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조선 제6대왕 단종(1441~1457)의 능이다.
1970년 6월27일 사적 제196호 지정
봉분 앞에는 상석과 4각옥형의 장명등(長明燈 멀리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있다.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2기. 문인석2기. 양, 말 형상의 석수(石獸 돌로 만든 짐승)가 있다.
1457년 10월24일 유시酉時에 관풍헌에서 승하(昇遐). [酉時 오후5시에서 7시]
영월호장 엄흥도에 의해 현 위치에 암장(暗葬 남이 알지 못하게 장사 지냄)
1516년 중종11년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짐. 승하 60년
1516년 12월15일 영월의 호장 엄주. 심귀손. 엄속. 양인. 지무작, 영월의 관노 이말산
“동을지산(冬乙指山)에 동쪽으로 향한 고분이 있는데 노산군의 묘입니다” 라고 고증
중종의 어명으로 제향을 올림-기일인 음력 10월24일, 설, 단오, 추석, 동지(4명절)
1541년 중종36년 영월군수 박충원 치제
1580년 선조13년 강원감사 정철의 장계. 봉분의 높이 가 두서너자에 표석이 없음.
선조-봉묘하고 표석을 세우고 근신을 보내어 치제함
상석 1개. 표석 1개. 향좌아(香坐兒) 1개. 장명등 1개. 망주석 2개. 관대석 2개 설치
1685년 선조18년 강원감사 정곤수, 영월군수 김늑이-제청 3칸과 재실. 주사를 묘 곁에 세움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1585년(을유) 을유에 김륵(金玏)이 이 고을 군수가 되었는데,
감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비로소 제청(祭廳) 3간과 재실과 부엌간을 묘 옆에 짓고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노산군 신주라고 쓰고, 부인 송씨 위패를 배향하여 세시에 제사를 드렸다.
《유천차기》[고전번역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
1610년 광해군1년. 사당을 세우고 참봉2인, 수호군 6명을 임명하여 수직하게 함
사당에 위판에는 노산군신위. 부인 송씨도 함께 배향.
임진왜란에 불탄 금몽암을 다시 지어 노릉암으로 이름을 고쳐 사당 지킴이로 지정
1698년 9월30일. 숙종24년. 단종 승하 241년. 前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
1698년 10월 29일. 숙종 24년 여러 대신을 인견하여 노산군의 복위 의절을 논의하다
임금이 후릉(厚陵)의 석물(石物)이 가장 간략하고 적다고 하여 그 예에 의하여 할 것이며,
이 뒤에도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뒤에 최석정(崔錫鼎)의 아룀으로 인하여,
또다시 정릉(貞陵) 과 경릉(敬陵) 의 예(例)에 의하여 무석(武石)은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1698년 11월6일. 숙종24년. 묘호, 능호, 시호를 내림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왕이 죽은 뒤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칭호
능호(陵號)를 장릉(莊陵 장중할 임금의 무덤)으로
시호(諡號)를 순정안장경순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 으로 함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壯景順敦孝大王)
*중정정수(中正精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대려자인(大慮慈仁)을 정(定 정할 정)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 편안할 안)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여 뜻이 화한 것을 장(壯 씩씩할 장)이라 하고
의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을 경(景 볕 경. 햇살)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목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을 순(順 순할 순, 도리를 따르다)이라 한다.
묘호 廟號 : 승하한 임금에게 후대 임금이 내리는 이름 *廟 사당 묘. 號 부르짖을 호
단종 端宗 : 예를 지키고 의를 붙잡음 宗 마루 종
단 端 : : 예의와 정의를 지키는 것 端 단정할 단
능호 陵號 : 임금의 무덤의 이름
장릉 莊陵 : 莊 장중할 장 陵 언덕 릉
시호 諡號 : 죽은자의 생전 행적에 의하여 임금이 내리는 이름
순 純 : 생사 순, 순수하고 섞임이 없다. 곧고 올바르며 깨끗하고 순수한 것
정 定 : 크게 생각하고 자애로우며 어진 것
안 安 : 화목함을 좋아하고 화친을 바라는 것
경 景 : 백성을 구제하는 것
순 順 : 사랑으로 화합하여 두루 다스린다는 의미
생각할 慮. 사랑할 慈. 어질 仁, 자애. 定 정할 정. 정해지다
승하 昇遐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
1698년 11월. 장능 추복 공사 시작.
1699년 3월1일 공사완료
후릉(厚陵) : 정종(定宗)과 정안 왕후(定安王后)의 능.
정릉(貞陵) : 태조(太祖)의 비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능.
경릉(敬陵) : 덕종(德宗)과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능. 덕종은 세조의 장남
추존 왕 덕종(1438~1457)과 소혜왕후 한 씨(1437~1504)의 능,
신규(申奎)
자 문보(文甫) 호 취은(醉隱)
생졸년 1659 (현종0) - 1708 (숙종 34)
시대 조선 중기 본관 평산(平山)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문과] 숙종(肅宗) 9년(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9위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9위
신규(申奎)에 대하여
1659년(현종 즉위)∼1708년(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보(文甫), 호는 취은(醉隱).
순안현감 종근(從謹)의 손자이며, 무공랑(務功郞) 찬연(纘延)의 아들이다.
1679년 20세에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9위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84년(숙종 10)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에 죽음을 각오하고 소(疏)를 올려 세조에 의하여 죽은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킬 것과, 중종반정 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당한 중종의 비(妃) 신씨(愼氏)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하여,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존호가 올려졌고 묘소는 장릉(莊陵)으로 추봉되었으나 신비(愼妃)의 복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01년에 함양군수, 1704년에 영해부사, 1706년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뒤 죽었으며 교하(交河)에 장사지냈다.
그뒤 1739년(영조 15)에 김태남(金台南)의 상소에 의하여 신비가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고 묘소가 온릉(溫陵)으로 추봉되자, 그는 이듬해에 단경왕후의 복위에 관한 지난날의 공로로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어려서 정태화(鄭太和)의 집에 기거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저서로는 《취은집》 4권이 전하여진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醉隱集 耳溪集 平山申氏文獻錄
첫댓글 의정부 대신(고명대신) :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조수량(趙遂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