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온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했고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만이천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나뭇잎이 지면서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렀다.
금강산은 그 화려함과 명성에 걸맞게 이름도 많다.
각종 문헌과 기록, 민간전설 등을 종합하면 금강산의 이름이 9가지나 된다. 金剛(금강) 皆骨(개골) 涅槃(열반) 楓嶽(풍악) 릟릟旦(기달) 蓬萊(봉래) 霜嶽(상악) 仙山(선산) 衆香城(중향성)등이 그것이다.
이중 일반인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은 4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경치와 山色(산색), 정취가 다르다고 해서 계절별로 붙여진 금강,봉래,풍악,개골 등 4가지 이름이다.
봄에는 온 산이 푸른 새싹과 형형색색의 꽃에 뒤덮여 아름아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해서 금강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려 신록의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 봉래라고 한다.
가을에는 1만2천봉이 오색의 단풍으로 곱게 물든다고 해 풍악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나뭇잎이 지고난 뒤 기암괴석이 뼈처럼 드러나 우람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 개골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이름이 있으면서도 일반적으로 ‘금강산’으로 통칭된 것은 이 산이 불교의 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금강’이란 이름은 불교와 관계가 깊다.
금강이라는 말은 범어의 바이아라(Vaiara·단단하다는 뜻)와 통한다고 한다. 화엄경에는 “바다동쪽 보살이 머무는 곳을 금강이라 부른다”고 하였고 “동북방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 보살이 1만2천의 보살들과 더불어 항상 반야심경을 설법하는 곳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佛家(불가)의 ‘금강’이 아니더라도 금강산은 자체가 세계의 山王(산왕)으로서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름 그대로 다이아몬드(금강석)처럼 고귀함을 지닌,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 이 산을 보면 죽어도 惡道(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 북송의 蘇軾(소식.1036∼1101, 호는 東坡·동파)같은 시인은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기가 소원이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고 했다고 전해진다.
금강산은 또 우리 강토를 금수강산이라고 해 비단에 비유한 것과 연관해서도 삼천리강산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꼽혀왔다.
조선조 후기의 천재화가이자 기인으로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던 崔北(최북)은 금강산 구룡연에서 "로소 죽을 곳을 찾았구나"하고 구룡연에 뛰어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금강산이야말로 목숨을 바치고 싶은 珍景(진경)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국의 다른 명산들도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칠보산을 "함경금강" 이라 하고, 내장산을 "호남금강", 속리산을 "호서금강", 장수산을 "해서금강", 석승산을 "의주금강", 부산 금정산을 "동래금강"등으로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금강산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금강산 내의 각종 산봉우리과 계곡, 약수터 등의 이름에 불교,도교 등 종교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명소를 보면 ‘仙’자가 많이 발견된다. 도처에 눈에 띄는 이같은 표현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道敎(도교) 즉, 仙敎(선교)를 도입하면서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은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강산의 지명 가운데 이와 관련한 표현을 보면 四仙亭(사선정), 仙蒼山(선창산), 六仙岩(육선암), 三仙岩(삼선암), 天仙臺(천선대), 降仙臺(강선대), 昇仙臺(승선대), 四仙峰(사선봉), 集仙峰(집선봉), 仙霞溪(선하계), 喚仙(환선)폭포, 四仙橋(사선교)등을 들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불교설화와 민간신앙 또는 선교의 믿음이 어우러져 지명이 지어진 것도 있다. 선녀와 신선을 믿는 민간신앙에서 바위와 봉우리를 신격화한 것이 많다. 또 금강산을 지리산, 한라산과 함께 三神山(삼신산)의 하나로 지칭한 배경은 이 산을 토속신앙의 靈山(영산)으로 받아들인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름 곳곳에 풍기는화랑의 발자취> 금강산이 공식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풍악, 상악, 개골로만 소개됐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금강산에 들러 수련을 했다는 기록이 문헌에 전하고 있다. 화랑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는 금강산 중에도 동해안쪽의 叢石亭(총석정), 三日浦(삼일포), 永郞湖(영랑호)등이다. 이는 화랑들이 남쪽에서 북상할 때 해안선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에 이들이 해안명소에서 풍광을 즐겼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삼일포의 경우 화랑들이 3일간 머물렀다고 하여 삼일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화랑중 4仙으로 불린 述郞(술랑), 南石(남석), 安祥(안상), 永郞(영랑)이 호수에 머무르는 동안 바위섬에서 춤을 추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여 四仙臺(사선대)란 곳이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산의 지명 가운데 蓬萊臺(봉래대),봉래굴 등 ‘봉래’라는 이름이 생긴 것에는 조선 선조때의 인물이며 조선시대 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楊士彦(양사언.1517∼1584)의 영향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蓬萊’라는 호를 가진 양사언은 금강산에 자주 들러 풍류를 즐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가 기거한 곳을 ‘봉래대’와 ‘봉래굴’이라고 하였다 한다.
양사언은 금강산의 산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仙人(선인)으로 묘사했다는데 그가 즐겨찾던 삼일포의 바위언덕 ‘봉래굴’바위벽에 그가새긴 七言詩(칠언시)가 전해오고 있다. |
첫댓글 어떤 캐나다인이 북한 관광간다고 저에게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론 만나지 못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캐나다 국적자들은 관광방문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