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랑
滿月心 이연수
1
“누구야, 남의 집에 들어온 녀석이?”
아기다람쥐는 기가 막혔습니다. 먹이를 찾느라고 잠시 숲속을 돌아다니다 와보니, 허깨비처럼 깡마른 할아버지다람쥐가 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여긴 우리 집이에요!”
“아, 그래? 난 빈집인 줄 알았구나!”
할아버지다람쥐는 금방 얼굴을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너 혼자냐?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부모님은 산 너머로 먹이를 구하러 가셨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아기다람쥐는 할아버지다람쥐를 쳐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는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네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저는 할아버지가 없는데요?”
그래도 할아버지다람쥐는 못들은 척하며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네 아빠도 본 적 있지!”
“아빠요?”
아빠도 본 적 있다는 말에 아기다람쥐는 순식간에 경계심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여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서글퍼졌습니다.
큰비가 내렸습니다. 불어난 물이 골짜기로 넘쳐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아기다람쥐 가족은 커다란 굴참나무 뿌리 밑에 있는 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굴참나무가 있는 곳은 쓰러진 참나무와 묵은 나뭇잎들이 쌓여서 좁은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골짝물이 불어나자 참나무가 밀려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골짜기물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굴참나무를 덮쳐버렸습니다. 엄마다람쥐와 아빠다람쥐는 깜짝 놀라 굴속에서 뛰어나왔습니다. 아빠다람쥐가 흙물에서 버둥거리며 아기다람쥐를 굴참나무로 밀어 올렸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굴참나무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흙탕물에 휩쓸렸습니다.
“엄마!”
아기다람쥐는 놀라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를 잡고 있던 아빠마저 엄마와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아기다람쥐가 울며불며 목이 터져라 엄마 아빠를 불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아기다람쥐는 혼자 집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날씨 한 번 좋다!”
할아버지다람쥐가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얼마 만에 찾아온 고향인지 모르겠구나. 고향에 돌아오니 정말 좋구나, 허 허 허!”
아기다람쥐는 그런 할아버지다람쥐가 왠지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금방 좋아져서 자연스럽게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2
먼동이 텄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아기다람쥐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아가야! 어서 일어나.”
“할아버지, 졸려요! 조금만 더 잘래요.”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려야지.”
아기다람쥐는 졸린 눈을 비비며 나무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아기다람쥐가 살고 있는 굴참나무 근처에는 아름다운 풀꽃들이 가득했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들이 풀잎에 대롱거렸습니다. 시원한 새벽바람에 비비추들이 보랏빛 꽃대를 흔들었습니다. 비비추의 작은 꽃송이 안에는 이슬이 가득 괴어 있었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꽃송이를 할아버지다람쥐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껴둔 씨앗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할아버지, 어서 드세요!”
“그래, 같이 먹자!”
할아버지다람쥐가 씨앗을 맛있게 오물거렸습니다.
“씨앗이 고소하다!”
“여기 이슬도 마셔보세요?”
“그래, 고맙다!”
할아버지다람쥐는 비비추꽃 속에 괴어 있는 이슬을 쪽 들이켰습니다.
3
오늘도 아기다람쥐는 하루 종일 숲을 누비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다람쥐는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좀 밖으로 나와 보세요. 그렇게 집안에서만 계시니 답답하지 않으세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구나!”
할아버지다람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아기다람쥐를 하인처럼 부려먹었습니다.
“시원한 아침이슬을 마시고 싶다! 달콤한 꿀을 구해 오너라!”
얼마나 까다롭게 이것저것을 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유 없이 벌꺽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그런 할아버지다람쥐가 점점 싫어졌습니다.
4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얘야, 물 좀 떠 오너라, 목이 마르다!”
아기다람쥐는 잠결에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깊은 잠에 빠진 척 하며 코를 골았습니다.
“이녀석아!”
할아버지다람쥐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기다람쥐는 이제 할아버지다람쥐가 가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녀석아! 어서 물을 떠오란 말이다.”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아기다람쥐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싫어요!”
“뭐라고?”
“싫다고요! 할아버지 심부름하는 것이 싫단 말이에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
할아버지다람쥐가 노려봤습니다. 아기다람쥐도 잔뜩 화가 나 심통을 부리며 따졌습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니요? 할아버지야말로 왜 이렇게 나를 부려먹는 거예요?”
“이런, 어른에게 함부로 말대꾸를 하다니, 못됐구나!”
“할아버지는 정말 나빠요!”
아기다람쥐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흘깃, 할아버지다람쥐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아기다람쥐는 얼굴을 홱 돌렸습니다. 딴 곳을 쳐다봤습니다.
“쿨럭! 쿨럭……”
할아버지다람쥐가 기침을 해댔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기침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해가 떴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가만히 할아버지다람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얼굴색이 너무나 창백했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급하게 옹달샘으로 뛰어갔습니다. 꼬리에 흠뻑 물을 적셔왔습니다.
“할아버지! 많이 아프세요? 이거라도 어서요, 목을 축여보세요!”
꼬리를 흔들어 적셔온 물을 할아버지다람쥐 입안에 떨어트렸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겨우 목을 축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흔들어 봤지만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의 눈자위가 움푹 들어가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눈을 떠 봐요. 어서요!”
그만 아기다람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 무섭단 말이에요!”
아기다람쥐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였습니다. 그러다가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눈을 떴습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안 아파요?”
얼굴에 눈물과 콧물을 매단 아기다람쥐가 얼른 다가앉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는 힘없이 웃으며 가만히 아기다람쥐의 손을 잡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의 손이 꼭 마른 낙엽 같았습니다.
“난 괜찮아!”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아기다람쥐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울먹였습니다.
“저, 있잖아요! 할아버지께 비밀이 있어요!”
“비밀이라니?”
“사실은, 저는요. 부모님이 안 계셔요. 여태 할아버지께 거짓말을 했어요!”
“괜찮다, 괜찮아!”
할아버지다람쥐는 아기다람쥐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만 남겨두고 죽으면 안돼요?”
할아버지다람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혼자살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다. 나도 널 속인거야. 쿨럭 쿨럭!”
“뭐라고요? 그럼 우리 둘이서 똑같이 거짓말을 한 거네요?”
아기다람쥐가 눈물을 닦으며 방글거렸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5
며칠째 장맛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그친 숲속은 싱싱한 풀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짙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 밑동에는 하얀 버섯들이 탱탱하게 피어올랐습니다.
“이녀석아! 천천히 다니란 말이다!”
할아버지다람쥐가 아슬아슬 나무를 타고 오는 아기다람쥐를 걱정스럽게 바라봤습니다.
“할아버지, 여기요!”
아기다람쥐가 등 뒤에서 도라지꽃 한 송이를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는 말없이 연보라 빛이 감도는 꽃송이를 받아들었습니다. 꽃송이 안에 이슬방울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는 달게 이슬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아기다람쥐를 정겹게 바라봤습니다.
“얘야, 요즘 근처에 뱀이 눈에 띄더라. 조심해야 한다!”
“할아버지나 조심하세요!”
아기다람쥐가 개구쟁이처럼 웃어보였습니다.
6
그날 밤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리 나오세요. 저 별들 좀 봐요!”
아기다람쥐가 할아버지다람쥐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꼭 비가 되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도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고향에서 별을 헤아려보다니!”
굴참나무 가지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빠르게 나뭇가지 사이를 살폈습니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가까이서 커다란 누룩뱀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야, 조심해!”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룩뱀이 입을 짝 벌리고 아기다람쥐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도망가!”
할아버지다람쥐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순식간에 누룩뱀은 아기다람쥐를 휘감았습니다.
“할아버지……!”
아기다람쥐가 버둥거렸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번개처럼 누룩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룩뱀의 목덜미를 꽉 물며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누룩뱀의 힘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기다람쥐를 내려놓지 못해! 어서 내려놔!”
할아버지다람쥐가 호통을 쳤습니다. 누룩뱀이 아기다람쥐의 머리를 깨물려다 멈췄습니다.
“너는 뭐야! 방해하지 마!”
꼬리로 할아버지다람쥐를 힘껏 찼습니다. 그러자 맥없이 나가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나뭇가지를 잡고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어린 것은 놔 둬! 대신 날 잡아 먹어라!”
할아버지다람쥐가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누룩뱀이 중얼거렸습니다.
“지난 번 봤을 때는 분명히 어린 것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누룩뱀이 두 다람쥐를 번갈아 노려봤습니다.
“어린 것이 너무 가엽잖아? 살려줘?”
누룩뱀이 다가왔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에게 쓰윽 얼굴을 들이대며 혀를 날름거렸습니다.
“늙고 병든 다람쥐는 살이 질기고 맛도 형편없단 말이야!”
얄밉게 말하며 더욱 세게 아기다람쥐를 죄였습니다.
“할아…버…지!”
아기다람쥐는 까부라졌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가 주위를 휘둘러 봤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밤송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날쌔게 밤송이 하나를 낚아채듯 땄습니다.
“이 놈아!”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누룩뱀이 홱 하고 머리를 돌렸습니다. 금방 잡아 삼킬 듯이 입을 쫙 벌렸습니다.
“옛다!”
할아버지다람쥐가 뱀의 입을 향해 밤송이를 힘껏 던졌습니다. 밤송이는 크게 벌린 누룩뱀의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캑!”
밤송이가 목구멍에 딱 걸렸습니다. 놀란 누룩뱀이 몸을 크게 꿈틀거리자 잡혀있던 아기다람쥐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
“다람쥐야!”
할아버지다람쥐가 팔을 뻗어, 떨어지는 아기다람쥐를 잡았습니다. 순간, 누룩뱀이 몸을 비틀며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졌습니다. 툭툭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할아버지다람쥐는 있는 힘을 다해 아기다람쥐를 나뭇가지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그래! 이젠 괜찮아.”
할아버지다람쥐는 아기다람쥐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기다람쥐는 엉엉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7
보름달이 걸려 있는 나뭇가지에 할아버지다람쥐와 아기다람쥐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쏴아 소리를 냈습니다. 그 때 작은 구름이 보름달을 가렸습니다.
“쿨럭, 쿨럭 쿨럭!”
할아버지다람쥐가 창백한 얼굴로 바튼 기침을 했습니다. 아기다람쥐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약초를 캐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보름달이 다시 환한 빛으로 두 다람쥐를 비춰주었습니다.
이연수/2007년 《한국아동문학평론》동화로 등단. 현재 동화구연가로 사단법인 한국반달문화원 운영위원, 반달아카데미 원장, 동화구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