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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慶州崔氏) 옻골(칠계, 漆溪) 마을
대구광역시 동구(東區) 동촌(東村) 인근의 여러 취락(聚落), 곧 둔산동(屯山洞) 옻골, 도동(道洞)의 달동, 갓골(枝洞), 봉무동(鳳舞洞)의 강동(江東), 지묘동(智妙洞)에는 경주최씨(慶州崔氏) 광정공파(匡靖公派) 후손들이 400년 가까이 세거(世居)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둔산동은 대구 근역의 저명(著名) 집성마을인 묘골, 못골, 솔례골 등과 나란히 옻골 마을로 유명하여 경주최씨 칠계파(漆溪派)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락으로 현재 20여 호의 고가(古家)들로 어우러져 있다. 행정동 이름 ‘둔산’은 조선 시대 군영(軍營)이 거기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아홉 동네 아이들이 같은 해안(解顔)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구명당(九名堂)으로도 불리어 오며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명당골이라고도 하였다.
경주최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자기들 마을이 제일 으뜸이라 하여 수동(秀洞)이라 칭하다가 빼어났다고 하여 빼골, 옻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옻걸로 칭하다가 부르기 쉽게 변하여 옻골로 되었으며, 일명 칠계동(漆溪洞)으로도 일컫는데 기타 토골 등 여러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경주최씨는 원조(元祖)가 옛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육촌(六村)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사량부(沙梁部)의 소벌도리(蘇伐都利) 공이며, 석학(碩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 中祖)로 받드는 성씨이다.
최치원 선생은 자(字)를 고운(孤雲), 호(號)를 해운(海雲)이라 하였으며 신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었다. 12세에 당(唐) 나라에 유학하여 희종(僖宗) 원년(874)에 예부시랑(禮部侍郎)의 문하에서 한 번으로 급제하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처음에 현위(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다음해에 사직하고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들어갔다. 곧 황소(黃巢)의 난(亂)이 일어나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므로 선생이 종사순관(從事巡官)을 맡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는데, 그 글 가운데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남몰래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 하였으므로 황소가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逸話)가 전한다.
난리가 평정된 다음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郎侍御史內供奉)으로 승진하고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28세에 선생이 부모를 그리며 귀국할 뜻을 밝히자 황제가 사신(使臣)의 임무를 주어 고국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신라에 이르자 헌강왕(憲康王)이 시독(侍讀) 겸(兼)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林學士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봉하였는데,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자 왕이 아찬(阿飡)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조정(朝廷)이 그의 시책(施策)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좌절하여 외직(外職)을 희망하여 천령군(天嶺郡, 咸陽郡) 등 여러 고을의 태수(太守)를 역임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천하(天下)를 두루 편력(徧歷)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침내 진성여왕 10년에 가솔(家率)을 이끌고 가야산에 입산하여 구경(究竟)에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전한다. 합천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경주 남산, 부산 해운대, 마산 월영대, 함양 학사루, 함양 상림(上林) 등에 널리 족적(足跡)과 전설을 남기고 있으며, 고려 현종 11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현종 14년에는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저서로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전하여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과 상서장(上書莊), 정읍(井邑)의 무성서원(武城書院), 옥구(沃溝)의 무창서원(文昌書院) 등 전국 40여 곳의 서원(書院)과 영당(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경주최씨 주요 역사 인물을 들면 고려초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언위(崔彦撝)는 최치원의 사촌 동생이다. 18세에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935년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었다. 최승우(崔承祐)는 진성여왕 4년(890년) 당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급제하였다.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 3 사람을 가리켜 ‘삼최(三崔)’라 부른다. 최승로(崔承老)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최항(崔沆)은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옻골 등 경주최씨의 파조(派祖)는 휘(諱) 단(鄲), 시호(諡號)가 광정(匡靖)인데, 고려, 조선 양조(兩朝)의 무신(武臣)으로 1388년(우왕 14) 요동(遼東) 정벌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였으며, 이해 창왕(昌王) 즉위 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尙州)에서 왜구(倭寇)를 격파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한양윤(漢陽尹),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이듬해에는 앞서의 회군의 공(功)으로 3등공신에 책록(冊錄)되었는데, 그 사실이 조선왕조 태조실록(太祖實錄)에 기록되었다.
기타 조선조 경주최씨 이름난 인물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 동학교도가 된 뒤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1876년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조약체결은 안 된다고 외치다 흑산도로 쫓겨 간다. 1906년에 이르러 항일의병 활동을 펼치다 채포되어 일본 재판부는 선생에게 대마도 감금 3년을 선고하였다. 선생은 신발 밑에 우리 흙을 집어넣어 일본 땅은 절대로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더욱이 일본이 주는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가 결국은 1907년 1월 1일 순절하고야 말았다. 근세에 최준(崔浚)은 경주시 교동(校洞)에서 9대 진사(進士), 12대 만석(萬石)의 ‘최부자집’으로 이름났다.
이곳 옻골 기타 경주최씨들의 계파(系派)를 위에서 보듯이 광정공파(匡靖公派=匡靖公鄲派)라 하였는데, 파조(派祖) ‘광정공’은 물론 상게 최단(崔鄲) 공을 가리킨다. 그분의 장자(長子)가 최재전(崔在田)이란 분인데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하며, 그 장자 곧 광정공의 장손(長孫) 최맹연(崔孟淵)이란 분이 평안도 맹산(孟山) 현감(縣監)을 지내고 은퇴한 후 대구의 도동 달동에 처음 복거(卜居)함으로써 이 지역 경주최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 경주최씨들은 대구 도동 향산(香山)의 근역에 그 일족의 입향조 현감공의 산소(山所) 및 최고운 선생 영당(影堂)을 모시면서 가까이에 광정공과 증호조참의 양대(兩代)의 제단비(祭壇碑)를 갖추고 구회당(九會堂), 경운재(慶雲齋)를 이룩하여 고운(孤雲) 선생 영당과 함께 받드는 처지이다.
경주최씨 대구 입향조의 오세손(五世孫), 곧 광정공의 7세손에 이르러 최인(崔認)이란 분은 자(字)가 사인(士仁), 호(號) 한천(寒川)으로 임진란(壬辰亂) 때 대구 공산(公山) 의병장으로 팔공산, 경주 전역(戰役) 등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화왕산(火旺山)에서 활약하였고, 화원(花園)의 노변(路邊)에서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 아우 최계(崔誡, 1567-1622)는 자가 사훈(士訓), 호는 태동(苔洞)으로 1591년(선조 24)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현령(縣令)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또한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大北)의 전횡(專橫)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는데,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분들의 장질(長姪) 최동보(崔東輔, 종파/수동파) 공은 자가 자익(子翊), 호 우락재(憂樂齋)인데, 역시 의병장으로 대구, 경산, 영천 등지에서 전공(戰功)을 이루어 세 분이 나란히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社)되었다. 그 평천사는 후일(後日) 소실되어 전하지 아니하다가 순조(純祖) 때에 이르러 그 임란창의의 공으로 나라가 삼충(三忠)으로 정표(旌表)함에 이르렀는데, 동구(東區) 지묘동에 그 삼충비(三忠碑)가 전래한다.
최씨의 옻골 입향은 중형(仲兄) 한천(寒川) 최인(崔認), 장형 최겸(崔謙)의 아들로 조카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 종파, 수동파)와 함께 왜적을 격파하고 많은 전공을 세워 공신(功臣)이 된 전게 태동공(苔洞公) 최계(崔誡)의 둘째 아들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옻골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곧 옻골마을은 효종(孝宗) 임금 잠저시(潛邸時) 사부(師傅)인 최동집이 장래 자손의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1616년에 정착한 이래 380여 년간을 계속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최동집 공의 자는 진중(鎭仲)이며 호가 대암(臺巖)이다. 일찍이 한강(寒岡)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여러 명유들과 더불어 도의로 교분을 맺어 강마(講磨)하였다. 광해군 때 성균생원으로서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더불어 교유를 청했으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하였다. 인조 17년(1639)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효종대왕이 잠저로 청(淸) 나라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공에게 대군사부(大君師傅) 벼슬을 배명했는데, 공이 그 명을 받들어 조정에 나아갔으나 대군의 행차와 길이 어긋나 미치지 못하여 체임(遞任)되니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신년(인조 22년, 1644) 명나라가 망하니 마침내 팔공산으로 들어가 농연(聾淵)의 수석이 좋은 곳에 초가를 짓고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또 이 마을의 대표 인물인 최흥원(崔興遠[(1705년(숙종 31)∼1786년(정조 10)]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교관(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살기 어려운 정상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우고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며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안정을 얻게 하였는데,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 부인동규(夫仁洞規)였다.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후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추증(追贈)되었다. 반계수록(磻溪隧錄)은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적 개혁론을 집대성한 책인데, 그 책 완성 3년에 반계의 죽음으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조(英祖)의 명으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70년 후 최흥원에 의해 최초의 교정본이 완료되어 1770년 대구감영에서 발간 세상에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최동집의 후손은 또 동구 봉무동(鳳舞洞, 江東)에도 여러 집 집성촌을 이루어 살며, 최계의 장자는 다천정(茶川亭) 진사(進士) 최동률(崔東嵂, 지묘파)이었는데 그 후손이 지묘동(智妙洞)에 세거하였고, 계자(季子)는 향암(香巖) 진사(進士) 최동직(崔東山+直, 갓골파)으로 후손이 지동(枝洞, 갓골)에 세거하였다. 봉무동에 세거하는 최씨 일족들은 그 마을 출신으로 생원(生員)이었고 호가 봉촌(鳳村)이며 봉무정(鳳舞亭)과 독암서당(獨巖書堂)을 지은 최상룡(崔象龍, 1786-1849)과 관찰사 최정덕(崔廷德)을 자랑한다.
옻골 마을에는 경주최씨 종가와 사당인 보본당(報本堂)을 비롯해 약 20채의 조선시대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심과 가까이 있어 일부 가옥은 현대식으로 개량되었지만 아직도 고풍 양반주택의 모습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약 350년이 되는 보호수 회화나무가 있으니, 최씨들이 이곳에 이주한 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은 나무라 한다. 마을의 담장들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안쪽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한 느낌을 주는 점이 특징이다.
이곳 경주최씨 종택은 1616년, 최동집이 웇골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으로 대구 소재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 됀 것이며,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데, 1630년에 지은 안채와 백불암 최흥원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에 헐어지면서 그 자재를 사용해 이곳 사랑채를 다시 지었으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별묘와 가묘 등이 있다.
그 중 생활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보본당은 1753년에 지었으며, 보본당의 동쪽 담장 밖에 위치한 포사는 과거에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또 보본당 뒤편에 있는 별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묘에는 최흥원의 위패와 종손의 4대 봉사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 중 반계수록 최초 교정 장소는 보본당의 서쪽방이다.
수구당(數咎堂)은 학문을 갈고 닦던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살림집으로 개조되면서 사랑채와 안채 2동만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었다. 건립 당시 안채는 기와집이었던 반면, 사랑채는 초가지붕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데, 1918년에 두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안채는 칸수를 늘리고 기둥을 높였으며, 사랑채에는 새로 기와를 올리게 되었다 한다.
웇골마을 중간에 위치한 최흥원 정려각(旌閭閣)은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백불암을 기리기 위해 1789년 조정의 명으로 세운 것이다. 정려각은 단순하고 규모는 작으나, 18세기 후반의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위 밖에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상징물들로 대암(臺巖)이 마을 뒷산에 있는데, 큰 바위로 생구암(生龜巖) 또는 상여바위라고도 하며, 옻골마을의 모든 공간적 질서가 대암을 배경으로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배치를 하고 있어 마을의 전체적인 축과 집의 좌향을 일치시키고 있다. 또 당목(堂木)으로 현 종손의 10대조가 심은 300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동구(洞口)에 있고, 가까이 숲과 연못이 있다. 위 외에도 대구지역 경주최씨 문중 연관으로는 도동의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 대곡의 최치원선생 영각(影閣), 지묘동의 삼충사묘정비각(三忠祠廟廷碑閣), 태동공묘우(苔洞公廟宇), 다천정(茶川亭) 등 다수가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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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옻골에는 본인 제일 큰 고모가 살았셨든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