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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종중회 창립총회
▣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 : 캠페인 운동) :
나의 조상님들을 숭배할 줄 알고
문중을 위해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송곡종중회원
▣ 캠페인(campaign)이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 계속적으로
행하는 운동
▣ 창립 : 송곡종중회 창립총회
▣ 일시 : 1994년 9월 20일 (화) /
: 음력 1994년 8월 15일(추석날 임)
▣ 장소 : 충북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1구(1리) (속칭 : 안나비)
順興安氏 第3派 文肅公派 參議公(諱ㆍ訓) 大宗會 本部 傘下 第16世
掌苑暑 別坐公(諱ㆍ尙文)의 5代孫 第21世 즙(濈)의 後孫 松谷小宗會
송곡종중회원(松谷宗中會員) 방명록(芳名錄)
<1994년 추석날 현재>
(01) 총회 : 송곡종중회 창립총회 개최
(02) 일시 : 1994년 9월 20일 (화) 2시 30분(추석날)
(03) 장소 : 매화리 별좌공 재실(안병희님 댁)
(04) 참석 : 23명 (사진 참조) + 촬영자 1명(혹시 안병찬님) ? = 24명
▣ 창립총회 참석자 명단 (사진 속의 인명은 아래의 설명을 참조 바람)
▶맨 앞줄에 앉아계신 분부터 (좌측부터) :
(01) 대전 안광석님 (02) 안양 안병호님 (03) 서울 안병길님
(04) 대전 안병기님 (05) 사직 안광세님 (06) 대전 안치설님
▶ 둘째 줄 좌측에 서계신 분부터 :
(07) 청주 안광용님 (08) 대전 안광범님 (09) 대전 안광천님
(10) 청주 안광흥님 (11) 청주 안광동님 (12) 청주 안광기님
(13) 대전 안광수님 (14) 대전 안광우님 (15) 청주 안광훈님
(16) 서울 안광일님
▶ 셋째 줄 좌측에 서계신 분부터 :
(17) 청주 안광식님 (18) 청주 안광일님 (19) 청주 안병희님
(20) 서울 안병옥님 (21) 대전 안광만님 (22) 서울 안병수님
(23) 서울 안병국님 (24) 사진 촬영자(안병찬 님?)
▣ 참 석 자 명 단 : 총 23명 (사진 촬영자 분을 포함하면 총 24명)
가. 송곡종중회 창립 및 종중회 등기 완료
(01) 송곡종중 창립총회 개최 일시 :
일시 :
1994. 9. 20. (화) 오후 2시 30분경
창립총회 개최의 날이 추석날로 정함 (음력 8.15)
그 이유는 명절이면 객지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참석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라서 날짜를 추석날로 결정함.
(02) 창립총회 장소 :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1구(안나비)
제16세 별좌공 (휘●상문) 재실 (안나비)
안용준 족장님 댁이 그 당시에
매화 별좌공(상문) 선조님 재실이었기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께서 적정 장소로 결정했다함.
(03) 참석자 :
총 24명 중 (족장님과 같은 어르신 몇 분은 촬영에 불참하심)
당시 생존하시고 연로하신 족장님들을 생각을 해보면
8분 정도가 계셨는데 모두가 연로하신 관계도 그 이유의
하나이지만 대서소와 읍내 군청을 찾아다니며 일을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일임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다고 함.
(04) 종회장 선출 :
대전 안병기님
(05) 총무 임명 :
대전 안병기님 장남 안광우님 임명
(06) 종중회 명칭 :
순흥안씨 휘(諱) • 즙(蕺)의 후손 송곡종중회
(07) 회의 내용 :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종회의
모든 부동산 전답(田畓)과 임야(林野)를
송곡종중회 대종손 안광기 대표자 명의로
등기를 신청하기로함.
(08) 처리 내용 대략 :
종중회 등록 및 제반 행정 처리는 수일 내로
등기 절차에 필요한 서류 일체와
종중회 등기에 꼭 필요한 종중회칙 (정관) 등을
청주 광용씨가 작성 및 책임을 지기로 결정을 함.
그 외에 대서소와 등기소 및 보은 군청을 찾아다니며
종중회 등록 서류 작성 제출 및 절차에 필요한
제증명서 발급을 위해서는 정해진 날짜에
보은읍 우체국 옆 대서소에서 함께 만나기로 함.
만나기로 약속을 하신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전 안병기 종회장님, 대전 안광석 족장님,
청주 안병희 둘재집 대표님,
보은 안광용 종회원님, 총 4명,
이상 총 4명이 만나서 절차상 필요한 서류는
당일 모두 등기소를 찾아다니며 서류구비는
완벽했다고 했지만 문제가 발생하였다.
회칙을 볼펜으로 쓰지말고 타자기로 다시
작성 제출하라는 대서소의 지시에 따라
당일 등기 서류 제출 매듭을 끝내지 못하였음.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종중회 창립 대표자 종손
본인이 직접 주민등록과 도장을 가지고 오라는
소장님의 말씀에 따라 만남의 날짜 다시 정함.
보은 군청에 등기를 필할 당일날은 종중 대표
대종손 안광기씨가 직접 참석을 해야한다 하여
다시 날짜를 정하고 송곡종중회 회칙(정관)도
타자기로 작성하여 안광용씨는 수일내로 완성
기일 내에 대서소에 제출하기로 했답니다.
그런 갖은 애를 쓰며 고생을 한 끝에 종중회의
등기를 필할 수 있었답니다.
그 외에도 송곡종중의 토지 전답은 물론 임야
등과 관련된 문제로 군청에 가면 등기소에 가서
무슨 서류를 다시 가져오라는 등 왔다갔다
군청과 등기소 대서방을 택시도 안 타고
걸어다니느라 정말로 수고 많이 했답니다.
(09) 2019년 현재의 종중명의 등기신청 내역
A. 임야 :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 산 34-1번지
면적 : 104.632㎡ (약 31706평)
B. 법율 제 4502호에 의한 토지 소유권
(1) 162-2 (전) 575㎡
(2) 162-4 (전) 251㎡
(3) 162-5 (전) 1,765㎡
(4) 144-2 (대) 774㎡
(5) (임야) 105322 ㎡
2002년 7.24.(전산이기)
(6) 162-3 (답) 793㎡
(7) 143-3 (답) 112㎡
(8) 144-3 (답) 704㎡
(9) 17 (답) 2,241㎡
677.9평(약 678평)
2002년 8월 29일 (전산이기)
(10) 162-1 (전) 674㎡
(11) 143-2 (전) 1,111㎡
(12) 144-1 (전) 833㎡
(13) 143-1 (전) 694㎡
C. 문제점을 발견한 종중땅 전(밭)
(1) 등기번호 162호 3
표시번호 1(전1)
표시란 : 1956.5.26. 000 162-3 답 371평
대법원 예규 제218호 의거 제2책 37장
등기번호 63호에서 이기
1987년 3월 13일
(2) 등기번호 162호 3
순위번호 1(전2)
사항 : 소유권 이전
접수 : 1956년 5월 26일
제978호 상환완료
원인 : 1955년 11월 27일
소유자 : 이용일 (주소 생략함)
구등기부 제2책 제37장에서 이기
1987년 3월 13일
순위번호 : 1번
사항란 : 4289년 5월 26일 977호
소유자 : 길상리 권형선
(3) 우리가 문제로 삼은 이유는?
종중의 어르신 족장님들의 말씀으로는
송곡종중의 땅으로 모두 알고 있었는데
등기소에 찾아가서 땅문서를 찾아본 결과
소유권이 길상리 권형선으로 되어 있더라.
그 이후 깨달은 점은 경계측량 등 등기소
에 가서 전답 등기문서도 가끔 발급을
받아보아야 되겠구나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송곡종중 회원님들은 명심해야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4) 문제의 종중 땅 결론은 상환완료 :
▶ 상환 완료란? :
구등기부에 상환완료로
기재된 장부도 많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과거 법무사,
변호사 비용이 물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고가인 관계로
공문서인 상환완료 증서로
서로 매매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1961. 5. 5. ~ 1965. 6. 30.
법률 제 613호
분배농지에 관하여
부동산 특별조치법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특조법 시행령에
매도증서를 첨부하여
특조법을 신청하게 하였습니다.
분배농지에 관한
부동산 특별조치법으로 등기한 것도
상환완료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끝>,
예외법(특수한 경우에 적용되는 법규)는
아래와 같습니다.
6-25사변으로 소작인의 사망,
피난, 흉년 등으로
단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전국적으로 많이 존재하였으며
전부 국유화 하였습니다.
이러한 농지는
지주의 상속인이
소송 가능합니다.
(10) 속칭 (구) 사직 종중회
신등기상 명칭은
송곡종중회 임야(산)
참나무 벌목에 관한 대금
A. 총금액 관리 및 보관에 대한 회의 내용
파악된 내용 :
청주 안병석님 종손께서 보관하고 있다고
족장님이신 매화 안용준님께서 말씀하심
종회장 말씀 :
추후(이다음)에 대전에 안병기 회장님과
안광석 종장님, 둘째집 대표로 안병희님,
보은 삼산4구 안광용 종회원 등은
청주 안병석 종손님 댁을 방문하여
벌목대금 인수인계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청주시 모충동 종손님 댁을
방문하기로 전화로 약속함.
방문 일시 :
1994년 10월경 (정확한 날짜는 잘 모름)
청주 안병석 종손댁(모충동 날망집)을 방문
방 문 자 :
대전 안병기님,
대전 안광석님,
청주 안병희님,
보은 안광용님
처 리 방법 :
송곡종산의 참나무 벌목 대금을
1년간 안병희님께서 은행금리로
융통해 쓰시고 꼭 갚겠다고 하심
결과 처리 :
1년 후 원금에 이자 합해서
청주 모충동 안병석 대종손님 댁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할 당시 채무자는
만기가 된 종금 전부를 이상없이 다 갚음.
금전관리 :
안병기 종회장님께서 전부 관장하심.
당시 총무님은 안광우님
문서작성 :
모충동 모임 당시 1차 와 2차에 걸쳐
현금출납 기록은 안광용님이 기록을 함. <끝>
...............................................................................................
나. 정기총회 및 임야 일부
농지정리에 편입&보상
초대 종회장 안병기님과 총무 안광우 님께서
송곡종중회 활성화를 위해서 주로 대전에서
해마다 송곡종중회 정기총회를 대전 선화동
에서 개최를 하심.
그러던 어느날 송곡종산 밑으로 정부에서
2002년 농지정리를 하는데 종산의 일부가
농지정리에 편입되는 관계로 구인리 부락
이장님 댁에서 보상문제로 회의에 참석함.
당시 참석하신 분은 안병기 종회장님
안광석 족장님, 안광용 종회원님 등
3명이 참석을 함.
보상금 신청 작성 제출을 해달라는
이장님 말씀대로 권리 면적과
(2,519.4㎡) 권리 가격
25,905,130원을 작성하여
그 이튼날 안광용 종회원은
장안면 면사무소에 보상금 신청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보상금이 예상외로
너무 작게 70만원 이 나왔으나 어떠한
항의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당시 임야가
농지정리로 인하여 편입이 된
지번과 지목, 권리면적, 평정가격 등은
다음과 같다.
1) 산 34-13 임야 43.0 ㎡ 종회가 요구한 권리가격 377,110 ㎡
2) 산 34-14 임야 56.0 ㎡ 종회가 요구한 권리가격 491,120 ㎡
3) 산 34-15 임야 313..0 ㎡ 종회가 요구한 권리가격 2,745,010 ㎡
4) 산 34-16 임야 52.0 ㎡ 종회가 요구한 권리가격 456,040 ㎡
5) 산 34-17 임야 226.0 ㎡ 종회가 요구한 권리가격 1,892,020 ㎡
..........................................................................................................
나중에 알고보니 작성된 권리가격의 내용을
잘못 알고서 작성 제출을 하였다고 깨달았음.
.........................................................................................................
▣ 1)~5)까지 농지정리로 편입된 면적이 690 ㎡(209평)
추후 확인 결과 편입된 면적은 690 ㎡(209평)이 맞음
.........................................................................................................
▣ 당시 책정된 임야는 평당 3350원 꼴로 계산해야 된다고 함.
▣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700,150원이 맞더라구요.
.........................................................................................................
그리고 논에 대해서는 논 평수가 늘어나면
땅이 늘어난 만큼 당시 시세를 처서 돈을 더 내놔야 하고
땅이 줄어들었으면 당시 시세를 처서
돈을 더 받아내야 했답니다.
▣ 그런데 논은 평각리 17번지
2,241.0 ㎡ (답) =679평에서
2002년 8월 22일 경지정리 완료 후
1,969.5 ㎡ (정확하게 596.8평으로 줄어들었음)
그래서 또 재확인을 해보니 그때는 착오가 있었다며
2,241.0 ㎡ (답) =679평이라고 해서 지금도
679평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 결과 송곡종중회 총 현금이
벌목 대금 20만원과 경지정리로 편입된
209평 대금 70만원을 합하여
총 90만원이 송곡종중회 현금의
총 재산이었답니다.
물론 종회비
연 1만원씩 받은 회비도 있었지만
70만원이 큰 밑천이 되었습니다.
.............................................................................................
이런 저런 송곡종중회
65명 종회원님들의 노력을
제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세세하게 작성을 해 보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나
이제 벌써 81세를 넘기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송곡종중회를 위해
카패 메니져로서 최선을
다해볼까 합니다.
.....................................................................................................
다. 산 34-18 (208평) 소유권 이전 내용
(01) 분할 (1) 임야
34-1번 지에서
34-18 번지로
685㎡ (208평) 로
대전 안병기 교수 명의로
분할 소유권 이전함.
(2002년 8월 6일)
(02) 분할 (2) 전 :
162-2 (전) 575㎡
(03) 일시 :
2007년 7월 24일 산 34-1에서 분할
(04) 이유 :
19세 중자(重字) 선조님의 차남(次男)
20세 처자(處字) 량자(良字)
선조님의 후손이신 후손
(우리 송곡종중회 처자 검자
할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임)
(前)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
안병기 교수님 (대목종중회)에게
▶임야 34-18 번지 685㎡ (208평)을
2002년 8월 6일 소유권 이전을 하였고,
▶전 162-2 575㎡
2007년 7월 24일 산 34-1에서
안병기 교수에게
소유권 이전으로 인하여
분할하였다.
19세 "중" 자 할아버지의
같은 자손이지만 큰 아들인
20세 "처"자 "검"자 할아버지의
소유로 임야가 별도로 있었고,
또 20세 처자 량자 할아버지의
임야가 고승리 뒤에서 월송리
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임야가
애당초부터 분배를 받은
산이었다고 족장님들 말씀임.
그래서 모두 선조님들 묘소도 해당
임야에 산소를 모시고 있었다고 함.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조상님들께서 물려주신 땅을
사정에 의해서 모두 팔아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 종산이 없다보니
송곡종중의 임야를 안병기 교수님
께서 우리 송곡종중회 임야 일부와
"전" 일부를 분할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 송곡종중 종회원님은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안광용은 기록으로 남김니다. (끝)
.....................................................................
20세 "안처검" 할아버지의
"장남"의 후손이
21세 "안즙" 할아버지가
송곡종중회의 분파조 되시고,
20세 "안처량" 할아버지의
후손이 21세 "안부" 할아버지가
대목종중회의 분파조 되십니다.
때문에
21세 "안즙"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송곡종중회로
큰집이 되시고
21세 "안부" 할아버지가
대목종중회로
작은집이 되십니다.
21세 "안즙" 할아버지의 동생
21세 "안부" 할아버지이신 관계로
아래와 같이 2002년 8월 6일
대목종중회 일원이신 안병기 교수님께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임야와 전을
매도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분할 소유권 이전을 하였습니다.
(前)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
안병기 교수님 (대목종중회)에게
▶임야 34-18 번지 685㎡ (208평)을
2002년 8월 6일 소유권 이전을 하였고,
▶전 162-2 575㎡
2007년 7월 24일 산 34-1에서
안병기 교수에게
소유권 이전으로 인하여
분할하였다.
라. 감역공 묘(監役公 墓)
갈명(碣銘) 해석(解釋)
순흥(順興) 안공(安公)의 휘(諱)는 수(修)요,
자(字)는 진숙(進叔)으로
선공(繕工) 감역공(監役工)이다.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상호군(上護軍)이며,
휘(諱)는 자미(子美)이다.
시조(始祖)의 제3자(第三子)요,
3파조(三派祖)인 교서공(校書公)
휘(諱)는 영화(永和)이며,
삼세(三世) 휘(諱) 석(碩)을 생(生)하니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4세(四世) 문정공(文貞公) 휘(諱) 축(軸)을 생(生)하니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配享)되다.
문정공(文貞公) 휘(諱) 축(軸)은
도첨의(都僉議) 찬성(贊成)을 지내고,
저서(著書)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있다.
휘(諱) 축(軸)은 문간공(文簡公)
휘(諱) 종원(宗源)을 생(生)하니
특진판삼사(特進判三事)를 지내고,
양도공(良度公) 휘(諱) 경공(景恭)을 생(生)하니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영삼사 (領三司)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고,
정숙공(靖肅公) 휘(諱) 순(純)을 생(生)하니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휘(諱) 숭선(崇善)을 생(生)하니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예ㆍ병(禮ㆍ兵) 양조판서(兩曺判書)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휘(諱) 훈(訓)을 생(生)하니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고,
휘(諱) 우연(友淵)을 생(生)하니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고,
휘(諱) 후(煦)를 생(生)하니
통정대부(通訓大夫)
낙안(樂安) 군수(郡守)가 되고,
휘(諱) 자우(自祐)를 생(生)하니
감역공(監役公)의 증조(曾祖)되고,
휘(諱) 온(穩)을 생(生)하니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성(安城)군수(郡守)로
감역공(監役公)의 조(祖)가 되어
휘(諱) 상문(尙文)을 생(生)하니
이가 감역공(監役公)의
고위(考位 : 아버지)다.
휘(諱) 상문(尙文)의 자(字)는 질부(質夫)요,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로서
비(妣)는 숙인(淑人) 연안김씨(延安金氏)로
4남(四男)을 생(生)한 중(中)에
감역공(監役公)은 제3자(第三子)이다.
공(公)의 휘(諱)는 수(修)로
서기(西紀) 1624년(仁祖 二年)
이괄(李适)의 난(亂)을 당(當)한지
삼년(三年)만에 정묘노란(丁卯虜亂)으로
장안(長安)의 소동(騷動)이 크게 일어나니
당시(當時) 감역공(監役公)의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는 구몰(俱沒)되고
훤당(萱堂)이 위에 계시고
두 형수(兄嫂) 생(生)하시며,
아래로 어린 조카가 있으니
노란(虜亂)에 그대로 있다가는
집안이 온전치 못할 것을 예감(豫感)하여
사판(祠版)을 받들고 훤당(萱堂)을 모시고
대소가(大小家) 친족(親族)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사백리(四百里)를 남하(南下)하니
이 곳이 충북 보은(報恩)의 길상리(吉祥里)이다.
이리하여 보은(報恩)에
안씨(安氏)의 맨처음
안주(安住)한 분이 되다.
관(官)은 선공감역공(繕工監役工)이고,
묘(墓)는 보은(報恩) 군(郡) 동(東)의
竹項(죽항) (속칭:대목) 유좌(酉坐)에
쌍분(雙墳)이다.
▶원배(原配)
숙인(淑人) 상산김씨(尙山金氏)는
아들이 없고,
묘(墓)는 라부촌(羅浮村)
(속칭 : 나비촌, 현재 : 충북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1구 안나비, 마을 뒤 동쪽의 산)
친정조묘(親庭祖墓) 좌(左)에 있다.
▶ 계배(繼配)
숙인(淑人)은 안동김씨(安東金氏)요
계자(系子)에 휘 (諱) 홍우(弘宇)요,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墓)는
감역공(監役公)과 쌍분(雙墳)이다.
▶ 삼배(三配)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휘(諱) 홍제(弘濟)를 생(生)하고,
묘(墓)는 송곡(松谷)
(속칭 : 새실, 보은군 장안면 구인리 산34-1)
유좌(酉坐)에 있다.
휘(諱) 홍우(弘宇)는
이남(二男)을 생(生)하니
장자(長子)는 휘(諱) 원(垣)이요,
차자(次子)는 휘(諱) 용(墉)이니
대종손(大宗孫)으로 출계(出系)하시고,
휘(諱) 홍제(弘濟)는
2남 2녀를 생(生)하니
장자(長子)는 휘(諱) 중(重)이요,
차자(次子)는 휘(諱) 재(在)요
따님은 류동직(柳東稷)
박지성(朴之誠)에 출가(出嫁)하다.
이하는 기록되지
않음을 슬퍼하노라
나라의 치란(治亂)과
사가(私家)의 흥체(興替)는
음양소장(陰陽消長)의
운수(運數)이니라
가히 얻어서 면(免)하지 못하나
그러나 사람의 일을 마땅하게 처리한 즉
혼란을 헤치어 바른 대로 돌아가고
쇠(衰)함을 일으키며
부흥(復興)하는 것이니
공(公)께선 시기(時機)에 밝으시고
높이 거조(擧措)하다.
종가(宗家)를 보존(保存)하고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니
어찌 처리를 덕기(德氣)함이
아니하리오.
명왈(銘曰)
혁엽(奕葉)하는 대종(大宗)에
중(重)한 험난(險難)이 박두(迫頭)하거늘
기색(起色)을 보고 피난(避難)을 해서
군대(軍隊)에 칼날을 멀리 끊었도다.
모토(茅土) 의연(依然)하니
국운(國運)이 망극(罔極)하도다.
단서 철권(丹書 鐵券)을
백세(百世)에 변혁(變革)하지 않도다.
지나간 선조(先祖)의 대(代)를 이으시고,
오는 후손(後孫)들의 앞날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공(公)의 음덕(陰德)이로다.
서자(逝者) 이와 같이 맑고
향기(香氣)로운
청신(淸新)한 삶을 살고
정(情)을 기르니
유교(儒敎)의 높은 스승이요,
이웃과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살아갔으니 이를 본 받아
후손(後孫)들이 대(代)를 이어
살아오는 것은
오직 공(公)의 유덕(遺德)이라 할 것이다.
이에 공(公)의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爲)해
족후예(族后裔) 성중(誠中) 삼가 찬술(撰述)하다.
서기 1990년 3월
서기 1990년 원문을 풀어쓴
청주 안광용 종회원의
훗날의 기록(후기)
위의 감역공 갈명을 작성하신 어르신은
대전에 살고 계시는 족후예(族后裔)
안성중(安誠中) 어르신 이십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양도공 대종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어르신 인지라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문도의 덕이 높으신
분이라 원문 전체를 모두
한자로만 기록을 해주셨습니다.
원문 그대로 비문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먼 훗날 한글 세대들에게
어려움이 될것 같아 우리말로
알기 쉽게 풀이 하였으면 좋겠다고
대전 선화동에 살고 계시는
안광석 큰 형님과 보은읍
길상리에 살고 계시는
안광주 족형님 두 분께서
청주 사직동 버스정류장 앞
미호아파트 뒤 4거리 2층에 살고 있는
안광용 동생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온 목적은 감역공 비갈명을
한글로 쉽게 풀어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집안에 동생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 두 사람이 상의를 한 끝에
광용 동생을 찾아왔다고 하셨습니다.
글을 쉽게 풀어 쓰는 작업은
오늘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이면 될 것이고,
금요일날은 보은 석재사(돌공장)에
관동 안광주 족형님께서
직접 감역공 갈명을
가지고 가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수요일날 우편으로 발송하여
목요일까지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도록 했었답니다.
그런 결과 오늘날 산 33-1 번지
"감역공 갈명" 비문의 내용이
누구나 쉽게 읽어볼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17세 선공감역공(繕工監役公)
휘(諱) 수(修)의
장자(長子)인
18세 휘(諱) 홍제(弘濟)는
2남 2녀를 생(生)하니
장자(長子)는
휘(諱) 중(重)이요,
차자(次子)는
휘(諱) 재(在)요
1녀 첫째 따님은
매화(나비)1리 류동직(柳東稷)에
출가(出嫁 : 시집을 감)하였다.
<묘는 매화(안나비)리 남쪽 능선>
2녀 둘째 따님은
박지성(朴之誠)에
출가(出嫁 : 시집을 감)하였다.
이하는
기록되지 않음을 슬퍼하노라.
▣ 참고 사항 : 어려운 낱말 풀이
나라의
▶ 치란(治亂 :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림)과
사가(私家)의
▶ 흥체(興替 : 흥함이 바뀌는)는
▶ 음양소장(陰陽消長 : 음양이 쇠하여 성함)의
운수(運數)이니라.
가히 얻어서 면(免)하지 못하나
그러나 사람의 일을 마땅하게 처리한 즉
혼란을 헤치어 바른 대로 돌아가고
▶ 쇠(衰 : 쇠잔할 쇠)함을
일으키며 부흥(復興)하는 것이니
공(公)께선
▶ 시기(時機 : 때나 기회)에 밝으시고
▶ 높이 거조(擧措 : 행동거지)하다.
종가(宗家)를 보존(保存)하고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니
어찌 처리를
▶ 덕기(德氣 : 덕스러운 기색)
함이 아니하리오.
▶ 명왈(銘曰 : 비에 새긴 교훈의 말)
▶ 혁엽(奕葉 : 여러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림)하는
▶ 대종(大宗 : 대종가)에
▶ 중(重 : 두 번의, 거듭 겹친, 중복된 )한
▶ 험난(險難 : 위험하고도 어려운)이
▶ 박두(迫頭 : 가까이 닥쳐옴)하거늘
▶ 기색(起色 : 어떤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고 피난(避難)을 해서
군대(軍隊)에 칼날을 멀리 끊었도다.
▶ 모토(茅土 : 강신할 때 쓰는 띠 묶음과 모래)
▶ 의연(依然 : 전과 다름없다.)하니
국운(國運)이
▶ 망극(罔極 : 그지 없음. 한 없는 슬픔)하도다.
▶ 단서(丹書 : 금석에 새긴 글),
▶ 철권(鐵券) : 무쇠처럼 굳센 주먹)을
▶ 백세(百世 : 오랜 세대)에
▶ 변혁(變革 : 바뀌어 새로와짐)하지 않도다.
지나간 선조(先祖)의 대(代)를 이으시고,
오는 후손(後孫)들의 앞날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공(公)의 음덕(陰德 : 숨은 덕행)이로다.
▶ 서자(逝者 : 죽은 사람)
이와 같이 맑고 향기(香氣)로운
청신(淸新)한 삶을 살고
정(情)을 기르니
유교(儒敎)의 높은 스승이요,
이웃과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살아갔으니
이를 본 받아 후손(後孫)들이
대(代)를 이어 살아오는 것은
오직 공(公)의
▶ 유덕(遺德 : 죽은 이가 후세에 기친 덕)이라
할 것이다.
이에 공(公)의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爲)해
▶ 족후예(族后裔 : 친족으로서 핏줄을 이은 먼 후손)
▶ 성중(誠中) 삼가 찬술(撰述 : 글을 짓다. 글을 지음)하다.
원배(原配)는
숙인(淑人) 상산김씨(尙山金氏)
아들이 없고
묘(墓)는 라부촌(羅浮村)
(속칭 : 나비촌(매화리1구, 속칭 안나비)
현재 탄부면 매화리 1구 안나비,
마을 뒤 동쪽의 산에 상산기씨 묘소가 있다)
친정조묘(親庭祖墓 : 친정 할아버지 묘소)
좌(左)에 있다.
상산김씨 후손의
이름은 매화리 김정훈이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류씨 종산의
능선 끝자락에 새로 집을 지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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