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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산악부와 책>
내 인생의 소설 <빙벽>을 읽고 북알프스로
삶의 나침반이 된 <내 청춘 산에 걸고>
학산 알피니즘의 화두는 끊임없는 산에 왜 가는가?
"책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이상을 현실화시킨다."
<영화 에베레스트와 희박한 공기 속으로>
최근 영화 에베레스트가 상영됐다. 해외에서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본디 이 영화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라는 책이 그 모티브다. 1996년 봄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발생했던 상업등반대의 참사를 기록한 책이며 이를 영화화된 것이다.
당시 에베레스트를 기자신분으로 등반했던 존 크라카우어가 정상등정후 조난 및 참사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상업화돼가는 히말라야 등반에 경종을 울리며 국내에서도 번역,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학산인들이 극장을 찾았으며 영화를 보며 마음아파했을 것이다. 필자도 보는 내내 감정이입돼 뜨거운 눈물이 가슴으로 흘렀다. 특히 필자는 그해 가을 취재기자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해서 누구보다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어 감회가 남달랐다.
영화에 나온 롭상이라는 셀파와 장시간 인터뷰도 했었고, 로브 홀과 남바 야스코 등의 묘비가 안치된 투클라 언덕을 애써 찾아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읽었으며 그때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선선하다. 아이젠을 한 번도 차보지 않은 초심자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참가한 억만장자에 이르기까지 에베레스트는 더 이상 알피니즘의 대상이 아닌, 7천만원으로 살 수 있는 영예로운 보상지로 변했다.
이 책은 상업화되는 현대등반의 현실을 조명하고 히말라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조난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각자의 선택들에 대해 기자의 시각으로 비판적으로 다룬 책이다. 영화보다 책이 더 실감나고 비극적이다.
<산책을 읽지 않는 이상한 산악강국>
원로산악인 김영도 선생(1977년 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은 한 강연에서 한국이 산악강국이면서도 산악서적이 가장 비참한 말로를 겪고 있는 나라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한국은 세계 7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8천미터 14좌 완등 산악인을 5명이나 배출한 국가다. 또한 등산인구가 2천만에 육박하는 나라이면서도 산서적을 가장 읽지 않는 나라라며 개탄했다. 실제로 수십만원에 달하는 아웃도어 의류는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면서도 단돈 1만원대의 산서적은 찾는 이가 없다. 김영도 선생이 국내에 번역, 소개한 책들을 비롯 80~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산책들은 절판돼 지금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희귀본이 돼버렸다.
<내 인생의 소설 빙벽>
필자는 대학산악부 1학년때 일본작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빙벽>에 매료돼 한동안 그 소설의 주인공인양 행세하며 다닌 적이 있다. 친구의 자일을 절단했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죽음의 길로 들어선 주인공 우오즈의 환영을 붙들고 배회한 적이 있다. 동계장기등반을 다녀와서는 주인공 우오즈처럼 험상궂은 배낭을 맨 채로 도시인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산악인이라고 자부했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남루하게 날을 지새우며 막걸리를 마시면 소설속의 한 풍경이 연상되기도 했다. 현실속의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이 멋들어져 보였고 더 동떨어지기 위해 더 마시고 더 수염을 기르고 더 방황했던 것 같다. 마치 진정한 산악인은 고독과 술과 방황과 벗해야 자유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결국에는 1991년 소설 <빙벽>의 주무대인 일본 북알프스 동계등반을 감행했다. 해외여행이 희귀했던 시절 원정준비를 하는 내내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밤잠을 설쳤다. 원정을 가서는 북알프스에서 주인공들이 추락해 숨졌던 마에호다카다케 동벽을 바라보며 도전욕을 불태우기도 했고,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나누며 거닐었던 북알프스의 아즈사가와 강변에 텐트를 치고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인생의 나침반이 된 내 청춘 산에 걸고>
대학산악부의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던 우에무라 나오미의 <내청춘 산에 걸고> <안나여 저게 코츠부의 불빛이다>라는 전기를 읽으며 나오미처럼 반드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극지탐험을 감행해 이누이트족들과 우정을 나눌 것이라는 거창한 꿈도 키워 나갔다. 동기들과 히말라야 적금통장을 만들고 이상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갈 때마다 나오미는 내 청춘의 나침반이었고 도전대상이었다. 에베레스트에 3번이나 도전한 끝에 목표를 세운지 14년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청춘 산에 걸고>에서 받은 동기부여와 영감때문이었다. 책은 불가능할 것같은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마력이 있었다.
<알프스 3대 북벽 등반기는 알피니즘 불지펴>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와 가스통 레뷔파의 <별빛과 폭풍설>을 읽으면서 알프스에서 숭고한 알피니즘을 실천한 선배 산악인들에 대한 외경심에 몸서리쳤다. 아이거, 그랑죠라스, 마터호른 등 알프스 3대 북벽에 새겨진 그들의 혼은 시공을 초월하며 신출내기 후배의 알피니즘에 불을 지폈다. 그들이 스러져간 아이거의 신들의 트래버스, 하얀 거미에서 반드시 비박하며 내 족적을 남기겠노라고 맹서하기도 했다. 리오넬 테레이, 안데르 헤크마이어, 하인리히 하러, 에드워드 윔퍼, 리카르도 카신, 기도 레이 등등은 이름만 들어도 젊은 대학산악인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책은 등산을,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히말라야 등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에는 위대한 등반가이자 철학가 사상가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등반기를 섭렵했다. <검은 고독 흰 고독> <죽음의 지대> <모험으로의 출발>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등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메스너처럼 위대한 등반기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등산이라는 처절한 고독의 행위가,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위험한 도전이, 사랑이 되고, 철학이 되고, 종교가 됐다. 히말라야에서의 죽음은 찬란한 젊음의 금자탑이기에 오히려 행복할 거라고 선후배들과 밤새워 메스너를 토론하기도 했다.
‘우리는 산에 왜 가는가?’와 ‘8천미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80,90년대 대학가의 사상이나 학점, 취업이라는 주제보다 더 몸을 뜨겁게 달궈 곧잘 열띠게 논쟁하며 날을 샜다. 각자의 산과 각자의 알피니즘을 설파하며 학산인들은 하나가 되곤 했다.
그들은 죽을지도 모르는 그 고행을 감수하면서 산에 왜 가는가? 알피니즘은 무엇인가? 과연 등산은 노동처럼 유익하고 예술처럼 고상하며 신앙처럼 아름다울까? 아니면 종교처럼 절대자인 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앙인가? 우리의 알피니즘은 이카루스처럼 추락해야만 완성되는 비참한 운명을 타고났는가? 나는 산에 왜 가는가?
<나는 두려움을 통해 이 세계를 알고 싶고 새롭게 느끼고 싶다>
메스너는 <검은 고독 흰 고독>에서 "두려움을 통해 이 세상을 알고 싶어 산에 간다"고 고백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이며 내 산 인생을 통틀어 산에 가는 이유를 가장 매력있고 설득력있게 제시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이 고요함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지난 날 그렇게도 침통하던 이별이 이제 자유를 뜻하는 것을 알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 고독은 벌써 두려움이 아니고 힘이었다."<검은 고독 흰 고독>
지금도 필자의 사무실 책꽂이에는 메스너가 낭가를 단독등반하며 소회를 밝힌 <검은 고독 흰 고독>(1989년 평화출판사 김영도역)이 20여년간 누런 빛을 발하면서 꽂혀있다. 필자가 현실에 적응하며 도전이 아닌 안주를, 이상이 아닌 현실을, 불확실이 아닌 편의를 추구할 때 필자의 매너리즘에 회초리를 들어준다. 누가 나에게 “산에 왜 가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검은 고독 흰 고독에 나온 이 문장을 인용한다.
등반은 순수성보다는 상업화되고, 아카데믹보다는 직업화되면서 21세기 들어 많이 변했다. 등반의 불편함과 불확실성은 첨단문명의 이기들로 최소화되고 편의주의화되는 이 시대에 대학산악부의 전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 학산의 후배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산 관련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재미도 쏠쏠한데다 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책들이다. 아카데믹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대학산악부 본연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산과 산철학, 알피니즘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1996년 봄 세계적인 등반가인 뉴질랜드의 로브 홀과 미국의 스캇 피셔가 상업등반대를 조직해 에베레스트에 입산한다. 7천만원 상당의 등반료를 지불한 고객을 정상에 올리기 위해 대규모의 짐꾼들이 고용되고 셀파들이 맨투맨으로 이들을 호위하며 에베레스트를 오른다.
고객들 중에는 전재산을 털어 2번째 도전장을 내민 우편배달부에서부터 자신의 명성과 스펙을 쌓기 위한 억만장자, 여성최초 세계7대륙 최고봉 완등달성을 목표로 참가한 사람 등 저마다 절실한 사연을 간직하고 왔다. 하지만 세계최고봉 등정의 영광 뒤에는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 상업등반대 가운데 8명의 고객이 조난사했으며 리더였던 로브 홀과 스콧 피셔도 남봉 인근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교훈은 간단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에베레스트에 가지말라’였다. 8천미터에서 조난은 곧 죽음이며 구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난과정에서 보여준 인간군상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당신이라도 살아야한다며 내려오라는 임신한 부인의 애절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고객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 로브 홀은 산악인과 알피니즘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필자는 참사가 있었던 그해 가을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 트레킹도중 만난 산악인의 묘지 투클라에는 그 당시 숨졌던 로브 홀 일행의 케른이 자리하고 있다. 베이스캠프에서 환한 웃음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로브 홀, 남바 야스코 등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행복하다. 당신들은 왜 에베레스트에 갔으며 왜 죽었는가? 나는 왜 에베레스트에 왔으며 죽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왜 오르려고 하는가?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클리프 행어, K2 등 산악영화에는 두 명의 대원이 자일에 매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한명의 대원이 자신이라도 살기 위해 자일을 절단하는 장면이 단골소재로 등장한다. 산악인이라면 친한 자일파티와 한번쯤은 상상해봤을 내용이며 술자리에서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토론의 주제가 되곤 했던 시나리오다.
영화 속 이야기라고 치부하지만 영화가 아닌 실제상황이 돼버린 사건이 있었다.
1985년 6월 페루 안데스의 시울라 그란데 서벽(6,400m) 초등에 도전한 영국인 등반가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 두 자일파티의 이야기다. 무사히 등정을 마친 이들은 하강하는 과정에서 조 심슨이 추락해 다리가 부러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후 사이먼은 심슨을 자일에 매달아 10여차례 하강시킨다. 그런데 마지막 오버행 하강지점에서 자일의 길이가 땅에 닿지 않아 매달리게 된다. 사이먼은 심슨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자신의 몸도 점점 쓸려 내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자일을 끊어버린다. 사이먼은 친구의 자일을 끊어버렸다는 죄책감에 베이스에서 괴로워하는데 죽은 줄만 알았던 심슨이 무릎으로 기어서 생환한다. 기적적인 생환의 장본인인 심슨이 자신의 자일을 끊어버린 사이먼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학산인의 안자일렌 정신과 산악인의 선택 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검은 고독 흰 고독>
위대한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의 자전적 등반기다. 1978년 메스너는 에베레스트 무산소등정이후 수주일만에 자신의 자일 파티였던 동생 귄터를 앗아가버린 비운의 산 낭가파르밧 무산소 단독등정에 나선다. 인류최초 8천미터 무산소 단독등반이다.
메스너는 이 책에서 단순히 등반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철저하게 파헤친다. 거대한 공포 앞에 선 나약함과 외로움이 극에 달해 찾아오는 검은 고독이 자신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솔직하게 고백한다. 아무도 없는 절대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자신과 대화한다. 자일도 없고 퇴로도 없는 디아미르벽에서 그는 공포를 이겨내고 지난날 그토록 침통했던 이별이 자유임을 깨닫게 되면서 흰 고독을 체험한다. 마치 구도자가 고행 끝에 해탈을 경험하는 듯한 희열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 자신이 히말라야 8천미터를 등반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좋다. 디아미르 절벽에 혼자서 매달려있는 듯한 긴장감도 좋고 절대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다른 메스너와 대화하는 것도 좋다. 실제로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또 다른 나와 대화했던 경험을 공유하게 돼 더욱 좋다.
<우리는 산에 왜 가는가?>
‘나는 산에 왜 가는가?’
‘히말라야에는 왜 갔으며 왜 또 가고자 하는가?’
히말라야등반은 늘 죽음의 그림자와 동행한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 있음으로써 등반을 더욱 치열하게하고 순간순간을 깨어있게 한다. 생을 살면서 이처럼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치열하게 숨을 쉴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이 있을까? 히말라야 등반은,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항상 함께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등반으로부터 돌아온 세상을 천국처럼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살아 돌아온 세상은 온통 희열에 찬 세상이다. 도로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 길섶에 널브러진 풀 한포기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에 경배를 올릴 수 있다.
인류최초로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웅대한 발걸음을 옮긴 머메리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설령 낭가파르바트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없소"라며 장엄한 세계를 본 것만으로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했다. 1895년 구르카 병사와 낭가에 오르다가 사라져 버린 머메리는 그의 유일한 저서이자 유작이 돼버린 <알프스에서 카프카즈로>에서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자신의 삶을 예언했다.
대학산악부시절 책속에서 알피니즘을 알았고 철학을 배웠으며 그게 인생이 됐다. 위에 열거된 수많은 책들은 내 인생의 방향이 됐고 생각과 행동이 됐으며 현재의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듯이 읽는 만큼 산에 가는 행위를 값지게 하고, 고행으로 여겼던 등반을 아름답게 할 수 있었다. 40킬로가 넘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내려와야만 되는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오르는 행위가 쓸데없는 행위가 아닌 무상의 희열이 있음을 증거시켜주었다. 더불어 나의 대학생활을 아주 가치있고 숭고한 시절로 만들어 자존감을 극대화시켜주었다.
올해 들어온 신입생이 나와 대략 30년 차이다. 30년 전에 읽었던 책들은 여전히 젊음과 도전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나는 너무 노회하면서 과거를 반추하는 신세가 되곤 한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즈로 향했던 머메리는 여전히 내 청춘 산에 걸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산으로 가야 다시금 청춘을 구가할 것 같다.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 산악매거진 무진악기고문>
전남대학교 산악회 86학번 박헌주 <광주 중앙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