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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행장) 安陵 李栽( 안능 이재)
공(公)의 휘(諱)는 계행(係行)이요 자(字)는 취사(取斯)이며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출계(出系)는 안동(安東)이고
고려 태사 휘 선평(高麗 太師 諱 宣平)의 후예(後裔)다.
태사(太師)께서는 신라말(新羅末)에 권태사 행(權太師 幸),장태사 길(張太師 吉)과 함께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서
역적(逆賊)견훤(甄萱)을 토벌(討伐)하여 공(功)을 세우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다.
후에 향인(鄕人)들이 그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사당(詞堂)을 세워 향사(享祀)하니,
곧 현성내(現城內:안동(安東)에 있는 세칭(世稱)삼태사묘(三太師廟)가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버성(繁盛)히 중세(中世)에 내려와서 휘 의(諱 義)는 벼슬이 정의대부 예빈시사(正義大夫 禮賓寺事)에
이르렀으며 공(公)에게는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증조 휘 득우(曾祖 諱 得雨)는 중현대부 전농정(中顯大夫 典農正)을 지냈고,
조부 휘 혁(祖父 諱 革)은 통사랑 합문봉례(通仕郞 閤門奉禮)이고,
고 휘 삼근(考 諱 三近)은 선교랑 비안현감(宣敎郞 比安縣監)을 지냈다.
비(妣)는 영가김씨(永嘉金氏)로 삭영감무 휘 전(朔寧監務 諱 腆)의 따님이다.
공(公)은 세조(世祖13년:명나라 선덕(宣德) 6년)신해(辛亥) 2월 신묘일(辛卯日)에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安東府 豊山縣 佛頂村)본가에서 탄생 하셨다.
어려서 부터 영민(英敏하며 사념(思念)이 깊고 과묵(寡默)하여 놀기 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섯살에 들어서 자서(字書)를 가르치니 문득 깨쳐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현감공(현감공)께서는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문예(문예)로 우리 문호(문호)를 일으킬 것이다. 라며
기특(奇特)히 여기고 더욱 사랑 하셨다.
열살에 비로소 스승에게 나아가서 독서(讀書)를 즐기시고 학습(學習)에 전념(專念)하니 수년(數年)이 못가서
문학(文學)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17세에 태학(太學)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과거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벼슬에 나아가려 급급하지도 않았다.
세조(世祖) 8년 여름 성주교수(星州敎授)로 임명(任命)되니 적은 벼슬이라 천시하지 아니하고 임기(任期)를
마치고 돌아왔다.
세조11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장례(葬禮)전에는 조석(朝夕)으로 죽만 접하고 장례(葬禮)후엔 여막에서 3년을 마치고
상제(喪祭)에 관한 독서(讀書)외엔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이 없었다.
탈복(脫服)하고 점필재 김선생(佔畢齋 金先生)과 더불어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갈고 닦는 더 함이 있음으로서
도의(道義)의 다짐이 매우 지극(至極)하였으니 오늘날 김선생(金先生)의 문집(文集)가운데,
증별시편(贈別詩篇)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갑인년(甲寅年:성종 5년)충주향교 교수(忠州鄕校 敎授)를 지냈고,
경자년(庚子年)에 비로소 급제(及第)하니 연만(年滿)함으로 규례(規例)에 따라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찰)에 올랐으며
임오년(壬午年)에 지방관(地方官)인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아갔으니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장엄하고
백성(百姓)을 다스림에 은혜(恩惠)로우며 스스로는 청렴(淸廉)과 근칙(謹飭)으로 엄격(嚴格)하니,
부임(赴任)한지 3년만에 치화(治化)가 잘되어 기강(紀綱)이 바로서고 관민(官民) 모두가 직분(職分)에 충실(忠實)했다.
갑진년(甲辰年) 봄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 겸 지제교(副修撰 兼 知製敎)가 되면서 부터 수십년 동안 해마다
달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빛나는 벼슬길로 이어졌다.
옥당(玉堂)만 하더라도 부수찬(副修撰)에서 부터 부교리,교리.응교 ,전한(副校理,校理.應敎 ,典翰)그리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고 교리,응교(校理,應敎)는 두번이나 지냈다.
사간원(司諫院)역시 정언,헌납,사간,대사간(正言,獻納,司諫,大司諫)을 차례를 밟아 대사간(大司諫)을 두번 지냈으며,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우승지,도승지(同副承旨,右承旨,都承旨)를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육조(六曹)에는 이조정랑,예조참의,병조참지,참의(吏曹正郞,禮曹參議,兵曹參知,參議)등 이와같이 그 전후(前後)한
관직(官職)의 내력(來歷)을 들 수 있다.
성종(成宗)이 재위(在位)해서 여러 현인(賢人)을 등용(登用)할때 의논하고 건의(建議)한 것이 평소에 쌓였던 모든것을
전포(展布)하고 천재지이(天灾地異)와 정치도의(政治道義)의 실책(失策)등 사건(事件)에 따라 하나 하나 들추어
논박(論駁)하고 아첨하지 않았으며 외척(外戚)과 내폐(內嬖)들이 일시적 영락(一時的 榮樂)으로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굶주려 죽게하는 고질적(痼疾的)인 폐단(弊端)에 이르러서는 더욱 꺼리낌없이 시정(是正)을 촉구(促求)하는
극언(極言)을 다하고 권귀(權貴)와 간신(奸臣)들의 거스름을 받아 시행(施行)이 보이지 않으면 바로 사표(辭表)를
제출하고 귀성(歸省)하였으며 때로는 상소(上疏)하고 체임(遞任)을 빌어서 일찌기 한 직(職)에 해를 채워 머문적이
없었을 뿐더러 체임(遞任)이 되면 바로 고향(故鄕)으로 돌아갔으니 그 결단성(決斷性)있는 지조(志操)가 너무나
위연(威然)함에 그 누가 가히 침해(侵害)했겠으랴.
연산군(燕山君)이 즉위(卽位)한 처음 또다시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권신(權臣)과 폐녀(嬖女)를 논소(論疏)하였으나
반영(反映)되지 않으니 이미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임을 알고 더욱 물러날 결의(決意)를 하여 연이은 사임(辭任)으로
기어코체임(遞任)되었다.
때는 정사년(丁巳年)연산군 3년 이었다.
전후(前後)하여 간문(澗文)소장(疏章)등 많은 문사(文辭)가 있었으나 다 흩어져 없어지고 전함이 없으나
외롭게 도승지(都承旨)를 사임하는 소 일문(疏 一文)이 다행(多幸)으로 남아 있었으니 요약(要略)하면,
신(臣)은 학문이 바르게 통하지 못하여 재능(才能)이 쓰임에는 맞지 아니하고 도구나 늙음으로서 몸이 쇠약(衰弱)해지니
질병(疾病)이 잇따르며 지식(知識)도 혼천(昏淺)하여 일을 접(接)함에 방향(方向)을 가늠키 어렵 사옵니다.
선왕조(先王朝)에 신임(信任)을 받사옴도 성은(聖恩)에 지나치게 힘 입었사옴인데 이제 그 한계(限界)에 달했습니다.
하늘에 우러러 부끄럽사옵고 세상을 대할 낮 또한 같사와 이몸 분발하려 스스로 힘써 봄인즉 재력(才力)이 부족하고
물러나 분수(分數)를 지키고저 함인즉 은고(恩顧)가 더욱 두터우시니 신의 진퇴(進退)가 기실낭패(其實狼狽)로 소이다.
옛적의 군자(君子)에 보잘것 없는 작은 벼슬 자리라도 더러는 해(年)를 다해가며 굳이 사양 했다하고 죽음을 밀쳐놓고
자리(취임(就任)하지 않는것이 그 형세(形勢)가 아무리 큰 불편(不便)이 있다해도 무릅써 함이 없었다 하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왕위를 이으신지 아직 얼마 아니되오니 인재(人才)를 천거(薦擧)하고 임용(任用)하는 과정(過程)에서
관계(關係)하는 바 가벼이 해서 아니되온데 어찌 신과 같은 졸열(拙劣)한 것을 오래도록 청반(淸班)의 자리에 있게해서
위로 지인(知人)하는 명철(明哲)에 누를 끼치게하고 아래로 지기(知己)하는 의리(義理)에 어긋나게하여
새로운 정사(政事)에 보탬은 없고 현재(賢才)의 나아갈길에 방해(妨害)만 있게 하옵나이까?
만약에 굽어 살피심을 입어 특볗히 개체(改遞)가 윤허(允許)되옴인즉 신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영광(榮光)이 되옵고
또한 다행(多幸)한 일인줄로 아옵니다. 와 같다.
이제 그 글을 읽고 그 뜻을 살펴볼때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충정(憂國忠情)으로 세상 앞날을 멀리 내다봄이 있었으니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음을 엿볼수가 있다.
전술(前述)한바 있듯이 이미 대사간(大司諫)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풍산 사제(笥堤)위 본가(本家)곁에다
소재(小齋)를 짓고 그 당(堂)에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한 편액(扁額)을 붙이니 아마 시(詩)에서 말한
『오가무보물,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이란 그 뜻을 담았으리라.
이때 공(公)의 연기(年紀)이미 68세의 노년(老年)에 이른 휴양(休養)을 자적(自適)해서 다시는 세정(世情)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마음을 경전(經典)에 의지(依持)하며 가라 앉히고 후진(後進)을 위해 힘쓰며
조용히 여생(餘生)을 마치려 한듯 하였다.
이듬해 가을 김일손 사화(金馹孫 史禍)가 일어 났다.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등이 쌓였던 감정(感情)으로 원한(怨恨)을 풀려고 기회(機會)만 노리다가,
마침 때를 타고 선동(煽動)을 꾸며서 반드시 그들과의 이단부류(異端部類)를 모조리 제거(除去)하고자한
조작(造作)임이 분명 하였으니 일시에 명인선사(名人善士)들이 처형(處刑)되거나 찬배(정배(定配)되기를
자못 다 했으며 공(公)또한 피체(被逮)되고 신문(訊問)을 당하여 거의 벗어날 길이 없을것 같았으나,
곧 죄상(罪狀)의 경중(輕重)이 가려져 장형(杖刑)을 치르고 석방(釋放)되었다.
도승지(都承旨)신수근(愼守勤)은 연산처(燕山妻)의 형(兄)이라 공(公)이 일찌기 내폐(內嬖)에 관계(關係)하여
논급(論及)한 바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한 감심(甘心)을 시키고자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등과 꾀 하기를,
지난날 옥사(獄事)를 다스릴때 문제의 요인(要因)을 다 뿌리 뽑지 못 하였으니 반드시 후일에 우환(憂患)이 될것이다.
는 계주(啓奏)를 내어 다시 국청(鞠廳)을 열것을 청하므로 공은 이듬해 2월에 또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게 되었으니
사태(事態)의 앞을 예측키 어려웠으나 마침 극력(極力)으로 억울함을 호소(呼訴)하여 구하는 자가 있어서 무사는 하였다.
그러나 또 그 다음해 연산(燕山)이 전사(前事)를 들추어 설국(設鞠)을 명하니 공은 두옥(投獄)되어 5개월 만에
천행(天幸)으로 방면(放免)되었다.
이렇게 수년동안 세 차례나 국청(鞠廳)에 들어가 신문(訊問)을 받는동안 이루 말 할수 없는 속박(束縛)과
갖은 고통(苦痛)을 겪었음에도 오히려 태연(泰然)하고 자약(自若)하게 대처(對處)해 감으로서 아무리 음일(淫佚)로
혼암(昏暗)한 극단(極端)도 끝내 더는 해치지 못하였다.
급기야 출옥(出獄)해서는 여러 현사(賢士)들과 운명(運命)을 같이 못함을 통탄(痛嘆)해 하며 홀로 살아 남은것을
다행(多幸)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고장(故庄)으로 물러난지 18년 세상(世上)과는 멀리 사절(謝絶)하고 평범(平凡)하게 순리(順理)에 그치며
그러다가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에 젖었을 때는 스스로를 무능(無能)하게 생각 하였다.
연산(燕山)이 무도(無道)해서 폐출(廢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10년이나 섬겼던 신하(臣下)로서 어찌 슬픔을 금할수 있겠느냐? 하시며 더욱 슬퍼 하셨다.
중종(中宗) 12년 정축년(丁丑年)보백당(寶白堂)에서 세상을 뜨시니 향년(享年) 87歲 였다.
임종(臨終)때 청백(淸白)을 전(傳)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으로서 세덕(世德)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을
심혈(心血)을 다하여 자질손(子姪孫)들을 위해 유념(留念)시키고 또 이르기를,
나는 오래 전중(殿中)에 쓰였으나 은덕(恩德)을 하나도 갚지 못하였음에 살아서도 이미 보탬이 없었으니 죽음에는
마땅이 박장(薄葬)하고 일절(一切) 비(碑)를 세우거나 넘치는 미화(美化)따위는 하지 말어라 없는 명예를 몰래 갖는것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고 하셨다.
또 부녀(婦女)들에게 명하여 절하지 말라고 하고 임종(臨終)에는 가까이 말라는 말과 아울러 남자(男子)란 부인(婦人)의
앞에서 죽지 않아야만 역시 군자(君子)의 바른 죽음인 것이다. 하셨다.
이듬해 3월 임오년(壬午年)에 예천 동직곡 신향(醴泉 東稷谷 辛向)의 원(原)에 장사하니 선영(先塋)의 뒤를 따른 것이다.
공(公)의 전부인 이천서씨(前夫人 利川徐氏)는 현감공(縣監公)인 운(運)의 따님이요,
이조전서 효손(吏曹典書 孝孫)의 증손(曾孫)이시다.
2녀(二女)를 두었는데,
장녀(長女)는 찰방 박눌(察訪 朴訥)에게,
차녀(次女)는 진사 유자온(進士 柳子溫)에게 출가(出嫁)하였고,
후부인 남씨(後夫人 南氏)는 지평 상치(持平 尙致)의 따님이며,
의령군 심(宜寧君 深) 손(孫)으로 5남(五男)을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극인(克仁)이니 영능참봉(英陵參奉)이고,
차남(次男)은 극의(克義)로 진사(進士)요,
삼남(三男)은 극례(克禮)인데 생원(生員)이며,
사남(四男)은 극지(克智)는 조졸(早卒)하였으며,
오남(五男)은 극신(克信)은 무과(武科)로 군수(郡守)를 지냈다.
찰방 박눌(察訪 朴訥)의 다섯 아들은 거린(巨鱗),형린(亨鱗),붕린(鵬鱗),홍린(洪鱗),종린(從鱗)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관(顯官)에 이르렀고,
진사 유자온(進士 柳子溫)은 네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작(公綽)은 군수(郡守)이고, 공권(公權),공석(公奭),공계(公季)라 한다.
군수 공작(郡守 公綽)은 관찰사 중영(觀察使 仲郢)을 낳았으니 문충공 서애 유성용(文忠公 西厓 柳成龍)그의 아들이다.
손자(孫子)가 여섯이니 숙보(淑寶),덕보(德寶),양보(良보),세주(世周),세은(世殷),세상(世商)이고,
증손(曾孫)은 다섯명이니, 수(洙),옥(沃),정헌(廷憲)은 진사(進士)고,정준(廷準)은 문과(文科)며 그리고 정노(廷老)다.
오늘의 8~9世에 이르러서는 후손(後孫)이 번성(繁盛)함에 이루 다 기록(記錄)이 불가하다.
오세손(五世孫) 구전공 중청(苟全公 中淸)은 문과 장원급제(文科 壯元及第)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고,
중청(中淸)의 삼남(三男) 주우(柱宇)도 또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 사간(司諫)을 지냈다.
또 중청(中淸)의 사세손(四世孫) 한운(翰運)은 아름다운 문학관(文學官)으로 통적(通籍)하였고,
그 밖에 태학(太學)에 들어간 후손이 여러명 이나 되었다.
공(公)의 천성(天性)은 효성(孝誠)이 독실(篤實)하여 모부인상(母夫人喪)을 당하였을 때는 이미연세(年歲)가 높았으나
전상(前喪)과 다름없이 여막에서 상(喪)을 마쳤다.
또 그 강직(剛直)한 기개(氣介)는 남에게 의탁(依託)함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처음 진사(進士)가 되어 교수(敎授)로서
성주향교(星州鄕校)에 재직(在職)할때 장질(長姪)인 학조(學祖)가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중이 되고,
임금의 총애(寵愛)를 받아 국사(國師)가 되어 도호 등곡(道號 登谷)이라 하고 위복(威福)을 천단(擅斷)할 때라
하루는 무슨 일로해서 성주목(星州牧)에 이르러 곧 향교(鄕校)에가 공(公)을 알현(謁見)하려 하니,
목사(牧使)가 화상(和尙)께서 몸소 수고로이 가실것 없습니다. 제가 교관(敎官)을 청(請)해 오겠습니다. 하고
사람을 보내어 맞으려 했으나 공(公)이 병(病)을 핑개로 사양하고 가지않으니 국사(國師)가 부득이 가서 뵈옵거늘
공(公)이 대노(大怒)하며 너는 왕은(王恩)만 믿고 교만(驕慢)을 자행(恣行)하느라 노숙(老叔)을 찾아와 보지는 아니하고
도리어 나로하여금 너를 찾아 뵈라하느냐? 하시며 호되게 매로 꾸짖으니 유혈(流血)에 가까웠다.
그런후 국사(國師)는 틈을 타고 청하기를, 숙부(叔父)님 께서는 언제까지 과거에 고생 하시렵니까?
만일 벼슬 하실 뜻만 있으시다면 힘을 써 보겠습니다. 라고 하니, 공(公)이 다시 꾸짖기를,
내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面目)으로 세상 사람들을 매하겠느냐? 하고 말씀 하시니
국사(國師)가 무참(無慚)하여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무렵 국사(國師)의 귀행(貴幸)이 왕조(王朝)에 경도(傾倒)되어 호흡(呼吸)이 염량(炎凉)을 변하게 할 때라
만약에 공(公)이 조금이라도 되돌아 보는 뜻만 있었다면 차라리 적지 않는 벼슬 자리라도 쉽게 다스릴 수 있었다.
따라서 정성을 다하여 천거코저 하였는데 또한 이치(理致)를 들어 준절(峻切)히 물리치니 그 언사(言辭)정하길
마치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듯 하였다.
아아!
공(公)이야 말로 어찌 이기심에 병들지 않고 위세(威勢)에 굴(屈)하지 않는 강자(剛者)라 하지 않겠는가?
만년(晩년)에 비로소 벼슬 길에 서서 처음으로 궁궐에 들어가 강직(剛直)한 말을 감히 하다가 조정(朝廷)에
용납(容納)되지 않아 외직(外職)으로 밀려 났다.
마침내 사조(四朝)를 누비며 관위(官位)가 더욱 현양(顯揚)되어도 일신의 영예(榮譽)를 지키기 위하여 어떤한
비리(非理)에 편승(便乘)하거나 외면(外面)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서 그때마다 지적(指摘)하지 않는 말이 없었다.
특히 권신(權臣)과 여폐(女嬖)들을 꼬집어 공박(攻駁)함에 더욱 더 절실 하였으니, 마치 시아(豺牙)를 찌르고
원호(怨虎)를 건드려서 죽음의 비탈에 놓였어도 후회(後悔)하지 않았다.
역시(亦是)화살같은 곧은 비궁지절(非躳之節)이라 하겠다.
무릇 사람은 진실로 재지(才智)를 갖추고 세무(世務)를 구제(救濟)해 나간다면 일시에 공(功)과 이름이 떨쳐 빛이난다.
그러나 이욕(利欲)의 생성(生成)을 능히 타파(打破)하지 못한다면 득실(得失)과 영욕(榮辱)의 즈음에서 타락(墮落)하고
비굴(卑屈)하여 천사만종(千駟萬鍾)의 영화(榮華)에 끌리어 배회(徘徊)하지 않는자 드물게 됨은 언제나 물질(物質)을
추구(追求)하기 때문에 공자(孔子)는 내 일찍 강(剛)한 자를 보지 못했다. 하였으니,
대개 인생(人生)은 능히 욕심(慾心)이 없을 수 없으나 오직 강(剛)한자만이 능히 이욕(利慾)에 굴(屈)하지 않는 따닭에
그런 사람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문왕(文王)은 역경(易經)을 연역(演繹)함에 양(陽)을 부호(扶護)하여 음(陰)을 억제(抑制)한다. 하였으니,
양강(陽剛)은 군자(君子)에 속함에 마땅히 이끌어 보강하고 음유(陰柔)는 소인(小人)에 속함으로 당연히 물리쳐
내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즉 사람은 반드시 양명(陽明)하고 강정(剛正)한 자질(資質)이 있게되고 그런후에야 비록 만변(萬變)이 닥쳐도
확고(確固)하고 굴(屈)하지 아니하여 출처(出處)하고 진퇴(進退)함에 거의 큰 후회나 치욕은 없었을 것이다.
이로 말 할진데 공(公)이야말로 어찌 천품(天稟)이 강직(剛直)하여 덕(德)을 쌓았고 도(道)를 함께 하였으니
역경(易經)에 있어 군자(君子)에 끼이고 성문(聖門)에 있어 보기드문 인재(人才)라 하지 않으랴.
아아!!
거룩함이여!
서애 문충공(西厓 文忠公)은 공의 천성(天性)이 강직하다 하였으니 연산조(燕山朝)에 두번이나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내폐(內嬖)들이 왕총(王寵)을 믿고 폐해(弊害)를 일삼으므로 극력(極力)으로 진소(陳疏)하여도 반응이 없으니,
시사(時事)를 구제(救濟)함이 어려움을 알고 병(病)이 들었다 사양하고 귀향(歸鄕)하였다.
참으로 만세에 깊이 남길 사기(史記)라 하겠다.
공(公)은 그 일찍 입산(入山)할 뜻이 있어 묵동(默洞)의 심오(深奧)한 자연기절(自然奇絶)에 심취(心醉)되어
근거(根據)할 터를 다듬어 퇴휴(退休)하여 안식(安息)할 곳으로 삼았으니 그것은 오랜 앞 세월(歲月)에 품은 뜻으로,
이미 서사(筮仕)할 그 무렵 마음깊이 다져 있었으리라.
숙종(肅宗)32년 병술년(丙戌年)에 향중인사(鄕中人士)들이 공(公)의 풍절(風節)을 민혈(泯烕)할 수 없다하여
그 은거지(隱居地) 북쪽 호담(壺潭)위에 사당(祠堂)을 세워 향사(享祠)하니 고산(高山)처럼 우러러 경모(景慕)함이
오래면 오랠수록 쇠(衰)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나 유독(惟獨)그 연대격원(年代隔遠)함에 문헌(文獻)이 무거(無據)하고
겨우 이보공(李簠公)이 지은 유사일편(遺事一篇)이 있을 뿐이다.
그 가장(家藏)한 기년록(紀年錄)또한 혼잡하여 후세에 전신(傳信)키 자못 어려워 미루어 지체하다 여태까지
실사(實事)를 편수(編修)하지 못했다.
이에 김세용군(金世庸君)이 동주(洞主)가 되어 사원(祠院)의 서책(書冊)을 살피다가 개연(慨然)히 탄식(歎息)하며
공(公)이 수립(樹立)하신바 그 실상(實相)은 완인(頑人)은 청렴(淸廉)해지고 나부(懦夫)도 자립(自立)하게하는
유풍(遺風)이 있었으나 기술(記述)한 문자는 초초(草草)하기 이러하니 이것이 어찌 사문(斯文)의
일대흠사(一大欠事)가 아니랴. 하고 곧 그들 후손(後孫)과 상의해서 나에게 연보(年譜)를 교정(校正)하고
또한 그의 사적(事蹟)을 서술(叙述)하여 행장(行狀)을 해줄것을 요청(要請)함에 나는 실사(實事)를 말할
그 능력(能力)도 없거니와 80 노혼(老昏)에 그 무슨 힘으로 감당(堪當)하겠으며 또한 수백년 후인(後人)이
수백년 앞일을 평론(評論)한다 함은 우자(愚者)가 아니면 망자(妄者)인 것이니 결연(決然)코 사양했으나,
김군(金君)과 그들의 뜻이 부단(不斷)함에 양해(讓解)받지 못하고 연보(年譜)를 바르게하고 유사(遺事)에 의거(依據)하여
평소에 느낀 것을 참고해서 삼가 위와 같이 논술(論述)하니 지언(知言)하시는 군자(君子)는 거의 평택(評擇)해서
취사(取捨)하실까 하는 바이다.
영조오년 팔월 신해일 안릉 이재 근장(英祖五년 八月 辛亥日 安陵 李栽 謹狀)
苟全公 13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동주(洞主)=사원(祠院)의 학장(學長).
사문(斯文)=우리 유림인(儒林人).
삼중대광(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고려시대 正一品,
원래 벽상삼한 혹은 삼중대광 이라 하던것을 공민왕 11년에 둘을 합하였다.벽상공신 이라고 도함.
태학(太學)=고려 때의 교육기관, 조선시대의 성균관(成均館).
옥당(玉堂)=성균관(成均館)의 별칭(別稱).
중서(中書)=의정부(議政府)의 별칭(別稱).
백부(柏府)=사헌부(司憲府)의 별칭(別稱).
미원(薇院)=사간원(司諫院)의 별칭(別稱).
은대(銀臺)=승정원(承政院)의 별칭(別稱).
증별시(贈別詩)=친한 사이에 정표(情表)로 지어주고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시(詩).
천재지이(天灾地異)=하늘의 재화와 땅의 이변(異變).
찬배(竄配)=정배(定配),귀양 보낼 곳을 정하고 귀양을 보내는일.
취리(就理)=죄를 범한 관원이 의금부(義禁府)에서 심리(審理)를 받는일.
근밀(近密)=지밀(至密)이란 말로 즉 대전(大殿),내전(內殿).
곧 임금이 평시에 거처하는 곳으로 동일시 하여 전중(殿中)으로 표현(表現)했음.
전서(典書)=고려때의 관직으로 상서(尙書)의 후신.
현관(顯官)=높은 관리(官吏),중요(重要)한 관리.
교관(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의 준말, 아이들을 가르쳐서 이끌어 주는 교관.
사조(四朝)=만조(滿朝)를 의미(意味)함.
시아(豺牙)=승냥이의 이빨.
비궁지절(非躳之節)=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忠誠)을 다하는 신하(臣下)의 도리(道理).
만종록(萬鍾祿)=아주 많은 봉록(俸祿),천사만종(千駟萬鍾).
연역(演繹)=한가지 일로 다른일을 추론함, 일반 원리를 전제로 하여 특수 사실을 이끌어 내는 추리.
퇴휴(退休)=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서 쉼.
서사(筮仕)=처음으로 벼슬을 함.
原文(원문) 行狀(행장) 安陵 李栽( 안능 이재) 公 諱 係行 字取斯 姓金氏 系出 安東 高麗太師 諱 宣平之後 太師當羅季 與權太師幸 張太師吉 有迎麗祖討逆萱之功 공 휘 계행 자취사 성김씨 계출 안동 고려태사 휘 선평지후 태사당라계 여권태사행 장태사길 유영려조토역훤지공 位三重大匡 爲開國功臣 旣沒而鄕人不忘其功德 立廟以祀之 今府城內世稱三太師廟者是也 其後寔昌以顯 위삼중대광 위개국공신 기몰이향인불망기공덕 입묘이사지 금부성내세칭삼태사묘자시야 기후식창이현 中世有 諱 義 官至正議大夫禮賓寺事 實爲公四世祖 曾大父得雨 中顯大夫典農正 大父 諱 革 通仕郞閤門奉禮 중세유 휘 의 관지정의대부예빈시사 실위공사세조 증대부득우 중현대부전농정 대부 휘 혁 통사랑합문봉례 父 諱 三近 宣敎郞比安縣監 母令人金氏 朔寧監務腆之女 公以皇明宣皇宰宣德六年我 莊憲王十二年二月 辛卯 부 휘 삼근 선교랑비안현감 모영인김씨 삭영감무전지녀 공이황명선황재선덕육년아 장헌왕십이년이월 신묘 生于安東府豊山縣佛頂村里第 幼穎敏凝遠 寡言笑不喜遊蕩 甫五歲 一聞書名 輒久而不忘 縣監公愛且奇之曰此兒他日 생우안동부풍산현불정촌리제 유영민응원 과언소불희유탕 보오세 일문서명 첩구이불망 현감공애차기지왈차아타일 必扶我門戶文藝非所廬也 十歲始就傳好讀書專意講習不數年 以文學發名 年十七入太學 自是蹭蹬科第 不爲汲汲求進計 필부아문호문예비소여야 십세시취전호독서전의강습불수년 이문학발명 년십칠입태학 자시층등과제 불위급급구진계 天順六年夏薦授星州學敎授 不卑小官任滿乃還 成化元年丁外艱 未葬朝夕啜粥 旣葬廬墓終三年 讀喪祭禮外非喪事不言 천순육년하천수성주학교수 불비소관임만내환 성화원년정외간 미장조석철죽 기장려묘종삼년 독상제례외비상사불언 服闋 與佔畢齋金先生 遊有講磨切磋之益 道義之契甚至 今有贈行篇十 見金先生文集什 十年又除忠州學敎授 十六年 복결 여점필재김선생 유유강마절차지익 도의지계심지 금유증행편십 견김선생문집십 십년우제충주학교수 십육년 始擢第 以年滿 例陞司憲府監察 十八年出知高靈縣監 莊以莅政 惠以治民 淸謹以自牧 爲政三年 化洽綱擧 史民不敢欺 시탁제 이년만 예승사헌부감찰 십팔년출지고령현감 장이리정 혜이치민 청근이자목 위정삼년 화흡강거 사민불감기 二十年春 入爲弘文館副修撰兼知製敎 自是數十年間 年除月遷 歷敭華貫 玉堂自副修撰至副校理校理應敎典翰副提學 이십년춘 입위홍문관부수찬겸지제교 자시수십년간 연제월천 역양화관 옥당자부수찬지부교리교리응교전한부제학 而爲校理應敎者再 薇垣爲正言獻納司諫大司諫而爲大司諫者再 柏府爲掌令 中書爲檢詳 銀臺爲同副右都承旨 이위교리응교자재 미원위정언헌납사간대사간이위대사간자재 백부위장령 중서위검상 은대위동부우도승지 國子爲大司成 六曹爲天官正郞春秋官參議夏官參知參議 此 其前後履歷官閥也 成廟在宥羣彦彙征 論思獻替庶幾展布 국자위대사성 육조위천관정랑춘추관참의하관참지참의 차 기전후이력관벌야 성묘재유군언휘정 논사헌체서기전포 素蘊 灾異之警 政法之失 隨事論列棘棘不阿 至於外戚內嬖蠧國病民爲一時痼弊者 尤極言竭論 不避忌諱 而徒忤貴近 소온 재이지경 정법지실 수사논열극극불아 지어외척내폐두국병민위일시고폐자 우극언갈론 불피기휘 이도오귀근 不見施行則輒呈告歸覲 或引章乞遞 未嘗終歲淹一職 見遞卽還鄕 其難進易退之操 澟然 有不可奪者喬桐主嗣服之初 불견시행칙첩정고귀근 혹인장걸체 미상종세엄일직 견체즉환향 기난진역퇴지조 늠연 유불가탈자교동주사복지초 又以大司諫 論權嬖不合 已知其不可有爲 尤決意退歸 連辭必遞 弘治十年丁巳也 前後諫藁辭章 今皆敢佚無傳 우이대사간 논권폐불합 이지기불가유위 우결의퇴귀 연사필체 홍치십년정사야 전후간고사장 금개감일무전 獨其辭都承旨一疏 尙幸見亂帙中 其略曰巨學不通方 才不適用 加以年紀衰耗 疾病纏身 識量昏淺 觸事迷方 而遭遇先朝 독기사도승지일소 상행견난질중 기약왈거학불통방 재불적용 가이년기쇠모 질병전신 식량혼천 촉사미방 이조우선조 濫被誤恩 涯分已逾 俯仰慚靦 欲奪身自厲則才力淺 薄欲退安愚分則 天眷愈厚 臣之進退實爲狼狽 古之君子於一 남피오은 애분이유 부앙참전 욕탈신자려칙재력천 박욕퇴안우분칙 천권유후 신지진퇴실위랑패 고지군자어일 資半級之除 或有終歲力辭 抵死不居者 其勢必有大不便 而難冒昧耳 殿下嗣服之初 厲引賢才 所係非經 如臣薄劣 자반급지제 혹유종세력사 저사불거자 기세필유대불편 이난모매이 전하사복지초 려인현재 소계비경 여신박열 豈可久冒淸班 上累知人之哲 下乖量巳之義 無補新政 有妨賢路 如蒙俯察 特 許鐫改則其在臣身 至榮且幸 今讀其辭 기가구모청반 상누지인지철 하괴량사지의 무보신정 유방현로 여몽부찰 특 허전개칙기재신신 지영차행 금독기사 翫其意則可見其憂深思遠 有不竢終日之志矣 旣遞諫長 卽謝病歸田 構小齋于豊山笥堤上居第之傍 扁其堂曰寶白 완기의칙가견기우심사원 유불사종일지지의 기체간장 즉사병귀전 구소재우풍산사제상거제지방 편기당왈보백 葢取其所作詩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之意也 是時 公已六十八矣 自以年至當休致 不復有意於世 潜心經籍 勉厲後進 개취기소작시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지의야 시시 공이육십팔의 자이년지당휴치 불복유의어세 잠심경적 면여후진 退然若將終身明年秋 金馹孫史禍作 李克敦柳子光等 蓄憾伺釁乘時構煽 必欲盡除異已而後 已一時名人善類 誅竄殆진 퇴연약장종신명년추 김일손사화작 이극돈유자광등 축감사흔승시구선 필욕진제리이이후 이일시명인선류 주찬태진 公 於是被遞考訊 幾不得脫 尋 分輕重 決杖見釋 有都承之愼守勤者 燕山妻兄也 公以嘗論內嬖故 必欲甘心 與盧思愼 공 어시피체고신 기부득탈 심 분경중 결장견석 유도승지신수근자 연산처형야 공이상론내폐고 필욕감심 여노사신 尹弼商 韓致亨等謀曰 前日治獄 不盡除禍根 必爲他日之患 啓請再鞫 公以明年二月 又就理 事將不測 會有極力 윤필상 한치형등모왈 전일치옥 불진제화근 필위타일지환 계청재국 공이명년이월 우취리 사장불측 회유극력 伸其枉者 事得已 又明年 燕山追記前事 㪅命設鞫 公逮繫 五閱月而天幸 又得脫 數年之內 三入訊庭 桎梏桁楊之謂何 신기왕자 사득이 우명년 연산추기전사 경명설국 공체계 오열월이천행 우득탈 수년지내 삼입신정 질곡항양지위하 猶且安而處之 不懾不震 雖以淫昏之極 終不能加害 及其旣出 又痛不得與諸賢駢命 不以獨免爲幸 於是退處鄕庄 유차안이처지 불섭불진 수이음혼지극 종불능가해 급기기출 우통부득여제현변명 불이독면위행 어시퇴처향장 十有八年 與世長사 夷然處順 然 傷時憂國之誠 猶不能自己 及聞故主以無道廢黜 泫然以涕曰臣事十年 不得不戚戚然 십유팔년 여세장사 이연처순 연 상시우국지성 유불능자기 급문고주이무도폐출 현연이체왈신사십년 부득불척척연 以 正德十二年考終于寶白堂 卽我 中宗大王卽位之十二年而享年八十有七 臨終 以傳淸白敦孝友母忝世德之意惓惓 이 정덕십이년고종우보백당 즉아 중종대왕즉위지십이년이향년팔십유칠 임종 이전청백돈효우모첨세덕지의권권 爲子姪孫言之 又曰吾久叨近密無一報效 生旣無益 死當薄葬 切勿丐顯刻爲溢美計 無寶盜名 吾所恥也 旣又命婦女拜 위자질손언지 우왈오구도근밀무일보효 생기무익 사당박장 절물개현각위일미계 무보도명 오소치야 기우명부녀배 辭而入臨絶 母近前曰男子不絶於婦人之手 亦可見君子之正終也 明年三月壬午 葬于醴泉郡東稷谷辛向之原 從先兆也 사이입임절 모근전왈남자불절어부인지수 역가견군자지정종야 명년삼월임오 장우예천군동직곡신향지원 종선조야 公前夫人徐氏 縣監運之女 吏曹典書 孝孫之曾孫 生二女 長適察訪朴訥 季適進士柳子溫 後夫人南氏 持平尙致之女 공전부인서씨 현감운지녀 이조전서 효손지증손 생이녀 장적찰방박눌 계적진사유자온 후부인남씨 지평상치지녀 宜寧君深之孫 生五男 長克仁英陵參奉 次克義進士 克禮生員 克智先卒 克信武科郡守 察訪柳子五人 巨鱗 亨鱗 鵬鱗 의령군심지손 생오남 장극인영능참봉 차극의진사 극례생원 극지선졸 극신무과군수 찰방유자오인 거린 형린 붕린 弘鱗 從鱗 皆登文科躋顯仕 進士有四子 曰 公綽郡守 公權 公奭 公季 郡守生觀察使仲郢 西厓文忠公成龍其子也 홍린 종린 개등문과제현사 진사유사자 왈 공작군수 공권 공석 공계 군수생관찰사중영 서애문충공성룡기자야 孫男六人 淑寶 德寶 良寶 世周 世殷 世商 曾孫男五人 洙 沃 廷憲進士 廷準文科 廷老 今至八九世 本支繁衍 不可盡述 손남육인 숙보 덕보 양보 세주 세은 세상 증손남오인 수 옥 정헌진사 정준문과 정노 금지팔구세 본지번연 불가진술 而五世孫 中淸 中文科 官至承宣 其子柱宇亦擢上第 入薇垣 又其四世孫翰運方趾美通籍金閨 其餘入太學自又數人 이오세손 중청 중문과 관지승선 기자주우역탁상제 입미원 우기사세손한운방지미통적금규 기여입태학자우수인 公天性篤孝 其遭母夫人喪 年已不毁 廬墓盡制 一如前喪 又其剛介 不肯苟徇人始以廣文寒官樓遲州庠間也 공천성독효 기조모부인상 년이불훼 여묘진제 일여전상 우기강개 불긍구순인시이광문한관누지주상간야 兄子學祖出家修道籍 上寵壇威福號爲燈谷國師 一日因事至星州將謁公於州庠 牧使曰和尙不必勞道體 吾請敎官來 형자학조출가수도적 상총단위복호위등곡국사 일일인사지성주장알공어주상 목사왈화상불필노도체 오청교관래 遺人邀公公謝病不往師不得已來謁 公怒曰汝恃 恩驕恣 不來見老叔反使我謁汝邪痛杖幾出血 旣而師乘間請曰 유인요공공사병불왕사부득이래알 공노왈여시 은교자 불래견노숙반사아알여사통장기출혈 기이사승간청왈 叔父久因場屋 如有仕意 請致力 公又怒曰 汝得官 何面目見人 師慚不敢復言 當是時 師貴幸傾朝 呼吸變炎凉 숙부구인장옥 여유사의 청치력 공우노왈 여득관 하면목견인 사참불감복언 당시시 사귀행경조 호흡변염량 如使公有一 分瞻顧意 寧不少爲之地而治之不少貸 及其輸誠欲吹噓 又據理峻斥 辭嚴義正 不啻若斬釘截鐵 嗚呼 여사공유일 분첨고의 영불소위지지이치지불소대 급기수성욕취허 우거이준척 사엄의정 불시약참정절철 오호 若公者 豈非所謂 不爲利疚不爲威惕者邪 晩始釋褐 初入殿中 已以剛直敢言 不容於朝 而出補外矣 及其歷事四朝 약공자 기비소위 불위이구불위위척자사 만시석갈 초입전중 이이강직감언 불용어조 이출보외의 급기역사사조 官位益顯 又以尸素爲深恥 知無不言 言無不盡 而指斥權嬖 尤深且切以至觸豺牙 撼虓虎 阽九死而不悔也 亦可謂得如 관위익현 우이시소위심치 지무불언 언무불진 이지척권폐 우심차절이지촉시아 감효호 점구사이불회야 역가위득여 失之直 匪躳之忠矣 夫人固有負才智濟世務 功勳名譽震耀一時 然 未能透打利欲關頭 則得喪榮辱之際 鮮不霣獲充詘 실지직 비궁지충의 부인고유부재지제세무 공훈명예진요일시 연 미능투타이욕관두 칙득상영욕지제 선불운획충굴 眷戀遲徊於千駟萬種之間者 恆物之大情也 故 孔子曰吾未見剛者 葢人生不能無欲 惟剛者而後 能不屈於欲故 爲難得也 권연지회어천사만종지간자 항물지대정야 고 공자왈오미견강자 개인생불능무욕 유강자이후 능불굴어욕고 위난득야 文王演易 扶陽而抑陰 葢以陽剛屬君子 當引翼 除柔 屬小人 當黜退故也 然則人必有陽 明剛正之質然後 雖萬變交前而 문왕연역 부양이억음 개이양강속군자 당인익 제유 속소인 당출퇴고야 연칙인필유양 명강정지질연후 수만변교전이 確乎其不可屈出處進退庶幾無大悔吝 以此言之 若公者 又豈非稟剛德秉直道 在易 爲君子之類 而在聖門 爲難見之人乎 확호기불가굴출처진퇴서기무대회린 이차언지 약공자 우기비품강덕병직도 재역 위군자지류 이재성문 위난견지인호 烏呼偉哉 西厓文忠公嘗稱公性剛直 燕山朝在長諫院 極陳內嬖恃 寵貽弊不納知時事難救 謝病歸田 可謂萬世惇史矣 오호위재 서애문충공상칭공성강직 연산조재장간원 극진내폐시 총이폐불납지시사난구 사병귀전 가위만세돈사의 公早有入山之志而愛默洞山水幽深奇僻 暇日營菟裘以爲退休樓息之所 葢其卷懷長往之志已決於筮仕之初矣 공조유입산지지이애묵동산수유심기벽 가일영도구이위퇴휴루식지소 개기권회장왕지지이결어서사지초의 明陵丙戌一鄕人士以公風節 不可終泯 卽其菟裘北壺潭之上 立廟以祀之 高山景行之思逾久逾不衰如此 獨기年代絶遠 명능병술일향인사이공풍절 불가종민 즉기도구북호담지상 입묘이사지 고산경행지사유구유불쇠여차 독기년대절원 文獻無徵 中間僅有故尙食郞李公簠遺事 一篇而已 若其家藏紀年錄又 其蹖駮殆難以傳信後世 而因循遷就迄未有能 문헌무징 중간근유고상식랑이공보유사 일편이이 약기가장기년록우 기용박태난이전신후세 이인순천취흘미유능 畱意者 迺者金君世鏞甫爲洞主周覽院籍 慨然發歎曰公之所樹立 實有廉頑立 懦之風 而紀述文字草草如此 豈非斯文 유의자 내자김군세용보위동주주남원적 개연발탄왈공지소수립 실유염완입 나지풍 이기술문자초초여차 기비사문 一欠事邪 乃與其諸孫謀屬余釐正年譜 又要次其事始終爲狀栽之 愚旣無能言之實 重以昏耋及之 其何力以堪之 일흠사사 내여기제손모속여리정년보 우요차기사시종위장재지 우기무능언지실 중이혼질급지 기하력이감지 且生於數百載之後 欲評論數百載之前 非愚則妄 決不敢犯手 而洞主君及諸孫之意 不但已也 旣不獲讓 考訂年譜 차생어수백재지후 욕평논수백재지전 비우칙망 결불감범수 이동주군급제손지의 부단이야 기불획양 고정연보 訖 據其遺事參以平日私自隱度於中者 謹次而論著之如牛 庶知言君子有所財擇去取云 흘 거기유사참이평일사자은도어중자 근차이론저지여우 서지언군자유소재택거취운 상지오년 팔월신해 안릉 이재 근장(上之五年 八月辛亥 安陵 李栽 謹狀) <苟全공 13 世孫 金台東 옮겨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