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군공신 [回軍功臣]
고려 말기 1388년(우왕 14)에 단행된 위화도회군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준 공신호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李成桂) 일파와 그에 협력한 신진사류세력이 실권을 잡아 권문세족을 억누르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이성계는 동조세력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위화도회군 때 공을 세운 이들을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으로 책봉했다. 이때 책봉된 인물로는 이성계(李成桂)·심덕부(沈德符)·왕안덕(王安德)·지용기(池湧奇)·배극렴(裵克廉)·윤호(尹虎)·정지(鄭地)·유만수(柳曼殊)·박위(朴葳)·최윤지(崔允沚)·황보림(皇甫琳)·이무(李茂)·이빈(李彬)·조인옥(趙仁沃)·남은(南誾)·신조(神照)·경보(慶補)·조희고(趙希古)·경의(慶儀)·이화(李和)·최단(崔鄲)·최운해(崔雲海)·이두란(李豆蘭)·이승원(李承源)·육려(陸麗)·윤사덕(尹師德)·구성로(具成老)·박영충(朴永忠)·정요(鄭曜)·황희석(黃希碩)·유광우(兪光祐)·김인찬(金仁贊)·장사길(張思吉)·최공철(崔公哲)·왕빈(王賓)·박가실(朴可實)·김천장(金天莊)·정자의(鄭子義)·이백(李伯)·조온(趙溫)·정송(鄭松)·이덕림(李德林)·백영우(白英祐)·장철(張哲) 등 45명이었다. 그리고 이미 죽은 변안렬(邊安烈)·조인벽(趙仁璧)·이원계(李元桂)·박총(朴叢)·안경(安慶)·김상(金賞)·김백흥(金伯興) 등 7명, 그리고 최영(崔瑩)이 이끄는 군과의 대치상황에서 계책을 낸 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도 봉록되었다. 회군 이후 이성계일파가 정권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조민수·최공철·변안렬·김백흥·지용기·왕안덕 등은 숙청당하여 공신의 명단에서 빠지게 되어, 회군공신은 48명이 되었다. 1391년 공신전(功臣田)을 지급했는데, 1등공신 이성계에게 100결, 2등 심덕부 등 17명에게 각각 50결, 3등 최단 등 30명에게는 30결씩을 주었다. 이들 48명 중에는 이성계의 편에 서서 회군에 적극 참여한 이들도 있지만, 단순 동조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후 그들 대부분은 조선을 개국하는 데 주요역할을 했으나, 일부는 정권에서 밀려나거나 은둔하기도 했다. 1393년(태조 2) 조선개국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성계는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위화도회군을 이용하기 위해서 회군공신을 재책봉했는데, 이때에는 6명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