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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1187호(1993년 11월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에서 승격)
위치 ; 제주시 삼양1동 696. 원당봉 불탑사 경내
시대 ; 고려
유형 ; 불교유적(탑)
원당사지의 주변은 남쪽으로 해발 170.4m의 원당봉으로 막혀 있고, 동․서․북으로 해발 40-80m의 산봉우리 6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움푹한 곳에 동서 길이 150m, 남북 폭 90m 저도의 완만한 경사면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지점에 원당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른 바 삼첩칠봉의 명당인 것이다. 오층석탑은 제주시 삼양1동 696번지 원당봉 불탑사의 동쪽 울타리에 붙여 세워져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원당사가 있었는데 당시의 절은 화재를 당하여 없어져 버렸고 탑만 남아 있다.
원당사라는 절은 고려 충렬왕26년(1300) 우리 나라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원의 기황후의 지시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당시 원나라 순제에게는 태자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북두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의 땅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승려의 계시를 받아들여 탐라국 원당봉을 적지로 선택하게 되어 이 곳에 원당사를 짓고 사자를 보내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원당봉이 적지라는 것은 삼첩인 원당봉과 그 북쪽에 작은 봉우리가 벌려 있기 때문이다. 七峰이란 주봉인 굼부리(170.7m, 허리에 굼부리를 가지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와 앞오름․망오름․펜안오름․도산오름․동나부기․서나부기를 이름이다. 서나부기는 다시 큰나부기와 은나부기로 나뉘어 불리기도 한다.
기황후(몽골명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란 고려 사람으로 관료였던 기자오(奇子敖=양광도 행주의 사족 출신으로 총부 정6품직 산랑을 지냄)의 딸이며 기철(奇轍)의 누이이다. 원나라에서는 해마다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해갔는데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녀도 공녀로 뽑혔지만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친정 부모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원나라 대도의 황궁에 도착한 후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되었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1333년 6월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고려 사람 내시 고용보는 요즘 말로 비선실세였으며 그의 힘으로 원 왕실의 궁녀가 된 것이다.
《원궁사(元宮祠》에는 그녀의 용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처럼 가냘픈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한국사인물열전, 위키백과)
그 후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惠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딸을 하나 낳았다. 기씨를 시기한 제1황후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매질과 인두로 지지기까지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기황후는 황실에서 모범적인 언행을 보였고 자금을 모아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꾸준히 넓혀갔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선행과 지지세력만으로는 자신의 입지가 확실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낳으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기황후는 탈신공개천명(奪神工改天命, 하늘이 하는 일을 빼앗아 천명을 바꿈)을 시도하였는데 풍수가 말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1황후 타나시리는 1335년 엘테무르 일족을 멸문시키려는 승상 메르키트 바얀(바이옌)이 기획한 순제모역사건에 연루되어 귀양 가던 도중 독살당하였다. 황후가 죽자 순제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권신(權臣) 바얀(바이얀)의 반대로 실패하고 바얀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칭기즈칸 시절부터 황후는 옹기라트(弘吉刺) 가문 출신에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1339년 황태자 아이유스리다례(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고 다음해 1340년 4월 11일 제2황후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정후(正后)가 된 것은 1365년 12월이다. 황후가 되자 실권을 장악하여 쇠운이 깃든 원나라를 극도의 부패와 혼란에 빠지게 하였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영향을 끼쳐 기철 일파로 하여금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게 하였으므로 이 후 공민왕의 자주운동 때에는 기철 일파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한편 원나라에서는 궁중에 고려의 미인들을 많이 두어 대신들의 배필로 삼게 함으로써 원나라의 고관․귀인들 사이에서는 고려 여자와 결혼을 해야만 명가(名家)가 된다는 관습까지 생기게 되었었다.
원나라 기황후와 원당사를 연결짓는 주장은 「고려사」에 보이는 ‘충렬왕26년(1300)에 원나라 황태후①가 또한 헌마(獻馬)를 방목했다.’라는 기록을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元의 창건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기황후의 생존 시점은 충렬왕 대가 아니라 충숙왕, 충혜왕 시절이다.(이영권) 오히려 고려시대의 양상이 짙다는 주장이다. 이 불탑을 지표조사할 때 주변에서 고려시대 도자기와 기와편이 출토된 것을 증거로 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탑이 고려후기 불탑의 무문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원나라와 연결짓는 데에 부정적인 견해를 펴고 있는 것이다.
탑이 충렬왕26년(1300)에 세워진 것이 맞는다면 기황후의 발원에 따라 절을 세웠다는 앞의 전설 또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1300년이면 기황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때이다. 기황후의 발원에 따라 세운 탑이 맞는다면 탑의 건축 시기는 1335∼1339년이 되어야 한다.
원당사는 조선시대 이후의 터잡기 방식과 다르다고 한다. 조선 이후는 땅의 형세와 좌향을 중시한 반면 이 탑은 하늘의 방위와 별(천문)을 중시하였다. 탑의 좌향이 산세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북극성을 향한 것이다. 즉,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별의 기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천문사상(숙명론)이 이곳 터잡기에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 이래로 사찰의 가람배치는 석탑이 쌍탑이건 1탑 형식이건 석탑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 중문이 있고, 북쪽에 대웅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당사지 5층 석탑이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대웅전 등의 건물지는 석탑의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1988년 제주시가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해 실시한 원당사지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30여 종의 와편이 수집되었는데, 그 중에는 대천(大天)이라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다. 또한 사지에서 와편, 청자 및 분청사기 편이 수습되어 원당사가 1300년-1600년 경까지 존속했던 사찰로 보고되었다.
어쨌든 기황후가 이곳에 절을 짓고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아들을 원하는 여성들의 성지처럼 됐었으나 조선조의 배불정책과 관련하여 절은 조선 중기에 헐리고 탑은 파묻혔던 것이 불탑사로 재건되었다.
불탑사는 원당사지에 1914년 무렵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1923년에 안봉려관과 안도월이 3칸 규모의 초가 법당 1동을 새로 지으면서 본격적인 불법 설파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불탑사의 사찰 계출일은 1930년 3월 25일로 되어 있다. 당시 명칭은 대흥사 제주포교소 불탑출장소였다. 1934년 김중봉이 감원으로 취임하여 사찰 증축에 힘을 쏟은 결과 기와로 된 법당 4칸을 증설함으로써 안정된 기반 속에서 포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에도 정법을 일으켜 세워 과거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불탑사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1948년 4·3이 일어났을 때 파옥되어 삼양리 마을로 소개(疏開)되었다가 1953년 이경호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개될 당시 승려들과 함께 피신했던 불상과 탱화들도 다시 불탑사로 되돌아왔다. 이때 되돌아온 불상은 목조 도금으로 된 높이 1척 5촌의 석가여래좌상과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 등이다. 후불탱화 신중·칠성·지장·현왕·독성·산신·감로탱 등은 1950년대 이후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불탑사는 오랜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유물이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전통 사찰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의 말사이다.
오층석탑은 다공질현무암으로 높이 395cm, 측면 너비 84cm, 정면 너비 89c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탑은 넓적한 받침돌 위에 단층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머리장식)을 장식한 일반형(一般型) 석탑(石塔)이다. 1매석(枚石)으로 조성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1단의 괴임을 각출하여 기단을 받고 있는데 기단면석에는 뒷면을 제외한 3면(面)에 같은 크기와 형식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앙연문)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하였다. 갑석(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은 부연②이 없고 상면에 넓직한 괴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각층의 탑신석에는 우주(隅柱)③가 없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각층의 탑신은 소문(素紋=무늬 없음)이나 각층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박하며 합각선(合角線)이 뚜렷하다. 각층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하나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은 문양 없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네 귀퉁이는 처마 끝만 살짝 올린 채로 마무리된(轉角) 反轉이 있는) 전형적인 고려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꼭대기에는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 후대에 만들어 올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장식이 있었다. 탑은 옥개석(屋蓋石)의 비례에 따라 축조되었다. 옥신(屋身)이 올라가면서 너비가 좁아졌기 때문에 1층 옥신만 경사가 더 심하게 보인다.
1988년에 제주대학교 박물관 팀이 지표조사를 할 때는 상륜부(相輪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직경 9.2cm, 높이 9.0cm, 구멍 직경 2.7cm의 보주(寶珠)④ 또는 용차(龍車)⑤로 추정되는 석제유물이 출토된 바 있으며, 이 유물 구멍엔 철물이 꽂혀 있던 흔적(쇠녹물)이 있어 원래 상륜부에는 철제찰주(鐵製擦柱)⑥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화산회토의 무른 땅에 세운 데다 후대에 올린 상륜부의 부도 뚜껑돌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그 동안 동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1999년 해체․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반듯하게 세워졌다. 복원팀은 흙으로 된 바닥을 파내고 생석회와 왕모래를 섞어 지반을 다졌다. 그리고 기단과 옥신 옥개를 순서대로 쌓았다. 후대에 사찰 측이 고증없이 올려놓았던 보개(寶蓋)는 탑의 비례에 맞지 않아 철거되었다.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는 (1)처마 귀퉁이마다 풍경이 달려 있었다 (2)꼭대기에는 높고 가는 장식물이 세워져 있었다 (3)원래 상륜이 분실되어 부도 뚜껑과 비석 지붕을 합친 장식물이 시멘트로 장식되어 있었다(제민일보 1999년 11월 12일) 94)지반 역할을 하는 심초(心礎)가 있었다는 사실 등이 밝혀지기도 했다.
전체적인 탑의 모양이 조형성이 적고 무거워 보이는 점, 기단부의 구조나 초층탑신의 감실(龕室)과 탑신부 각층의 옥개석 형태로 보아 지방색이 강했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5층석탑 주변은 돌담으로 둘려 있고, 경역 밖으로는 경작지, 대나무밭, 민묘 등이 있었다.
아래 사진은 해체 복원하기 전 모습이고, 위 사진은 2014년 4월 주변을 개방하여 정비한 모습이다. 주변이 넓어지니까 탑이 작아 보인다.
《작성 041017, 보완 140603, 170602, 191030》
①여기서 황태후는 원(元) 성종(成宗)의 모후(母后)인 유성황후(裕聖皇后)이다.(고창석, 제주도와 원)
②부연은 겹처마에서 처마 끝에 걸리는 방형 서까래인데 처마를 깊게 할 목적으로 사용하지만 장식적인 효과도 있다.
③건물 모퉁이에 세우는 기둥. 탑에서 상하층기단의 면석(面石)과 몸돌(塔身)의 양쪽 가장자리에 새겨지는 기둥 모양
④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구슬. 여의주 또는 여의보주라고도 한다. 〈지도론 智度論〉 권59에 의하면 원래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중생을 정신적인 번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체로서 신앙되어 점차 불상·보살상의 지물로 표현되었으며 보관·광배·천개·사리기 등 여러 부분에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드물게 연화좌 위에 따로 안치하여 독립된 본존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고루 비치는 빛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형태는 원형보주와 끝이 뾰족한 첨정보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불상 중 특히 우견편단의 약사불입상이나 백제 보살상의 지물로 많이 나타난다.
⑤탑의 상륜부(相輪部)의 꼭대기 아래에 끼운 원구(圓球)형의 장식
⑥불탑 꼭대기에 세우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중심 기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