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고린도전서 1 : 1-17 요절 / 고린도전서 1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지난 6월에 대통령 자문 정책위의장이 현 정부를 훈구파에 맞서는 초기 사림파에 비유를 했다가 말이 나왔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백성을 착취하던 훈구파에 대해서 원칙과 개혁을 내세우며 도전했던 그 초기 사림파를 지칭해서 한 말인데, 일반적으로 국민들의 인식은 사림파라하고 하면 동인,서인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동인은 남인,북인,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진 분파와 정쟁의 집단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분파와 당쟁의 역사로 인식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분파와 당쟁으로 날을 새운 비효율과 분열이 가득한 한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안에서도 분파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역사도 분파와 분쟁이 있으면 외면당하는데, 교회에서 분파와 분쟁이 발생하면 영혼들을 담거나 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분파문제가 발생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화합하고 동역하며 평강과 은혜가 충만한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서신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그 형제 소스데네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개척된 곳입니다. 철학과 지혜의 도시 아테네에서 너무 복잡한 이론을 펴다가 생명역사를 이루지 못한 바울이 보다 말씀 중심으로 심플하게 메시지를 전하여 복음의 능력을 다시금 체험한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12개가 넘는 우상신전이 위치하고 있어서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죄악된 문화가 어느 곳보다 왕성한 곳이었습니다. 거친 뱃사람들과 타락한 세속문화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 강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힘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였을 때 다른 도시는 다 믿어도 이곳만은 믿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이곳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사상과 죄악과 생각과 문화라도 능히 찍어 쪼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의 첫머리 인사말을 통해서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원래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세우심을 입은 12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12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늘 자신이 사도로써 부르심을 입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간적인 권위나 형식에 근거하기보다 오직 믿음으로 영접하는 데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고 영접하는 것이지 분석하거나 인간적인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교회란 어떤 모임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공식적인 호칭을 사용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뾰족한 첨탑이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건물지붕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님이 길다란 가운을 입고 성도들을 문밖에 까지 나와 환영하고 영접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는 근거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계속해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을 캠퍼스 목자로 세계선교역사의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씀을 기초로 영접하였으면 그 부르심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다만 지역을 전도대상으로 하는 일반교회는 아닙니다. 캠퍼스에서 나라와 사회의 미래를 이끌 대학생들을 주로 전도하고 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특수사명을 가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불러주신 사도로서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에게 편지 머리말에서 평강과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4-7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감사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할 때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습니다. 요번에 학생선교여행팀이 유럽 주요나라들을 한바퀴 돌고 왔는데, 여러 분들이 우리 센터를 떠나 멀리 나가 있으면서 우리 아산UBF를 떠올릴 때 어떤 생각이 나셨습니까?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생겼습니까? 이름만 떠올려도 불평불만이 생기고 왕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 감사로 충만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고대의 중요한 교통중심지, 상업중심지입니다. 이런 곳은 원래 죄악이 가득하고 인심이 사납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런 도시에서 예수님을 순수하게 영접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장 죄악된 곳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신기하고 놀라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죄악된 도시에서 어떻게 그렇게 순수하게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따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늘 감사함이 가득하고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나사렛대학교가 있는 천안과 호서대학교가 있는 아산이 어떤 곳입니까? 또 오늘날 우리가 있는 캠퍼스가 어떠합니까? 공부하는 분위기는 없고 전체적으로 먹고 마시고 놀고 사귀고 즐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 학생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서울에서, 성남에서, 안산에서, 성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도 감사드릴 감사제목이 넘치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감사제목이 있습니다.
둘째, 풍성한 성령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각종 다양한 은사가 성도들 가운데에서 드러났습니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각종 언변과 온갖 지식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메시지를 잘 전했습니다. 그들은 설득력있게 예수님이 주님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지혜있고 힘있게 증거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풍성한 말씀의 은사로 인하여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늘 권세있는 메시지로 인하여 마음에 큰 감동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은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풍성한 은사들을 생각할 때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습니다.
셋째, 재림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섬기는 믿음도 있고, 십자가에 대한 믿음, 부활의 믿음도 있는데, 제일 수준높은 믿음은 재림신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재림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세상이 진정한 소망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루시실 새하늘과 새땅 영원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셔서 평강과 의로 다스리시는 영생하는 하나님나라를 참 소망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그런 차원높은 재림신앙 가운데 소망이 풍성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목자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자는 사람을 돕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돕고 섬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양들을 볼 때 바울과 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돕다 보면 사람만큼 부담스럽고 사람만큼 어려운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만드는 직업인 ‘선생의 변은 개도 안먹는다’는 말이 있으나 우리 UBF에서는 ‘선생의 변은 개도 안먹지만, 목자의 변은 나오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양들 때문에 부담과 스트레스가 가득한 목자는 불행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목자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양들을 바울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양들로 인해서 감사하고 양들로 인해서 행복할 줄 아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들을 늘 부족하다고 여기고, 늘 죄악된 존재로 여기며 그들을 개조하고 뜯어고칠 생각을 하는 목자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양들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목자는 양들로 인해서 행복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가 보기 나름인 것입니다. 행복한 목자 감사가 충만한 목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양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를 기도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고린도 성도들을 지켜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고린도 교회에는 갖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린도 전,후서 성경에 나타나는 문제중 큰 것만 따져도 열가지가 넘는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고 견고케 하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양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가슴에서 자라나는 법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 보기에 언제나 양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자가 양들을 늘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본다면 목자나 양이나 모두가 함께 불행해 지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가운데에서도 양들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행복한 목자가 될 수 있고 행복한 목자가 양들도 행복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2. 온전히 합하라
그러면 바울이 본 편지를 보내며 고린도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온전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는 바울로부터 고린도 성도들이 받아들여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현재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 중 가장 첫 번째 문제는 분쟁하는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분쟁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 역사가 방해받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투는 내용이 무엇이며 이들이 다투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 교회 내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세례를 준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분파를 만드는 일이 생겼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는 바울파라고 하고, 이후에 고린도 교회를 섬긴 아볼로가 있을 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볼로파라고 하였습니다. 후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베드로가 있을 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파라고 하였고 이도 저도 아니고 내세울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파를 만들어서 근본적인 그리스도파라고 칭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심히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분파를 만들고 분당을 지으라고 하신 일이 없으시고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도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자기 이름을 내세우며 분파를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렇게 분파를 만들고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결국 교회 안에서 자기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목자의 명성을 내세우며 결국 자기들이 잘났고 자기들이 우수하며 자기들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앞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분파와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가지 입니다. 다시금 실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나를 앞세우는 것이나 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 것이나 나의 이론을 펼치는 것보다도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을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높이고자 방향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놓을 때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높이고자 하는 분명한 방향을 가질 때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준 것은 예수님께 합하는 의미이지 바울과 합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죄사함을 주신 분도 바울이 아니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심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몇사람 외에는 직접 세례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라고 하는 것부터 없어져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을 증거한 바울의 이름은 자랑하지 말도록 권합니다. 바울은 양들에게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높이고 자기의 이름은 낮추는 본을 보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임에서도 분파하는 문제나 상처받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혹은 교만하여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들은 모두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보면 자기중심임을 보게 됩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상처나게 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섭섭한 마음과 쓴뿌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나보다도 예수님, 나는 어찌되든지 예수님이 높아지고, 내가 비록 아프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내 삶에 가득 채우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어떤 문제도 믿음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산 UBF는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세워지고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은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저항하거나 어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우고자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우리들을 강성하게 복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tlafudd 주님으로 모시고 복음적인 제자들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일꾼이 전국에서 가장 적으나 오히려 많은 새로운 양들이 몰려오는 역사가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교훈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영접하여 더욱 성숙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우며 부활을 믿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든지 축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은 믿음그대로 예수님을 나의 마음의 주인으로 나의 주님으로 마음 중심에 모실 때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