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향교는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창건되었으며 그 위치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양주관아의 역사로 보아 고읍동 일대 어디엔가 있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중종 원년(1506) 폐목되었던 양주목이 부활되면서 양주관아, 사직단과 함께
유양동 현 위치 조금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년(1650) 재건하였고
숙종 9년(1683)에 향교 부지가 협소하고 목재가 손상되어 비바람을 견디기 어렵다고
본 양주목사 ‘이유’가 경기감사 ‘김우석’에 보고, 예조를 거처 윤허를 받아
현 위치에 이건하였으며,
숙종 40년(1714) 양주 유생이
위패 차서가 바뀐 것(伯백 叔숙 두 분과 程정子자)을
예조에 상소 윤허를 받아 바로잡은 것은 양주 유림의 자랑이었다.1)
1)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7월11일 경술 2번째 기사
철종 원년(1850) 명륜당이 낡아 관비와 유림들의 협조로 중수하였다.
고종 32년(1895)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관립소학교로 교육기능이 이관되었으나,
학교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당분간 향교에서 개화된 소학교 교육을 시켰다.
광무 4년(1900) 향교재산 관리규정이 제정되어 부윤 군수가 책임관리하고 1945년 미군정법령
제194호로 향교재산 관리법을 제정하며 현재 각도 향교재단이 향교재산을 관리한다.
향교의 교육기능이 소학교로 넘어가고 향교의 책임자를 직원이라 명명하고 직원의 임명은
학부대신이 임명하고 직원은 향사와 삭망분향만을 봉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향교 전체가 소실된 것을
1957년 전교 남궁복과 기성회장 내석 이방림이 주선하여 유림들의 헌금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 내외삼문을 복원하였고
1976년 10월 25일 전국 유림총회 결의로
공문10철 송조4현 위패를 매안하고, 송조2현과 동국18현을 대성전에 봉안하였다.
18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1984년에는 전교 최병선, 군수 정승우가 협의하여 관비 6,500만원을 지원받고
유림들의 헌성금 1,000만원을 들여 명륜당을 복원하였다.
2022년에는 양주시의 지원을 받아 쇠약해진 홍살문을 다시 세웠다.
현재는 춘추석전과 삭망분향 외 기로연·성년례와 각종 공모사업을 통해
많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