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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성(姓)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므로, 이것이 성인지,
그냥 단순히 이름의 한 글자인지 분명하지 않다.
참고 : 삼국 및 신라 시대의 안씨 추정 인물
확실히 안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경우는 신라말 금석문에서 부터 보인다.
금석문과 고려사 등에 나타나는 신라말 고려초의 안씨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본다.
1300년까지는 가능한 한 모든 안씨 기록을 망라하도록 하였고,
그 이후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선택적으로 하였다.
기록이 여러번 나오는 사람은 최초기록만 적었다.
아래에서 보듯이 본관이나 출신지역이 명확한 최초의 안씨들은 신라말 고려초에 경주부(慶州府)의 안강현(安康縣)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안강(安康) 안씨, 중원부(中原府)에 살았던 충주(忠州) 안씨, 황해도 동주(洞州, 지금의 서흥)를 본관으로 한 동주(洞州) 안씨 등이다. 광주, 순흥, 죽산 안씨들은 고려 후기에 가서야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설사 고려 초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한 동안 지방 세력으로 머물렀고, 중앙 관계로의 진출은 위의 안씨들에 비해 상당히 늦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산안씨들이 주장하는 우리나라 안씨들이 807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온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에 기원한다는 설은 이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광주, 순흥, 죽산안씨들이 신라말부터 고려 중기까지 아래 표에서와 같이 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1250년 이후에야 조금씩 나타나며, 그 이전 400여년 동안에는 이들과 관련이 없는 다른 안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과 어긋난다. 죽산안씨동원보와 같은 설은 광주, 순흥, 죽산 안씨들이 안씨 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하게 된 조선 후기 이후에 모든 안씨들을 중국서 온 한 사람의 조상아래 묶으려고 만들어낸 설인 것이 자명하다.
이원이 당나라서 왔다는 807년 이후 고려말까지 400여년 동안 수많은 다른 안씨들이 기록에 나오지만, 정작 이원 후손이라는 광주, 순흥, 죽산안씨는 1250년 이후에야 기록에 나타난다. 그런데 수많은 다른 안씨들은 어떻게 하고, 하필 고려말에 부상하여 조선 후기에 다수가 된 이들 성씨만 807년 당나라서 온 이원의 후손이 될 수 있었겠는가?
신라말 고려 시대 기록에 나오는 대다수 안씨들은 현존 어느 안씨 족보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들이 후손이 끊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족보 간행이 붐을 이루는 조선 후기 무렵에는 후손들에게 계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후대의 안씨들로부터 잊혀졌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된 후대 사람들이 모화 사상에 젖어 다른 성씨들의 주장을 모방하여 조선 후기 안씨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광주, 순흥, 죽산안씨를 중국서 온 당나라 사람의 후손이라고 조작한 것이다.
[아래 표에서 푸르스름한 배경색으로 된 것은 죽산안씨들이 807년 당나라에서 온 이원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죽산(1249년), 순흥(1288년), 광주(1350년) 안씨가 고려사에 처음 나오는 기록이다. 우리나라 안씨들 대다수가 이원에서 비롯한다면 그 이전 기록에 나오는 광주, 순흥, 죽산과는 무관한 아래와 같이 수많은 안씨들은 어디서 왔으며, 또 그 후손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름 | 출신지 | 본관 | 기록내역 및 근거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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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현(安處玄)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888년 동궁내양(東宮內養)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
안이조(安尼藻) | 중원부(中原府) | 충주(忠州) | 사마(司馬) 역임.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의 부친.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
석초(釋超) | 중원부(中原府) | 충주(忠州) |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 안이조(安尼藻)의 아들.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
별빈(別嬪) 안씨(安氏) | 경주? 안산? | 안강? 안산? |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 ?~978, 재위 927∼935)의 부인으로 별빈(別嬪) 안씨(安氏)가 여러 기록에 보임. 경순왕과 별빈을 추모하는 성황제(城隍祭)가 시흥과 안산 두 지역에서 고려초부터 지금까지 매년 행해지고 있다고 함. 시흥 군자 성황제(君子 城隍祭) : 매년 음력 10월 3일 (군자봉) 안산 잿머리 성황제 : 매년 음력 10월 (여기서는 경순왕의 비가 홍씨, 장모가 안씨라고 함.)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안산 잿머리성황제 굿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
안락(安樂)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대광(大匡). 고려 태조(재위 918-943) 공신. 안직숭(安稷崇:1066~1135)의 선조. 안직숭 묘지명(安稷崇 墓誌銘) |
안제경(安帝京) | 죽주(竹州) | 죽주(竹州) | 997년 동량(棟梁) 대행명도교위(大行明徒校尉) 호장(戶長) 통화명안성장명사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장명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서부동 512 |
안창령(安昌齡) | ... | ... | 1009년 문과 장원 급제. [高麗史4卷-世家4-顯宗 즉위년] 是月賜 安昌齡 等及第. |
안소광(安紹光)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010년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상장군(上將軍) 안소광(安紹光, ?-1017)을 행영도병마사(都兵馬使)로 함.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安紹光 爲行營都兵馬使 / 高麗史4卷-世家4-顯宗 1년 /《고려사》 제94권 - 열전 제7 안소광(安紹光)] |
안재균(安宰均) | ... | ... | 1016년 司憲 安宰均 李元秀 劉玄佐 李懷 郭紳 李周佐 爲監察. [高麗史4卷-世家4-顯宗1-07-21-1016] |
안인표(安仁表)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증조 인표(仁表)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이고,.. " |
안정화(安鼎和)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조부 정화(鼎和)는 소부감에 추봉되었다." |
안홍점(安鴻漸) | ... | ... | 1020년 안홍점(安鴻漸)을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임명하였다.[以 安鴻漸 爲司憲雜端. / 高麗史4卷-世家4-顯宗1-11-26-1020] |
안보(安甫) | ... | ... | 1041년 加徐訥洪賓有暹 [安甫] 高烈等重大匡.[#高麗史6卷-世家6-靖宗-07-24-1041] |
안민보(安民甫) | ... | ... | 1056년 겸 감찰 어사(兼監察御史)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 관북, 관내 등 세 지방의 무문사로 함.[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安民甫] 爲關西北關內三道撫問使; / #高麗史7卷-世家7-文宗1-10-15-1056] |
안신조(安申祚)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아버지 신조(申祚)는 대자대부(大子大傅)에 추봉되었고,... " |
탄연 모(坦然 母) 안씨(安氏) | ... | ... |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은 고려 전기의 명필로 신품4현의 한 사람이다.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鑑國師碑)에 <<..휘는 탄연(坦然)이요, 속성은 손씨(孫氏)며, 선조(先祖)는 (결락) 양현(陽縣) 사람이다.아버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
안광(安光) | ... | ... | 1079년 九月日本國歸我飄風 商人 [安光] 等四十四人.[#高麗史9卷-世家9-文宗3-33-12-1079] |
안덕보(安德保) | 대원군(大原郡) | 충주(忠州) | 외손자 최유청(崔惟淸:1095~1174) 묘지명(墓誌銘)에 " 어머니는 □ 대원군대부인 안씨(大原郡大夫人 安氏)로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 덕보(德保)의 딸이다."고 함. |
안민후(安民厚) | ... | ... | 1085년(선종2년)에 세운 국보 59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의 글씨를 씀.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안민후는 구양순체를 잘 썼다고 하며, 서예사에 이름이 나옴.[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참고] |
안선준(安先俊) | ... | ... | 1091년 甲辰都兵馬使奏: "往年蕃賊寇昌州兵馬錄事 [安先俊] 等領卒出屯德寧戍遣郞將高猛等 追捕奮擊賊大潰校尉崇儉隊正邊鶴等突入賊中士卒增氣 斬有功乞加職賞以勸將來." 制可.[#高麗史10卷-世家10-宣宗-08-11-1091] |
안인감(安仁鑑) | ... | ... | 1097년 甲辰遣 [安仁鑑] 如遼賀天安節.[#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2-27-1097] |
안자공(安子恭) | ... | ... | 1102년 壬申遣 [安子恭] 如遼賀天興節.[#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7-58-1102] |
안지충(安之忠) | ... | ... | 1106년 예종 원년 3월에 중서 사인(中書舍人) 이재(李載)가 안지충(安之忠) 등 89명을 뽑았다. 睿宗元年。三月。中書舍人李載。取安之忠等八十九人 [『고려사(高麗史)』74권 지(志) 제28권 선거 2(選擧二) / 과목 2(科目二) 국자시지액(國子試之額)] |
안직숭(安稷崇)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13년 九月乙酉遣西頭供奉官 [安稷崇(1066-1135)] 如宋. 牒宋明州云: "去年入朝金緣等同稱: '在闕下 時蒙館伴張內翰等諭來歲又當 祀申覆國王遣使入朝以觀大禮.' 聞此已令有司方始 備辦忽母氏薨逝迫以難憂今年未遑遣使入朝以達情禮請炤會施行."[">#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8-34-1113]/ 안직숭 묘지명(安稷崇 墓誌銘) 안직서(安稷諝) |
안보린(安寶麟) | ... | ... | 1122년 丁丑御紗樓召文臣五十六人刻燭命賦牧丹詩六韻詹事府注簿 [安寶麟] 爲第一. 賜絹有差.[#高麗史14卷-世家14-睿宗3-17-11-1122] |
안거중(安居中)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35년에 지은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장남 거중(居中)은 어려서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금 수주판관 예빈주부(樹州判官 禮賓主簿)로 있다. " |
안거정(安居正)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35년에 지은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차남 거정(居正)은 음서[廕]로 관직을 얻었는데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직을 받았다." |
안숙(安淑) | ... | ... | 1138년 가을 7월에 지어사대사 최관(崔灌)과 잡단 박정유(朴挺蕤)와 시어사 인의(印毅)ㆍ최술중(崔述中)ㆍ안숙(安淑) 등이 3일 동안 합문 밖에 엎드려 추밀사 진숙(陳淑)을 탄핵하기를, “일찍이 서경을 토벌할 때에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받은 바 있다." 하였는데, 왕이 답하지 않자 모두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최관 등을 불러 일을 보도록 타일렀으나, 오직 정유와 술중은 굳게 다투고 나오지 않고, 안숙은 결국 면직되었다.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무오 16년(1138)] |
안정수(安正脩) | ... | ... | 1142년 癸丑遣 [安正脩] 如金賀萬壽節.[#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0-33-1142] |
안작유(安綽裕) | ... | ... | 1145년 丙子遣借戶部侍郞 [安綽裕] 謝橫宣.[#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3-36-1145] |
안영유(安永有) | ... | ... |
1150년 의종(毅宗) ... 4년(1150)에 문공원(文公元)이 지공거로 되고 이지무(李之茂)가 동지 공거로 되어 안영유(安永有) 등을 뽑았다. [毅宗四年。文公元。知貢擧。李之茂。同知貢擧。取安永有等。]『고려사(高麗史)』73권 / 지(志) 제27권 / 선거 1(選擧一) / 과목 1(科目一) / 선장(選場) 의종(毅宗) 4년(1150) 경오(庚午) 의종 4년 경오방(庚午榜) |
안필공(安弼公) | ... | ... | 사위 오천유(吳闡猷, 1168~1238) 묘지명(墓誌銘)에 "먼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안필공(安弼公)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고 함. |
안사열(安社悅) | ... | ... | 임춘(林椿), "안사열에게 제사지내는 글 매제를 대신하여 행하다 [祭安社悅文 代妹行]" [동문선 제109권 제문(祭文) / 西河先生集卷第六 啓狀祭文 二十二] |
안지언(安之彦) | ... | ... | 1174년 덕수가 주(州)의 부사(副使) 최박문(崔博文), 판관(判官) 안지언(安之彦)ㆍ김공유(金公裕) 등과 더불어 군사를 나누어서 모든 성문을 진치고서 지켰다. [고려사절요 제12권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갑오 4년(1174)] |
안치민(安置民)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지인(知人)으로, 시화에 능하였으며, 미술사에 이름이 나온다. [고려 중기 경주의 안치민(安置民) / 高麗時代 화가 安置民의 現實認識 / 안치민(安置民)의 시와 관련 기록] |
안유발(安劉勃) | ... | ... | 1178년 시어사(侍御史) [고려사 절요] / 고려사 제101권 - 열전 제14 안유발(安劉勃) |
안윤공(安允恭) | ... | ... | 1182년 癸未遣將軍 [安允恭] 如金謝賀生辰; 兵部郞中崔永儒賀正.[#高麗史20卷-世家20-明宗2-12-27-1182] |
안사기(安社基) | ... | ... | 명종 20년(1190) 9월에 안사기(安社基) 등 32명을 뽑았다. [《고려사》 제74권 - 지 제28 > 선거 2 > 과목 2 > 승보시(升補試). 이는 곧 생원(生員)을 뽑는 시험이다.] |
안유부(安有孚) | ... | ... | 1200년 十二月丁未 以崔詵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 奇洪壽守*大師柱國; 任儒守*大傅門下侍郞平章事; 崔忠獻守*大尉上柱國; [安有孚] 爲右副承宣中書舍人; 趙準爲戶部侍郞右諫議大夫. [#高麗史21卷-世家21-神宗-03-22-1200] |
안완(安琓) | ... | ... | 1205년 八月宋商船將發禮成江監檢御史 [安琓] 行視 出之物得犯禁宋商數人笞之太甚. 忠獻聞之罷琓又論不擇遣御史罷侍御朴得文. [#高麗史21卷-世家21-熙宗-01-04-1205] |
안유좌(安劉佐) | ... | ... | 사돈 조충(趙冲 : 1171∼1220) 묘지명(墓誌銘)에 "둘째 딸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안유좌(安劉佐)의 □째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문생(門生)이다."고 함. |
안효덕(安孝德) | ... | ... | 고려문과에 급제하고 1212년 경 서해부서기(西海府書記)의 관직에 있었다. 외조부 박인석(朴仁碩, 1143~1212)의 묘지명(墓誌銘)에 나옴. 외조부가 광주 연창군(廣州 延昌郡) 사람이고, 그 어머니가 안성군대부인 이씨(安城郡大夫人 李氏)라 하였다. 외조부는 죽산박씨일 것이고, 안효덕(安孝德)도 죽산안씨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문과 방목에는 고종(高宗)때 시년 미상 급제자로 나온다. |
안팽조(安彭祖) | ... | ... | 1217년 5월에 ... 대정(隊正) 안팽조(安彭祖)가 화살에 맞아 서울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거란병이 피살되기는 오직 두 사람뿐이고, 나머지 죽은 사람은 모두 우리 군사였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5권 >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정축 4년(1217)] |
안영린(安永麟) | ... | ... | 1219년 의주 선유사(宣諭使) 조염경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의주의 반민(叛民) 50여 명이 가주(嘉州 평북 가산(嘉山))에 와서 말하기를, '병마사 조충ㆍ김군유ㆍ정공수(丁公壽) 등은 청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백성에게서 재물을 거두어 살을 벗기고 뼈를 긁어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이러한 반란이 일어났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최우가 그 말을 듣고, 안영린(安永麟)ㆍ유비(柳庇)ㆍ준필(俊弼)ㆍ이정수(李貞壽)ㆍ최수웅(崔守雄)ㆍ이세분(李世芬)ㆍ고세림(高世霖)ㆍ홍문서(洪文叙)ㆍ이윤공(李允恭)ㆍ최효전(崔孝全)ㆍ송자공(宋自恭)ㆍ이원미(李元美)ㆍ최밀(崔謐) 등이 일찍이 충헌에게 아첨하여 섬겨서, 안찰사가 되기도 하고, 분도(分道)ㆍ분대(分臺)ㆍ감창사도 되었으며, 큰 고을을 구하여 한없이 착취를 하였으므로,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기묘 6년(1219)] |
안석정(安碩貞) | ... | ... | 1221년 봄 정월에 어느 사람이 상소하기를, “어사 중승(御使中丞) 안석정(安碩貞)은 사노(私奴)의 아들이니, 대각(臺閣)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이때에 최우가 사사로이 석정에게 후히 하여 외람되게 이 직을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신사 8년(1221)] |
안부(安孚)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외손자 오잠(吳潛 : 1259~1336) 묘지명에 "어머니는 안강군대부인 안씨(安康郡大夫人 安氏)로 안강(安康) 사람이며, 아버지인 금오위 정용별장(金吾衛 精勇別將) 부(孚)의 딸이다."고 했다. |
안기(安琦) | ... | ... | 1243년 봄 정월에 교위(校尉) 조보수(趙甫壽)가 그 표형(表兄) 대장군 송백공(宋白恭)을 최우에게 참소하니, 우가 백공을 강에 던져 죽이고 보수를 낭장으로 삼았다. 또 어떤 사람이 장군 김치(金偫)를 참소하니 우가 치를 불러 꾸짖기를, “네가 무뢰배를 모아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머리를 깎아서 하동현(河東縣)으로 귀양보내고 김치와 친하게 지내던 장군 김정희(金正曦), 평로진 부사(平虜鎭副使) 손중수(孫仲秀), 다방(茶房) 안기(安琦) 등 35명을 강에 던지었다. 김치는 곧 최우의 외손 정(晸)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계묘 30년(1243), 송 순우 3년] |
안전(安戩) | 죽주(竹州) | 죽주(竹州) | 1249년 6월 "계축일에 시랑 안전(安戩, ?∼1298)과 낭장 최공주(崔公柱)를 몽고에 보냈다" [高麗史23卷-世家23-高宗 36년(1249)/ 癸丑遣侍郞安戩郞將崔公柱如蒙古]. / 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안전(安戩) |
안방열(安邦悅) | ... | ... | 1255년 己未命判司天事 [安邦悅] 脩智陵以爲蒙古所壞也.[#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2-16-1255] |
안열(安悅) | ... | ... | 1257년 원주(原州)의 적 안열(安悅) 등이 옛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군 윤군정(尹君正)과 낭장 권찬(權贊)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치게 하였다. [原州賊 [安悅] 等據古城叛遣將軍尹君正郞將權贊領兵討之./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1-1257] |
안희(安禧) | ... | ... | 1257년 東北面兵馬使報: "分司御史[安禧]設伏於永 山谷挾擊東眞兵獲兵仗鞍馬及所虜男女牛馬等物."[#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9-1257] |
안홍민(安洪敏) | ... | ... | 1259년 2월에 등주와 화주 등 여러 성의 반민들이 관인(官人)이라 자칭하고 몽고 사람을 인도하여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쳤다. 방호별감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나와 쳐서 전부 섬멸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기미 46년(1259)] |
안세정(安世貞) | ... | ... | 1271년 봄 정월에 공유(孔愉)ㆍ안세정(安世貞)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또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어 아해(阿海)가 겁내어 우리 군사를 구원하지 않은 일을 아뢰니, 황제가 아해를 면직시키고 소환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원종 순효대왕 2(元宗順孝大王二) 신미 12년(1271)] |
안열(安悅) | ... | ... | 1271년 신축일에 착량(窄梁)의 초소를 지키고 있던 몽고 군대가 대부도(大部島-남양 대부‘大阜’섬)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해 약탈하니 주민들의 원망이 심하였다. 대부(大部) 사람들이 숭겸 등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몽고 병사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주(水州) 부사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므로 안열의 관직을 5품으로 올리어 주었다. [辛丑窄梁防戍蒙古兵入大部島侵奪居民民甚怨之大部人聞崇謙等起遂殺蒙古六人以叛 水州副使[安悅]率兵討平之進悅秩五品. / #高麗史27卷-世家27-元宗3-12-15-1271] (1257년 원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안열과는 동명이인) |
안적재(安迪材) | 제천(堤川) | 제천(堤川) | 1277년 "6월 경신일에 .. 장군 안적재(安迪材)를 합포 방호사로 임명하였다.[六月 庚申 ... 以將軍安迪材爲合浦防護使. /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정축 3년(1277)]" 증보문헌비고에 제천 안씨(堤川安氏) 시조(始祖)로 나옴. |
안사정(安社貞) | ... | ... | 1277년 전 대장군 위득유(韋得儒)와 중랑장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계획한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흔도(忻都)에게 참소하기를, “방경이 아들 흔(忻)과 사위 조변(趙抃) 및 공유(孔愉)ㆍ나유(羅裕)ㆍ한희유(韓希愈)ㆍ안사정(安社貞) 등 4백여 명과 함께 왕ㆍ공주ㆍ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로 들어가 점거하여 반역하기를 계획했다.” 하면서, 여러 가지로 죄를 꾸며서 무고하였다.......[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 1(忠烈王一) 정축 3년(1277)] |
안사준(安社俊) | ... | ... | 유학자로 《논어》ㆍ《맹자》ㆍ《시경》ㆍ《서경》에 통달했다고 함. ["역옹패설 (櫟翁稗說)의 안사준(安社俊) : 이제현(李齊賢, 1287-1367) "] |
안향(安珦) | 흥주(興州) |
흥주(興州) =순흥(順興) | 1288년 안향(安珦, 1243∼1306)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함.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 14년(1288) 春正月己丑以安珦爲左副承旨.] |
안수정(安守貞) | ... | ... | 1291년 경신일에 적이 양근성에서 잡아간 여자 두 사람을 보내어 성 아래에서 유인하자, 충갑이 또 이들의 목을 베니, 적은 북과 함성을 울리고 전진하면서 온갖 계략을 써서 성을 공격하였다. ....고을의 아전 원현(元玄)ㆍ부행란(傅行蘭)ㆍ원종수(元鍾秀)가 국학 양정재(國學養正齋)의 유생 안수정(安守貞) 등 1백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로부터 내려가서 합세하여 공격하는데, ...이로부터 적의 예기(銳氣)가 꺾이어 감히 다시 공격해 오지 못했고, ... 이는 모두 충갑의 공이었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신묘 17년(1291)] |
안진(安震) | ... | 안산(安山) | 1314년 "9월 초하루 무자일에 안진(安震, ?-1360) 등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九月 戊子 朔賜安震等及第/《고려사》 제34권 - 세가 제34 충숙왕 1] 한중연 인명사전에는 순흥안씨로 나오나, 순흥보에는 없고, 안산군(安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안산(安山) 안씨로 추정됨. |
안자유(安子由) | 안산(安山) | 안산(安山) | 1342년 전 군부판서 안자유(安子由) [《고려사》 제36권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1347년 6월 갑술일에 참리(叅理) 안자유(安子由)를 원나라에 보내 모시베를 바치게 하였다. [고려사 충목왕 정해 3년(1347)] 증보문헌비고: 안산 안씨(安山安氏) 시조(始祖) 안자유(安子由)〔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
안길상(安吉祥) | 광주(廣州) | 광주(廣州) | 1350년 경인 2년(1350) 봄 정월 ...경진일에 왕이 사부 상의(師傅商議) 민사평, 시학(侍學) 신덕린(申德鱗), 안길상(安吉祥, ?-1380), 봉질(奉質), 손계(孫桂) 등을 위하여 간단한 연회를 베풀었다.[《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 충정왕 > 충정왕 경인 2년(1350)] |
안익(安翊) | ... | 공산(公山) | 1378년 10월...성여완(成汝完)을 정당문학 상의(政堂文學商議)로 임명하고 왕승귀(王承貴), 김광후(金光厚), 최준(崔準), 김한제, 안익(安翊, ?-1410), 장하(張夏), 목자안(睦子安) 등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133권 - 열전 제46 신우 무오 4년(1378)] 익재 이제현의 사위이며, 공산안씨의 시조로 나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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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기록.
고려 전기의 안씨들 (고려사 세가편)
금석문에 나타난 신라말 고려초의 안씨들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안씨(安氏)들(1)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안씨(安氏)들(2)
羅末麗初의 안씨 기록에서도 드러나는 안씨동원보의 허구성
죽산안씨들은 807년 중국서 신라로 와 개성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는 이원(李瑗)의 세 아들이 우리나라 안씨들의 기원이라고 극구 주장하나, 여기서 보다시피 실제 옛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안씨들의 시원은 송악산 아래 살았다는 이원의 아들들이 아니라, 800년대 후반에 처음 보이는 경주의 안강안씨, 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충주의 충주안씨, 고려 개국(918년)을 전후한 시기의 동주(황해도 서흥)의 동주안씨 등이다. 죽산안씨들은 여러 가지 역사 기록들과 배치되는 허황된 내용을 담은 안씨동원보를 조속히 폐기하여 더 이상 혼란을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 경주부(慶州府) 지역의 안씨 - 안강(安康) 안씨?
안처현(安處玄) : 888년(진성여왕 2년) 동궁내양(東宮內養)이란 관직에 있었다.
안치민(安置民) : 경주에 살았던 처사(處士) 안치민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지인(知人)으로, 시화에 능했다.
안부(安孚) : 외손자 오잠(吳潛 : 1259~1336)의 묘지명에 "어머니는 안강군대부인 안씨(安康郡大夫人 安氏)로 안강(安康) 사람이며, 아버지인 금오위 정용별장(金吾衛 精勇別將) 부(孚)의 딸이다."고 했다.
경순왕(敬順王) 별빈(別嬪) 안씨(安氏) : 경순왕(敬順王: ?~978, 재위 927∼935)이 경주에 있을 때 결혼한 부인이라면 안강안씨일 가능성이 크다.
안처현(安處玄) :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안치민(安置民) : 고려 중기 경주의 안치민(安置民) / 高麗時代 화가 安置民의 現實認識 / 안치민(安置民)의 시와 관련 기록
안부(安孚) : 외손자 오잠(吳潛) 묘지명
별빈(別嬪) 안씨(安氏) :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안산 잿머리성황제 굿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경순왕(敬順王) 별빈(別嬪) 안씨(安氏)의 경우 경순왕릉이 경기도 연천에 있으므로, 만년에 경주를 떠났을 때 결혼한 부인이라면 연고지가 안산 시흥 부근일 수 있고, 안산안씨일 수도 있는 듯하다. 별빈이 순흥안씨라는 기록도 보이나, 순흥이라는 지명이 고려말에 생겼고, 시조 자미공도 후대인 1200년 경의 인물이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 원래는 그냥 안씨 정도로 전해오다 순흥안씨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조선 후기에 순흥안씨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궁내양(東宮內養)이 어떤 관직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태자(太子, 東宮)와 관련된 직책인 것은 분명하므로, 골품제를 시행하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안처현은 경주에 살던 중앙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강현(安康縣)은 경주부의 속현(屬縣)으로 오늘날 경주시 안강읍 지역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안강현 조에 토성으로 안씨가 나온다.
안강(安康) 안씨는 오늘날 잘 보이지 않으나, 근래 인구 통계에 경주(慶州) 안씨가 나온다. 광주안씨들은 인구 조사 하는 사람들이 광주(廣州)를 경주(慶州)로 잘못 읽고 쓴 통계라고 주장하나, 통계에 오인하여 잘못된 부분도 있겠지만, 모두 착오로 보기는 어렵고 일부 경주안씨가 실제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경주안씨 인구는 1985년에 672명에서 15년 후인 2000년에 5619명으로 급증하고, 광주안씨는 1985년에 53,523명, 2000년에 43,609 명으로 급감하여 통계의 신뢰성에 의문은 있지만, 오늘날의 경주 안씨가 이전의 안강(安康) 안씨와 동일한 본관으로 추정된다.
경주 안씨 인구 분포 (1985년 및 2000년 통계)
안씨 본관별 인구 통계 (2000년, 각 본관별 인구 수를 클릭하면, 1985년도 통계도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장기현(長鬐縣)에도 안씨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장기를 본관으로 한 안씨는 기록에 보이지 않으므로 안강안씨와 같은 계열의 안씨가 아닌가 생각된다.
- 중원부(中原府, 충주) 지역의 안씨 - 충주(忠州) 안씨?
안이조(安尼藻) :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 :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스님의 휘(諱)는 석초(釋超)이고, 속성은 안씨(安氏)이니 중원부(中原府)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尼藻)로서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하였으니..."라 함.
안덕보(安德保) : 외손자 최유청(崔惟淸:1095~1174)의 묘지명(墓誌銘)에 " 어머니는 대원군대부인 안씨(大原郡大夫人 安氏)로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 덕보(德保)의 딸이다."고 함.
안속(安束) : 고려 문과방목에 나오는 1383년 급제자로 본관이 충주(忠州)임.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최유청(崔惟淸) 묘지명(墓誌銘)
안속(安束) 문과방목
대원군(大原郡)은 충주 또는 중원의 다른 이름이다. 충주는 순흥안씨들의 본관지와 가까우므로, 위의 사람들은 순흥안씨 선대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
충주 안씨 인구 분포 (1985년 및 2000년 통계)
- 동주(洞州, 황해도 서흥) 지역의 안씨 : 동주(洞州) 안씨
안직숭(安稷崇:1066~1135) 가계
안직숭(安稷崇:1066~1135)은 동주안씨로 그의 묘지명(墓誌銘)에 선대와 아들이 나온다.
안락(安樂) .... 인표(仁表) -- 정화(鼎和) -- 신조(申祚) -- 직숭(稷崇) -- 장남 거중(居中), 차남 거정(居正)
안락(安樂) : 대조(大祖, 太祖) 때의 공신. 대광(大匡). 동주안시 시조로 보임.
안직숭(安稷崇) 묘지명(墓誌銘)
공의 이름은 직숭(稷崇)이고, 그 선조는 대조(大祖, 太祖) 때의 공신인 대광(大匡) 안락(安樂)으로 동주(洞州) 사람이다. 증조 인표(仁表)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이고, 조부 정화(鼎和)는 소부감에 추봉되었다. 아버지 신조(申祚)는 대자대부(大子大傅)에 추봉되었고, .....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이 있는데, 장남 거중(居中)은 어려서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금 수주판관 예빈주부(樹州判官 禮賓主簿)로 있다. 차남 거정(居正)은 음서[廕]로 관직을 얻었는데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직을 받았다. 딸이 한 명 더 있어서, 장사랑 양온령동정 이문저(李文著)에게 시집갔다.
안소광(安紹光, ?-1017) :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고려사에 몇 건의 기록이 있고, 열전에도 나옴. 안락(安樂) 또는 안직숭(安稷崇)과의 관계는 불명.
▣ 안소광(安紹光) : 《고려사》 제94권 - 열전 제7
안소광은 동주 토산현(洞州土山縣) 사람이다. 대대로 무관을 지냈는데 그는 몸집이 장대하고 외모가 잘났으며 성품이 기세스럽고 매 사냥과 승마를 즐겼다. 목종(穆宗)이 즉위할 때에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 하여 숙위(宿衛)를 장악하게 하였으며 왕의 총애와 우대가 비할 바 없었다. 현종(顯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있다가 죽으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멈추고 경강(敬剛)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 安紹光洞州土山縣人世爲將體貌魁偉使氣好鷹馬穆宗卽位以有翼戴功令掌宿衛寵待無比顯宗朝累拜尙書右僕射卒輟朝三日謚敬剛.
동주안씨는 오늘날 없어졌다. - 죽주(竹州, 안성시 죽산면) 지역의 안씨 : 죽주(竹州, 죽산) 안씨?
안제경(安帝京) : 997년 죽주(竹州) 호장(戶長). 탑지에 "동량(棟梁) 대행명도교위(大行明徒校尉) 호장(戶長) 안제경(安帝京)"으로 나온다. 죽산안씨로 추정되나 족보에는 나오지 않음. 이 무렵부터 죽산안씨들이 죽산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나, 지방 세력에 그치고, 중앙관계로 진출하는 것은 좀더 후대에 가서인 것 같다. (고려사에는 고려말에 죽산안씨가 처음 나타남.)
통화명안성장명사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장명사 터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서부동 512 에 있다.
참고: 997년 죽주(竹州) 호장(戶長) 안제경(安帝京)은 방준(邦俊) 후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