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
딜쿠샤는 흰두어로 '행복한 마음', '희망', '기쁨, '이상향' 등을 의미합니다.
딜쿠샤 가옥은 UPI 통신의 서울특파원이었던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입니다.
알버트 테일러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를 뚫고 독립선언문과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미국에 보냈으며, 그로 인해 전세계에 3.1운동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19년 2월 28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3.1 운동 전야. 갓 태어난 아기의 침대에 누군가 일본 경찰의 수색을 피해 인쇄물을 숨겼다. 앨버트 테일러는 아들을 안아 보려다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그것은 독립선언서였다. UPI 통신원 자격으로 서울에 와 있던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독립 선언서를 일본으로 보냈고 독립운동의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1923년, 서울에서 평생을 뿌리 내리려고 마음먹은 테일러는 인왕산 언덕에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짓고 인도에서 보았던 궁전의 이름을 따서 ‘딜쿠샤’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고 그의 부인은 남편의 소식도 모른 채 딜쿠샤에 가택연금 되었다.
수개월째 먹을 것이 떨어져도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던 때 누군가가 감시를 피해 문 앞에다 달걀과 꿩, 김치를 가져다 놓았다.
삼엄했던 식민지시절 딜쿠샤 근처의 가난한 이웃들이 테일러 가족을 도왔던 것이다.
테일러가족은 결국 일제에 의해 추방 되었다. 하지만 1948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앨버트 테일러는 사랑했던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가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다. 부인 메리 테일러 여사는 남편의 그리움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한국에 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김치를 먹어 보라던 남편의 모습과 문 앞에 가난한 이웃들이 전해 주었던 김치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유해를 홀로 안고 막 해방된 한국으로 향하는 군함에 올라 다시 태평양을 건넜다.
알버트 테일러는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치 되었다. 그리고 부인 메리테일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알리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힘섰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그리며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희망했고 태평양 저 끝 아득한 캘리포니아 해변가에서 영원한 안식을 맞았다.
해방 후 딜쿠샤는 18가구가 집을 나누어 함게 살게 되었다.
딜쿠샤라고 적힌 초석의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하다가 독립선언서를 숨겨 두었던 요람의 아기 브루스 테일러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65년만에 지구 반대편의 고향집을 찾아오면서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 이야기는 손녀에 의해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