운사 만세전에 그려져 있는데, 사람이 위치를 달리해 보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호랑이 털이 달라 보입니다. 또한 호랑이 눈동자도 보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응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호랑이의 눈빛을 보면서 항상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라는 선조들의 깨우침은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몇 년 전, 무상한 세월 앞에 늙은 호랑이는 새롭게 조성되어 참배객을 맞고 있습니다.
고운사는 오랜 사찰의 역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과 함께 등운 산의 절경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등운산의 아름다움은 이 곳을 참배하는 이들에게 많은 감명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특히 절에 이르는 500여미 터의 진입로는 빽빽한 소나무가 좌우에 펼쳐져 있어 ‘솔굴’로 불릴 정 도로 유명하지요.
도선 국사와 고운사를 중흥시킨 스님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 국사가 고운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5법당 10방 사(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 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 국사께서 조성하였다고 하니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1482년에는 석가여래불상을 안동 갈라산 낙타사로부터 옮겨와서 대웅전에 봉안한 고운사는 1646년에는 소영의 사리탑을 건립했습니다. 이후 고운사는 1668년에는 극성ㆍ승묵ㆍ덕종 스님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고, 처순 스님이 천왕문을, 설행 스님이 봉황문을 신축하였습니다. 1803년 4월에 적묵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1804년 2월에 문찰 스님이 중건하였고, 1812년에는 의암 스님이 운수암을 중건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인 17세기에는 극열한 불교 탄압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진행된 17세기 고운사의 중창 노력은 불교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695년에 진행된 대규모의 중창 불사는 조선 초기의 부진했던 사세를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고운사는 19세기에 들어와 1803년, 1835년의 두 차례에 걸쳐 화재를 당하는데, 특히 1835년에 발생한 화재는 대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고운사는 소실된 전각들을 중창, 보수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갔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 고운사를 통해 여러 명의 고승들이 배출됩니다.
함홍치능 대사는 19세기의 대표적 고승으로 후학 양성에 힘썼는데, 그의 문하에서는 주로 화엄학을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걸출한 고승들이 배출된 고운사는 일제시대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의 건물에 2백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 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삼십여 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운사는 본사의 위상을 갖추면서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 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만약 길을 떠난다면, 마음을 내려놓고 호랑이가 사찰을 외호하는 고운사로 걸음을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솔바람 깊은 향기에 잊고 지냈던 과거의 향수가 문득 생각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