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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백허(伯虛) |
호 | 겸재(謙齋) |
생졸년 | 1486 (성종 17) - 1521 (중종 16) |
시대 | 조선 전기 |
본관 | 순흥(順興) |
활동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
과거 및 취재 | [문과] 중종(中宗) 14년 (1519) 기묘(己卯)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5위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8년 (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14위 |
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좌의정 안당(安瑭)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경원부사 전영희(全永禧)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를 거쳐,
1517년 8월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문묘배향과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등을 건의하였다.
1519년 아우 안처함(安處諴)·안처근(安處謹)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1521년 상복을 벗고 처가에 있으면서 이웃에 사는 시산군(詩山君) 이정숙(李正叔)·권전(權磌) 등과
더불어 담론하다가 세상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중 군주 측근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고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는 등의 언사가 있었다.
이때 송사련(宋祀連)도 함께 담론하였는데 그는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상을 얻고
자기의 처남인 정상(鄭鏛)을 시켜, 간신은 곧 남곤·심정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며,
그 당여의 증거물로 안처겸의 모친상시의 조문록 및 역군명부(役軍名簿)를 가지고 고변하게 하였다.
이로써,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아우 안처근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었다.
성명(姓名) 以名 初諱 |
生年 자(字) 호(號) |
관직, 경력 |
파(派)-세(世) 父 |
고려 신종조(神宗朝) |
흥위위(興威衛)보승별장(保勝別將)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 |
고려-신종4년 1201년 신유(辛酉)生 |
추밀공(樞密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
고려 고종(高宗) 경진년(1220)生 |
태사공太師公 수태사문하시중守太師文下侍中 |
안향(安珦)안유(安裕) |
사온(士蘊) 회헌(晦軒) |
문성공(文成公) 安子 성리학의 조종(祖宗) 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 |
안우기(安于器)安遷 |
허중(虛中)죽옥자竹玉子 순평군(順平君) |
順平君 文順公(문순공) 贊成事兼判典儀寺事 |
익지(益之),겸재(謙齋) 진현관대제학進賢冠大提學 |
順興君 문숙공(文淑公) |
고려조 충선왕 순성군(順城君) |
順城君 문혜공(文惠公)藝文館大提學 |
안원(安瑗)安定 |
서암(瑞巖) 병마절도사 |
경질공(景質公) 형조전서奉翊大夫刑曹典書 |
(藝文館大提學) |
판서공(判書公) 吏曹參議 判書公 |
기지(器之) 一三八八년生 |
찬성공(贊成公) 嘉善大夫 檢校漢城府尹 |
文科 成均舘 司藝 贈崇祿 議政府領議政 |
1派11世-찬성공파安璟4 |
匙山 永慕堂 |
정민공 貞愍公 左相議政府좌의정左議政 |
1派12世찬성공파安敦厚3 |
癸酉進士 學諭掌議淸白吏 |
1派13世-찬성공파安瑭1 |
子-應達 應建 應進 大珍 焦浦 |
進士 縣監 贈禮曹叅議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1派14世찬성공파安處謙1 |
應吉應珣以達應三廷蘭幽蘭 |
進士 |
1派14世찬성공파安處謙2 |
子-安應德 安應福 安應樞 |
進士 |
1派14世찬성공파安處謙3 |
安處謙
安處謙瑭子(又思齊堂又虛齋)成宗丙午生字伯虚號謙齋中宗癸酉進士己卯登賢良科官止學諭
有才器己卯其父免官庚辰奪爵憤袞貞謀除君側之惡其弟處誠與其庶姑子宋祀連告于其父其父率
歸陰城村舍以沮其謀處謙豪俊亢直好義嫉惡憂時憤惋遂陷大辜辛巳祀連恐事覺被禍詣政院告以
謀害大臣袞貞等搆成大獄瑭被法處謙處謹皆受極刑庚子特宥三兄弟文科同榜弟處誠戊申生
字久叔己卯登賢良科以操履有方篤志學問爲薦目官止修撰免禍廢于家沈潜莊重無疾言戯色環堵
蕭然而好周急力止其兄之謀勸其父率泩外郷及其兄弟同下獄不加刑訊特放之任便居住二十二年而卒
當時之論兄弟中最優弟處謹庚戌生字靜夫己卯進士同年登賢良科以端雅明敏趍向克正爲薦目
官止弘愽資禀安詳平居不敢怠慢敖肆與朋友久而愈敬也稱三珠辛巳與父及兄
同受刑庚子并雪冤毒子蒙宥
-紀年便攷-
安處謙
順興人。字伯虛。貞愍公之長子也。癸酉進士。與權礩請從祀鄭文忠。革昭格署。
釋奠儀物獻議更定。鉶羹大羹陽燧明水各得其制。至今遵用。登第授學諭。遭母喪。
辛巳服闋。與同里詩山正權礩等語曰。衮貞專擅威福。必除去此輩。可以扶國勢。
宋祀連與其妻甥鄭瑺告謀害大臣推官鍛鍊構捏。故入大罪。
-雜記本朝 海東雜錄一權鼈
안처겸(安處謙)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백허(伯虛)이며 정민공(貞愍公)안당(安瑭)의 장자이다.
계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권질(權礩)과 더불어 정문충(鄭文忠 포은(圃隱))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으며, 석전 의물(釋奠儀物)을 헌의(獻議)하여 다시 정하고
형갱(鉶羹 5미(味)를 조화시켜 형기(鉶器)에 담은 국)ㆍ대갱(大羹 양념을 치지 않은
육즙(肉汁))ㆍ양수(陽燧 태양열을 받아 불을 일으키기 위한 동제(銅製)의 거울)ㆍ
명수(明水 맑은 물)가 각각 그 제도를 얻어서 지금까지 준용하고 있다.
급제하여 학유(學諭)로 제수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만나서 신사년에 탈상했다.
한 동네에 사는 시산정(詩山正)과 권질(權礩)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남곤과 심정이 권위와 복록을 제 맘대로 하니,
반드시 이 무리를 제거하여야 국세를 바로잡을 수 있다.” 하였던 바,
송사련(宋祀連)과 그의 처 생질 정상(鄭瑺)이 대신을 해칠 것을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추관(推官)이 거짓으로 꾸며 죄안(罪案)을 성립시켰다. 그래서 대죄(大罪사형)에 들어가게 하였다.
-《잡기(雜記)》해동잡록 1 본조(本朝)
안처겸(安處謙)에 대하여
본관 | 순흥(順興) | |
성 | 안(安) | |
자 | 백허(伯虛) | |
호 | 겸재(謙齋) | |
성별 | 남 | |
생년 | 1486 | |
연령 | 36 | |
활동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 |
과거 및 취재 | [문과] 중종(中宗) 14년 (1519) 기묘(己卯)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5위 |
1486(성종 17)∼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좌의정 안당(安瑭)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경원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묘배향과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등을 건의하였다.
1519년 아우 안처함(安處諴)·안처근(安處謹)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세상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중 군주 측근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고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는 등의 언사가 있었다. 간신은 곧 남곤 ·심정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며, 그 당여의 증거물로 안처겸 의 모친상시의 조문록 및 역군명부(役軍名簿)를 가지고 고변하게 하였다. |
-->신사 무옥(辛己誣獄)사건
구봉집(龜峯集)을쓴 구봉 송익필(宋翼弼)의 부친 송사련(宋祀連)은
1496(연산군 2)-1575년(선조 8) 감정(甘丁)안돈후의천첩소생의 아들로 안돈후(安敦厚)의 서녀(庶女)와 혼인 안처겸(安處謙)의 서고종(庶姑從).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벼슬할 기회를 살피다가 안당(安瑭)과 사이가 좋지 않던 권신,심정(權臣,沈貞)에게 아부 관상판관(觀象判官)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처 조카인 정상과 공모 안당, 안처겸, 권신(安瑭, 安處謙, 權臣)등이 심정, 남곤(南袞)등의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로 밀고 신사 무옥(辛己誣獄)사건을 일으켜 안당, 안처겸 등 안씨 일문과 많은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자신은 그 공으로 당상에 올라 30여 년간 세력을 잡았다.
죽은 후 1586년(선조 19)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 관직이 삭탈 되었다.
<sbs대하사극 여인천하 제91회 대본>
의금부 마당
김전, 홍경주, 남곤, 이유청(*), 심정, 김안로,
판서급 대신들이 당상자리에 서있다.(*김제학은
없다)금부도사의 지휘로 군졸들이 안당과 안처겸
부자와 선비등을 형틀 의자가 있는 곳으로 거칠게
끌고 온다.
안당 (김전등을 보며) 대감들! 대체 이사람과
여기 있는 젊은 선비들을 대체 무슨 죄로
잡아온 것이오?!
신료일동 (시선을 피하는)...
김안로 대감은 역모를 꾀한 혐의로 고변되었소이다!
안당 뭣이라?! 이사람이 죄가 없음은 대감들이
잘 알고 있으신데 역모라니?!
남곤 (휙-보며) 죄가 있고 없음은 문초를 해보면
백일하에 드러날 터이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시구려!
안처겸 하하하! 아버님
홍경주 네가 실성을 했느냐? 어찌 죄인된 자가 당상
관들 앞에서 웃음을 보이는 것이냐?!
안처겸 조정의 큰 도적들이 당상입네 하고 앉아있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우스워서 그렇소이다!
하하하!
신료일동 (굳는)...!
남곤 (분노한) 화천군, 죄인이 국문장의 당상관들
을 이리 기망하도록 내버려 두실 작정이시오?!
심정 (금부도사에게) 죄인의 입을 막아라!
금부도사 예! 죄인의 주둥이를 다스려라!
군관 예! (군졸들에게 눈짓하면)
형졸들 (안처겸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몽둥이 찜질
을 해댄다)
안처겸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질러대는데)..
대전내관(E) 주상전하 납시오!
중종, 대전내관과 김상궁, 호위별감등을 거느리고
의금부마당으로 들어선다.
조정신료들과 금부도사, 군졸들이 일제히 예를 갖춘다.
중종, 금부 대청위로 올라 교의에 앉는다.
중종 (안당을 노려보며) 영모당, 그대는 좌의정을
역임한 조정의 중신이거늘 어찌하여 자식들과
작당하여 역모를 꾀했는가?
안당 역모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신은 평생
전하와 이나라 종묘사직을 위해 충성을 다바친
일밖에는 없사옵니다! 그것이 역모이옵니까?!
중종 (안처겸을 보며) 안처겸, 너는 평소 조정에
불만을 품고 조정대신들을 참살할 마음을 먹었
다고 들었다!
안처겸 (격앙된) 그렇사옵니다! 조정에서 전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소인배들의 목을 쳐낸다면
전하와 이 나라 종묘사직이 바르게 설 수 있다
고 믿사옵니다!
신료일동 (당혹스럽고, 일그러지고)...
홍경주 저,저런! 죽일놈!
중종 (벌떡 일어서며) 이런 괘씸한! 과인이 중용한
조정신료들을 참살하겠다는 것은 곧 과인에
대해서도 다른 마음을 먹었음이 자명할 터!
네가 누구를 추대하려고 하였느냐?!
안당 (놀라) 추대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신의
자식이 젊은 혈기로 과격한 언사를 토로한 적
은 있사오나 모두가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일뿐
다른 마음을 먹은 일은 결코 없사옵니다!
안처겸 조정의 쇄신과 개혁정치의 열망을 품은 것을
어찌 역심이라 하시옵니까? 신들의 충정을 깊
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중종 뭣들 하느냐?! 죄인들이 바른 말을 토설할때
까지 주리를 틀라!
심정 주리를 틀라신다!
금부도사 예! 주리를 틀랍신다!
군관의 지휘로 형졸들이 안당과 안처겸에게 달려들어
주리를 튼다.
안당과 안처겸, ''전하-''를 부르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중종 (교의에 앉으며 그 모습을 노려보는)...!
--->한양조씨 11세조 정익공(貞翼公) 조변조변(趙忭)(1500~1582)]
가천재공-현령공의 5세손. 자는 호연(浩然), 호는 금재(琴齋). 정암(靜菴)의 문인.
소년시절부터 안처겸(安處謙)과 서로 좋아 지내다가 뒤에 그의 이질서(姨姪壻)가 되었다.
1521년(중종 16) 안처겸이 송사련(宋祠連)에 의하여, 기묘사회를 일으킨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의 숙청과
경명군(景明君, 성종의 열째 아들) 침의 추대를 모의하였다는 무고를 맞고 국문(鞠問)을 당하던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들것을 메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옥문에 출입하면서 안처겸의 안부를 탐문하였다.
송사련이 무고한 사람가운데 그의 이름도 들어 있어 이 때문에 혹독한 형장(刑杖)을 받고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19년만에 풀려났다.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영조조에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좌찬성(左贊成) 겸 세자이사(世子二師)에 추증되고
철종조에 정익(貞翼)의 시호를 받았다.
본디 학식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나 천성이 매우 명석하였다.
안처겸(安處謙)
1486(성종 17)∼1521(중종 16)
백허(伯虛),겸재(謙齋)
1486(성종 17)∼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좌의정 안당(安瑭)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경원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를 거쳐 1517년 8월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문묘배향과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등을 건의하였다.
1519년 아우 안처함(安處諴)·안처근(安處謹)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1521년 상복을 벗고 처가에 있으면서 이웃에 사는 시산군(詩山君) 이정숙(李正叔)·권전(權전) 등과 더불어 담론하다가
세상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중 군주 측근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고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는 등의 언사가 있었다.
이때 송사련(宋祀連)도 함께 담론하였는데 그는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상을 얻고 자기의 처남인 정상(鄭상)을 시켜,
간신은 곧 남곤·심정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며, 그 당여의 증거물로 안처겸의 모친상시의 조문록 및 역군명부(役軍名簿)를 가지고 고변하게 하였다.
이로써,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아우 처근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思齋集(金正國)
大東野乘, 稗林,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金東洙〉
<국조 문과 방목>
안처겸(安處謙)
중종(中宗)14년(1519년), 현량과시(賢良科試) 병과5(丙科5)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86년, 병오
자(字) 백허(伯虛)
호(號) 허재(虛齋)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안당(安瑭)
조부(祖父) 안돈후(安敦厚)
증조부(曾祖父) 안경(安璟)
외조부(外祖父) 이영희(李永禧)
처부(妻父) 옥당부수 이수장(玉堂副守 李壽長)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13(계유)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학유(學諭)
●청백리(淸白吏): 안처겸(安處謙) (중종조)
기묘록보유 己卯錄補遺追錄
추록(追錄)
안처겸전(安處謙傳)
제목 : | 기묘록보유 |
설명 : | 조선 명종 때 안로(安璐)가 ≪기묘당적≫을 보충한 책. 1책.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에서 화를 당한 인물들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
기묘록보유 [己卯錄補遺]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에서 화를 당한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하였다.
본래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기묘당적≫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94인의 생년·급제·최종 관직만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인데,
안로(安璐)가 이를 보완해 편찬하였다.
본문 후미에 보(補)라 표시하고 내용을 보충했는데, 호·시호와 그들의 모습, 특별한 재능, 사람 됨됨이·관력(官歷),
겪은 사건, 친척 관계·응수시편(應酬詩篇)·사망 연도 등을 자세하게 적었으며, 인물의 수도 94인 외에 35인을 추가로 보충하였다.
안로의 가계는 원래 훈구계열에 속했으나, 그의 할아버지 안당이 조광조(趙光祖) 등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가 진출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바 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안처겸(安處謙) 역시 조광조와 밀착되어 현량과에 급제함으로써 사림파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안당·안처겸이 모두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뒷날 사림파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안로가 ≪기묘록보유≫를 저술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 책은 안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및 그들과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승(家乘)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기묘당적≫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므로 사림파 집단의 인적 구성을 파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이는 1638년(인조 17) 기호사림파의 주도적 인물인 김식(金湜)의 현손 육(堉)에 의해 더욱 정리되어
≪기묘록≫(일명 己卯諸賢傳)으로 편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一潮閣, 1983)
아들 안로(安璐)ㆍ안율(安瑮)률ㆍ안서(安 )절,
사위 허제(許悌),
손자 안응달(安應達)ㆍ안응길(安應吉)ㆍ안응초(安應初)ㆍ안응덕(安應德)ㆍ안응건(安應建)ㆍ안응진(安應進)
<子>
안로(安璐)
璐로
字 大珍 號 蕉浦 進士 縣監 著己卯錄 贈禮曹叅議
配 贈淑夫人文化柳氏父宣傳官淑蕃生一男一女
后配 贈淑夫人坡平尹氏父守禧祖縣監峻曾祖縣監三元生二男
○墓 先塋云而未尋故乙巳四月十日諸子孫設壇於晋陽智水龍奉塋域內 歲祀十月十三日
從後裔晦崗明植撰壇記見總錄追記
一九一六年世譜에墓在載寧下柳坊沼龍里西酉坐有碣 歲祀十月初五日로追后尋之要
璐 로
자대진(大珍) 호초포(蕉浦) 진사(進士)↓현감(縣監)↓증 예조참의 기묘록(贈禮曹叅議己卯錄)을 지음
부인 증 숙부인 문화류씨(贈淑夫人文化柳氏) 부친은 선전관(宣傳官) 숙번(淑蕃) 슬하에 1남1녀
부인 증 숙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부친은 수희(守禧) 조부는 현감(縣監) 준(峻) 증조는 현감(縣監) 삼원(三元) 슬하에 2남 묘선영이라하나 찾지 못하므로 을사년 4월10일 여러 자손이 진양(晋陽) 지수룡(智水龍)에 설단하고 묘역 안에서 제사를 받듦 세사는 10월 13일 종후예(從後裔) 회강(晦崗) 명식(明植)이 단기(壇記)를 지은 것이 총록에 실림
●追記 : 1916년(병진) 세보(世譜)에 묘는 재영(載寧) 하유방(下柳坊) 소용리(沼龍里) 서쪽 유좌(酉坐)에 있고 비갈이 있다고 하며 세사는 10월 5일이라 하였으나 추후 찾아보아야 할 것임
<子>
안률(安瑮)
瑮률
進士
配 全州李氏父昌原守千壽祖幽山正敏曾祖定陽君淳外祖進士鎭川宋佶
○墓 佛堂洞子坐合窆追記錄一九四六年後孫權鎔商鎔承春等諸孫이生管하고
全族이一心으로輸材互出財力以相助하여敬慕之義로謹竪碑床石而奉祀하니
後世子孫者無窮矣라 祭祀十月十四日
瑮 률 진사(進士)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친은 창원수(昌原守) 천수(千壽) 조부는 유산(幽山) 정민(正敏) 증조는 정양군(定陽君) 순(淳) 외조는 진사(進士) 진천송씨(鎭川宋氏) 길(佶) 묘불당동 자좌(子坐)에 합폄 ●추기록(追記錄) : 1946년(병술) 후손 권용(權鎔) 상용(商鎔) 승춘(承春)등 여러 자손이 주관하고 모든 후손이 일심으로 재목과 기와를 나르고 자금을 출연하여 서로 도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으로 삼가 비석과 상석을 세우고 제사를 봉행하니 후세 자손 된 자들은 무궁하리라 세사는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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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안절(安 )
절
配 全州李氏 父靑原君賢孫
○墓 長湍蘆池洞卯坐
안돈후(安敦厚)후손-4형제:부사(府使)안장(安璋), 정랑(正郞)안총(安璁), 좌의정(左議政)안당(安瑭)
여(女) 2 : 의정(議政)김응기(金應箕)妻, 송인妻
안장(安璋)--->1안처형(安處亨),2안처정(安處貞)--->1안황,2안련,3안필,2-1안옥,2-2안연,안수(安琇),
안총(安璁)홀--->无后男 女1
안당(安瑭)--->1 안처겸(安處謙), 2 안처함(安處諴), 3 안처근(安處謹) <3형제>
1 안처겸(安處謙)--->1 안로(安璐), 2 안율(安瑮)률, 3 안서(安 )절, 허제妻 <3男1女>
2 안처함(安處諴)--->안윤(安玧), 권수妻, 조희맹妻 <1男2女>
3 안처근(安處謹)--->안전, 안산, 정진妻, 우필성妻 <2男2女>
안처겸(安處謙)ㅡㅡㅡ>
1-1 안로(安璐)--->1 안응달(安應達), 2 안응건(安應建), 3 안응진(安應進), 김진천妻, 김녕妻 <3男2女>
1-2 안율(安瑮)률--->1 안응길(安應吉), 女, 女 <1男2女>
1-3 안서(安 )절--->1 안응복(安應福), 안응덕(安應德), 女, 女 <2男2女>
안처함(安處諴)ㅡㅡㅡ>
2-1 안윤(安玧)--->1 안수기(安守基), 女 <1男1女>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10 安玖 安璟 安琇 安理
11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敦厚 安仁厚
12 安璋 安璁 安瑭
13 安處謙 安處諴 安處謹
14 安璐 安瑮 安 안조(安璪)
15 安應達 安應建 安應進
부(父)
안당(安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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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겸(安處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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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 全州李氏 父玉堂副守 壽長
祖連江守義孫 曾祖榟山副正孝溫
外祖經歷安東權寬
처부(妻父) 全州李氏 옥당부수(玉堂副守) 이수장(李壽長)女
祖父-연강수(連江守) 이의손(李義孫), 曾祖父-재전부정(梓田副正) 이효온(李孝溫)ㅡ>祖父 : 定宗
外祖父-안동인(安東人) 사용(司勇)경력(經歷) 권관(權寬)
이질서(姨姪壻) 좌찬성(左贊成)기묘현(己卯名賢) 정익공(貞翼公) 조변(趙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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