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하고 세련돼 보이지만 암울하고 생기 없는 성의 모습과 복잡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다정하고 포근한 정원의 모습 간의 대조는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키우려고만 할 뿐 그 밀도나 다채로움에는 도무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것을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며 둘러싼 겉모습에 붙잡힐 뿐, 그렇게 둘러싸인 본질, 의미, 자아, 내면의 중력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콜린처럼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있지 않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생각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저 하루하루에 순응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른들이 금지하는 것에 직접 부딪히면서도 매번 주변에 애정 어린 손길을 뻗는 메리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그저 살기 쉬운 삶보다 우리의 고유한 궤도와 박동을 찾으려는 강한 열망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리라는 직분을 포착해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약한 자들이 자신의 적과 정복자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으로 ‘고귀하고, 강력하고, 쾌활한’ 그들의 가치를 ‘악한 것’으로 전도시켰다. 비참하고 가난하고 무력하며 비천한 자를 선한 자로,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은 사악하고 잔인하고 음탕한 자로 취급하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한 것이 좋기만 하고, 악한 것이 나쁘기만 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하고 정의로운 것이 결국 승리하는가? 어쩌면 승자만이 정의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성과 정원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은 굳건하게 서 있는 장벽이 아니라 누구든 열어젖힐 수 있는 문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메리의 행실이 어른들에게는 일탈이나 말썽으로 비쳤을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태도만이 삶을 새롭게 창조할 여력을 주며, 자신에게 주어진 정원으로 가는 오솔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화 초반에 메리가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며 인형을 물에 버리는 장면에서, 메리는 그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어린아이의 모습도 함께 버린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전혀 알 수 없고,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혹은 자신의 선택이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답이나 보증을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기에 항상 불안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법칙이나 관습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항해할 때 바람이 분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돛을 펼지 말지 결정토록 요구할지언정 어느 시점에 얼마만큼 펼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 아니겠는가? 메리는 어른들의 말이나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안내하는 정원의 길을 한껏 헤매고 따라가며 주변을 생동감과 온유함으로 가득 채운다.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기대함 없이, 단순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시선에서의 세상은 아름답기만 할 따름이다.
대게 예술은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투쟁하고 세계로부터 빗겨져 있다. 세계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회의하고, 갈등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예술은 기성의 형식 속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고, 매 순간 생성하고 태동하는 과정으로 호흡한다. 물론 우리는 정적인 것에서 안정을 느끼고, 동적인 것에서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다. 가령 우리 사회는 항상 목표를 쫓고 또 매번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건강하고 활력있는 삶을 만든다고 믿는다. 하지만 목표를 이뤄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남으로부터 평가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알면 목표를 이루지 못한 만큼의 허무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적인 목표를 갖기보다는 일련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자세를, 다시 말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형식을 갖추지 못해 불안하고 불완전한 상태만이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순간임을 수긍하는 태도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과 삶의 물음에는 대답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 정답을 말하려 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시험에 불과해지며, 답을 맞히지 못했을 때의 나무람과 비판에 대해 항상 불안해하게 된다. 그런 불안을 기본값으로 둔 채 안정을 찾으려고 정답처럼 보이는 다른 주어진 길들을 따라 그대로 살아보려 하지만, 여전히 오롯함에 대한 향수에 젖은 채 방황하며 우리 고유의 맥박은 엷어질 따름이다. 더군다나 그런 정답이라 불리는 것의 출처에 있어서 우리는 한낱 교조주의자일 뿐,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떠오르는 예감들의 착상을 막지 말고, 들려오는 영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영화 초반 메리의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콜린의 모습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나를 반성하기도 했다. 완전히 성장한 후 긍정적으로 변화한 그들의 모습에서만 희열을 느끼기 보다, 그들이 점차 주체적으로 변화하는 매 순간순간이 오히려 모두 완전함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에 대해 우리가 갖는 착각에서도 반성해낼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실체가 이뤄내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흐르는 현상들의 현존이 시간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땅 위를 걷는 것이지 땅이 러닝머신처럼 우리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물속에서 걸음이 느려지는 이유는 물의 저항 때문이지 땅이 늘어난다거나 우리의 다리를 붙잡는 게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삶 역시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도중이자 정해진 변천 과정 중에 있음이랄 것은 착각에 불과할 뿐임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의 나를 긍정할 수 없고, 미래에 집착하면 현재의 나는 한없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과거와 미래는 그저 현재의 일념에서 만개할 뿐, 시간을 지양하는 시각에서 바라본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다시 말해 어떤 완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완성이자 온전함임을 알 수 있다. 정원이 메리에게 흙을 잔뜩 묻히고 지저분하게 만들지언정 메리에게 열쇠를 쥐여주고, 분노와 좌절에 쌓인 콜린에게 미소와 건강을 되찾아주는 정원의 마법은 어쩌면 그들이 더 온전한 그들 자신이 되도록 성장시키고 치유해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