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혼수(婚需) 카시미롱 담요
개암 金東出
넓은 유리창으로 봄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3월의 한나절. 따스한 햇볕에 무거운 몸도 한결 가벼워 ‘오늘은 뭘 할까?’ 생각하다 날마다 하던 대로 청소기를 밀면서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다음은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쪽. 빼꼼히 열린 아내의 방문 앞에 이르니 얼마 전에 한 교우의 선종으로 조문 갈 일이 생겨 급하게 검은 넥타이를 찾다 이불장 밑에서 얼핏 보았던 그 무엇이 생각났다.
먼지 청소를 멈추고 아내 방으로 살며시 들어가 보니 아내는 침대에 모로 누워 TV를 켜놓고 쪽잠을 맛있게 자고 있었다. 청소를 핑계로 아내를 깨워 안방으로 보낸 후 이불장을 열어젖혔다. 이불장 속에는 봄 가을용 얇은 이불 몇 장이 아내의 야무진 손끝을 보듯 각을 지어 차곡차곡
시루떡처럼 층을 지어 개어져 있었다. 아내가 정리해 둔 이불을 뭉개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으로 차례차례 빈 침대 위로 이불을 옮겨 놓다 보니 맨 밑바닥에서 이불보에 싸인 정체 모를 것이 불쑥 나왔다.
얼른 풀어 보니, 의문의 보자기 속에는 짐작한 대로 찾고 싶어 안달했던 연청색 카시미롱(이하 캐시밀론) 바로 그 담요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1979년 11월에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아내가 가져온 혼수품이었다, 4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필자의 근무지를 따라 자주 이사하며 정신없이 사는 동안 최근 몇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연청색 캐시밀론 담요였다.
곧바로 안방에 피신해 있던 아내에게 가서 찾아낸 담요를 불쑥 내밀었다. 아내는 당장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담요에서 풍기는 냄새를 요리조리 맡아보기 시작했다. 이러는 아내 곁에 취한 듯 멀뚱히 서서 아내의 두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침묵하며 캐시밀론 이불에 묻어있는 우리 가족이 여태껏 살아온 온갖 추억을 꺼내 보았다.
아내의 혼수품 캐시밀론 담요는 1970년대 그 시절만 해도 처녀들의 혼수용 품목으로 꽤 인기 있던 침구였다. 하지만 그동안 국민소득이 증가와 함께 삶의 질이 향상되어 침대 생활이 보편화된 지금 담요의 쓰임새가 예전만큼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예전의 캐시밀론 담요보다 더 포근하고 보온력이 우수한 담요가 많이 나와 요즘에는 캐시밀론 담요를 찾기조차 힘들다. 난방시설이 시원찮던 시절에는 너나없이 한겨울 추위를 막아주는 몸 덮개나 방바닥의 한기를 차단하는 편리한 침구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캐시밀론 담요와 구제품 군용 모포(毛布)였다.
우리 부부가 결혼했던 1970년대 카시미롱 담요는 획기적인 침구로 유명했다. 한일합섬이 ‘Made in Korea’ 우리나라 상표로 만든 섬유제품으로 그 시절 정부의 수출 정책에 맞물려 경공업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역이었고 섬유제품은 주력상품이었다. 카시미롱(Cashmilon)은 당시 마산에 있던 [한일합섬]이일본과 합작하여 개발한 상품 브랜드로 그 재질이 가볍고 보온성이 매우 뛰어났다. 한겨울이면 무거운 솜이불을 덮고 잤던 그 시절에 등장한 카시미롱(이하 캐시밀론) 담요는 단번에 침구류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특히 신혼살림의 필수품이 되기도 하였다.
아내가 혼수품으로 가져온 연청색 캐시밀론 담요는 우리 가족 이부자리의 역사나 다름없다. 1981년 2월 말에 고향인 경상남도 해양 도시 K 시를 떠나 세 번째 근무지였던 C군 D면 소재지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창원시에 정착하기까지 여덟 번이 넘는 이삿짐 보따리 속에 들어있던 살림 밑천이었다. 1981년 4월에 큰 녀석이 태어나기 이전까지 알콩달콩했던 신혼 시절에는 우리 부부가 애용하였고,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남매의 어린 시절에는 아기용 이부자리로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필자가 통영의 사량도 읍덕(邑德)분교장(2012년 3월 1일 폐교)에서 근무할 때는 담요는 ‘가족사진’과 함께 가족의 그리움을 달래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연청색 캐시밀론 바로 그 담요를 덮고 누우면 그리운 아내와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의 냄새도 묻어나 퇴근만 하면 곧장 숙소로 들어와 캐시밀론 담요를 깔고 냄비 밥을 먹으면서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다.
2019년 2월 정년퇴직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의 체취가 밴 캐시밀론 담요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이삿짐센터에 부탁하여 이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특별히 담요를 쓸 일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담요의 실종에 애태운 사람은 아내보다 필자였다. 찾아낸 담요를 펴서 요리조리 살펴보니 우리 부부의 속 머리카락처럼 허옇게 센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아내가 혼수로 가져왔던 것이기에 애착이 더 컸던 캐시밀론 담요는 올해로 42살 먹었다. 사람을 치면 청년 나이지만 손빨래와 세탁기에 시달려 쉬이 낡아버렸다. 아기 볼같이 부드러웠던 아크릴 소재의 담요 바닥은 낙타 털 오라기처럼 굵은 보풀이 일어 있고 버선 날 같았던 모서리도 해지고 닳아 마치 폐가의 울타리같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 집 가훈(家訓)인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삶을 지켜준 낡은 담요와 이별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다. 그러나 ‘소중한 아내의 혼수품’이요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결혼 선물로 보내주신 캐시밀론 담요’를 이제 와 낡았다고 해서 내다 버리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직도 건강하게 아직 살아있으니 태워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 우리 부부가 날마다 애용하는 차탁 깔개로 사용하며 우리 부부의 남은 생과 함께 하기로 하였다. 2021.03.24.
첫댓글
ㅎㅎㅎ 대단한 추억 증표?를 간직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거의 같은 시기에 결혼한것 같은데, 남아있는것은 사진밖에 없습니다.
제가 원래 획, 획, 버리기를 잘하거든요~
모르지요 또. 꿍쳐놓기 좋아하는 우리 땡감 서랍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카시미롱 담요! 우리들 말고 누가 이제 이리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겠나요?
좋은글 올려주셔서, 잠시 옛생각에 머물다 갑니다.
칭찬 받은 고래처럼 춤추고 싶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차탁 깔개!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알콩달콩 정성들여 쓴 글솜씨도 매우 아름답고요.
기분 짱!
카시미롱 담요.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서 크게 공감합니다. 그때 참 인기가 대단했지요. 칙칙한 솜이불보다 가볍고 보온성도 월등하지만 고급스럽고 아름다웠지요. 캐시밀론 담요에서 애틋한 부부사랑이 물씬 묻어나네요.
네. 성함으로 보아서 맏딸로 태어나신 것 같군요. 허접한 저의 글에 공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청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