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마리의 쥐들이 탐험을 시작하며, 결말에는 그들이 더 이상 아이들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순수함으로써 환경을 해체하여, 아이들의 성장이든 성인들의 선택이든, 모두에게 충분한 낭만과 현실성을 보여주었으며 재밌는 이야기지만 무겁기도 하다.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영화로서, 이 작품은 고난을 아이들의 선량한 순수함 아래 숨겨 놨고, 사악한 마녀의 마법 세계 묘사에 중점을 두며, 서사는 마녀를 패퇴시키는 아이들의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소년이 쥐로 변하였고 되돌아올 수 없다"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쥐로 변한 소년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결말의 미세한 정보를 주의하지 않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마녀를 물리치는 동화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는 곧 이야기 속 또 다른 시공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 문 안에는 해학적 동화 뒤에 숨겨진 진정한 철학이 있으며,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두 가지 주제, ‘죽음’과 ‘인생의 비극’에 관한 담론이다.
부모를 잃고 불행히도 쥐가 되어버린 남자 애기 주인공이든, 쥐로 변해 부모에게 혐오받아 버림받은 비만 소년 브루노이든, 고아원에서 도망쳐 기만당해 쥐가 된 소녀 데이지이든, 혹은 딸을 잃고 외손자마저 일찍 떠나보내야 할 할머니이든, 겉보기에 재미가 있고 즐거운 이야기 속에서 어느 누구의 인생도 진정 쉽지 않았으니, 이는 우리 실제 세계의 모든 이들과 같았다.
이야기는 어린 소년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소년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당시 소년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할머니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어릴 적 사용했던 방에서 지내게 된다. 그때 소년은 생과 사의 이별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죽음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의 사진을 다시 보았을 때, 그는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소년은 슬픔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무겁고도 심오한 주제이며, 아직까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죽음은 너무나 신비롭고 거대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일부는 종교를 만들었고, 일부는 그것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혼란스러워하며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아예 이야기조차 피하려고 한다. 인간은 죽음의 비밀 앞에서 여전히 갓난아기와 같고, 소년이 어떻게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소년은 외할머니의 지혜를 통해 하나의 답을 얻는다. 외할머니는 소년에게 부모님이 이생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새로운 임무를 맡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과도한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소년의 생활을 돌보는 데 전념한다. 외할머니는 소년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일상적인 생활을 챙기며, 작고 귀여운 동물을 사주고, 그에게 즐겁게 춤을 가르치며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년은 마녀와의 싸움에서 결국 쥐로 변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마치 사람들의 삶에서 겪는 다른 비극들처럼 한 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어느 날, 고요한 오후, 외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소년과 함께 있으며, 소년의 아픔에 대해 무심코 이야기하게 된다. 이번 대화는 따뜻하고 가벼우며, 동심 가득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마치 모든 고난이 인생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이미 먼 과거로 지나가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의 동반자처럼 함께 하며, 죽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는 인간에게 가장 심오하고도 무거운 주제인 ‘죽음’을 다룬다. 쥐로 변한 소년은 외할머니와 함께하며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임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소년의 비극적인 생존에서 시작하여, 소년이 죽음을 마주하며 웃음을 되찾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과 동반자, 긍정과 끈기가 마법을 치유하는 해답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마녀를 잡아라>는 일반적인 공포 영화와는 달리, 시각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감독은 감정적인 깊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영화 속에서 산림으로 둘러싸인 외딴 집, 사회와 격리된 가족, 신비로운 마녀, 괴상한 쥐 등은 조용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묵직한 분위기는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기에는 효과적이다.
영화의 공포는 바로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며, 악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주제는 사실 기독교의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속임수’와 ‘오만’을, 어머니는 ‘위선’과 ‘분노’를 대표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인기 있는 인종 정치와 계급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그 갈등은 동물로 변한 주인공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이 영화 속에서는 피부색의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마녀들 중에도 유색 인종이 존재한다.
사회 내의 갈등과 분열은 삶과 꿈에 대한 불경을 의미하며, 모든 이는 변화하고, 버리고, 잊혀지고,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치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대로,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모든 것이 낡고, 그 해답은 잔인하고 무력하지만, 그중에 있는 인생 철학이 여전히 부드럽고 진심 어린 것으로 느껴졌다.
첫댓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남겨진 이들이 겪게 되는 심리의 변화를 판타지적으로 비유했다는 게 인상깊습니다.
묵직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관객을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몰입시키네요
자극적인 현대의 공포 영화들과는 달리 다양한 그 외의 방식들을 통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학우님의 감상에 공감합니다.
정효린/ 죽음에 대응하는 법을 영화에서 다루고 있으며 단어의 무거움에 비해 죽음을 더 가볍게 대하는 모습에 흥미로움을 느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올 죽음이기에 마냥 두려워하는 자세가 아닌 언젠가 찾아올 일로써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인생에서 단 하나뿐이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과 사람에서 쥐가 되어 돌아갈 수 없는 주인공의 처지가 겹쳐진다는 학우님의 통찰에 공감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냐가 중요하고,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음을 새삼 되새겨보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공포가 '알 수 없음'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다루는 죽음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합니다. 공포 영화는 상업용으로만 생산된다는 선입견을 깨주는 좋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