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는 내겐고향, 산꾼들에게는 디딤돌 같은 곳"
소속한국산악회
등반경력1986년 히말라야 참랑 등정
1990년 그랑조라스·아이거 북벽 등반
1993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
1996년
매킨리 남벽 등반
1997년
가셔브룸4봉 서벽 등반
1998년 유럽 알프스 등반
1999년 알프스 4,000m급 봉 순례등반
1999년 영국 글랜모어 UIAA 합동등반
2000년 알프스 4,000m급 봉 순례등반
2001년 이후 샤모니 거주
등반의 본질은 무엇일까? 더욱 높고 더욱 험난한 루트를 추구하는 머메리즘인가. 아니면 자유인가.
허긍열씨(許兢烈·37)는 그 해답을 자유에서 찾고 있다.
대학시절인 86년 히말라야 참랑(7,319m) 등정으로 고산 등반을 경험한 이후 90년 알프스 그랑조라스와 아이거 북벽, 93년 탈레이사가르(6,905m), 96년
매킨리(6,194m), 97년
가셔브룸4봉(7,925m) 등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난이도와 높이를 더해가며 여러 대륙의 명봉들을 등반했다.
그렇게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가 98년 이후 알프스에만 몰두했다. 98년 그는 대학 시절부터 머릿속에 두었던 봉우리와 빙하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99년과 2000년 두 해 여름에는 서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알프스 산맥에 솟아 있는 명봉들을 섭렵했다.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언제나 알프스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2001년 6월 아예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인 샤모니에 주저앉았다. 알프스 등반은 그가 원하는 자유를 주었다. 어느 봉, 어느 빙하를 등반하든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누구의 신세를 질 이유도 없었다. 그는 산에서 명성보다 자유를 추구한 것이다.
남다른 스타일로 험난한 대상 추구허긍열씨는 9월 중순 잠시 귀국했다가 10월16일 다시 샤모니로 떠났다. 추석과 부친 제사 때문이다. 그는 3남3녀 중 다섯째로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구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은 집을 떠난 이후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름방학이면
낙동강가의 친척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지내도록 했다. 땅을 알아야 삶을 안다는 지론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어린 시절 경험한 시골 생활이 그를 산으로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시골 생활이 지겹고 힘들었을 텐데 저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홀로 낚시도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캠핑도 다닌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암벽등반에도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스릴 넘칠 것 같았던 거였죠.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앞산에서 만난 우정산악회 회원들이 산악회에 가입하면 바위를 가르쳐주겠다고 꼬시지 뭡니까.”
계성고 2학년 봄이었다. 그 다음 주부터
허긍열은 우정산악회 선배들과 어울려 대구 주변의 산이란 산은 다 찾아다니고, 바위란 바위는 다 오르내렸다. 84년 영남대 기계과에 입학하자마자 한국산악회 대구지부에 가입했다. 고3 때 산악회가 흐지부지 해체되는 바람에 함께 등반할 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허긍열은 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의 등반 스타일은 남달랐다.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바위가 더 좋았고, 남들이 피하는 힘든 등반이 더 즐거웠다. 암벽화보다는 빙벽화를 신고 바위를 오르는 날이 많았고, 빙폭보다는 눈과 얼음 덮인 바위가 더 좋아 험난하고 위험한 혼합벽을 찾아다녔다.
장비를 철공소에서 만들어 쓰기도 했다. 토왕폭 등반을 앞두고 철공소에 근무하는 선배가 바일을 만들어주면서 쇠가 너무 강하면 부러질 염려가 있다며, 연한 재질의 쇠로 바일을 만들어주는 바람에 토왕폭 정수리에 올라설 때까지 피크를 수없이 펴가면서 등반하기도 했다.
“부모님께서 제가 산에 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러면서도 여러 모로 도와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솜을 누비고 비닐을 씌워 매트리스를 만들어주셨고, 아버지께서는 창고에 넣어두었던 하이포라 현수막으로 비박색을 만들어 주시도 했으니까요. 매트리스는 보온이 전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비박색은 정말 오래 사용했습니다. 90년 아이거 북벽 등반 때도 긴요하게 썼으니까요.”
선배들은 86년 봄 아직 햇병아리인
허긍열을 히말라야 원정에 참가시켰다. 한산 대구지부 창립 35주년 기념 참랑(7,319m) 등반대로, 목표도 뚜렷하고 부담도 많은 등반이었지만, 워낙 열심인 그를 대원으로 선발하는 데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캐러밴만 20일 이상 걸리는 힘든 원정이었다. 해발 6,000m대 캠프에서 눈사태를 맞고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폭풍설이 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베이스캠프로 줄행랑치다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크레바스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긴박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악천후가 계속되는 등 난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선배 대원과 함께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신출내기로서 7,000m급 고봉에 올라선 그의 눈앞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로체,
마칼루,
초오유 등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펼쳐졌다. 모든 게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게
허긍열에게는 고산등반의 시작이었다.
부친이 6·25 참전용사로서 국가유공자인 까닭에 8개월로 군복무로 마칠 수 있었다. 87년 가을 제대한 후 1년간 그는 입대 전과 다른 스타일의 등반을 추구했다. 입대 전에는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체력 강화에 몰두했으나, 제대 후에는 고난도 암벽 루트를 찾아 전국 암장 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한 2년 난도 높은 암벽루트 등반에 몰입하던 그는 90년 졸업반이 되자 마지막 남은 학창시절 동안 좀더 다양한 대상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알프스를 선택했다. 선배 두 사람과 함께 나선 알프스 원정에서 그는 그랑조라스 북벽의 크로스퍼과 워커스퍼 루트를 등반하고, 이어 아이거 북벽도 등반했다. 외국 팀들은 감히 나서지 못할 정도로 악천후가 몰아치는데도 그는 등반을 강행하곤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돌로미테를 순례하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사흘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등반이렇게 산에 몰두하면서 지내다 보니 책과 가까울 리 만무. 졸업식이 다가왔는데도 그를 받아주는 직장은 한 곳도 없었다. 결국 졸업 후 ‘취직 재수생의 길’을 걸어야했지만, 한 해 동안 책에 파묻혀 지낸 덕에 이듬해 한국전력에 입사, 울산 화력발전소에 근무하게 되었다.
다른 직장에 비해 시간도 많고 자유로와 주말 산행뿐 아니라 대학시절처럼 동계와 하계산행도 보름씩 할 수 있었다. 사규를 어기지 않고도 해외원정이 가능해 93년에는 인도히말라야의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에 나섰다. 처음 시도하는 히말라야 거벽 등반이었기에 등반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게다가 날씨 운도 따라주지 않아 실제 등반한 날짜도 며칠 되지 않았다. 결국 벽 중단부인 해발 6,400m 지점에서 등반을 끝맺어야했다.
“무엇보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가 갈릴 정도로 추웠으니까요. 그러나 친한 선후배와 어울려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소속이 다른 선후배 산꾼들끼리 원정대를 만들었기에 굴레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각자 원정비를 냈기에 스폰서에 대한 부담도 없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거죠. 지금 돌이켜 봐도 힘들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등반이었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은 주말 산행으로 만족하며 지냈다. 알프스를 비롯해 여러 차례의 원정 기회가 왔지만 회사 분위기를 생각해 차마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근질거렸다. 또다시 원정병이 돋은 것이다. 96년 봄 어느 날 결국 그는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직장 상사는 황당한 행동에 곰곰이 다시 생각하기를 부탁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별러온
매킨리를 찾았다. 거기서도 남들이 찾지 않는 루트를 찾았다. 수직고 2,000여m 높이의 남벽이었다. 후배 3명과 함께 베이스캠프 이후 1주일을 등반기간으로 잡았다. 그러나 출발 직후부터 지속된 악천후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하루 하루 날짜가 늘어나면서 식량도 떨어지고 연료마저 바닥이 났다. 너무 추워 이중화를 신은 채 침낭에 들어가 자곤 했다. 2~3인용 텐트에서 4명이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 홀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자일에 확보한 채 설사면에서 잠을 잔 날도 허다했다. 그런 날이면 밤새 흘러내린 눈가루를 뒤집어 써 설인 같은 모습으로 아침을 맞곤 했다.
마지막 사흘을 남겨놓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면서 지내야했다. 확보용 장비도 다 떨어져 후퇴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편안히 가졌다. 적어도 남벽에서 영원히 잠들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발 한 발 정상으로 옮겼다. 결국 베이스캠프 출발 2주일만에 북미 최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매킨리 최난 거벽이라는 남벽 등반에 성공했지만, 그는 발가락 하나를 대가로 지불해야했다.
산서적 번역 출간 위해 출판사 차려귀국 후 그는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을 시작했다. 외국 산서적 번역이었다. 이미 92년 '창가방 그 빛나는 벽' 번역서를 펴낸 바 있지만 책이 잘 팔리지 않자 출판을 맡아줄 데가 나서지 않았다. 그래도 번역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은 그는 아예 출판사를 차릴 결심을 했다. 새로운 직업으로서도 어울리는 일이다 싶었다. 설악출판사를 차리고 '세비지 아레나', '위험의 저편에서', 그리고 '왜 산에 오르지' 등 치열한 등반 활동과 등반 철학에 대한 책을 펴냈다.
“86년 참랑 등반을 마치고 카트만두 시내 관광을 하던 중 외국 등반가들의 명등반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머니를 털어서 산 책이 '창가방 그 빛나는 벽'이었습니다. 그림만 보아도 정말 좋더군요. 내용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 하나까지 음미해가면서 읽다보니 나 혼자만 읽고 끝나서는 안되겠다 싶어지더군요. 후배들도 읽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게 생긴 거죠. 그래서 92년 번역 출간하게 된 겁니다.”
번역 출간에 대한 꿈은 컸지만, 어렵게 책을 펴내도 사보는 이가 별로 없었다. 첫번째 책은 3,000부를 찍었다. 그러나 판매가 되지 않자 두번째 책은 2,000부, 세번째 책은 800부, 그리고 마지막 책은 400부로 부수를 줄였지만, 96년 마지막 책을 출간한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박스에 담겨 있는 책이 있을 정도로 책을 찾는 이가 없었다. 결국 외국 산서적을 출간해 많은 산악인들에게 읽히도록 하겠다는 그의 꿈은 흐지부지 깨지고 말았다.
96년 말부터 한국산악회 편집위원으로 사무국에 근무해온 그에게 이듬해 여름
가셔브룸4봉 서벽 등반의 기회가 왔다. 그런데 베이스캠프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등반 열정이 식고 말았다.
매킨리 때 입은 동상 부위에 고름이 차는 등 병이 재발하면서 등반 의지가 꺾였다. 게다가 처음 경험한 대규모 원정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원조로 공격조를 열심히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그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공격조의 철수를 돕기 위해 제2캠프에 올랐다가 커니스가 무너지면서 추락,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리는가 하면, 마지막 캠프에서 만난 공격조에게서 건네 받은 정상 필름을 집어넣은 배낭이 눈이 무너지면서 1,000여m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공격조로부터 원망도 사야했다.
“알프스 등반 때도 그랬고, 탈레이사가르 등반 때도 그랬습니다. 가까운 선후배들끼리 어울려 부담없이 등반하다 보니 성패를 떠나서 모든 게 즐거웠습니다. 베이스캠프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큰 원정대이다 보니 그런 게 어려웠습니다. 등정에 대한 부담을 갖다 보니 대원들 대부분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등반할 수밖에 없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실컷 등반했다는 성취감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가셔브룸4봉 등반을 통해
허긍열은 자신의 등반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90년 여름 알프스 등반의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샤모니가 그리워졌다. ‘내 스타일에 맞는 등반을 할 수 있는 곳이 알프스’라는 판단이 섰다. 실행에 옮겼다. 이듬해 98년 여름 알프스 등반시즌이 다가오자 한국산악회 사무국에 사표를 내고 후배들과 샤모니로 떠났다.
그랑조라스의 프티 매킨타이어 루트, 프티조라스, 몽블랑 동벽과 남벽 등 그간 머리 속에 담아두었던 루트를 죄다 찾아 올랐다. 그에게 등반의 본질은 자유였다. 자유를 만끽하게 해주는 산이 알프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산악마을 샤모니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알피니즘이 태동한 곳이고, 그 분위기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가슴에 와닿는 곳이죠. 여름 등반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겨울에 또다시 샤모니를 찾았습니다. 알피니스트들에게 에덴의 동산으로 불리는 아르장티에르 빙하에서 1주일간 지내면서 등반도 하고 낮잠도 실컷 자는 등 어느 누구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서 지냈습니다. 멍하니 있기만 해도 좋은 곳이 제게는 알프스인 것 같습니다.”
99년 여름과 2000년 여름에는 알프스 동서 명봉 순례 등반에도 나섰다. 슬로베니아의 트리글라브도 등반하고, 중부 지역의 뮌히 일원의 고봉들, 체르마트의 몬테로자, 최동부인 생모리츠의 베르니나 등 알프스의 4,000m급 명봉들을 20여 개나 올랐다.
그렇게 3년 연속 알프스를 찾았으면 지칠 만도 한데 그는 달랐다. 2000년 가을부터 근무한 무역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알프스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어 선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01년 4월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보따리를 싸 가지고 샤모니로 떠났다.
“여기 저기 다녀봤지만 알프스만큼 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침 먹고 해발 3,000m대에 올랐다가 점심 때 다시 내려올 수 있는 곳은 아마 알프스밖에 없을 겁니다. 특히 샤모니는 제겐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알피니즘을 느끼면서 산다는 게 제게는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요.”
“알프스 등반과 스키는 나의 삶”허긍열씨는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돈을 아껴 쓰면 10년은 아무 일 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겠다 생각하고, 샤모니로 떠났다. 하지만 요즘 아파트를 전세 내 지내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여름에는 트레킹이나 몽블랑 등반 가이드를 하고, 겨울에는 빙하스키 가이드를 하고 있다. 홈페이지(www.goalps.com·이메일 vallot@hanmail.net)에 알프스 등반과 스키에 대한 정보과 사진도 올려놓았다. 틈틈이 돈을 벌어야 하루라도 더 알프스에서 지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한동안은 한 10년 더 직장 생활하면서 돈을 모은 다음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왜 더 일찍 샤모니로 오지 않았나 후회되기도 합니다. 그랬더라면 더 험난한 등반을 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알프스는 산악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가야 하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하는 산악인이라면 더욱 그렇죠. 사실 아무 것도 모르고 히말라야 고봉 원정에 참가했다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런 과정만 겪은 나머지 귀국 후 산과 멀어진 선후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면에서 알프스는 디딤돌 같은 곳입니다.”
허긍열씨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95년 결혼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깨졌다. 때문에 3남3녀 중 다섯째인 그를 볼 때마다 형제들은 마흔이 다 되가는데 이제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산에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걱정을 많이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한다.
허긍열씨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결국 생활에 얽매여 산과 멀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비현실적으로 지내서는 안 될 것 같아 고민도 많이 한다. 하지만 미루다 보면 결국 하고픈 일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지금의 생활을 뒤로 미룰 마음은 없다.
“이제 알프스는 제 고향이나 다름없고, 등반과 스키는 제 삶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샤모니를 거주지로 한정짓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은 샤모니 이상 좋은 곳이 없지만, 언젠가 샤모니가 좁다고 느껴지면 또 다른 곳을 찾아 떠날 겁니다. 남미 안데스산맥도 좋을 것 같더군요. 접근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오지로 남아 있는 곳이니까요.”(한필석 기자)
ㆍ기고자 :
ㆍ발행일 : 월간산 2002년 11월 (3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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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감동입니다.^^
저는 지금 창가방 그 빛나는 벽을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후배들이 이 책을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른쪽부분이 보이지않아 스크랩해갑니다 스크랩해서 메일에서보니 아주잘보이는군요 기사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