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행복수업 합본]
1) 수연성 불자님
입보리행론
청전 스님 옮김
2563. 6. 24.
해제문
1. 샨띠데바의 생애
샨띠데바 스님은 7ㅡ8세기경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대승의 중요 사상을 널리 선양한 중관학자였다.
남인도 사우라아슈트라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꿈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을 때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 라는 말을 듣고 왕위 계승에 회의를 품게 된다. 드디어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 왕궁을 몰래 나와 나란다사(대학)에 가서 비구가 되었다.
많은 큰스님 밑에서 폭넓게 수학하면서, 은밀히 삼매를 닦으며 무위행에 들어갔다. 그래서 겉으로는 항상 먹고, 자고, 놀기만 하는 그런 스님으로 보였다.
나란다사(대학)의 전통인 큰스님들이 경을 외우는 법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적천 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나란다사의 대중은 이 스님의 입에서 도대체 어떤 경문이 나올 것인지 의심을 하며 모여들었다. 적천 스님은 법좌에 올라 ''여태까지 외웠던 것을 송경할까? 아니면 지금까지 없었던 것, 즉 새로운 것을 외워볼까? 하고 물었다고 한다. 대중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을 외울 것을 요구했고, 이에 적천 스님은 대승의 모든 뜻이 결집된 이 《입보리행론》을 설하였다.
제9장 (지혜 바라밀품) 34절 ''만일 사물과 비사물들이 마음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형상은 구분이 없어지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 완전한 평정을 얻으리라. '' 이 게송을 송경할 무렵 적천 스님의 몸은 사라지고 오직 음성만 하늘에서 들려왔다. 대중은 이 모든 송경을 듣고 기억해, 놀라움과 기쁨으로 이 경을 기록해 두었다. 이후 적천 스님은 다시 나란다 절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찾는 제자들에게 스님 방 어딘가에 써 둔 경론을 참고해 더욱 수행할 것을 당부했는데, 그것은 《대승집보살학론》 또는 《제요경집》이다.
참고로 《대승집보살학론》은 한글대장경 249번, K- 1121(33-996)에 번역 되어 있다.
수연성 사경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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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전 거사님
입보리행론(지복(至福)에 이르는 보살의 길)
샨티데바
최로덴 역주
2563.6.24.
해제문
[입보리행론(티벳譯名,梵語明:入菩利行論)]을 지
은 샨티데바 보살은 서기 7세기 후반에 인도에서 태어났다. 날란다 대승원(大僧院)의 17논사 가운
데 한 분이고, 특히 시문에 뛰어난 중관학자(中觀學者)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지고한 가르침이 아비달마불교시대를 거치며 정체되고 관념화되어 갈 때, 보리(깨달음)의 이상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실천적인 생명력으로 다시 꽃피운 것이 대승불교운동이었다.
[입보리행론]은 전체 10장(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 '보리심의 공덕'은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보리심을 내도록 권하고 있다. 진정으로 보리심을
내기 전에 먼저 삼보에 귀의하고 널리 공양하고, 또한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 제2장 '악업의 정화(懺悔非業)'이다.
이어서 수희(隨喜)와 권청(勸請)을 딲고, 쌓은 복덕을 널리 회향한다. 그러고 나서 원보리심(願菩提心)을 일으키고 보살계를 수지하는 것이 제3장 '행보리심 일으키기(受持菩提心)'인데, 이 세 장의 요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속의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계를 받고나서 게으르지 않게 정진(不放逸)을 닦아서 보살의 학처를 어기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제4장 '보리심 지키기(不放逸)'이다.
제5장 '지계와 정지(護戒正知)'의 요점은 보살의 학처를 수
호하는 것이다. '인욕(安忍)'을 닦아 보살행의 심리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제6장 '인욕바라밀(忍辱)'인데, 이상의 세 장의 요점은 우리가 어떻게 이미 일으킨 보리심과 받은 보살계를 수지하여 그것들이 오염되는 일이 없게 하고 물러나 잃지 않게 하는가를 가르치고 격려하는데 있다.
더 나아가 보살행을 늘리기 위해 정진을 닦는 것이 제7장 '정진바라밀(정진)'이다. 우선 '선정(사마타)'을 닦아서 혼미하고 산란한 것을 멈춘 뒤에 '자타교환(똥렌)'을 닦으며 세속 보리심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제8장
'선정바라밀(靜慮)'이다.
제법의 실상(=空性의 智慧)을 통달하기 위해 승의(勝義) 보리심을 이끌어내어 일체 번뇌를 끊어버리고 지혜를 닦는 것이 제9장 지혜바라밀(智慧)인데, 이 세장의 요점은 이미 견고한 세속 보리심을 증진시키며 정화시키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순수하여 물들지 않은 승의 보리심을 구하며, 또한 이 힘으로 출세간의 바라밀을 행하여 청정한 복덕과 지혜의 두가지 자량을 늘려 10지를 단계적으로 올라가 구경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보리행론]을 찬술한 선업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제10장 '회향품'인데, '회향'은 복덕을 끝없이 늘이는 또 다른 방편이기도 하다. 요컨대, 어떻게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아가 어떻게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증장시키고 어머니였던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입보리행론]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입보리행론]에는 치밀하고 정치학 논리속에
깊은 철학적인 통찰력이 있는가 하면, 명쾌하고 심오한
비유 속에 더욱 간절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 [입보살행론]에 관해 인도에서만 100여부의 주석이 있었다고 하며, 더욱이 인도 후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유행한 문학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티벳으로 전해지자 티벳불교 각 종파의 학승들도 수 많은 주석을 남겼는데, 특히 위대한 티벳불교 중흥조 쫑카빠 대사가 그의 [람림첸모(菩提道次第廣論]에서 인용한 [입보리행론]의 게송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관심 속에 티벳불교에서는 [입보리행론]을 승속이 함께 보리심 수행의 근본 보전으로 수지하고 있으며, 특히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구전(口傳
)과 법문을 해 주셨다.
이 [입보리행론- 지복에 이르는 보살의 길]은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구전을 받고(2006년), 까르마빠 존자님이 주석하시는 규또밀
교대학(GYUTO TANTRIC UNIVERSITY 上密院)
에서 존귀하신 스승님의 가피 속에 비로서 [람림] 과 [보리심]에 눈을 뜨고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사경자 법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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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진 거사님
달라이 라마의 입보리행론 강의
뻬마까라 번역 그룹 편역
이종복 옮김
2563. 6. 24
▶ 들어가며
달라이 라마(뗀진 가쵸)는 1935년 동북부 티베트 지방인 암도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때, 라마 환생 전통에 의해 열네 번째 환생자로 지목되었었다. 달라이 라마는 프랑스 영토의 세 배에 달하며 2,000년에 걸쳐 통일되고, 독립 국가로 존재해온 비베트를 3세기 동안 지배해온 정신적인 지도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테베트를 중국 공산당 정부는 1950년, “평화로운 해방”을 가져오겠다는 구실로 침략했다. 이 침략은 곧 티베트의 정체성가 문화 피괴를 초래했고, 오늘날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다.그는 1959년부터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 거처하며, 티베트 난민 공동체를 지도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또한 비폭력의 대변인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타심에 기반한 지혜와 경험을 우리에게 알기 쉽게 전해주는 영적 스승이며, 많은 불교도가 그를 존경하고 경배한다. 달라이 라마에게 불교란 교리 또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지혜, 내면의 평화 그리고 행복의 원천이다. 불교는 우리 안의 자애와 연민을 일깨워 우리에게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을 보호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께서 공동의 책임, 즉 우리 하나하나가 인류라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고 환경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이유이다. “무기를 버리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무기를 버려야 한다. 유일한 평화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책은 달라이 라마가 1991년 8월 프랑스 남서부 지방인 도르도뉴(Dordogne)에서 일주일 동안 강연한 내용의 정수를 담아 만들었다. 불교 문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게송 중 하나인 샨띠데바의 《입보리행론(bodhicaryāvātara, byang cjub sems dpa'i spyod pa la 'jugpa)》을 설법하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연민의 길이 무엇인지 설법했다. 연민의 길이란 타인의 괴로움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닦아나아가는 보살의 길을 말한다. 달라이 라마는《입보리행론》을 무수히 많이 강의해왔다. 그럼에도 가끔 게송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내용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시곤 한다. 이는 진심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기 때문이다.
8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인도의 성자 샨띠데바처럼, 달라이 라마 역시 인간의 본성을 간결하고 가슴에 와닿는 말로 설명하신다.
그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과 다정함의 잠재된 힘을 조금이라도 빨리 일깨우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달라이 라마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길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 쉽게 설명해 준다. 그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의미이다.
뛸꾸 뻬마 왕겔
▶ 감사의 말
우리는 1991년 8월 달라이 라마를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으로 초대 해주신 테베트 스승들께 깊은 감사를 보낸다. 달라이 라마는 센펜다와 린뽀체, 라마 직메 인뽀체, 딱릉 쩨튈 린뽀체(뛸꾸 뻬마 왕겔) 그리고 돌아가신 네낭 빠오 린뽀체의 초청으로 오셨다. 이 스승님들의 협력으로 많은 대중들이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프랑스에서 처음 행해진 완전히 집성된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가르침을 티베트어로부터 옮기는 과정에서 빼마까라 번역그룹(Padmakera Translation Group)의 구성원인 집메 켄체 린뽀체, 스테판 게딘, 울스턴 플레처, 마이클 에이브럼스, 비비안 쿠르즈, 존 캔티, 크리스티나 퍼마일러 그리고 꾄촉 뗀진과 크리스틴 폰드케이브의 지대한 도움이 있었다. 여기에 인용된 샨띠데바의 《입보리행론》의 번역은 뻬마까라번역 그룹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도르도뉴 불교 센터 연합
▶ 게송 역자들의 글
달라이 라마는 많은 저술과 각종 미디어 출연 및 대중 강연을 통해 이미 서구에 널리 알려진 분이지만, 이 책은 달라이 라마의 유럽과 북미 순방을 더욱 널리 알리고 뜻깊은 행사로 만들어주었다. 한 주 동안 달라이 라마는 거대한 천막 아래 앉아 잇는 2,000여 명의 청중들에게 《입보리행론》이라는 위대한 불교 문헌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펼쳤다.
《입보리행론》은 8세기 무렵 활동한 인도 승려 샨띠데바의 작품으로 깨달음의 길 전체를 설명하는 문헌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언제나 영감을 주지만,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한 해설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설법을 완전히 마치려면 예닐곱 달은 족히 걸린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는 제한된 시간 내에 핵심이 되는 부분을 요약해서 가르침을 전해야만 했다. 특히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제9장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9장은 1993년 11원, 우리에게 다시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이 가르침은 2004년 위즈덤 출판사에서 《지혜의 수행(Practicing Wisdo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그러나 어디에서도 달라이 라마는 《입보리행론》의 10장을 제대로 가르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책에 나오는 한두 가지 정도의 세밀한 부분은 특히 이 가르침이 행해진 상황에 한정된 것이다. 3장에서 달라이 라마께서 《입보리행론》의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 샨띠데바의 말을 근간으로 그곳에 모인 사라들에게 보살계를 받도록 권하신다. 10장의 대부분은 가르침의 마지막을 맺는 헌사를 하는 동안 주신 달라이 라마의 조언이다.
이 책에서는 《입보리행론》의 게송이나 주석에서 모두 일반 대명사를 사용할 때 남성형 대명사, 즉 ‘그’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티베트어 원문은 종종 대명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타일의 문제상, 특히 내용이 함축적이고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이 있는 샨띠데바의 게송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샨띠데바는 이 《입보리행론》을 처음 가르친 것이 8세기라고 한다. 만일 이 전설이 옳다면, 이 가르침은 날란다 사원에 있던 그의 도반들에게 한 것이며, 그가 쓴 언어나 비유들은 모두 비구 대중, 즉 남성 청중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달라이 라마는 여성 독자들에게, 예를 들어 욕정을 다루는 8장과 같이 샨띠데바의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할 때는 간단하게 지칭되는 대명사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어 읽어보라고 조언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 책에서 티베트에 머물렀을 때 승원 대학에서 닦은 방대한 배움의 결과를 선사한다. 그 결과란 심오한 지식, 인간의 조건, 책임감 있고 선량한 사람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에 관한 그의 비범한 식견이다. 이 책은 그가 자신의 삶을 예로 진리와 소통하는, 간단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보여준다. 이 책의 여러 부분은 매우 전문적이기도 하다. 이 부분들은 다양한 불교 용어와 개념에 관한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불교 용어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용어 해설에 넣어 두었다. 가끔 나오는 이명이나 용어는 각주에 있다.
뻬마까라 번역 그룹
▶ 목차
들어가며 - 004
감사의 글 - 007
게송 역자들의 글 - 008
보살의 길 - 012
제1장 보리심의 이로움 - 025
제2장 공양과 정화 - 043
제3장 보리심 제대로 이해하기 - 061
제4장 보리심 불방일(不放逸) - 071
제5장 정지(正知)의 수호 - 079
제6장 인욕(忍辱)의 실천 - 101
제7장 정진(精進)의 실천 - 139
제8장 선정(禪定)의 실천 - 161
제9장 지혜(智慧)의 실천 - 209
제10장 회향(廻向) - 229
역자후기 - 236
용어해설 - 240
참고문헌 - 246
▶ 보살의 길
나는 이 《입보리행론(bodhicaryāvavatāra)》의 가르침을 꾼누 린뽀체(주01) 뗀진 겔첸에게서 받았다. 꾼누 린뽀체는 이 가르침의 위대한 전수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는 빠뚤 린뽀체(주02)로 부터 전해 받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빠뚤 린뽀체가 《입보리행론》을 설법할 때마다 많은 꽃잎으로 이루어진 노란 꽃들이 피어나는 등의 상서러운 징조가 일어났다고 한다. 나에게 이러한 위대한 불교 고전을 설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샨띠데바(주03)는 이 책을 내면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그는 자신의 무기들을 자신을 향하게 해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전투를 벌였다. 따라서 우리가 이 고전을 통해 정신적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샨띠데바가 했던 것처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붓다에 귀의하고 경전에서 뽑은 구절들을 같이 낭송함으로써 각각의 장을 시작해보자.
악행을 버리고
덕행을 닦아
마음을 조복하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별, 신기루, 혹은 불꽃과 같이,
마술로 일어난 환영, 이슬, 혹은 물거품과 같이,
꿈, 섬광, 혹은 구름과 같이,
모든 이루어진 것들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 게송을 낭송할 때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함과 현상에는 실재하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끝을 맺는다.
이 공덕으로 우리가 일체지를 얻을 수 있기를
우리의 적인 해로운 행동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생로병사의 파도에 시달리는 모든 생명이
삶의 바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반야심경》, 문수보살을 찬탄하는 게송 그리고 만달라의 봉헌을 낭송한다.(주04) 이러한 게송들을 낭송할 수 없는 분들은 간단하게 붓다의 자애에 댜해서 생각하고,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의 가르침인 공성(空性)에 관해서 고찰한다.
끝으로, 삼귀의를 하고 발보리심의 서원을 세 번 함으로써 우리의 서원을 일신한다.
붓다, [붓다의 가르침인] 다르마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깨달음을 얻을 날까지 귀의합니다.
보시 등의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복지를 위해 우리가 불성을 얻을지이다.
이제 《입보리행론》을 시작하자.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스승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면서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세 무량겁 동안 선업을 쌓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에 태어나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깨달음을 일으키셨다. 붓다가 광대하고 심오한 다르마의 바퀴, 법륜을 굴리신지 이제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불교의 길은 세계의 종교 전통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로 자리 잡았다.(주05)
붓다의 가르침은 두 가지 방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천과 관점이다. 실천이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종교를 떠나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관점이란 상호의존의 원리를 일컫는다. 행복과 괴로움 그리고 이를 경험하는 존재들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영원한 창조자에 의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사실상 모든 현상은 그 현상과 관련 있는 원인으로부터 일어난다. 이 사상은 모든 불교의 종파에서 견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보통 우리 불교도의 관점은 상호의존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상호 의존의 관점은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한 것은 원인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행복과 슬픔 같은 것이 단 하나의 독립적인 원인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접촉할 때, 우리는 당장 저절로 행복해져야 한다. 반대로 나쁜 것과 접촉할 경우, 슬퍼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기쁨과 슬픔의 원인들이 무엇인지 찾고 목표로 삼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화와 집착을 정당화할 좋은 이유도 찾을 수 잇을 것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원인들과 조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할 때, 우리가 원하거나 화를 낼 어떠한 단일 개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집착 또는 화와 같은 고통을 일으키는 단일 개체를 찾는 것은 더욱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의 관점은 우리의 마음을 보다 편안하고 열려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마음을 닦고 이 상호작용의 관점에 점점 더 익숙해짐으로써, 우리가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굴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차츰차츰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 다른 생명을 덜 해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앞에서 낭송했듯이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악행을 버리고
덕행을 닦아
마음을 조복하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가장 하찮은 악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피해야 하며, 아무리 작은 선한 행동이라도 하찮게 보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원하는 행복과 우리가 모두 피하고자 하는 괴로움은 바로 우리의 행동, 혹은 업(業, karma)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늘 그렇듯 우리의 행동에 의해 계획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은 다시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젊을 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 모든 것이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 겪는 행복과 괴로움의 원인이다. 게다가 이번 생에 한 모든 것이 다음 생의 행복과 괴로움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겁의 행동들이 미래 겁에 우리가 경험할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것이 업의 법칙, 혹은 인과법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광대하고 심오한 수행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마음을 조복시키ㅐ는 모든 방법을 아는 것이다. 증오의 해독제는 자애(慈愛)의 명상이다.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추함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자망의 해독제는 오온(五蘊)의 명상이다. 무지(無知)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호흡의 움직임과 상호의존성에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요동치는 마음의 근본은 현상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다. 실재에 대한 오해를 정화시킴으로서 그 마음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마음을 닦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탈바꿈할 수 있다.
일반적인 붓다의 가르침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대승 불교에 따르면,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그가 가르침을 세 번에 걸쳐 불법의 바퀴를 굴리셨다고 한다. 첫 번째로 붓다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근본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치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그리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두 번째로 법륜을 굴리시면서, 그는 공성과 수행의 길에 대한 심오하고 자세한 가르침을 피셨는데, 이는 반야부 경전들에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법륜을 굴리시면서, 그는 공성을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여래장경如來藏經》등의 경전들에서, 붓다는 나 자신인 주체와 대상인 객체 사이에 이분법적 사고가 없는 절대적인 자성에 대해서 마씀하셨다. 이것이 또한 미륵(彌勒, Maitreya)의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의 주제이기도 하다.
괴로움인 번뇌(주06)의 근원에 관한 이해는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현상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 번째 법륜을 굴릴 때, 붓다는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는 현상에 대한 매우 상세한 분석이 번뇌에 대한 더 투철한 이해로 이끌고 마침내 훨씬 더 정확한 공성의 통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 앎은 다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더 심오한 이해로 이끈다.
세 번째 법륜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이 세 번째 법륜은 우리가 모두 장래에 깨달을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강조한다.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혹은 불성(佛性)이라고 불리는 이 가능성은 우리가 무시이래로 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완전히 다른 씨앗 혹은 원인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버섯과 같은 어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개달음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토대 혹은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법륜에 속해 있는 문헌들은 현상의 공성에 관해서 설명하지만, 세 번째 법륜에 관련된 《여래장경》과 다른 가르침들은 마음의 명료하고 밝게 빛나는 측면인 지혜를 강조한다.
붓다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처음 가르치신 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모든 가르침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그의 가르침을 보다 자세히 가르칠 때, 상대방의 능력과 자질에 맞게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친 길은 아주 다양하고, 그가 말한 것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냐에 따라 심오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르침들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가르침들이 특정한 자질을 지닌 어는 제자에게 알려준 것들인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식별한 후 붓다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논리적이지 않거나 혹은 상호 모순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에 맞게 상대적으로 표현된 진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반면에 만일 그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전혀 모순이나 오류가 없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궁극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신심(信心), 즉 믿는 마음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지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진실된 믿음은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맹목적으로 어떠한 깊은 고찰도 없이 “귀의합니다” 혹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 합리적인 탐구를 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특정한 상대에게 맞추어진 것, 혹은 상대적인 것이지, 아니면 궁극적인 의미를 가르치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전혀 분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의 경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지처를 말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맞추어 설한 가르침에 의지하지 말고 궁극적인 뜻에 의지하라.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일상의 지적인 이해와는 다르게, 마음의 참 모습은 명료함과 앎으로 어떠한 장애물에도 걸림이 없다. 대승 불교의 수행은 전적으로 이 마음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에 기반 한다.
티베트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부터 무상요가 딴뜨라가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다른 불교 전통에 의해 보전되어왔다. 첫 번째 단계는 성문승(聲聞乘)으로(주07)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길을 가르친다.
두 번째 단계는 대승(大乘)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六바波羅蜜)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단계는 금강승(金剛乘) 혹은 진언승(眞言乘)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그리고 행, 소작, 요가, 무상요가딴뜨라의 네 종류의 딴드라를 단계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불교는 여러 나라에서 번성해왔지만, 성문승, 대승 그리고 금강승을 모두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는 나라는 티베트였다. 사실 한 수행 기간에 이 세 단계의 수행을 모두 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불어 티베트의 학자들은 수행의 측면을 절대 소흘히 하지 않았으며, 숙련된 수행자 역시 학문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완벽한 전통 안에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침을 편 뛰어난 스승들에 의해 서로 다른 전승들이 일어났다.(주08)
그렇게 티베트불교는 낭마빠의 오랜 전통[구파(舊派)]이 있고,(주09) 까담, 사꺄 그리고 까규의 새로운 전통[신파(新派)]이 있게 되었다.(주10) 현겔룩빠 전통은 까담빠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종파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경전 전통을 따르는 현교(顯敎)와 딴뜨라의 전통을 따르는 밀교(密敎)의 전통을 잘 조화시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주11) 븬교의 전통은 불교가 티베트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존재한 토속 신앙으로, 이 역시 붓다의 가르침의 완벽한 세트를 보전하고 있다.
《입보리행론》은 모든 티베트불교 종파의 스승들이 높이 추앙하는 논서이며, 아마도 그븐들 중 백 명 이상의 스승들이 이 논서에 관한 주석을 쓰셨을 것이다. 내가 이《입보리행론》에 대한 가르침의 전통을 꾼누 린뽀체로부터 전수받을 때, 그는 종종 잠양 켄체 왕뽀의(주12) 제자인 미냑 꾼상 소남이(주13) 쓴 훌륭한 주석서를 언급했다.
《입보리행론》은 붓다가 법의 바퀴를 세 번에 걸쳐 굴린 것을 응축하고 있다. 나는 《입보리행론》을 낭독해 그대들이 가피의 원천인 정신적 전승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나는 이 논서를 글자 하나하나까지 설명하지 않는 대신 중요한 부분에 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가르침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물질적인 이익 혹은 명성을 얻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듣는 것은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천신 혹은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처럼 다음 생에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내쳐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생각을 접고 셀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위해 일체지를 얻겠다는 굳은 서원을 세우고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논서에서 가르치는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의 길을 반드시 닦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발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바람직한 행동들이 수승한 깨달음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소원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듣는 동안에라도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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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꾼누 린뽀체(1855~1977)는 인도에서 태어나 티베트에서 공부했으며, 달라이라마를 가르친 스승들 가운데 한 명이다.
(주02) 빠뚤 린뽀체(1808~1887)는 동부 캄 지방에서 태어난 훌륭한 스승이다. 그는 샨띠데바와 자비의 보살 첸레직(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는《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오기열 역, 지영사, 2012)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03) 샨띠데바는 8세기경 인도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날란다 사원에 머물면서 그가 처음 이 책을 가르친 것도 날란다 사원의 승려들이다.
(주04)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들의 가장 짧은 요약본이며 공성에 대한 가르침의 정수를 담고 있다. 문수보살을 찬탄하는 게송(Śrījñānagunabhadraanāmastuti)은 지혜의 붓다에 대한 기원문으로 불교 문헌을 공부하기 전에 낭송된다. 만달라는 우주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법문을 청하 때 법을 설하는 스승에게 봉헌된다.
(주05) 다르마의 바퀴, 즉 법륜은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가르침을 펴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 장의 후반부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
(주06) 역자주: 원문에서는 부정적인 감정(negative emotion)이라고 티베트어를 번역했으나, 앨런 웰레스(Alan Wallace)는 불교 용어인 번뇌(kleśa)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만으로 번역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번뇌를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범위가 작은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역자의 경우 일반 불교 교양서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에서는 번뇌로 번역한다.
(주07) 역자주;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
(주08) 티베트불교의 종파런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가르침을 법제자에게 전하는 스승의 전통을 일컫는다. 종파는 어떤 특정한 문헌 혹은 일련의 가르침에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종파는 붓다의 가르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입보리행론》에 대한 달라이 라마가 전승받은 전통은 샨띠데바로부터 나와 빠툴 린뽀체로 이어지고, 다시 켄뽀 생가(1872~1927), 꾼누 린뽀체 그리고 달라이 라마 자신에게로 이어진다.
(주09) 역자주; 닝마빠 혹은 구파(舊派)로, 8세기에 산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도와 토속종교인 뵌교를 신통력으로 물리친 밀교승인 빠드마삼바바(Padmasaṃbhāva)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종파이다.
(주10) 역자주; 신파(新派)란 랑달마의 폐불 이후 11세기 후반, 12세기 초부터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온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종파를 일컫는다. 간략한 테베트불교의 역사에 대한 소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불교”, 불교평론, 2014 가을호.
(주11) 역자주; 원저에서 현교와 대승이라고 해쑈으나, 전후문맥상 현교와 밀교를 잘못 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현교와 밀교로 한다.
(주12) 잠양 켄체 왕뽀(1820~1892)는 지난 세기 티베트불교 중흥을 이끈 슨임이다. 이 위대한 스승은 리베, 또는 초종파 운동을 찬시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주13) 미냑꾼상 소남은 근 20년간 빠뚤 린뽀체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위대한 겔룩빠의 학승이다. 그의 《입보리행론》 주석서는 가장 상세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宗眞 寫經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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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원 불자님
입보리행론
샨티데바의 행복수업
김영로 옮김
2563.06.24.
해제
“나무 라트나 트라야야”
삼보에 예경 드리오며
저를 이 길로 이끌어주신
모든 부처님, 보살님과
선지식들께 절을 올립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저에게 축복의 빛을 내려주시고
제가 자는 동안에도 공부시켜 주시는
스승님들께 절을 올립니다.
무시(無始)이래
직접 ‧ 간접적으로
제가 지은 모든 악행을
참회합니다.
이제부턴 잠시라도 방심하지 않고
자나 깨나 부처님의 가르침만 생각하며
어머니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의 길을 가겠나이다.
중생들의 안내자이신
부처님, 보살님들이시여,
제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저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분들도 모두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누리게 이끌어 주소서.
제가 이 책을 펴내서 얻을 공덕을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깨달음을
위해 회향합니다.
“타야타 옴 무니 무니 마하무니예
샤카무니예 사바하!”
샨티데바(‘평화의 신’, 687-763)는 전해내려 오는 얘기에 의하면 서인도의 한 왕국에서 태자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꿈에 받은 문수보살님의 충고에 따라 왕국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숲 속에서 명상하던 중에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나무로 만든 상징적인 검을 하나 받고 여덟 가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날란다(Nalanda) 승려대한 재학 중이었는데, 밤에 비밀리에 금강승을 수행하여 놀라운 신통력까지 얻었습니다.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이 책을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여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곳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 후 대학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보살행을 하면서 금강승의 무상요가 탄트라(anu-ttarayoga tantra) 수행으로 마침내 한 생에 동안에 성불했다고 합니다.
“옴 바즈라사트바 훔”(108번)
아잘라(금강수 수행자, 속명 김영로)
지원(智源) 사경 합장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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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인덕 불자님
입보살 행론
석혜능 편역
2563. 6.24
해제문
샨티데바 보살은 서기 7세기 후반에 인도에서 태어났다. 날란다 대승원의 17논사 가운데 한분이고 특히 시문에 뛰어난 중관학자 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지고한 가르침이 아비달마불교시대를 거치며 정체되고 관념화되어 갈 때, 보리(깨달음)의 이상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실천적인 생명력으로 다시 꽃피운 것이 대승불교운동이다.
입보살행론은 전체10장(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치밀하고 정치적인 논리 속에 깊은철학적인 통찰력이 있는가 하면, 명쾌하고 심오한 비유 속에 더욱 간절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입보살행론이 중국송나라 때 천식재에 의해 보리행경 으로 한역되섰으나 한역 귄에서는 여러가지 인연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티벳으로 전해지자 티벳불교 각 종파의 학승들도 수많은 주석을 남겼는데 특히 위대한 티벳불교 중흥조 쫑카빠 대사가 그의 람림첸모에서 인용한 입보살행론의 게송은 많다.입보살행론을 승속이 함께 보리심 수행의 근본 보전으로 수지하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는 지금까지 여러차례 구전과 법문을 해 주셨다.
이 입보살행론 - 지복에 이르는 보살의 길 은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구전을 받고, 까르마빠 존자님이 주석하시는 규또밀교대학에서 존귀하신 스승님의 가피속에 비로소 람림 과 보리심 에 눈뜨고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심인덕 사경 합장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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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묵인 불자님
입보살행론광석 (上)
적천보살 게송 / 수다지 켄뽀 강해 / 지엄 편역
2563. 06. 24
* 추천사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왔다 가신지 어언 3천 년이 되어간다. 길고 긴 세월에 법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까닭은 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덕이라고 본다.
오직 중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왕위를 버려두고, 설산고행을 하고, 우주의 대 진리를 활연히 깨달으신 후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보여주신 그 법-(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
영산회상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임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법, 곧 가섭 존자가 이심전심(以心傳心)하시어 삽삼조사(卅三祖師)에 전전상승 하여온 그 법을 위하여 오셨으니 이 어찌 작은 일인가!
종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유한 일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이 신라시대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조계선맥을 이어온 이래 그 얼마나 많은 도인들이 이 국토를 빛내었던가!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이교도가 성하고 외도선(外道禪)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찬란한 역사에 비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원인은 중생을 위하는 원력이 모자란 탓일 것이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는 대승불교를 자처하면서도 실지 행(行)은 그렇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지엄 스님이 입보살행을 번역하였다. 지엄 스님은 일찍이 제방선원(諸方禪院)에서 실답게 참구하여 그 진솔함이 늘 대중에 귀감이 되더니 중국 오명불학원에 유학하여 그 실력을 탄탄하게 다져왔다.
그 후 해인사 강원(海印寺 講院)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크게 느낀 점은 요즈음 학인들이 중생들의 아품을 같이 하겠다는 원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가겠다는 큰 원력과 그에 따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데 양식이 되게 하고자 수년에 걸쳐 정성을 쏟은 역작이 입보살행이다.
이러한 진단에 대한 대안으로 “끝없는 윤회의 고통을 없애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갖가지 행복을 누리게 하고자 한다면 늘 위없는 보리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입보살행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이 수행의 길에 양식이 되고 중생제도의 길에 씨앗이 되어 자타가 모두 성불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엄 스님의 진솔한 노력에 고마움을 표하며 격려의 몇 자를 적는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전국선원수좌협회 회장
석종사 선원장 혜국 합장
* 감사의 글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말이 대변하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무량하다. 무진장한 불교의 가르침은 심심산중의 약초와 같이 곳곳에 비장되어 있다가 시절인연이 도래되면 그 모습을 드러내어 기사회생의 명약으로 사용된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계시는 지엄 스님께서 번역하신 ‘수다지 캄부’의 «입보살행론광석»은 앞으로 우리 불교를 더욱 튼실하게 만드는 약초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수다지 캄부’는 중국 사천성의 불교교육기관인 오명불학원에서 현재 교수로 활동하고 계신 티베트 스님으로, ‘수다지 캄부(Suó dájí Kánbú. 索達吉 堪布)’ 라는 호칭은 ‘소달계 캔뽀(Sodargye Khenpo)’라는 티베트어에 대한 중국음역어인데 ‘캔뽀(Khenpo, mKhan Po)’는 직함을 나타내는 말로 친교사(親敎師)라고 번역된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로 겔룩(dGe Lugs), 닝마(rNyihg Ma), 사꺄(Sa sKya), 까귀(bKarGyud)파의 넷을 든다. 수다지 캄부는 이 가운데 닝마파에 소속된 스님이다. 닝마파는 ‘고파(古派)’라고 번역되며 티베트 불교 초전기에 ‘삼예(bSam Yas)사원’을 건립[779년C.E.]한 빠드마삼바바를 그 종조로 모시는 가장 오래된 종파이다.
티베트에서는 불교를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로 구분한다.
수다지 캄부의 «입보살행론광석»은 적천(寂天, santideva : 685~763 C.E.)의 «입보살행론(Bodhisattvávatára)»에 대한 강의록으로 밀교수행에 들어가기 이전에 닦아야 하는 현교수행의 상세한 지침을 담고 있다.
현교란 문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으로 소승일반과 대승보살도의 가르침이며, 금강승(金剛乘 : Vajrayána)이라 불리는 밀교는 ‘비밀스럽게 전수된 가르침’으로 특별하게 고안된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수행을 통해서 현생에 부처의 법보화(法報化) 삼신(三身)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가르침이다.
티베트의 4대 종파 모두 밀교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지만 기초수행을 통해 심성(心性)과 인지(認知)가 어느 정도 정화된 수행자에게만 밀교수행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다시 말해 철저한 현교수행을 통해 ‘자비의 보리심’이 충분히 무르익고 ‘공성의 지혜’가 어느 정도 열린 사람만이 밀교수행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밀교수행에서는 ‘기법(技法)’에 치중하기 때문에 아직 탐진치의 삼독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밀교수행의 ‘기법’ 만을 익힐 경우 수행자 자신과 남 모두에게 해를 줄 수 있다. 마치 자연과학의 ‘기술(技術)’이 양날의 칼에 비유되듯이 ‥ ‥ 티베트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학설강요서(學說綱要書 : Grub mTha)’들이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론»에 대한 월칭의 주석서인 «쁘라산나빠다(Prasannapadá»를 티베트어로 번역했던 역경승 빠찹니마닥(Pa Tshab Nyi Ma Graga : 1055~1145 (?)C.E.)이 청변(靑辯) 계통의 중관학을 랑귀빠(Ran rgyud pa), 월칭 계통을 태귈와(Thal’ gyur ba)라고 명명하면서 중관학 전통에 대한 학파적 분류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분류법은 후대 티베트에서 제작된 학설강요서에 그대로 반영된다.
서구학자들은 랑귀빠를 쁘라상기까(Prasangika), 태귈와를 스와딴뜨리까(Svátantrika)라는 산스끄리트어로 복원하였는데,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전자를 자립논증파, 후자를 귀류논증파라고 번역한 반면, 중국에서는 전자를 자속파, 후자를 응성파라고 번역하였다
«입보살행론»의 저자 적천은 중관 귀류논증파, 즉 응성파에 소속된 논사로 분류되며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모두 중관 응성파의 조망을 현교수행의 정상에 위치시킨다
대승불교의 기초인 보리심과 보살행을 가르치는 «입보살행론»이 우리말로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입보살행론» 본문은 다람살라에서 오랫동안 수행정진하신 청전 스님에 의해 번역 소개된 바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 이라는 제목으로 달라이 라마 스님의 강의록도 출간된바 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되는 «입보리행론광석»은 앞의 두 책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도 풍부하지만 «능엄경»이나 «대지도론»과 같은 한역불전들이 인용되는 등 티베트와 중국의 불교전통을 넘나들며 «입보살행론»을 해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수다지 캄부의 «입보살행론광석»을 번역하신 지엄 스님은 우리 현대불교의 중흥기인 30여 년 전에 출가하시어 선방과 강원을 두루 섭렵하신 선승(禪僧)이며 학승(學僧)이시다.
학문과 수행의 원숙기에 재 발심하여 중국의 남경대학에서 불교학 연구에 매진하시던 중 티베트 닝마파의 수행도량인 동장의 ‘오명불학원’을 방문하시어 수다지 캄부로부터 «입보살행론» 강의를 들은 후, 그 중요성을 절감하시고 중문으로 출간된 강의록을 번역하여 이렇게 우리 불교계에 소개하신 것이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우리 불교의 신행전통에서 많이 보완되어야 할 점은 기초수행이라고 생각한다.
기초수행을 통해 ‘세속적 복락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종교심’, ‘꿈속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는 도덕성’,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출리심’, ‘모든 중생을 돕겠다는 대자비심’, ‘흔들리지 않는 삼매력’,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력’ 등이 우리 불자 모두의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자라날 때 우리 불교는 혁명적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입보살행론광석»은 이러한 기초수행을 위한 지침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관학을 공부하다가 보리도차제법(菩提道次第法)의 위대성에 감탄하여 티베트 불교에 대해 이제 겨우 관심을 갖지 시작한 필자로서, 학행(學行)을 겸하신 스님의 노작(勞作)에 어쭙잖은 글을 올리는 것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아무쪼록 본서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 불교의 수행 전통이 더욱 살찌기를 바랄 뿐이다.
불기 2559년 6월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金星喆 감사드림
* 머리말
«입보살행론»은 대승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빠뜨릴 수 없는 논전이다. 티베트(西藏) 불교의 각 파에 소속된 모든 정규 사원의 수행자들은 모두 이 논을 배우고 수행하는데, 이미 보편적인 관념을 형성하여 만약 진실한 수행인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입보살행론»을 정통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 논이 이와 같이 추앙을 받는 이유는 당연히 내용 때문이다.
논은 정밀하게 계통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살행을 배우는 대승보살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수학해야만 하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게송은 간명하고 유창하여 평범한 언어 속에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 아주 절실하게 수행자가 보통 범부에서 보살로 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소통시키고 없애야 하는 심리장애를 하나하나 대응하여 해결해주고 있다.
그래서 «입보살행론»은 7세기 중엽, 세간에 나온 이후 빠르게 인도와 카시미르지역에 전파되어 학습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며, 수백 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관련 주석서가 전래된다.
9세기 초, «입보살행론»이 티베트에 전해진 이후, 대대로 고승 대덕들이 폭넓게 전파하였는데 티베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석서는 20여 편이다. 원전의 게송은 티베트 지역에서 보전(寶典)으로 수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된다. «입보살행론»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라면 반드시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논서이다.
이처럼 인도와 티베트 불제자들의 중시를 받는 불학의 명저가 중국불교 역사에서는 천여 년 동안 줄곧 중시되지 못했다. 비록 송대의 한역본이 있으나, 지금까지 강의한 승려가 없으며, 주석을 붙인 사람도 없었다.
본인은 그 원인을 함부로 서술하지 않고, 잠시 보류해두어 천하의 승려와 지식인들이 함께 깊이 연구하는데 미룰 것이다.
본인이 이 논을 풀이한 것은 법왕 여의보 진메이펑줘께서 1998년 결정한 4년 설법 계획의 인연에 기초를 두어 이루어진 것이다. 1998년, 법왕 여의보는 홍신(虹身) 성취1)의 성지 라롱의 조용한 곳에서, 사부대중 제자들을 위하여 «백업경»을 강의하였다. 그때 제자들이 인과에 대한 바른 견해를 일으키도록 인도하여, 제자들이 인격 · 계율 측면에 견고하게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1999년부터 시작하여 법왕 여의보는 8천여 명의 제자들에게 «입보살행론»의 대소(大疏)를 강의하여 대중 제자들이 보리심을 내어 대승 보살도의 이해와 실천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였다.
이때, 학원에는 늘 상주하며 법을 구하는 688명의 한족(漢族) 사부대중이 있었고, 잠시 머무는 사람도 100여 명이 있었다.
동시에 383명의 대중은 «입보살행론»외우기를 발원하였다. 그런데 한족 제자들은 중국어로 된 자세한 주석서(廣疏)가 없어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나에게 소(疏)를 번역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최초의 계획에 따라 나는 인도와 티베트 두 곳의 중요한 여러 가지 주소(注疏)를 열람하여 이 논을 세밀하게 풀이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로 중국의 한 학자가 “본래 나는 오로지 지식을 배우고 싶었고, 속세와 접촉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뿐만 아니라,
주석을 집필하는 기간에 나는 또 «대원만전행문 大圓滿前行文»을 번역하고, «불교과학론 佛敎科學論»을 짓는 등 많은 업무를 보느라 쉴 겨를이 없었다. 이와 같이 바쁜 가운데 원래의 계획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전에
«입보살행론»에 대하여 여러 차례 스승에게서 배운 적이 있고, 또 여러 종류의 대소(大疏)를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이전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 이 논의 중요한 뜻을 해설하였다. 이 «입보살행론광석»에 대하여 본인은 비교적 만족한다. 왜냐하면 광석(廣釋)에서는 논의 각 요점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 뒷사람들이 이 논을 연구하는데 비교적 전면적인 참고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나는 불제자들이 이 «입보살행론광석»을 의지하여 듣고 탐구하는 수행을 중시하길 바란다. 또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해탈을 구하는 수행자들은 반드시 계율을 지킴으로써 수행방법을 삼음이 첩경임을 자세하게 알아야만 한다.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起行), 의심과 삿된 견해를 깨끗이 없애고, 다시 견고하고 정묘(穩固捷妙)한 보리도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탁한 세상의 대중들은 많은 장애의 인연 속에서 성공의 희망이 상당히 멀 것이다. 많은 수행자들 또한 불교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고, 증득하는 보리도 순서에 있어 우선 교학적으로 설명하여 체계를 세우는 것을 더욱 중시해야만 할 것이다. 현재 불교를 책임지는 승가는 경 · 율 · 론 삼장의 강습을 더욱 중시하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듣고서 생각을 일으켜 수행하는 것은 사실 삼장 경론을 여읠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방편문에 국한된 폐쇄적인 수행법을 내세우는 것은 안 된다. 그리하면 광대무변한 교법을 강설하여 널리 펴고 전수해줄 사람이 없을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입보살행론»은 서방 각국에서 20세기 초부터 여러 문자의 번역본이 있었는데, 중국어본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송대 천식재(天息災)의 «보리행경 菩提行經», 융련(隆蓮) 법사가 1950년대 번역한 «입보살행광석 入菩薩行廣釋», 여석(如石) 법사가 번역한 번역본이 있을 뿐이다.
이 논의 원문 게송은 여석 법사가 세 차례 수정한 번역본을 선택하였다. 이 번역본은 원문의 뜻에 맞고, 유창하여 이해하기 쉽고 문구가 아름답다. 얻기 어려운 훌륭한 작품으로 여석 법사가 그 번역문을 세 차례 수정한 엄격한 태도는 충분한 미덕이 된다.
의정(義淨) 법사는 일찍이 “후현들이 만약 번역에 신중하게 임한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경전 대하기를 쉽게 여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후학들은 앞선 사람의 고충을 알아 그 은덕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 광석은 이미 상 · 중책이 출간되었고, 내 자신 본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할 뜻이 없었지만 하책이 인쇄에 들어가면서 제자들이 여러 차례 서(序) 써 주기를 청하여 물릴 수 없었다. 편하게 몇 마디 말로 그 청을 헛되지 않게 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기를 바란다!
때는 마침 석가모니 부처님 탄신일(降天)을 맞아, 불학원에 있는 티베트 족 거사림(居士林)의 왕생극락 대법회를 거행하는 은백색 장막 안에서 쓴다.
2000년 11월 18일
수다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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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높은 단계의 수행 중에 청정한 광명의 식을 성취하면 업식의 몸이 무지개빛의 광명신으로 변하는 것을 말함.
* 일러두기 *
1. 인명과 지역명은 티벳어로 익숙한 것은 티벳어로 하고 그 외는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적는다.
2. 인명과 지역명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각주를 생략한다.
3. ()는 단어의 부가적 설명 혹은 중국어 발음상의 원어를 표기한다.
4. «입보살행론» 원작자의 산스크리트어 음역은 산티데바이나 이곳에선 중국어 의역인 적천 보살을 채용한다.
5. 논전 명은 «입보리행론» 으로도 번역되기도 하나, 여기서는 수다지 라마의 «입보살행론»을 따른다.
6. «입보살행론»은 본문 중에 «입행론»으로 표기한다
◈ 해제
1) 논의 이름 설명 (1)
보리심을 주로 설하는 «입보살행론», 이 논은 모든 제불보살들이 같이 행하는 도(道)이며(同行道), 모든 안락을 얻는 원인이며 모든 중생이 선취(善趣)에 태어나는 근원이다. 대승 불법을 닦고 배우는 불자가 되어 당신이 현종을 닦는가, 혹은 밀종을 닦는가를 논할 것 없이 이 논전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 논의 내용을 통달하지 않았다면 대승의 기초인 보리심을 일으킬 방법이 없고, 만약 이 논에 통달할 수 있다면 이미 8만4천 법문의 심요를 모두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불법은 듣기 어렵고 기회와 인연은 순식간에 바로 사라져간다. 수행인들이 성실하게 듣고 익힉를 희망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하나같이 듣고 익힐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얻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들을 때 정미하지 못하고 듣고 나서도 가져 닦지 않으면 오직 하나의 지식을 얻었을 뿐 이외에 많은 의의가
없다.
수행인들이 배워 원만하게 닦고 잘 계승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시작할 때 중시하지 않아 끝날 때 스스로 수확이 없다고 느낀다면 후회해도 때가 늦을 것이다. «입행론»은 인도 적천보살이 지은 것인데, 현재 우리가 참고하는 한문본은 대만의 여석(如石) 법사가 티베트본에 의거하여 번역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전에 이 논을 광범위하게 강의한 사람이 없는 것 같으며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 논에 여러 가지로 다르게 전수해 주는 방식이 있다. 현재 우리는 화지 린포체의 비결, 즉 «입행론»의 과목의 분석표인 «명경의 明鏡義»를 가지고 강해한다.
이 과목의 분석표는 가장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법왕 여의보는 이와 같이 평가한 적이 있다. 티베트와 인도에서는 분명 «명경의»보다 더 수승한 «입행론» 과목의 분석표를 찾을 방법이 없다. 다음에서는 정식으로 «명경의»를 가지고 서술하겠다.
이 논의 논명은 범어로 ‘보리살타 짜야 아파타나’가 된다. 범어의 ‘보리(菩提)’는 청정한 깨달음(淨覺)의 의미이고, ‘살타(薩埵)’는 대승불자를 가리키는 용식(勇識)으로 해석되고, ‘짜야(渣硏)’는 행위라는 뜻이고, ‘아파타나(阿巴打那)’는 들어가다(趨入)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체 명칭을 직역하면, 청정한 깨달음에 들어가는 대승불자의 행위(趨入淨覺勇識行爲)이다. 다시 글자를 따라 해석해 보면, 정각(淨覺)은 «지망경 智網經»에 이르길, “오염을 멀리하는 것을 깨끗함이라 하고, 지혜를 늘리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불교 내의 성문 · 연각 · 보살 · 각의 성자들은 모두 다른 수준의 깨달음을 갖고 있다.
용식(勇識)은 대승불자에 대한 특별한 호칭으로 대승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곤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아 마음(心識)이 매우 용맹하게 일체를 감당한다.
«현관장엄론»에서 “보살은 공(空)의 성질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중생이 윤회에 오래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菩薩不畏空性, 不畏衆多經久)”라고 말하였다.
그 뜻은 보살은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매우 깊은 공성법의(空性法義)를 깨닫기를 구하며, 넓고 깊은 윤회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는 중생들의 고통을 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 3가지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명칭으로 삼아서 용식(勇識)이라고 한다.
행위란 육바리밀을 행하는 것(行持)으로 무구광 존자가 말씀하시기를 “대승 보살의 수행과 배움은 육바리밀(六度)을 위주로 한다.”
추입(趨入)이란 글자의 뜻은 어떤 방면을 향하여 발전해나가 어떤 궤도나 방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또한 행지(行持)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불교의 전통 풍격에 따르면 보살행으로 들어간다(入菩薩行)고 번역된다. 어떤 번역본은 뒤에 ‘논(論)’ 자를 넣기도 하는데 범어 원본과 티베트어 번역본에는 ‘논(論)’ 자가 분명하지 않아 의미에 따라 이해하는 것도 괜찮다.
논은 정론과 사론(邪論)으로 나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있다. 이 100권의 거대한 저서 «유가사지론»에 대하여, 티베트와 중국의 불교 학자들은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이 논의 작자에 대하여 두 곳의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티베트의 사료 기록에 따르면, 이 논의 작자는 무착 보살로 당시 무착 보살은 도솔천에 나아가 직접 미륵보살로부터 자씨오론(慈氏五論) 등의 법을 전수받았다. 나중에 인도의 바나빠라 삼림에서 무착 보살이 이것을 문자로 기록하였고, 또 세친 논사를 대승으로 이끌기 위하여 «유가사지론»을 저술하였다.
이 대승 불법의 양대 산맥 중의 한 종파의 발원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 땅을 ‘파야스’라 명명하였다.
한문 «유가사지론»의 저자는 미륵보살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이 누구에게서 근원한 것이고, 증명할 어떤 사실이 있는가? 수행인들이 한번 이를 고증해보아야만 하는데 학문을 다루는 태도는 엄격하고 신중하며 진실한 증거 없이 적당한 것을 정설로 해서는 안 된다.
«유가사지론»의 관점에 따르면 정론은 셋으로 나누는데 구의론(具義論)· 이고론(離苦論)· 근수론(勵修論)이며 사론(邪論)에는 6가지가 있다.
무의론(無義論)은 많은 고금의 소설 · 잡지 같은 것으로 진실한 가치와 의의가 없는 것들이 모두 이 종류에 속하고, 사의론(邪義論)은 상견(常見) · 단견(斷見) · 인과의 비방을 선양한 각종 사마(邪魔) 외도 논전으로 이러한 것들은 현재 매우 많다.
간악론(奸惡論)은 전쟁 · 투쟁 등을 선양한 온갖 종류로 중생들에게 이익이 없는 저작들이고, 이비론(離悲論)은 대비심과 거리가 아주 먼 논전으로 예를 들면, 어떻게 중생을 살해할 것인가를 전문적으로 펴고 소개한 저서이다. 어떻게 돼지를 죽이고, 낚시하고, 뱀과 벌레를 잡는가와 같은 종류의 책들이며 정확히 자비심이 없는 사악한 저서이다.
문의론(聞義論)에는 진실한 내용이 없고, 단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화려한 어휘들을 모아 문자 유희를 할 뿐이다. 마치 현재 세간의 어떤 시가와 산문들이 이와 같은 것이다.
변론론(辯論論)이란 세간에 각종 진리와 무관한 것으로, 조금도 의미 없는 문제에 대하여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지껄인 작품들이다. 예를 들면, 홍루몽 학회의 온갖 쟁론 등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은 모두 멀리해야만 하는 사론이다.
«입행론»에서 서술하는 것은 대승불법의 정수로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발보리심 · 수보리행(修菩提行)을 광범위하게 서술한 진실한 수행법이다. 작자 역시 문수 본존의 섭수가피를 얻어 직접 제법 실상을 증득한 대승보살이다. 이치상 당연히 정론이며 뿐만 아니라, 불교사에 있어 당대에 견줄 것이 없는 위대한 저서(巨典)이다.이 점은 필자가 보기에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고승 대덕은 저서를 해설하건 논전을 해설하건 간에 경론의 명칭을 매우 중요시한다. 뿐만 아니라, 경론 앞면에는 모두 범어 명칭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전승(傳承)을 따라 경론 명칭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해설을 하였다.
경론의 명칭 명명에는 일정한 방식이 있는데, «해심밀경 解深密經»에는 4가지로 나열되어 있다. 지명에서 취한 것 · 인명에서 취한 것 · 비유에서 취한 것 · 의미에서 취한 것으로 지명에서 취한 것에는 «능가경 楞伽經» 같은 것이 있는데, 부처님이 법을 강의한 소재지 능가산에서 명칭을 취한 것이다.
인명에서 취한 것으로 «미륵청문경 彌勒請問經» · 중국의 «육조단경 六朝壇經» · «요범사훈 了凡四訓» 등이 있는데, 경의 질문한 사람과 논의 작자로써 명칭을 취하였다. 비유로써 취한 것으로 «도간경 稻稈經» · «금강경» 같은 것이 있는데, 경의 의미를 알게 할 수 있는 비유로써 명칭을 취하였다.
의미로써 취한 것에는 «십지경 十地經» · «보리도차제광론 菩提道次第廣論» 등이 있는데, 그 서술한 내용으로 명칭을 취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4가지 명명 방식 외에 또 숫자를 따른 것으로 «삼십사본생전 三十四本生傳» 같은 것이 있고, 시간을 따른 것으로 «현겁경 賢劫經»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많은 명명 방식이 늘 보이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 불교에서의 논사는 논을 지을 때 대부분 논의 의미에 따라 이름을 짓는데 이러한 방식은 특히 뛰어나다. 아티샤 존자가 티베트에 들어갔을 때 특별히 이러한 명명 방식을 숭상하고 찬탄하였다. 경론의 명명에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경에서 “만약 명칭을 붙이지 않으면 세간 사람은 진리에 우매해지기 때문에 부처님은 방편을 교묘하게 하여 제법에 다른 여러 명칭을 붙였다.”라고 말하였다.
상근기(利根者)의 사람은 겨우 논의 이름만 알고서도 바로 전론의 의미를 통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맥팽 린포체는 경 · 율 · 논을 열람할 때 늘 목록만을 보았을 뿐인데 바로 많은 경론의 뜻을 통달했다.
중근기의 사람 역시 명칭에 따라 대략적인 의미(義理)를 알 수 있다. 하근기의 사람은 명칭에 따라 논전을 찾기 쉬울 수 있다. 현재 논전 앞에 범어 명칭의 필요성을 해석하여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입행론»과 같이 티베트 경론 앞에 모두 범어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는 4가지 필요가 있다. 전해온 내력이 청정하고 스스로 가피를 얻고 선근을 심고 은덕을 기억하는 것을 나타낸다.
첫째, 논전의 전해온 내력이 청정함을 나타낸다. 범어는 인도의 주요 언어중 하나로 고대 인도에서 논을 짓는 것은 매우 엄격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당시 만들어낸 논전은 유통되기 전에 반드시 수백 논사의 검토를 거쳐야만 했다.
곧 그 논의 작자는 논에서 세운 명제와 대의로 다른 논사들과 변론해야만 한다.
만약 승리할 수 있으면 그 논저는 바로 승인을 얻을 수 있었고, 작자도 아주 큰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명제와 대의를 세우는 데 실패한다면 작품은 개꼬리에 묶어 불 붙여 태워버렸다. 만약 저자의 내용이 사문 외도에 속하여 중생에게 해를 끼친다면 작자 본인은 양손이 잘릴 것이며, 그리고 종신토록 지극한 고통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엄격한 제도 때문에 당시 출간된 범어 논전의 관점은 순수하고 매우 깊고 예리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범어로 논의 의미가 순정함을 나타내었다. 이후 우리가 논을 저술하는 것도 고인에게 배워야만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검토하고 높은 자리에 놓고 아주 잘 공양하고 예를 갖추어 읽어야만 한다. 사악한 작품에 대해서도 개꼬리에 묶어 불 붙여 태워버려야만 한다.
둘째, 스스로 가피를 얻는다.
범어는 삼세제불이 성불경계를 나타낼 때, 법을 전하면서 사용한 언어로 가피력이 매우 크다. 논전의 첫머리에는 범어를 써서 제불의 가피를 얻을 수 있다.
셋째, 보는 사람이 선근을 심는다. 논전 첫머리의 범어 명칭은 보고 듣는 사람들이 선근을 심을 수 있게 한다.
넷째, 은덕을 기억한다.
논 첫머리의 범어를 보면, 우리에게 이 논전들을 저작하고 번역하고 널리 강의한 논사 · 대논사 · 대번역사들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복덕은 천박하여 여래를 친견하고 여래의 법음을 직접 들을 수 없고, 오직 대대로 내려온 고승 대덕에 의지하여 불법의 청정 원류가 아직 중단되지 않아 우리의 메마른 마음 밭으로 콸콸 흘러 들어왔다. 이 선현들의 우리에 대한 은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전 앞에 범어로 쓴 명칭을 표기한다.
2) 원저자의 전기
(적천보살전 寂天菩薩傳)
중국에 전해진 불교 전적 중에서 적천 보살의 사적이 알려진 것은 매우 적다. 송조 옹희 20년(기원985년) 천식재(天息災)가 일찍이 «입보살행론»을 «보리행경 菩提行經»으로 번역하였으니 법칭(法稱) 보살이 지은 «보리행경»으로 제목을 삼은 것이다.
문자가 낯설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시한 사람이 없는 듯하다.
요 몇 년, 티베트 불교의 영향 때문에 이 논은 이미 융련(隆蓮) 법사 · 여석(如石) 법사의 2종 한역본이 중국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작자인 적천 보살의 비교적 상세한 사적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여전히 거의 얼마 되지 않는다.
적천 보살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7가지 희유한 전기가 있다. 예를 들면, 송(頌)에서 말하길, “본존께서 기쁨으로 탄생하시어 나란타사(那爛陀寺)에 머무시며, 화현함이 원만하여 논쟁을 깨뜨렸네. 기이한 사적(事迹)과 걸행(乞行)으로 다니며 법왕을 위하여 여러 외도를 항복받으셨네!”라 하였다.
적천 보살은 고인도 남방 현강국(賢疆國)의 왕태자로, 원래 이름은 적개(寂鎧)이고, 부왕의 이름은 선개(善鎧)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믿어 삼보를 공경하였으며, 자신의 권속과 다른 중생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늘 그들에게 재물 등을 보시하였다.
태자는 어린 시절 학식이 출중하여 세간의 각종 학문 · 기예에 통달하였다.
유가(瑜伽) 스승 ‘고소노(古蘇 嚕)’ 앞에서 «문수예리지성취법 文殊銳利智成就法»을 구하여 배우고서, 정진 수행을 통하여 본존을 친견하였다.2) 후에 선개 국왕이 세상을 떠한 후, 대신들은 적개 태자를 옹립하여 자리에 오르도록 준비하였다.
정권을 수여하는 관정의식을3) 거행하기 하루 전날 밤, 태자는 꿈에서 문수보살을 보았다. 꿈에서 문수보살은 적개 태자가 오르려는 왕좌에 앉아서 그에게,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이여, 이것은 나의 보좌이고 나는 너의 스승인데, 네가 나와 한 자리에 같이 앉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또 태자가 꿈에서 대비도모존(大悲度母尊)4)을 보았는데, 뜨거운 물로 그에게 관정을 하였다. 태자는 도모에게 왜 뜨거운 물로 자기에게 관정하였는지 물었고 도모는 “왕권을 수여하는 관정의 물과 지옥의 쇳물은 차이가 없다. 내가 뜨거운 물로 너에게 관정한 함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적개 태자는 깨어난 후, 이것이 부처님의 그에 대한 수기와 가피라는 것을 깨달았다.5)
이 때문에 세속 8법(이익,쇠퇴, 훼방,명예,칭찬,비방,고통,기쁨)에 대하여 맹렬한 출리심이 일어나 일체를 버리고 왕궁을 떠났다. 적개 태자는 혼자 황야를 걸었는데 가는 길 내내 어떠한 음식도 얻을 수 없었다.
오직 끊임 없이 성존에게 기도할 뿐이었다. 21일이 되는 날, 삼림에 들어가 있었는데 기갈과 피로에 지친 태자는 한 줌 탁한 물을 찾았다. 그가 막 물을 먹으려고 준비하였는데 용모가 장엄한 한 여자가 나타나 그에게 탁수를 먹어서는 안 되며 깨끗한 물을 마셔야만 한다고 일러주고 바로 그를 깨끗한 감로수가 흐르는 샘터로 인도하였다.
샘물 옆에는 유가 스승이 있었는데, 유가 스승은 사실 문수보살의 화신이고 여자는 도모의 화현이었다. 태자는 감로수를 마셨고, 또 유가 스승에게서 진실한 불법 도리를 구하여 체득한 후 매우 깊은 지혜의 경계가 일어났다.
(1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이어서, 적개는 동인도를 거쳐 오사(五獅) 국왕의 국토에 왔다. 당시 그의 무예가 높고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대신이 그를 오사 왕에게 추천하였고, 그는 이로 인하여 오사 왕의 대신이 되었고 무예와 진리 등을 세간에 널리 전파하였다.
일정기간 동안 적개는 국왕을 위하여 호위를 담당하였는데, 어질고 능력 있음을 질투하는 대신들이 그가 문수 본존 수행법을 닦는 목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국왕에게 가서 모함하여, “신임 대신은 교활한 사기꾼이다. 만약 대왕께서 믿지 못한다면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한 번 보시기를 청하옵니다. 근본적으로 국왕을 호위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아뢰었다.
오사 왕은 반신반의하면서 적개가 보검을 내어 보이도록 요구하였다. 적개는 국왕에게, “국왕이시여! 이렇게 하면 당신이 상해를 입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보려는 마음이 이미 깊어서 억지로 보검을 내보이게 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국왕이 오른쪽 눈을 감도록 요구하고 칼집에서 목검을 뽑아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목검의 광선이 목검을 주시하던 국왕의 왼쪽 눈을 해쳐 눈동자가 튕겨 나와 땅에 떨어졌다. 통증과 회한이 교차하는 국왕은 여기에 이르자, 적개가 대 성취자라는 것을 알고 대신들과 함께 적개 대사 앞에서 참회하고 귀의하였다. 대사는 오사 왕에게 가피를 주어 그 왼쪽 눈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오사 왕은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대사의 가르침을 따랐다. 왕은 관할지에 불교 법당(法幢)을 높이 세우고 정법을 널리 펴서 적개 대사는 오사 왕의 나라에서 보낸 몇 년 동안 많은 설법을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대사는 오사 왕을 교화시킨 후, 중인도 나란타사로 옮겨갔다.
(2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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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의 대덕 지작혜(智作慧) 논사, 아티샤(阿底崍) 존자(尊者) 등은 모두 적천 보살이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인정하였다. 아티샤 존자는 «보리도등론 菩提道燈論» 에서 말했다. “적천 보살은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가피를 얻고 진리(眞諦)를 깨달았다.”
3) 고승이 불법을 제자에게 전수해 주거나 국왕위를 물려받을 때 행하는 의식.
4)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의 화현보살이며, 녹(綠)도모 홍(紅)도모 등이 있음.
5) 불보살이 해탈, 성불할 것을 증명하고 은총을 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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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개가 나란타사로 온 뒤, 당시 절 내 500 빤디따(班智達)의6) 수장인 승천(勝天)이 직접 교수사가 됨에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니 법명이 적천(寂天)이었다. 당시 대사는 내증(內證) 공덕을 깊이 감추고, 암암리에 문수 본존 앞에서 교법을 듣고 선관(禪觀)을 엄밀하게 닦았다.
동시에 대승 불자의 수학 차제(次第) 중 요긴한 것을 뽑아내어 100여 경율론(經律論)의 정의(精義)를 모아 «일체학처집요 一切學處集要» · «일체경집요 一切經集要»를 편저했으나, 외관상 음식 · 수면 · 보행 외에 다른 일들은 아예 듣지도 묻지도 않았기 때문에 겉모습을 가지고 그를 헤아리는 사람들에 의해 폄하되어 “삼상자(三想者)”라고 불리었다.
당시 나란타사 스님들은 적천이 어떠한 수행 정법의 공덕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다시는 본사에 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그를 몰아낼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후에 절에서 경전 암송 대회를 거행하여 비구들에게 배운 경전을 암송할 것을 요구히였다.
일련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빌어서 적천에게 수모를 주어 그가 스스로 절을 떠나게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바로 승천 논사에게 적천이 암송하도록 안배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적천보살은 허락하였다. 그가 암송하는 그날이 되자 사람들은 경전 암송회장에 일부러 높은 좌석을 쌓고 자리에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회의장은 그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과 그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적천보살은 결코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유자재로 높은 좌석에 올라 물었다. “이미 들은 적이 있는 논전을 외울까요, 아니면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할까요?” 웃음거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모두가 들은 적이 없는 것을 암송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상서로운 모습이 분분이 드러나자 많은 사람들은 무수한 성존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적천보살은 즉시 그 스스로 체득한 지혜경(智慧境)에서 흘러나오는 «입행론»을 독송하였다. 제9품 14송, “만약 실법(實法)과 무실법이 다 마음 앞에 머물지 않는다면, 저때 다른 상이 없으니, 인연 없음이 최적멸(最寂滅)이다.”에 이르렀을 때, 신체가 허공에 떠올라 점점 높이 올라가 끈내 몸의 형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허공에서 전해오는 낭랑한 경전 낭송 소리만이 계속되더니 «입행론» 전체를 다 암송하고서야 그치었다. 당시 다라니 삼매를 얻은 논사들은 각자 송문(頌文)을 기록하였고, 카시미르(克什米爾)의 논사들은 1,000여 송을 기록하였으며, 동인도의 논사들이 기록한 것이 700여 송이 있었고, 중인도의 논사들은 1,000여 송을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몇 게송인지 몰라 의심을 일으켜 다투었다. 나중에 적천보살이 남인도의 길상 공덕 탑에 거주한다는 것을 듣고, 2명의 논사를 파견하여 그를 절로 다시 모셔 오려고 하였으나 완고하게 거절하였다.
두 논사는 할 수 없이 그에게 «입행론»의 정확한 송문을 보여주기를 청하였고 적천보살은 그들에게 일천송 «입행론»이 정확하다고 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가 일찍이 머물렀던 방안에 «학집론» · «경집론» · «입행론» 3부론의 경들이 보관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 이 논의 수행법을 전승해 주었다. 이때부터 «입행론»이 인도에서 광범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3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적천보살이 길상 공덕 탑에 있을 때, 그곳의 울창한 삼림 안에 500명의 비구가 살고 있었다. 그 역시 숲 속에 초가집을 지어 머물 곳을 만들었다. 당시 숲 속에는 많은 야수들이 있었는데 숲 속의 수행인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비구들은 늘 야수 무리가 적천보살의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끝내 어떤 세심한 사람들은 적천보살이 사는 초가집에 들어간 야수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울타리 밖에서 몰래 살피다가 적천보살이 울타리 안에서 짐승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비구들은 적천에게 살생죄가 있다고 단정하고 종을 쳐서 숲 속의 수행자들을 집합시켰다. 그들은 대중들 앞에서 적천의 ‘파계악행’을 선포하고, 또 그를 축출하려고 준비하였다. 대중들이 집합하여 회의할 때, 실종된 야수들이 하나씩 적천의 초가 울타리 안에서 나왔다.
당연히 야수들과 서로 오랫동안 보아온 비구들은 그들에 대해 매우 잘 알아 이 야수들 하나하나가 이전보다 더 활발하고 건강해졌음을 발견하였다. 놀랍고 기이한 나머지 대중스님들은 적천보살에 대하여 매두 커다란 신심이 일어났다.
적천보살은 사람들이 그의 신분을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스님들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숲 속을 떠나 길상 공덕 탑의 남쪽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는 거지 복장을 하고 남이 버리고 남긴 음식을 양식으로 하면서 수행하였다.
그곳의 비사리 왕에게 여자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한번은 목욕물을 버릴 때 적천 보살의 몸에 뿌렸다. 그 물은 순간 뜨거운 쇠를 만난 것처럼 끓어 튀어 올랐다. 여자 하인이 깜짝 놀랐을 때 그는 이미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향가(香迦)라 불리는 외도가 국왕에게, “이틀 후, 나는 허공에 대 자재천 만다라(壇城)7)를 그릴 것이다
만약 불교도가 이 만다라를 무너뜨릴 수 없으면 나는 불교경전 · 불탑 등을 불사르고 불교도 역시 반드시 나의 교문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라고 경고하였다.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은 스님들을 불러 모아 외도의 도전을 알렸다. 그러나 스님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외도의 만다라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국왕이 매우 초조해하고 있을 때 여자 하인이 자신이 만났던 이상한 일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국왕은 급하게 여자 하인에게 그 이상한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여자 하인은 곳곳으로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나무 아래에서 적천보살을 보았으며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그가 외도를 항복시켜줄 것을 부탁하자, 적천보살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아울러 여자 하인에게 물이 든 큰 병과, 두 장의 천과 성냥을 제때에 준비하라고 분부하였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외도 스승은 채색 흙으로 허공에 대자재천 만다라를 그렸으며 만다라의 동문을 그리자마자, 적천보살이 바람 속으로 들어가 풍유가(風瑜伽) 선정에 들어 신묘한 변화를 드러내자, 갑자기 사나운 비바람이 일어났고 찰나에 외도가 그린 만다라는 흔적도 없이 없어져 버렸다.
놀라서 부들부들 떨던 외도들은 폭풍에 말려 올라가 마치 낙엽처럼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이때, 천지는 암흑이 되었는데 적천보살이 양미간에서 광명을 쏘아내어 긕왕, 왕비 등의 사람을 밝게 비추었다. 바람 불고 비에 젖는 동안 국왕 등의 옷이 다 벗겨지고 온 몸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여자 하인은 먼저 준비한 병속의 물을 이용하여 그들을 깨끗이 씻어주고, 두 장의 천으로 국왕과 왕비를 걸치게 하였고 성냥을 이용하여 불을 피워 국와 등의 사람들이 곧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여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다.
나중에 국왕은 외도 사당을 부수었고 모든 외도들 역시 불문에 귀의하였다. 적천보살이 외도를 항복시킨 그곳은 지금까지 줄곧 ‘외도실패지’라 불린다.
(4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적천보살은 나중에 인도 동쪽 만가달(曼伽達) 지방에 와서 그곳의 많은 외도들과 대변론을 하였다. 적천보살은 신묘한 변화를 드러내어 외도를 무너뜨렸고, 쟁론의 종식을 가져왔다.
(5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만가달 서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삿된 견해를 가진 500명의 외도 무리가 있었다.
당시 그곳은 기아와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토의를 하였다.
“누구든 대중들의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우두머리로 삼을 것이다.”
적천보살은 이 사실을 알고 시내로 가서 한 발우의 밥을 얻고, 신통으로 이 밥이 매끼마다 계속 변해 나오도록 가피하여 외도 무리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얻도록 하여 기아의 고통을 해결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 뒤, 적천보살은 그들에게 법을 전하여 그들이 삿된 견해를 버리고 불문에 귀의하여 후에는 좋은 수행인이 되게 하였다.
(6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어느 한 시기, 인도 어떤 지방에서 아주 큰 자연 재해를 만나 한 톨의 식량도 거두지 못하였을 때, 그곳의 일천여 거지들은 먹을 것을 얻을 방법이 없어서 모두 손 놓고 죽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겨우 숨만 쉬는 거지들이 누워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적천보살은 신묘한 변화를 부려 그들에게 풍부한 먹을 것을 얻게 하였다.
또 그들을 위하여 인과 · 윤회 · 5계 · 10선 등의 불법을 널리 설하여 불법으로 인도하였다.
(7번째 희유한 전기가 끝나다)
위에서는 간단하게 적천보살의 7가지 희유한 이야기를 진술하였다. 우리는 작자가 대 성취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가 지은 논전에 대해서도 배우기를 원한다. 적천보살의 전기는 «포되불교사 布頓佛敎史» · «인도불교사 印度佛敎史» 및 «입행론소»의 강의에 모두 있는데, 자세히 전한 것과 간단히 소개한 것이 일정치 않다.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볼 때,
이 보살은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고, 사방을 주유하면서 보낸 일생은 신기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위에서 말한 것은 단지 보살이 세상일을 따라 화현한(應化) 일 중 만분의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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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론을 연구하는 대법사.
7) 진리를 묘사하여 조각하거나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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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법을 강의하고 듣는 법도
(1) 불법을 강술하는 방식
불법을 강술하는 데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불타의 전달 방식이다. 즉, 세 가지 신묘한 변화로써 법을 전한다.
첫째, 불타의 몸으로 신묘한 경계와 신묘한 변화를 쓴다.
불타는 법을 전할 때, 양 눈썹 사이의 흰 털에서 빛을 내어 삼천세계를 두루 비추어 불법의 뜻을 감응 받지 못한 중생들이 감응을 얻게 하였고 불타의 32상의 하나인 장광설(長廣舌)의 모습을 내어 대천세계에 두루 미치어 이미 감응 받은 중생들이 환희와 신심을 일으키도록 한다.
둘째, 수기하여 말씀하는 것이 신묘한 변화를 이룬다. 부처님은 60가지 묘음으로 제법을 넓고 간략하게 펴서 육도윤회의 각 취(聚) 중생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이 신묘한 변화를 이룬다.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중생이 근기가 다름으로 인한 중생의 취향을 통찰하여 다르게 변화된 근기에 대응하여 각기 다른 법문을 편다.
두 번째는 아라한이 전법하고 강의하는 방식 즉, 삼청정(三淸淨) 의지하여 전법하는 것이다.
첫째, 아라한은 법을 전할 때 먼저 소리 인연의 지혜로써 중생이 법기인지 아닌지를 관찰하여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상응하는 법문을 편다. 이것이 바로 법기 청정이다.
둘째, 아라한은 모든 번뇌 장애를 멀리하여 수승한 묘음으로 법문을 펴서 제자들이 환희와 믿음 · 이해(信解)를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어청정(語淸淨)이다.
셋째, 아라한이 강의하고 해설한 법은 부처님의 친히 설함(金口)으로 편 것이거나, 혹은 스스로 직접 증득한 것으로 정확하여 치우치거나 틀린 것이 없다. 이것이 법의청정(法義淸淨)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 아라한이 기왕에 이치대로 불법을 강술할 수 있다면 왜 부처님의 3가지 신묘한 변화에 의지하여 전법 강설하지 않는가를 의심한다. 이 점을 수행인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라한과 부처님은 업을 끊고 법을 증하는(斷證) 공덕이 있어 아주 잘 차별이 있다. 아라한은 아는 장애(所知障) (이 논은 지혜품에서 두루 설명함)를 끊어 없애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4가지 부지인(不知因)을 가지고 있다.
(時不知因 · 境不知因 · 細不知因 · 多不知因)
시부지인(時不知因)은 아라한의 지혜 신통에 일정한 한도가 있어서 오랜 시간 전의 일은 알 방법이 없는데
이를테면, 사리불이 화제 시주에게 출가 인연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없지만, 부처님은 그가 일찍이 불탑을 돈 선근으로 현생에 출가하여 도를 증득할 수 있었음을 아신 것과 같다. 이러한 공안은 «백업경»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경부지인(境不知因)은 외부 경계와의 거리가 너무 먼 이유로 아라한이 알 방법이 없다. 비유하자면,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취광불(聚光佛)의 국토(刹土)에 다시 태어났는데 이 찰토는 사바세계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존자는 자력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직 석가모니불에게 여쭌 뒤에야 안다.
세부지인(細不知因)은 세밀한 인과이다. 예를 들면, 공작 깃털의 다른 색이 어떤 종류의 다른 인연에 근원하였는가를 아라한은 통달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는 이 일체 인연을 뒤섞이지 않고 알아볼 수 있다.
다부지인(多不知因)은 매우 많은 법음을 아라한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4무외(無畏) · 18불공법(不共法) 등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데, 아라한은 사실대로 헤아릴 힘이 없다.
일찍이 나한은 여래의 정상육계상(頂髻相)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결과의 끝이 없고 다 알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아라한은 세 가지 신묘한 변화로써는 불법을 전할 수 없다.
세 번째는 논사(論師)의 전법 방식이다.
불교 역사에서 인도에는 매우 유명한 두 개의 큰 사원이 있다
하나는 계향사(戒香寺)이고, 다른 하나는 나란타사(那爛陀寺)로 당시 모든 논사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사원은 논사에게는 각기 다른 불법 전강 방식이 있다.
계향사의 논사는 두 가지 결정인 불법결정(佛法決定 · 법기결정(法器決定)에 따라 전한다. 이 방식이 티베트에서는 널리 펴지지 않았다. 계향사는 지금은 소실되어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전에 티베트의 근등추배 대사가 인도의 각 성지를 참배(朝禮)할 때, 이 절의 유적지가 인도 남쪽 지방에 있다는 것은 말했을지라도 상세한 위치는 고증할 사람이 없다.
나란타사 유적지는 지금도 완연하게 남아있다. 그 절의 논사가 창조한 전법 방식은 지금까지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법 방식은 불경과 법전에 대한 해석(講解) 방식에 차이가 있다. 모든 불경은 6가지 원만함에 의거하여 설한다.
즉, 신(信)· 문(聞)· 시(時)· 주(住)· 처(處)· 중(衆) 등 6가지 원만함이다. 모든 논장(論藏)에서 포괄하고 있는 것은 5가지 법칙에 의거한다.
즉, 누가 논을 만들었는가? · 어디에서 결집하였는가? · 논전이 어느 범위에 속하는가? · 어떤 필요를 갖추고 있는가? · 전체 논이 무슨 뜻을 펴고 있는가? 등이다.
이 5가지 법칙은 인도와 티베트 불교에서 광범위하게 퍼졌다. 용수보살 · 연화생 대사 등 대다수 대덕들도 이 법칙에 따라 현교와 밀교 두 큰 수레의 각 부 논전을 해석하였다. 맥팽 린포체가 «중관장엄론 中觀莊嚴論»을 해석(講解)한 것이 바로 한 예이다.
그중 제1항, 누가 논을 지었는가를 예를 들면, 우리가 현재 «입보살행론»을 강의하려고 하면, 우선 작자 적천 보살에 대하여 소개를 하여 그의 희유한 사적 · 공덕을 이해하여야만 그가 지은 논전에 대하여 신심이 생기고, 깊고 정확하게 논전의 은밀한 뜻(密意)을 바로 체득할 수 있다.
제2항, 어디에서 결집한 것을 따르는가는 예를 들어, «입보살행론»은 경율론 삼장의 내용을 총집한 것으로 매 품의 문장 뜻은 대장경 중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함을 인식해야 퇴보하지 않는 굳은 믿음이 생긴다.
제3항, 논전이 어떤 사상의 범주에 속하는가는 «입보살행론»은 수승한 대승 논전으로, 이전법륜(二轉法論)8) 중의 중관 웅성파9)에 속하는 저작이어야 한다.
제4항, 어떤 필요성을 갖추었는가는 전해진 논을 학습할 어떤 필요가 있으며, 학습 후 어떤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가이다. «입행론»을 학습한 후, 우리에게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켜 묘법을 체득하여(行持) 불과를 증득하게 할 수 있다.
제5항, 전체 논이 무슨 뜻인가는 전해지는 논이 전언(前言)에서부터 결미에 이르기까지 밝힌 내용에 대한 것이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항으로, «입행론»에서 천명한 것은 발보리심 · 보살행의 대승도 차제수행이며 또한 현종의 기도과(基道果)10)인 일체 수행법이다.
부처님의 세 가지 신묘한 변화 방식으로 법을 전하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다.
아라한의 삼청정(三淸淨) 전법 방식도 현재의 능력으로는 미칠 수 없으며, 현재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논사의 전법 방식이다.
비록 우리가 논사는 아니지만 우리의 전승 스승들은 연화생 대사 · 용수보살 · 화지 린포체 · 맥팽 린포체에서부터 법왕 여의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다섯 가지 규칙에 따라 논전을 전강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 규칙을 따라서 이 논을 전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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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1전법륜은 비파사종의 교의이고
제2전법륜은 중관이며,
제3전법륜은 유식이다.
9) 중관종에 월칭 논사의 이론에 따르는 응성파와 청변 논사의 교의에 의한 자속파가 있음.
10) 수행의 차제인 십신위의 발보리심과 삼현위의 수행과 십지위의 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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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자가 법을 듣는 방식
제자가 법을 듣는다는 것은 제자가 듣는 법상(法相) 방식으로 마음을 내는 것과 실행, 이 두 가지이다. 이것들은 «대원만전행 大圓滿前行»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풀이할 뿐이다.
발심은 현종의 발보리심과 밀승의 발무상청정심 두 가지로 나뉜다.
현종의 발보리심은 넓고 큰 원력(意樂)으로 삼계 중생이 모두 일찍이 세세생생 자신의 부모였던 적이 있고, 모두 막대한 탄생과 양육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음을 알아 부모 은덕이 크다는 것을 앎에 오직 성불과위를 증득해야만이 보답할 수 있다.
이 과위를 얻기 위하여 나는 지금 듣고 배우며 정진하고 정법을 닦아 지녀야만 한다고 하는 생각에 미치는 것이다.
만약 발심을 갖추지 않으면 법을 듣고 법을 닦는 것은 그림자일 뿐 실제 의의가 없다.
밀승의 발심은 매우 깊은 지혜로써 체득하는 넓고 큰 방편이다. 즉, 5가지 원만을 밝게 관하여 법(法)과 의(義)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다.
5가지 원만이란 사는 곳이 원만함은 청정 불국토(佛刹)가 되고, 설법 상사가 원만함은 불세존이 되고, 권속이 원만함은 용사(勇士)와 공행(空行, 보살과 호법중)의 자성이 되고, 법이 원만함은 구경요의(究竟了義)인 대승을 말하며 때가 원만함은 삼시(三詩) 어느 때이건 청정한 때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마음의 원함을 따라 바뀌어 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정을 밝게 관하는 원력을 통하여 아주 큰 고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빠르게 기본수행(資糧)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
행위는 끊는 것과 취하는 것 2가지로 나뉜다. 끊는 것은 기(器)의 3과(過) · 6구(垢) · 5부지(不持)의 3가지로 나뉜다.
기의 3과는 법을 들을 때 귀의 인식(耳識)이 다른 곳으로 치달려 분산되고, 마음(心意)이 들은 법의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혹은 듣기만 할 뿐 명심하지 않으며, 또 마음이 5독 번뇌와 8법 망념에 물든 채 법을 듣는 것이다. 법을 듣는 사람에게 만약 이 세 가지 잘못이 있다면 입구가 뒤집어진 그릇 · 새는 그릇 · 독그릇과 같아서 수승하고 미묘한 정법의 감로를 담을 수 없다.
6구란 법을 듣는 사람이 자신에게 법을 설명하는 상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교만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법하는 상사에 대하여 법의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데까지 미쳐 힘써 법을 구하지 않고 마음의 인식(心識)이 바깥 경계로 치달려 산만하다.
오근이 안으로 거두어들인 것이 너무 지나쳐서 법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들어 취할 뿐이며, 법기(法期)가 너무 길어 비바람에 침략당하거나 혹은 기갈의 고통을 받아 피곤과 싫증이 생긴다.
5부지란 글(文)을 수지하고 뜻을 수지하지 않으며, 뜻을 수지하고 글을 수지하지 않으며, 뜻을 이해하지 않고(不會義) 수지하며, 위아래 순서를 뒤섞어 수지하며, 거꾸로 수지하는 것, 이 5가지는 끊어 없애야 한다. 이3과 · 6구 · 5부지를 만약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법에 들어가는 문이 끊어져 정법을 근본적으로 성취할 수 없다.
취하는 행위는 셋으로 나뉜다.
4가지 생각에 의지하고 멈추고 6바라밀을 구족하고, 위의에 의지한다. 4가지 생각에 의지하여 멈추는 것이란 법을 듣는 사람이 지신에 대하여 환자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법에 대하여 약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법을 전하는 상사에 대하여 의왕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수지하는 것에 대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6도를 구족하는 것은 법을 강의하는 곳에 신선한 꽃 · 법좌 등을 바치는 것이 즉 보시이고, 깨끗하게 청소함을 잘 행하고 공경하지 않음을 엄하게 살피고 위의를 갖추는 것이 바로 지계이며 모든 고난과 추위 · 더위의 고통을 참고 번뇌하는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인욕이며,
상사와 법에 대하여 삿된 견해를 끊어버리고(斷邪倒見) 바른 믿음으로 기뻐하며 듣고 배우는 것이 정진이고, 상사의 강의에 대하여 집중하여 자세하게 듣는 것이 정려(靜慮)이며, 모든 의혹들이 늘어나는 것에 대하여 자문을 구해 없애버리는 것이 반야이다.
이와 같이 하면 알 수 있으니, 만약 법대로 듣는다면 한 번을 듣는다 하더라도 육바리밀을 원만하게 행하고 지킬 수 있다.
그 나머지 위의에 의지하는 것은 법을 들을 때는 모든 6근 작용을 조복시켜 공경을 일으켜야만 한다.
가사 등의 물질로써 머리를 덮어서는 안 되고, 머리를 싸매서도 안 되고, 우산 · 몽둥이(傘杖) · 칼 등을 지녀서도 안 되며, 법좌보다 낮은 곳에 앉아 기쁜 모습으로 상사를 주시한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비나야 毗奈那» · «본생경 本生經» 등의 경에 자세한 해설이 있다.
제자가 어떻게 법을 들어야하는가를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만약 우리가 말한 것처럼 3과 · 6구 · 5부지를 끊어버리고 여법하게 발심 · 4상(想) · 육바리밀(6度)을 구족한다면 법을 듣는 데 있어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는 것이다.
(3) 법을 강의하고 듣는 것을 원만하게 함
상사가 법을 강의하고 제자가 법을 듣는 방식은 이미 다 설명하였다. 그러나 상사가 설명하는 내용과 제자가 듣고 사유하는 사이에는 어떻게 소통되는가?
만약 상사가 법을 강의하면서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여 너무 간략히 하거나 너무 번잡하게 하면, 제자는 타당하고 완전하게 논전의 글자 의미 · 문장 의미 · 전체 의미를 장악할 수 없어 큰 수확을 얻지 못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이 문제의 해결 방식은 인도 세친 논사의 5가지 비결(竅訣, 필요 · 간략한 설명 · 의미풀이 · 연관 · 변론)에 의지한다.
첫째, 필요란 법을 강의하기 전에 그 필요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현재 «입행론»을 강의하는 것은 어떠한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 논을 학습하면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고, 육바리밀을 행할 수 있는 것(行持) 등이다. 이것이 바로 이 논을 학습하는 필요성이 된다.
둘째, 간략한 설명이란 강의를 시작할 때, 강의할 법의 전체 의미를 간략하게 귀납하여 법을 듣는 사람이 전체 논에서 서술하고 있는 중점 뜻 · 층차 등에 대하여 개괄적인 인상을 가지게 한다.
셋째, 의미 풀이란 강의하는 논전에 대하여 문장의 글자 하나하나마다 해석을 해주어 제자들이 정확하게 글자와 문장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의미만 수지하고 문자를 수지하지 못하는 것을 면하게 해준다.
넷째, 연관이란 논전에서 매 과목 사이, 매 문장 단락 사이가 의미에 있어 어떻게 전후로 호응하며 연관되어 있는가는 반드시 설명해야만 하고, 듣는 사람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다섯째, 변론이란 논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법을 강의하는 상사는 변론의 방식을 채택하여 정면 · 반면 · 각 측면으로부터 일문일답을 통하여 듣는 사람의 맺힌 의문점을 남김없이 없애주어야 한다.
세친 논사의 비결 외에, 티베트 불교 대덕에게는 경론을 강의하는 비결로 3가지 요강이 있다. 과목의 분석표를 두어 뜻을 포괄한다(科判攝義) · 자세하게 게송의 뜻을 풀이한다(細解頌義) · 중심으로 귀납한다(歸納中心).
첫째, 과판섭의는 비유하자면, 사나운 호랑이가 골짜기를 뛰어넘는 것이다. 한 번 뛰어 넘어가는 것이 비유하는 의미는 과판이 가장 정밀하고 민첩한 언어로 모든 내용을 총괄하여 포괄해내는 것이다.
둘째, 자세하게 게송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검은 거북이가 기어오르는데(烏龜爬行)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것이다.
의미는 자세하게 매 글자와 문장을 해석하여 대략적으로 뛰어넘어서는 안 되고 글자와 문장 사이의 미묘한 뜻 · 숨겨진 뜻을 다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셋째, 중심으로 귀납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설산의 사자가 뭇 짐승을 위엄으로 항복시키는 것이다. 매 단락 문장의 중심 의미를 귀납시켜 각 장과 과판의 주제를 장악하여 위엄 있는 논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다른 유사한 의미와 이론들이 논파하거나(破斥) 대체할 방법이 없게 한다.
경론을 강의하거나(講解) 듣는 것을 막론하고, 이 3가지 요강은 반드시 전면적으로 장악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논을 강의하거나 배울 때, 과목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논의 뜻을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의심할 가치가 있는가!
만약 단지 과목에 있어서만 통달하는 것이라면 검은 거북이가 기어 올라가는 것의 자세한 게송 의미 해석은 그 이해를 상세하게 할 수 없어 매일 매일 호랑이가 펄쩍 뛰어 오르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과 같다. 혹은 겨우 ‘검은 거북이가 기어간다.’라고만 해석하고 설산의 영웅인 사자가 뭇 짐승을 위엄으로 조복시킨 것은 없다.
이 두 가지는 원만한 강의와 학습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이 5가지 비결과 3가지 요강을 반복해서 학습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마음속에 굳게 기억하고 응용하여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큰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다.
이번에 «입행론»을 강의하면서, 나는 힘을 다하여 5가지 비결과 3가지 요강에 따를 것이며, 또한 여러 도반들이 경론을 현재 학습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강론할 것인가를 막론하고 이 비결과 요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중생들은 분별하는 생각(分別念)이 번잡하게 많다
경을 강의하는 법사가 전체 의미를 강의하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간단하게 하고, 혹은 문장의 의미를 너무 번잡하게 하며, 자세하게 교증(敎證) · 이증(理證)11)을 하지 않아 또 의심을 일으키는 등이다.
만약 당신이 위에서 서술한 비결과 요강을 장악할 수 있다면 강론할 때 전체의미 중심을 파악하고, 문구에 있어서도 변론 · 교증 · 이증을 통하여 분명하게 강의한다.
동시에 현대인의 심리에 맞는 언어 · 방식을 운용하여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제도 교화할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서 앞으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고승 대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비결을 자신의 마음에 융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입행론» 강의는 인도에 100여 종이 있고, 티베트어로 번역된 것에 8종이 있으며, 티베트 고승 대덕이 저술한 강의를 20여 종을 본 적이 있다. «입행론»에 대한 중시 정도는 이를 통해 대략 그 일부를 알 수 있다.
중국은 지금까지 융련(隆蓮) 법사의 번역본 «입보살행론광석»이 있을 뿐이다. 수행인들이 앞으로 이 논의 여러 가지 주석서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중국 불교의 부족한 아쉬움을 보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설산 지역의 학파들은 이 논을 강의(講述)할 적에 각각 존중하여 의거하는 주석이 있다. 겔룩파 논사들은 주로 자조제 대사의 강의에 의거하고, 샤카파 논사들은 수랑저무의 강의에 의거하며, 까규파 논사들은 화오저낭의 강의에 의거한다.
화지 린포체 이전의 닝마파 논사들은 주로 도미 린포체가 지은 강의에 의거하고, 화지 린포체가 응화하여12) 세상에 있었을 때, 각 파 제자들을 위하여 여러 차례 이 논을 전강하였고, 맥팽 린포체 · 감포근훠 등 많은 사람들이 그 강좌에서 이 논을 들었다.
이후 닝마파는 종조로부터 «입행론»에 대한 많은 강의, 예를 들면, 감포근훠의 강의 · 근수취자의 강의 등을 첨가하였다. 이번에 나는 많은 주석서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주로 화지 린포체의 비결에 의거하여 «입행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전승은 매우 청정할 뿐만 아니라 가피력을 지극히 수승하게 갖추고 있다.
수행인들은 마땅히 큰 환희와 신심을 일으켜 분명하게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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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처님의 설법으로 증명하거나, 논리로 증명함.
12)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보살이 이 세상에 환생하심.
묵인 사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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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혜광명 불자님
입보리행론
김영로의 행복수업
2563.6.24
해제문
옴아훔!
저를 이끌어주시는 모든 스승님들이시여!
어머니와 같은 고통 받는 분들을 위해
제가 죽기 전에 이 책 한 권만이라도
남기고 떠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자기 자신의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도와주시는 불보살님들 같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금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의 숨결 하나까지도 모두 은혜로운
어머니 중생들을 위한 기도이게 하소서!
중생들을 인도하시는 불보살님들이시여
이 고귀한 가르침을 만난 모든 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세간의 행복은 물론
열반의 기쁨 또한 얻도록 인도하소서!
옴 아 훔! 옴 아 훔! 옴아 훔!
(아찰라 김영로 합장)
사경자 혜광명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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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편집 법전 합장