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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일곱 자루의 검(劍)
쏴아아… 쏴아아…
비가 내리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는 가을밤의 정취(情趣)를 흠씬 머금은 야우(夜雨)였다.
그러나, 공룡(恐龍)의 앙상한 뼈다귀마냥 흉칙한 몰골을 드러낸
폐성(廢城) 위로 쏟아지는 비에는 결코 정취따위가 있을 수 없다.
거대한 규모였던 성채의 곳곳에는 고루거각(高樓巨閣)과
가산(假山), 인공연못 등의 잔재가 남아 있어 한때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영화롭던 시절은 일장춘몽처럼 지나가고
지금은 그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 검게 타다 남은 보기 흉한 건물의 골격들이 덩그라니 버려진 채
그 무상(無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위가 깊은 어둠과 적막에 잠겨 있을 야심한 시각,
쏟아지는 빗줄기는 황폐한 폐성의 잔해를 두들기며 튀어오르고 있었다.
한데 오직 빗소리만이 요란하던 이 폐성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절벅…절벅…
마치 한 밤의 얼굴없는 사자(死者)의 행진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는
비먹은 땅을 밟는 발자국 소리였다.
이미 오 년(五年) 전에 폐허로 변해 버린 이 죽음의 땅을 과연 누가 아왔단 말인가?
쏴아아아… 휘이잉!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어우러진 발걸음 소리는
마치 오 년 전 그 날의 참혹했던 비명소리처럼 을씨년스럽게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문득 멈추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봉분(封墳) 앞이었다.
무덤-! 그것은 오랫동안 돌보는 이가 없었던 탓에 온통 잡초로 뒤덮인 무덤이었다.
높이가 삼장이 넘는 이 커다란 무덤은
잡초가 너무나 무성한 탓에 흡사 풀로 뒤덮인 둔덕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무성한 잡초 더미 사이로 하나의 석비(石碑)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
이것이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무덤임을 은연중에 웅변하고 있었다.
-切劍塚(절검총)!
멀리 먹장구름 속을 지나는 벼락의 흐릿한 섬광이 언듯 비추며
석비에 새겨져있는 그같은 글귀를 내보였다.
절검(切劍)이라 함은 검을 부러뜨림을 말하고 총(塚)이라 함은 무덤을 의미한다.
즉 이 잡초 무성한 무덤이 부러진 검들의 무덤이란 뜻이다.
무덤치고는 엄청날 정도로 큰 무덤…!
정녕 그 속에는 사람의 유골대신 부러진 검이 묻혀있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도검이 부러지고 끊어져
이같이 거대한 무덤을 이루었단 말인가?
쏴아아…쏴아아…
[…!]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 무덤 앞에 말없이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인물의 일신에서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은 처절한 비애(悲哀)의 기운이었다.
무덤을 바라보며 마치 굳어진 석상처럼 서 있는 그 인물은
대략 이십 삼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일신에는 칠흑같이 검은 흑의(黑衣)가 걸쳐져 있었고
신발 역시 검은색의 흑단화(黑短靴)였다.
청년의 검디검은 흑발(黑髮)은 삼단처럼 풀어헤쳐져 바닥까지 끌리고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는 물풀처럼 출렁였다.
후리후리한 몸매의 이 청년은 입고 있는 검은색의 옷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창백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던 듯 너무나 희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청년의 이목구비만큼은 정교한 세공품처럼 아주 수려했다.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지녀
어떤 여인이라도 한 번쯤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심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눈빛은 흐릿하여 마치 깊디깊은 늪 속을 보는 듯했고
안색은 일점의 변화도 없어 흡사 깍아놓은 석고상 같았다.
[……!]
흑의청년의 눈빛은 절검총이란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다.
돌보는 사람 없어 잡초가 무성하고 군데군데 무너진 무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덤보다 더 황량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무심해 보이는 두 눈 깊은 곳에서는 처절한 비애와 분노가
잔광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쏴아아아…
망부석처럼 서있는 흑의청년의 전신을 비바람이 휩쓸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눈가에 서렸다.
문득 흑의청년은 조용히 무덤 앞에 무릎을 접더니
일 배(一拜), 또 일 배(一拜), 도합 두 번 반의 절을 했다.
절을 마친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어 영원히 열릴 것같지 않던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음울하고 비감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못난 단사영(段社煐)이 이제서야 검성(劍城)으로 돌아왔습니다.]
단사영(段社煐)-!
빛을 모은다는 뜻을 지닌 사영(社煐)이란 이름을 지닌 이 흑의청년은
조용하지만 마디마디 한 어린 음성을 토해냈다.
[오직 의(義)를 위해서만 뽑혀졌던 삼천검(三千劍)이 무참히 부러진 그 날의 빚은
이 단사영이 기필코 받아낼 것입니다.
부디 구천에서나마 사영의 복수를 지켜봐 주십시오 검성의 영령들이시어!]
그것은 통곡보다 더한 단장의 맹서였다.
검성(劍城)-!
추야한우(秋夜寒雨)에 젖고 있는 이 광활한 성채의 옛 이름이 검성인 듯했다.
절검총이란 이 거대한 무덤에는 검성의 검수들이 목숨같이 아끼던 보검들이
무참히 끊겨 묻혀 있는 듯하고…!
[피에는 피…! 악에는 악…!
그들 일곱의 가증스런 흉수(凶手)들은
자신들이 우리 검성일족에게 베푼 그대로를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빗줄기 속에 우뚝 선 채 복수를 다짐하는 흑의청년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살의와 광기가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겠습니다.
검(劍)의 자존심을 걸고 그 날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 죽어야 할 이유조차 모르고 죽음을 당한 여러분들의 한맺힌 복수가
이 순간 이후로 시작될 것입니다.]
쏴아아…
[일곱 명의 흉적(凶賊)들,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 인면수심(人面獸心)들은
이 순간부터 살아있음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흑의청년은 조용히 등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돌아서는 가 싶었는데
그의 신형은 마치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쏴아아… 쏴아아!
밤비만이 남아 정적을 깨는 야심한 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믿었던 자는 되살아났고,
상상도 못한 복수는 시작되었다.
어둠은 말이 없었으나
비정(非情)한 피비린내(血香)는 소리없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소흥(紹興)-
절강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인 항주(杭州)의 남동쪽 사백여 리에 자리한 시진이다.
비록 천하에 이름 높은 예향(藝鄕) 항주에 비할 바가 못되는 자그마한 시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소흥은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것은 소흥이 바로 저 중원팔대명주(中原八大名酒) 중 하나인
소흥주(紹興酒)의 원산지인 때문이다.
소흥주는 탁주(濁酒:막걸리 종류)의 일종이다.
중원 어느 지방을 가건 그 지방 고유의 탁주가 있긴 하지만
이곳 소흥에서 나는 소흥탁(紹興濁)의 맛을 따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소흥은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수도(首都)로써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다짐하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가 깃든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쏴아아…
삼경이 다 되어 가건만 소흥성은 여전히 비에 젖어 있었다.
소흥주의 원산지답게 보통은 새벽까지 흥청거리던 주점(酒店)과 청루(靑樓)들도
구질구질 내리는 비 때문인지 일찌감치 등(燈)을 내리고 있었다.
주점들이 빼곡히 늘어선 홍등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황가철점(黃家鐵店)의 주인인 황태(黃太)도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술집을 찾는 손님의 발길도 없는데
하물며 병장기나 농기구를 사러올 손님이 있을 턱이 없었다.
[빌어먹을… 웬놈의 비가 이렇게 징하게 쏟아지누?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이 을씨년한 비네 그려…]
초로의 닳고닳은 장사치인 황태는 비에 젖은 나무 문을 닫으며 투덜거렸다.
황가철점은 쇠로 만든 것은 무엇이든 취급하지만
주로 취급하는 상품은 창이나 칼같은 병장기였다.
춘추시대의 전설적인 도검장(刀劍匠)들인
구야자(邱冶子)나 간장(干將) 막야(莫耶) 부부가 이곳 월(越)의 출신임을 안다면
소흥의 병장기가 무림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이러니 장사가 될 턱이 있나?
이 시간까지 문을 열어 놓고 있는 내가 팔푼이지. 쯧쯧…]
그는 연신 투덜거리며 오늘 장사가 망친 것을 날씨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소흥의 도검이 유명하다고 해도
이렇게 하루종일 비가 질척거리는 날 장사가 될 까닭이 없었다.
한데, 황태가 가게문을 반쯤 닫았을 때였다.
거리 저편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가을비를 뚫고
가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을 발견한 황태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사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닌지라
첫눈에도 그 인물이 병기를 사기 위해 나타난 고객이란 것을 알아본 것이다.
(흐흐! 역시 끈기있게 버틴 보람이 있군! 잘만 후려치면 오늘 일당은 벌겠어!)
황태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허억!)
가까이 다가온 그 인물의 얼굴에 시선이 가는 순간
황태는 그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문 앞의 그림자는 일신에 먹물같은 흑의를 걸친 청년이었다.
일견하기에도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그의 일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용모와는 달리 실로 소름끼치도록 냉혹한 것이었다.
(시…시체?)
흑의청년을 가까이서 본 황태는 기절할 듯 놀랐다.
흑의청년은 마치 이제 방금 무덤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전신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릿하게 풀어 헤쳐진 눈빛과 창백한 피부 위로는
그저 석고상같은 무생명체의 기운만이 감돌았다.
도대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얼마 전 소흥성 동문 밖에 버려진
검성(劍城)이란 이름의 거대한 폐성을 떠나온 흑의청년 단사영(段社煐)이 아닌가?
단사영의 음산한 행색을 본 병기점 황태는 사지를 벌벌 떨었다.
(빌…빌어먹을! 진작 문을 닫았어야 하는 건데
칼 한 자루 더 팔려다가 내 목숨까지 팔겠다.)
오랜 장사 경험 덕으로 황태는 눈 앞의 흑의청년이
강호도상의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흑의청년의 전신으로 풍기는 기도로 보아
백도(白道)상의 인물이기보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흑도인(黑道人)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니 황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흑…흑도인들에게는 말…말 한 마디 잘못해도 목이 달아난다. 꾸울꺽!
아쉽지만 가장 좋은 병기를 줘서 후딱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만수무강에 이롭다.
그런데 왜 입이 열리지 않지?)
병기점 주인 황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그 비를 맞고 나타난 손님이
죽음의 기운을 물씬 풍겨내는 인물이니 공포에 떠는 것도 당연했다.
단사영은 침잠한 시선으로 그런 황태를 바라보았다.
[검을 주시오.]
순간 황태는 흠칫하여 몸을 떨었다.
[저…저의 집에 손님 눈에 들 만한 좋은 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백련정강(百鍊精鋼)의 보검이 한 자루 있기는 합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황태는 되도록이면 이 음산한 분위기의 손님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서
아끼고 아끼는 보검에 대해 말했다.
괜히 시덥지 않은 검을 권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사영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검은 좋은 검이 아니오.]
[예?]
황태는 눈을 크게 떴다.
대개의 무사들은 좋은 검을 원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사용하는 검의 좋고 나쁨에 따라서 목숨이 오고갈 수도 있는 것이 강호인의 삶인 것이다.
헌데 이 재수없게 생긴 손님이 좋은 검을 마다하자
황태는 더 한층 마음이 조급해져서 급히 되물었다.
[그… 그럼 어떤 검을 원하십니까?]
단사영은 음울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개 돼지를 벨 수 있는 정도의 검이면 되오.]
[개 돼지를 벨 때 쓸 만한 검…?]
[녹슨 철검이라도 상관없고, 부러진 검이라도 상관없소. 일곱 자루만 주시오.]
[정…정말 그거면 됩니까?]
[어서 주시오.]
단사영의 어조에서 약간의 역정을 느낀 황태는
황망히 안으로 가게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일곱 자루의 쓸어모았다.
곧 황태는 가슴 한 아름 일곱 자루의 검을 안고 다시 돌아와
그것 들을 단사영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단사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쓸 만한 검들이군.]
그는 황태가 건네주는 일곱 자루의 검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말없이 소매 속에서 끈 하나를 꺼내더니 검들을 한테 묶어 칭칭 감았다.
그런 다음 어깨에 짊어매니 일곱 자루의 검이 묵직하게 등에 업혀졌다.
단사영의 그런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고 있던 황태의 눈에 의혹이 번졌다.
(진짜 저걸로 개 돼지를 잡을 모양이군.
병장기 장사 삼십 년 동안 검을 저 따위로 다루는 강호인은 처음 봤다.)
대저 강호무림인들은 검을 목숨처럼 다룬다.
검 한 자루에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걸고 있는 자들이 강호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 눈에 비쳐진 단사영의 모습은 강호인이라기보다는
검장수처럼 보일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과 압박감이 없었더라면
단사영을 시정잡배나 장사치로 보기에 딱 알맞았다.
단사영이 황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두 얼마요?]
황태는 염두를 굴렸다.
(바가지를 확 씌워 버릴까? 아니지, 이제껏 내 눈은 정확했어.
검을 막 다루지만 함부로 다룰 작자는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꽁짜로 줄 수는 없고…)
황태는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헤헤 한 냥만 주십시오.]
[한 냥이라…! ]
단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사영은 은자 한 냥을 꺼내 황태에게 건네주었다.
[헤헤 감사… 억!]
황태가 은전 한 냥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단사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본래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단사영의 귀신도 곡할 경신술에 황태는 새삼 진저리를 쳤다.
[으…! 잔머리 굴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까딱했으면 골로 갈 뻔했다.]
황태는 떨리는 시선으로 단사영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의혹이 떠올랐다.
[그… 그런데 그 유령같은 작자가 왜 검을 일곱 자루 씩이나 샀을까?
그것도 명검이라면 또 모르지만 나무도 제대로 벨 수 없는 몹쓸 검들인데…]
그러나 그는 아무런 해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일개 장사치인 그가 어찌 짐작인들 할 수 있겠는가?
머지않아 자신이 엽전 한 냥에 팔어 버린 그 검들이
강호 무림에 무서운 혈풍을 몰고 오게 된다는 것을…!
다만 황태는 한 차례 악몽을 꾼 듯한 표정으로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비는 밤새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다 쓰러져가는 사당(祠堂)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당의 사방에는 무성한 잡초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휘청이고 있었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심야이건만 사당에서는 흐릿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사당 안에서는 소란스런 사람들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왼쪽이다. 왼쪽으로 돌아!]
[어어… 피해, 오른쪽으로 피하란 말야!]
[잘한다! 물어! 쉭쉭 물어라!]
사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당 안에는 비를 피해 이십여 명의 거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에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말하는 입술 사이로 내비치는 이빨은 누렇다 못해 아예 황금빛이었다.
한데 지금 사당 안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라올라 있는 거지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중앙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거지들이 빙 둘러선 중앙에는 큼직한 나무 물통이 하나 놓여 있고
그 나무 물통 안에서는 지금 지금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쥐(鼠)!
집쥐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커보이는 들쥐 두 마리가
나무 물통 안에서 발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들쥐들은 그리 넓지 않은 나무 물통 안에서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그놈들은 어떤 약물이라도 복용했는지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살벌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서로 물어뜯는 두 마리 들쥐를 바라보며 거지들은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
이는 말 그대로 투견(鬪犬)도 투계(鬪鷄)도 아닌 투서전(鬪鼠戰)이었다.
찍 찍-!
[물어! 물어!]
[쥑여! 목아지를 따버려!]
광란의 외침과 뜨거운 열기가 사당 안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던 한 순간 나무 물통을 에워싼 거지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되었다.
[와! 이겼다.]
[빌어먹을… 또 깨졌잖아!]
물통 안엔 한 마리 들쥐가 다른 들쥐의 목을 문 채 질질 끌고 다녔고,
통 안은 죽어 축 늘어진 쥐의 피로 가득했다.
그리고 좌우로 나눠진 거지 패거리들 가운데 좌측의 거지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면 우측의 거지들은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크크크… 우리 쥐새끼가 이겼으니 내일 동냥은 너희 쪽이 하는 거다.
알겠냐? 추면개(醜面蓋)!]
좌측의 거지 가운데 허리춤에 세 가닥의 매듭을 한 중년 거지가
우측 거지들 중 역시 세 가닥 매듭을 한 늙고 못생긴 거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추면개라 불리운 늙고 못생긴 거지가 입맛을 다졌다.
[ , 졌으니 할 수 없군.]
추면개는 그래도 승부가 아쉬운 듯
물통 안의 들쥐를 바라보다가 상대편 중년 거지에게 말했다.
[이봐, 구지걸(九指乞)! 한 판 더하자! 아까 판은 동냥질이었으니까
이번 판에는 죽엽청 열 동이 내기! 어때?]
그러자 중년 거지가 새끼 손가락이 없는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손을 저었다.
[됐네 이 사람아! 저번에도 술내기 해놓고 지자 오리발을 내밀었잖아?
이번에도 오리발 내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안해!]
[오리발이라니, 그때 상황이 그랬잖아.
갑자기 총단에서 전령이 오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절대 일부러 뺀 게 아니야.]
[어쨌든 내긴 내기야! 총단에 갔다 와서도 술을 살 수 있었는데도 자넨 뭐라 했나?
술 사겠다는 날이 지났으니 무효라고 했잖아.]
[아냐, 이번엔 진짜로 하자!]
[뭘로 믿고?]
[내 목을 걸지.]
[목은 장난감이 아니라네.]
[제길!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원래 다음 달부터 일년동안 내가 분타주를 해먹기로 되어 있잖아!
하지만 이번에 지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네가 계속 분타주를 해먹게!]
[음… 분타주 자리를 내놓기 싫으면 졌을 때 술을 사겠군
. 좋아, 그 정도라면 다시 한 판 더 하세.]
[클클클…잘 생각했어!]
늙고 못생긴 거지 추면개는 괴이하게 웃으며
옆에 서 있는 삼십대 초반의 딸기코 거지에게 눈짓을 했다.
[야 홍주개(紅酒蓋), 가서 기찬 놈 한 마리 잡아와!
이번에는 기필코 이기고 말 테니 잘 보고 잡아오도록 해!]
[예!]
홍주개라 불린 딸기코 거지가 굽신거리며 대답을 했다.
헌데,
(헉!)
막 몸을 돌려 사당 밖으로 쥐를 잡으러 나가려던 딸기코 거지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 사당의 입구에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잡초 무성한 사당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인물은 일신에 먹빛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등에는 일곱자루의 검을 둘둘 싸맨 채 둘러메고 있었다.
흑발은 치렁하게 발끝까지 흘러내려 하늘거리고 있었다.
단사영! 그는 바로 황가철점에서 일곱 자루의 검을 산 단사영이란 청년이었다.
비를 맞으며 유령같이 서 있는 단사영을 발견한 딸기코 거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웬…웬놈의 눈빛이 저렇게 칙칙하고 스산하냐?)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사영처럼 지독히도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단사영이었다.
그때 다른 거지들도 이상을 느끼고 일제히 사당 입구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의 눈빛도 일제히 굳어졌다.
그들 역시 단사영의 몸에서 풍겨지는 암울한 분위기와
섬뜩한 허무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 온몸이 비에 흠씬 젖은 단사영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사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그의 입술은 굳어진 듯 꽉 다물려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 거지 구지걸(九指乞)에게 다가섰다.
이 순간 구지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아무래도 오늘 밤 일진이 사나울 듯하구나.)
구지걸은 내심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단사영에게 던졌다.
단사영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심했고 표정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마치 감정이라고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같았다.
사당 안은 일순간 죽음과 같은 정적에 파묻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입을 먼저 여는 자가 죽음도 먼저 당할 것처럼…!
문득 단사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개방인가?]
[그… 그렇소만…!]
구지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사당 안의 거지들은 개방에 적(籍)을 둔 인물들이었다.
-개방(蓋幇)!
이는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로서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망을 지닌 거지 집단이다.
중원천하 어디에도 거지가 있고,
그 거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무림소식통은 가히 따를 문파가 없었다.
바로 개방의 인물들이 무림의 입과 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금 무림의 개방은 남북(南北)으로 갈라져 있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강북의 거지들을 북개방(北蓋幇)이라 한다.
그들은 개방의 전통을 무시한 채 개혁된 파(派)를 구성하고 있어
넝마가 아닌 보통 사람과 같은 평복을 입고 행동하기 때문에
얼핏보면 개방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반면 남쪽의 남개방(南蓋幇)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거지들만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었다.
단사영의 시선이 구지걸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구지걸의 허리춤에 매어진 세 개의 매듭은 개방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세 개의 매듭이라면 적어도 분타주급의 신분이었다.
단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소흥분타주인가?]
[틀…틀림없소. 내가 바로 걸개방의 소흥분타주를 맡고 있는 구지걸이요.]
구지걸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단사영의 입가에 언뜻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찾아오긴 제대로 찾아왔군.]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아니 지금부터하는 질문에 숨김없이 대답해야 한다.]
[무… 무례한 말투로군.]
단사영의 냉오한 말투에 구지걸은 가슴 속에서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다.
본래 거지들이란 족속이 두렵고 꺼리는 것이 없는 부류아닌가?
비렁뱅이질을 하자면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는 가장 밑바닥의 인생들인지라
거지들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사영의 전신에서 풍기는 칙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던 구지개는
이내 거지 특유의 배배 꼬인 심사와 심술이 되살아나
두 눈에서 음험한 흉광을 토해내었다.
하물며 주위에 둘러선 졸개들의 수십 쌍 눈이 지켜보고 있으니
이대로 고분고분 물러설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구지걸은 엉거주춤 들고 있던 누더기를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걸치며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내 비록 거렁뱅이지만 올해 나이 일흔하고도 다섯 살이다.
겉으로 보기엔 팽팽한 중년이지만 먹을 만큼 먹은 강호 선배이거늘
내 앞에서 오만을 떨다니…]
구지걸은 히죽 웃었다.
[낄낄!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하라고? 천만에! 대답 못한다. 대신…!]
구지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야말로 노부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괜히 객지에서 송장신세 면하려면…!]
구지걸의 위협에도 단사영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는 전혀 구지걸의 말을 듣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구지걸은 표정을 싸늘히 굳히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며, 뭘 알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냐?]
한데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였다.
아니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읏!
단사영은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오른 쪽으로 쓸어내렸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의 오른손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내려졌다. 한데,
[으허억!]
구지걸은 사색이 된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진 채 경악과 공포의 빛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의 누더기를 보라.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양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역시 미간(眉間)으로부터 인증(印中)을 거쳐 턱 끝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길게 선(線)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선에서는 가는 선혈이 언뜻 배어나고 있었다.
[허억!]
[저…저럴 수가!]
나머지 거지들은 사색이 되었다.
구지걸은 남개방에서도 알아주는 상당한 고수다.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라 해도 일류고수의 대열에는 끼는 고수였다.
그런데 그가 눈을 벌겋게 뜬 채 당한 것이다.
비록 기습을 당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처참했다.
만약 단사영이 손속에 인정을 조금이라도 두지 않았다면
구지걸의 전신은 양단된 채 끔찍하게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무…무서운 고수다.)
거지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때 구지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이 자식을 죽여라.]
이성을 상실한 그는 수치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자,
[죽여라!]
[어디 와서 야료냐?]
나머지 거지들이 일제히 단사영을 향해 타구봉(打狗棒)을 휘두르며 단사영에게 달려들었다.
위이잉…! 파아아…!
수십 자루의 타구봉이 귀청을 에이는 파공성을 일으키며
단사영을 향해 사나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단사영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할 뿐이었다.
그는 다만 거지들을 향해 가볍게 우수를 휘저었을 뿐이었다.
헌데 다음 순간,
[헉!]
[에쿠!]
쿠당탕! 콰당!
거지들은 마치 폭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뒤로 정신없이 날려갔다.
그들의 몸은 사당의 벽에 반쯤은 박혀서야 동작을 멈추었다.
거지들의 안색은 창백했고 입가에는 가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도… 도저히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다.)
(방주보다도 더 강한 고수같다.)
단사영의 기이무쌍한 손속을 본 거지들은 혼비백산해서 더 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들의 수하들이 무참히 당하는 광경을 보고 있던 개방의 소흥분타주 구지걸도
그만 누렇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단사영을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 개방의 정보망은 치밀하기 이를 데 없어
무림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체같은 놈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닌가?
어째서 이 정도의 초일류고수가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구지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룻 이름 깨나 알려진 고수들 치고 개방의 이목을 벗어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뛰어난 개방의 정보망에도 눈앞에 있는 이 청년고수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것이다.
구지걸은 조급해졌다.
자칫하다가는 이 사당에서 덧없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단사영의 무심한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이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겠군.]
[으으…!]
[만약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 밤이 가기 전에 이곳의 모든 거지들은
염라전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허억!]
구지걸과 나머지 거지들은 헛바람을 일으키며 흙빛이 되고 말았다.
단사영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네 사람의 행적이다.
그들의 종적을 실토하면 피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 네 사람?]
구지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단사영은 말을 이었다.
[흑절신제(黑絶神帝) 소섭랑(蘇燮郞), 신검황(神劍皇) 자운량(紫雲凉),
초혼간(招魂竿) 용불군(龍不君), 벽력권왕(霹靂拳王) 반장(潘璋),
그들의 행적을 듣고 싶다.]
단사영이 차례로 열거한 이름들을 듣는 순간 구지걸은 다시금 헛바람을 들이켰다.
(지금 저 놈이 말한 사람들은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十大高手)들 중 네 명이 아닌가?
이놈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들을 는단 말인가?)
구지걸은 아연실색했다.
-절대십천(絶代十天)!
당금에 있어서 강호무림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열명의 초절정고수를 말할 때 세인들은 절대십천이라 한다.
절대십천이야말로 무림의 신(神)이며 태양(太陽)과도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이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절대십천의 종적을 알려 한단 말인가?)
구지걸은 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없이 단사영을 주시했다.
이때 단사영이 다시 말했다.
[개방은 무림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많다고 들었다.]
[그… 그것은 사실이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네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만을 말하면 된다.]
구지걸의 추악한 얼굴이 한층 더 흉칙하게 이지러졌다.
절대십천은 비록 열 명의 무림인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지닌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그들 중에는 독불장군인 양 독보천하를 하는 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휘하에 막강한 세력을 지닌 일파의 지존(至尊)들인 때문이다.
만일 절대십천에게 빚을 진다면 이후로 한시도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없는 것이다.
[말…말할 수가 없소.]
구지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오. 모르고 있거늘 어찌 대답할 수가 있겠소?]
구지걸의 말투는 공손해져 있었다.
상대에게서 풍겨지는 위압감이 너무 강렬해서 공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사영은 차갑게 웃었다.
[할 수 없군.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대들을 죽인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다.]
[으으…]
[대답을 할 때까지 한 사람씩 차례로 죽여주마.]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비정하며 냉혹한 음성이었다.
파아아…
무엇인가가 사당 안에서 번쩍인다고 거지들이 느낀 순간,
[크악!]
거지 가운데 한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이어 그는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구지걸의 안색은 대변했다.
[자… 잔인한 놈!]
그는 이빨을 갈았다. 당장이라도 단사영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대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곳의 거지들 전부가 떼로 몰아붙여도 승산이 없는 절정고수다.
단사영은 차갑게 웃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단사영은 느릿한 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거지를 향해 다가갔다.
과연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는 죽지는 않았다. 간신히 숨이 붙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지에게 다가가고 있는 단사영의 두 눈엔 자욱한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죽이려는 이 잔인한 행위에 구지걸과 거지들은 진저리를 쳤다.
구지걸의 안면근육이 떨렸다.
[멈추시오.]
구지걸은 버력 고함을 질렀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가 이유 없이 죽어가는 꼴을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라질! 좋다! 말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들의 행적을 알려 준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렇다. 절대십천이 굳이 자신들의 행적을 비밀에 두지 않은 이상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구지걸의 입술을 짓깨물었다.
[말하겠소. 그러나 후회하게 될 것이오.
오늘 우리에게 저지른 일은 두고두고 개방인들에게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오.
우리 개방인들에게 잘못 보이면 이후 단 하루도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을 것이오.]
[하하하…!]
단사영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낭랑했으나 듣는 구지걸 등은 안색이 일변했다.
그 웃음소리에는 엄청난 공력이 실려 있어 비수처럼 아프게
그들의 고막을 파고 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단사영은 웃음을 거두고는 차갑게 말했다.
[천만에! 편히 잠을 잘 수 없는 쪽은 개방인들이 될 것이다!
절대십천 가운데 취선(醉仙)이 개방인인 이상 개방은 곧 비정한 피비린내를 맡게 될 것이다.]
순간 구지걸은 단사영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가공할 한기(寒氣)를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취선(醉仙)!
남북으로 갈라진 개방을 다시 옛날의 통일 개방으로 돌려 놓기 위해
홀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진정한 개방인이며 남북개방을 통틀어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이다.
또한 그는 현 무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절대십천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데 단사영은 취선에게도 원한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아니 비단 취선 뿐만이 아니었다.
절대십천에게 한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절대십천이 누구인가?
그들은 당금 무림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이 시대의 절대자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아닌 모두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도 말도 안 되지만
, 그들 모두를 노리고 그들의 행적을 알고자 하는 단사영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말하라.]
단사영은 더 이상 시간을 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잘 들으시오. 한 번 이상은 반복하여 말하지 않겠소.]
단사영의 채근에 구지걸은 절대십천 가운데 그가 원하는 네 사람의 행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흑절신제(黑絶神帝) 소섭랑(蘇燮郞)은
자신의 세력인 흑련(黑聯)의 총단이 있는 태산(泰山)에 기거하고 있소.]
[태산…흑련…]
[벽력보주인 벽력권왕(霹靂拳王) 반장(潘璋)은 현재 벽력보에 없소.
정확히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정보망에 의하면
오 년 전 벽력보 관할 안에 있는 황산(黃山)에 입산했다는 것 밖에 모르오,]
[황산에 입산…무엇 때문인가?]
[그걸 어찌 아오? 다만 짐작컨대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 은거한 것이 아닌가 싶소.]
[무공 연마를 위해 모처에 은거했다?]
[신검황(神劍皇) 자운량(紫雲凉)은 한 곳에 머물지 않소.
그를 추종하는 검수들의 집단인 검단(劍團)은
무려 이른 두 개의 검파(劍派)들이 모여 만든 중원최대의 검수 집단이오.]
[검단?]
[검단은 중원 곳곳에 산재해 있는 지라 신검황 자운량은 그 곳 검단의 검파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그곳에서 검론(劍論)을 강의하고는 또 다른 검파를 찿아 떠나기 때문에
그의 종적을 기란 쉽지가 않소.]
[후후후…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개방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그를 을 수 있을 텐데…]
[그건 사실이오.]
[그의 행적은?]
[며칠전까지 금릉(金陵) 풍우검장(風雨劍莊)에 머물렀으나
지금은 그곳을 떠나 북상중에 있소.
그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행로로 보아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검단의 검파를 방문하려는 발걸음이 아닌가 싶소.]
[강소성에 있는 검단 소속 검파는 모두 몇인가?]
[모두… 여섯으로 무적검장(無敵劍莊), 일월검관(日月劍館), 청풍신검보(靑風神劍堡),
부운검궁(浮雲劍宮), 팔극검혼곡(八極劍魂谷), 단심채(丹心寨)가 검단에 속해 있소.]
[……]
[끝으로 초혼간(招魂竿)은…]
구지걸의 말은 이어졌다.
쏴아아아…
잠시 후 대략 반 시간이 흐른 다음 단사영은 사당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구지걸은 단사영이 빗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굳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쓰러져 있는 거지에게 향했다.
[상태는 어떠냐?]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구지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 놈을 추적한다.]
[예…?]
[다른 분타에도 알려 놈의 뒷조사를 철저히 해봐라! 놈의 정체를 알아내고,
놈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는 단사영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네놈은 우리 개방을 무시했음을 절실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를 가는 구지걸의 눈가로 독오른 뱀같은 차가운 한광이 스쳤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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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독 감사....
즐.독.하고 있읍니다
즐감 했습니다
즛ㄴ감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